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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임권택 감독, 조승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판소리 춘향전. 완창하면 네 시간, 혼자서 그 너른 무대를 채우는 판소리꾼을 생각하면 때로 황망하다. 때로 소낙비같이 쏟아지는 소리, 때로 미풍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처럼 속살거리는 소리, 때로 파도에 쓸리는 자갈돌들의 소리를 혼자 만들면서 그 무대 공간을 훌떡 뛰어넘어버린다. 한 소리꾼의 노래와 이야기와 슬쩍슬쩍 흘리는 몸짓 만으로, 관객은 제한된 무대를 넘어 펼쳐지는 광막한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이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이 영화는 지금 봐도 새롭다. 한국 영화사에서 춘향전 만큼이나 여러 번 영화화된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 만으로도 짜릿하고 재미가 오달지다고는 하나, 다 아는 이야기다. 자꾸 자꾸 만들어내는 이유가 뭘까?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그러니까 수 년 전이겠다-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이래서 또 다시 만들어내는구나, 싶었다. 판소리와 소설로 우리에게 정식으로 알려지기보다는 크면서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로 먼저 알아버린 춘향전. 스토리야 같다지만 제대로 대사 한 번 음미해보지 못했던 진짜 춘향전을, 임권택 감독은 꼭 맛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니들이 춘향전 맛을 알아? 언제 제대로 보기나 했어?"
영화는 판소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이팔청춘 풋풋하다못해 풀비린내가 나는 듯 싶다가도 또 조선의 열여섯이야 반 성인 아니었던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면 어느새 홀릴 듯 발랄한 청춘들이다. 판소리 중의 '사랑가' 대목에 이르면 원색 그대로라 아니할 수 없다. 고것들, 참 질투나게도 노는구나.. ^^ 제법 진하게, 색기발랄하게 놀지만 어느 한 군데 귀엽지 않은 곳이 없다.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또 두 배우의 힘이기도 하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판소리가 보이고 들린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조상현 명창의 판소리다. 그리고 네 시간의 꽉 찬 무대를 위해 정동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기도 하다. 소리가 이어지면서 관객들이 점점 그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언제나 '무심하게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우리의 내용들에 카메라를 조용히 갖다놓고 보여주곤 했던 임감독님의 작품이 아니던가. 그 방식도 그 시대에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 내게 이 영화는 지금 봐도 새롭다.) 정색을 해서 시간을 내고는, 가만히 보고 듣기만 해도 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세계로 이끈다. 그 세계야말로 내 바로 옆에서 눈길 주기를, 손 뻗어 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런 익숙하고 친근한 세계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 되어버린 영화지만, 여전히 즐겨 다시 보고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