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아이들 난 책읽기가 좋아
구드룬 파우제방 글, 잉게 쉬타이네케 그림, 김경연 옮김 / 비룡소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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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는 모든 것을 가지고 더 가지려고 하는 지주 세뇨르 리폴이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땅과 건물과 숲 마저 소유하되 숲이 무얼 하는지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이쪽에는 오직 지주의 땅 위에 붙이고 있는 조그만 집 하나만 달랑 있는 산타나네 열 한 식구가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숲 마저 소유하지 못하나 그 숲이 무얼 하는지도 알고 그 숲과 더불어 즐길 줄도 알고 숲을 사랑한다. 그들에게 숲은 원천이다. 그늘이고 물이고 열매이며 친구인 동물들의 집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지주의 자식이되 그냥 순전한 아이일 뿐인 움베르토가 있다. 이 아이는 형제도 없었고 숲과 더불어 놀 줄도 몰랐고 산타나네 아이들이 무얼 먹고 무얼 입는지도 몰랐으리라.

그러나 어느날 아버지를 따라 이 집에 오게 되고 한나절 머물게 되면서 갑자기 산타나네 식구들의 일상에 동참한다. 글쎄, 홀로 큰 지주의 아이가 과연 그렇게나 쉽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러나 한편 가능할 것도 같다. 홀로 큰 아이니까. 마음이 비뚤어지거나 어그러진 아이가 아니라면, 아이니까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들의 식사, 화려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연스럽고 소박한 식사는,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가서 먹는 고구마처럼 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산타나네 아이들이 하는 일? 힘들 수도 있겠지만 한나절 하기에는 놀이같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많은 아이들과 함께라니. 그리고 숲에서의 놀이... 움베르토는 다른 아이들과 숲의 관계를 금새 깨닫는다. 그리고 순순히 거기에 동화되어 기쁨을 맛본다.

이렇게, 움베르토는 지주의 아들이되, 홀로 자란 <아이>였으므로 그 두 식구를 잇는 자연스런 연결 고리가 된다.

더 많은 농토를 갖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려는 지주의 결정에 산타나의 어머니는 흐느낀다. 아버지는 절망적으로 복종한다. 아이들은... 나무위에 올라가 '숲과 함께 불타겠다'면서 옳지 않은 힘과 결정에 저항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처지 때문에 나무를 내려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움베르토, 지주의 외아들. 그 조그만 아이의 나무 위에서의 저항이 어리석고 탐욕스런 지주인 아버지의 마음을 돌린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그 숲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둘 것을 약속할 때까지 나무 위에서 저항하였고, <스승인 어린이>가 되어 아버지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닫게 한다.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해도, 여전히 이 이야기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주의 외아들 움베르토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움베르토의 마음에 숲을 넣어준 것은 산타나와 아이들이었다. 움베르토의 아이답게 열린 마음이 그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숲과 더불어 살아온 산타나네 아이들이 움베르토에게 그 숲을 보여줄 수도 있었으리라.

걸릴 것 없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숲은 지켜진다. 마치 한편의 시처럼 씌어진 글과 조용하게 사물을 응시하는 듯한 무채색의 그림의 조화가 정말 좋다. 구드룬 파우제방의 <핵전쟁 최후의 아이들> 또한 먹먹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는데, 하나씩 보탤 때마다 작가의 저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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