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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 상 ㅣ 한빛문고 9
이미륵 지음, 윤문영 그림 / 다림 / 2000년 11월
평점 :
1946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지은이인 이미륵님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이어 신식 중학을 다니다 경성 의전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조국의 역사의 격랑 속에 3.1 운동에 가담하고, 결국 압록강을 건너 유럽으로 향한다.
이미륵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채로 있다가 이 책의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되었다. 다소 비장감 도는 제목이면서 관조가 느껴졌다. 제목 탓일까. 읽는 내내 흐름이 느껴진다.
한 인간의 삶이 그대로 흐르고, 그 사람을 둘러싼 우리네 역사가 흐르고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 변하는 세상을 맞이하는 시류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가 태어난 시대로부터 100년을 훌쩍 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역시 내 민족의 이야기라는 동질감과 함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고아한 기운이 온 책을 감싸고 있다. 내성적이면서 사색적인 한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고즈넉히 드러나는 역사 속의 이야기, 한 가족의 이야기가 부드럽고 소박하다.
'나의 소설은 내가 소년 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 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독일의 출판사 사장에게 보낸 서신이다. 바로 이 책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닌가.
1946년 이 책이 출판되자 이 작품은 유럽 내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100여 신문의 서평에 오르고, 어느 조사에 의하면 그해 '가장 훌륭한 독일어로 된 책'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나중에는 독일의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읽혀져서, 동양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독일의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동양 세계.. 동양의 정신 세계.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금 우리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되어버린, 그러나 결코 완전히 없어져 버리지는 않은 채 우리의 근근한 뿌리가 되어 남은 동양의 정신 세계를 더듬는다.
기품있는 가정에서 자랐고, 민족적으로 힘든 시기에 보낸 청소년기에서는 의외로 마름, 소작인들에게서조차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함이 있다. 그만큼 철저히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부친이 온화한 지주여서일까? 그 지방이 그토록 그악스런 착취에서 좀 자유로왔거나 풍요로왔던 것일까?
아무튼 그 시대를 설한 다른 책들에서의 절박함과 신산함이 거의 배어나지 않는 채, 그의 소년기는 적당히 풍요롭고, 고아하고, 조용하다. 글쎄, 어쩌면 그의 말이 그런지도 모른다. 그의 문체는 고아하고, 조용하다.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그의 품성과 동양적인 관조의 품격은, 결코 단조롭거나 수월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조차 그토록 고요하게 바라보게 만든 것일까? 이제는 그저 뿌리의 저 깊은 속에만 남아 근근히 이어지고 있는 우리 민족, 동양인의 정신 세계를 함초롬이 적시듯하는 책. 흘러가버린 세월, 그러나 면면히 흐르는 압록강 앞에 서서 그 알 수 없는 깊이와 유구함을 느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