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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ㅣ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책을 읽는 이유 중에 제일 큰 것이 아마도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데, 이 책이야말로 내게 책 읽는 즐거움을 한껏 선사해준 책이다. 시대를 오르내리며 전개되는 내용 안에는 이모저모 마음에 덜컹 내려앉히는 일도 있고, 천연덕스런 사랑의 즐거움에 빠질 일도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얽히고 설킨 관계가 짜내고있는 그 무늬의 절묘함이라니! 각각 흥미로왔던 그 이야기들이 실은 커다란 양탄자에서 한 부분 한 부분 세밀한 무늬였음을, 결국은 그 자잘하고 섬세한 무늬들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하나의 커다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는 순간의 쾌감! 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다시 그 세밀한 무늬의 함의를 좇아 앞뒤로 부산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리라. 그리고 아마 한 둘 쯤은 놓치고 지나간 자잘한 무늬의 결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래저래 덮어도 남는 책이다.
각각의 이야기도 충분히 흥미롭다. 설정된 공간은 미국, 텍사스주, 초록호수 캠프 언저리의 땅. 그곳이 백인인 스탠리 옐네츠 4세와 흑인인 헥터 제로니가 만나는 무대가 된다. 무심하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그러나 어떤 필연성을 가진 듯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독자들이 전혀 짐작할 수도 없고 천연스레 진행되는 동안에도 눈치채기 어려운 그 일들은 그러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다만, 작가는 알고 독자는 모르는 상태라는 것일 뿐. 진행되는 사건들은 그야말로 놀랍다. 실재로 초록호수 캠프라든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은 은유의 세계일 것이나, 그러나 어디선가 꼭 일어날 법한 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잘 짜여진 환상의 공간이라 해야 할까 싶은데, 그런데도 섬뜩하고 서늘하고 우울한 가상 공간의 기운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현실감 있는 가상공간의 설정이다.
텍사스라는 현장성 있는 공간에서 실제로는 가상 공간이 펼쳐진다면, 이제는 그 동일 공간에서 시간으로 무대를 확장시킨다. 그 곳 텍사스 주의 초록호수 캠프 언저리의 땅은 예전에 어떤 역사의 무대였던가? 그 평범한 역사와 비범한 역사가 혼재한 곳에는 또 어떤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났고 묻혀버린 것일까? 예전에 충만하게 초록으로 넘실거리던 그 호수가 언제부터 맹독을 품은 붉은눈도마뱀이 주인이 되어버린 괴괴 적막한 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인지? 시대를 넘나드는 그 스토리가 날줄 사이에서 고유한 씨줄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스탠리의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엘리야 옐네츠와 집시여인인 마담 제로니가 짜는 무늬가 그 하나, 스탠리 옐네츠 1세의 이야기가 그 하나인데, 거기서 또다시 이야기는 가지를 쳐서 흑인 양파장수 샘과 아름다운 백인 교사 케이트 바로우의 애틋한 사랑의 무늬를 짠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독자를 비탄에 빠지게 하는, 실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의 하나이다. 미국이라는 특이한 나라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생채기인 인종차별의 문제를 새커는 딱 적당할 만큼 아름답고도 가슴아프게 보여준다. 케이트 바로우는 시대가 무참하게 좌절시킨 사랑으로 인해 원귀와도 같은 악당이 되고 스탠리 옐네츠 1세의 보물 이야기와 얽혀들게 된다. 아, 그랬구나 하는 그 순간, 샘의 존재는 더 선명하게 각인된다. 샘은? 백인천하 시대의 완전 비주류 흑인인데다가 건방지게도 그 비주류적인 삶에 구애받지도 않는 천연한 인물이다. 양파와 더불어 먹고살고, 양파의 만병통치적 특성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베풀기도 하며, 양파가 저절로 자라나는 신비로운 엄지손가락 산골짜기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이 양파 이야기들이야말로 작은 비밀의 방의 열쇠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흑인이라는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순하게도 아름다운 백인 여성을 사랑하다가 결국은 사악한 총탄에 숨진다. 그 사악한 총탄의 역사는 또 어떤가? 대를 이어 그 후손의 역사에 굴레를 씌우고 있다. 결국은 탐욕과 광기에 물든 초록호수 캠프의 소장으로 귀결되어있는 것이다.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이 장대한 드라마가 대체 어떻게 풀려지게 되는 것일까? 쥔 손에 땀이 난다. ^^
과연 새커는, 교묘하게 씨줄 날줄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두었다. 그 줄들이 정교하게 얽혀 무늬를 만들고, 독자가 그것을 하나씩 해독하게끔 한 올 씩의 힌트를, 힌트가 아닌 듯 던져주었다. 불현듯 그것이 힌트였음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이 청명하고 흡족하다. 스탠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엄청난 악운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어지는 원조 고조부 엘리야 옐네츠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 마담 제로니를 업고 엄지손가락산을 올라야 했던 그 약속은 4대를 지난 시점에 신비롭게도(혹은 공교롭게도) 지켜진다. 스탠리 옐네츠가 마담 제로니의 4대 후손인 헥터 제로니를 업고 엄지손가락산을 힘겹게 오르는 것으로 약속의 책임은 풀리고, 그 순간 모든 악운의 시간은 장엄하게 한편 비밀스럽게 막을 내린다. 그들을 둘러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녹여낸 이 책을 감미롭고도 짜릿하게 맛보았다. 하나하나의 맛은 제 역할을 잊지 않으면서도 전체 속에서 맛깔스럽게 어울린다. 새커는 대단히 창의적이고 지적인 작가다. 게다가 따스한 시선을 가졌으니 더할 나위없다. 이 책을 만났던 행운을 새커의 또다른 책 <웨이싸이드학교> 이야기로 이어가고야 말겠다,고 결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