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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생쥐는 아이가 다섯이야
크리스티나 브레츠슈나이더 그림, 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엄혜숙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베르너 홀츠바르트가 썼다는 글과, 무언가 기대감을 주는 제목, 재미있게 그려진 표지 그림까지 두루 살펴보고, 내용도 리뷰에서 미리 훑어보고.. 이리저리 재고 난 뒤에 샀지만 막상 책을 보고는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다. 글쎄. 아무래도 내게는 글쓴 이가 정말로 좀 안이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생쥐는 아이가 다섯인데, 막내 한스는 다르다. 이상하게 생긴 긴 꼬리 때문이다. 그래서 놀림을 받고 따돌려진다. 그러나 넷이 나가서 놀다가 고양이에게 잡힌다. 그때 한스의 긴 꼬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할 수 있다, 그 긴 꼬리로 고양이 다리를 칭칭 감더니 (당겨서) 넘어뜨리고 모두들 탈출... 그리고는 그 보기 이상하던 꼬리는 이제 자랑스런 꼬리로 받들어진다는 줄거리인데, 물론 그림책에서는 이야기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도 정말 중요하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게다가 억지스럽기까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글쎄, 낮은 연령대의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책이라 그랬던가? 막내 생쥐 한스가, 어째서 꼬리로 고양이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남다른 점이라고 언제나 썩 훌륭한 장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꼬리가 길다는 것 말고는 그저 약한 작은 생쥐일 뿐인 한스가, 고양이를 물리친다는 설정이 너무 억지스러워서, 이 작가의 안이한 글쓰기에 짜증이 났다.
책의 뒷 표지에는 이런 해설까지 곁들여 놓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과 다를 경우에는 나름대로 고민도 하지요. 이 책은 '남다름'이 '왕따'가 되는 현실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이제는 '남다름'이 개성이 되고, 어울려 살아갈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히 '남다름'은 개성이고, 어울려 살아갈 바탕이 된다. 하지만 꼭 이렇게, 억지로라도 절대절명의 순간에 빛나는 역할을 해내야 그런 생각이 받아들여지는가? 게다가 그것이 빛나는 그 순간조차 황당하기 그지없어서 공감조차 가지 않는다면?
실제로 남다른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고민을 한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문제가 아닌가. '왕따'를 만드는 현실은, 다소 유치하고 부당한 따돌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뭔가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어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왕따들은 구제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따돌리는 형들이 뭐라든 말든 (형들은 부당하게 따돌리고 있으니까) 그 긴 꼬리로 즐겁게 줄넘기나 하고, 위로 올려 공돌리기를 하고 재밌게 놀고 있었다...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뒤에 붙여놓은 그림 한 장에 나오는 것 처럼). 그러면 한스, 당당하기라도 하지! 하기야 한스가 무슨 잘못이 있나. 작가인 베르너 홀츠바르트가, 안이하게 이끌어간 생각의 희생물일 뿐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