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신mens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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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도 mens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정신이라고 번역했지만, 주로 우리의 어떤 지적/인지적 기능을 가리킬 때 쓴다. mens에 비해 덜 쓰이지만 animus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animus의 경우 마음이라고 번역했는데, animusmens에 비해 좀 더 감정적 정서적인 걸 말한다. 그러니까 정신은 정신 똑바로 차려!” 마음은 마음이 지옥이야같은 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anima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도 갖고 있는 걸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책 <영혼론>이 바로 <De Anima>. 이 단어가 넓은 의미로 확장되었을 때는 생명과도 관련된다. 스피노자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anima는 이미 너무나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적 말이고, 정신과 육체가 섞여있는 의미라서 스피노자의 논리에 적절치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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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2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정리1 ~ 정리13 :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2부 정리1에서 정리13까지의 논의는 상당히 난해하다. 1부의 고비를 넘기자마자 다시 직면하게 되는 난해한 논의 때문에 대부분의 <에티카> 독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심지어 스피노자가 독자들에게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텐데 날 믿고 따라오라고 따뜻하게 말함ㅋㅋ)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신의 기원과 본성을 해명하면서, 또한 정리13과 정리14 사이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1-1) 정리1 ~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전반부 첫 번째 부분에서 아주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정리7 평행론.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들뢰즈는 무려 두 챕터에 걸쳐서 설명한 바 있다. 최근 영미 스피노자 연구자들도 이 명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작년에 한국에서도 이걸로 박사논문). 정리1에서 정리7까지에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해명되고,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는 것이 해명, 결국 평행론으로 귀결된다.

 

1-2) 정리8~ 정리13: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여기는 앞의 평행론 명제를 전제로 인간의 정신을 도출한다. 사유속성에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있는데 거기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한 양태를 도출. 사유속성의 존재론적 자율성이 확립되고 난 뒤, 스피노자는 무한양태(사유속성의 경우 신의 관념), 곧 관념들의 생산의 연쇄를 다룬다. 그 다음 인간의 정신은 일종의 관념이며, 이 관념의 대상은 곧 인간의 신체라는 것을 증명 -> 인간이란 정신과 신체의 합일union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게 인간이다.

 

2) 정리13 ~ 정리14 사이: 자연학 소론- 물체의 본성에 대하여

정리14가 바로 나오지 않고 뜬금없이 공리1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연구자들이 [자연학 소론]이라고 이름 붙인 부분. 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체의 한 종류로서의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부록 내지는 보론. 자연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긴 한데 길게 이야기하기는 힘들고(이 책의 주제는 자연학이 아니라 윤리학이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꼭 필요한 내용만 보론격으로 붙였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끝내고 자연학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10년만 더 살았으면 정치론을 다 쓰고 자연학을 쓰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당시 뉴턴의 책도 나왔던 데다가 참 재미있었을 텐데. 자연학소론은 분량은 적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스피노자도 과학혁명에 관심이 많아서 이걸 논의에 적용시키고 싶어 했다. 책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는 스피노자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을 모르지만 여기서 그 편린들을 볼 수 있다. “물체란 무엇인가

 

자연학 소론도 2-3개로 나눌 수 있다.

 

2-1) 공리1, 2에서 공리, 까지 : 단순물체의 본성

1부에서 진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원자 이야기도 했는데, 정리15에서 스피노자는 진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원자론을 이야기하려면 진공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스피노자는 원자도 진공도 다 부정한다. 공리1, 2에서 스피노자는 가장 단순한 물체의 본성에 대해 다루는데 이 단순물체는 원자인가? 미리 말하면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모든 것을 복합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개체는 다 복합체.

 

2-2)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6개의 요청까지: 복합물체의 본성

공리 VS 요청- 둘 다 증명이 불필요한 자명한 명제로 참인 명제로 받아들여진다. 차이는 공리는 모든 영역에 걸쳐서 참, 요청은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만 참. 요청은 어떤 영역과 관련된 건지 말해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로 말해졌고 인간신체에 관해서만 타당하다. 시간이 있으면 이걸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냥 참이라고 하겠다고 요청하는 것. 에티카에는 총 8개의 요청이 나오는데, 6개가 여기에 나오고 3부 앞부분에 인간신체에 대한 2개의 요청이 나온다.

 

2. 정리14~ 정리49: 인식의 세 가지 유형

 

1) 정리1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기원과 본성

 

1-1) 정리14~ 정리23 : 상상의 매커니즘

정의4에서 다룰테지만 스피노자는 인식을 크게 부적합한 인식/ 적합한 인식으로 나눈다. <에티카>에서는 상상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신학정치론>에서는 아주 풍부한 상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예언의 본질은 상상이다. 그가 보기에 예언자들은 지적능력이 풍부한게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하다. 스피노자에게 이마지나치오는 우리가 쓰는 상상보다 범위가 넓다. 감각, 지각 자체도 포함된다. 나중에 정리16~정리18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2) 정리2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성격

 

2) 정리32 ~ 정리49: 적합한 인식

 

2-1) 정리32 ~ 정리39: 공통통념의 형성

공통통념 common notion notio communis. 아주 독창적이고 새로운 논의다. 들뢰즈가 평행론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common notion. 2부에서도 <에티카> 전체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부 부록에서도 스피노자가 상상적 통념notion에 대해 언급했었다. 미추, 질서와 혼란, 선악 이 모든 게 notion이라고.

 

2-2) 정리40 ~ 정리49 : 인식의 세 가지 유형

- 1종의 인식 imagination 상상

2종의 인식 참된 인식

3종의 인식 scientia intuitiva 스키언티아 인튜이티바 직관적 지식

 

- 1종의 인식: 오류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렇다고 1종의 인식이 다 잘못이고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1종의 인식에는 참된 인식도 있다. 그런데 오류라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찍어서 어쩌다 맞은 것 같은 것. 맞을 수도 있지만 잘못일 가능성이 많은.

- 2/3종의 인식: 왜 그런지 근거를 파악한 인식. 공식도 알고 있고 논증도 알고 있고.

- 정리49는 지성과 의지가 다른 게 아니라는 내용이다. 주석이 붙어있는데 이 주석이 2부의 부록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가 의지와 지성을 구분한 것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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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서문

- =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자

- 1부에서 신에 대해 다루었고(신의 본질, 신이 존재하는지, 원인으로서 무엇을 생산하는지) 2부에서는 양태들(=신이 필연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모든 것),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 윤리적= 1) 어떻게 하면 정신을 파악하고 2) 그것을 지복으로 이끄는지.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스피노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윤리학><나의 철학>이라는 잠정적 제목으로 부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철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이름 붙었고, 2부 서문이 바로 왜 최종적으로 <윤리학>이라고 붙였는지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 길물어보면 손잡고 끌어주듯이 확실하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데려가 주겠다. (여기서 어쩐지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뭉클했다...ㅠㅠㅠ)

 

정의1

나는 물체를, 연장되는 실재로 간주된 한에서의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로 이해한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를 보라 (물체에 대한 정의)

- 물체 corpus/ body. 영어에서 body가 신체이자 물체이듯이 corpus도 마찬가지다. 비유적으로 쓰면 저작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막스의 corpus- 막스가 남긴 저작

 

정의2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본질에 대한 정의)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정의3

나는 관념idea,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res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지각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concept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지각이라는 명칭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작용을 수동적으로 겪는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념은 정신의 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정신도 res고 관념도 res->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 나는 개념이라는 것이 외부자극이 촉발해서 맺히는 상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개념을 훨씬 적극적, 능동적 활동으로 이해한다.

- 정의3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념은 정신의 개념”, 정신의 작용을 표현한다는 점, 이것은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관념은 사물에 대한 정태적인 표상과 다르고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데카르트를 겨냥한 것이다.

 

- 정의3/해명과 아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2부 정리49/따름정리다.

-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정신 안에는 상이한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 표상으로서의 관념 2) 이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의지.

그러니까 관념 자체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고, 참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 스피노자는 정리49에서 이를 반박한다. 정신 안에는 관념인 한에서의 관념이 함축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의지 작용 또는 긍정과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하고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지성과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갖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념 자체에 긍정 또는 부정이 이미 다 들어있다. 관념은 수동적으로 형성된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언가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부정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부 정리49의 따름정리에서 의지와 지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 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려면 데카르트의 관념이론에 대해 먼저 더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앞으로 2부를 하게 되면 관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명석판명이라는 말도 굉장히 많이 쓸 것이다. 이 용어의 뜻들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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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관념 이론

 

관념에 대한 정의

- 넓은 의미의 관념: 정신적 상태 일체. 인지적 관념뿐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내용도 다 포함

- 좁은 의미의 관념 : 이미지와 같은 외양을 지닌 의식의 상태. 사물의 상을 갖는 것.

내 생각들 가운데 흡사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만이 본래적인 관념이라고 명명될 수 있으며, (중략) 그러나 나머지 다른 것은 이런 상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의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나는 내 생각의 대상으로서 항상 어떤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또한 그 사물과의 유사성 이상의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또는 정념으로, 다른 것은 판단으로 불린다” - <성찰> : 내가 어떤 걸 의지한다고 하면 의지고, 어떤 걸 두려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희망한다고 하면 정념, 어떤 걸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판단이다.

 

-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주장하려고 했던 점은, 비록 내가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 여부(내 앞에 탁자가 실제로 놓여있는지 등)나 특성(저 바깥의 사람이 실제의 사람인지 아니면 자동인형인지) 등에 관한 이런저런 판단에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이런저런 대상이나 그 대상의 특성에 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관념은 정신이 무매개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관념을 갖고 있다고 혹은 내가 이런저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확실할 수밖에 없다.

- 그러니까 관념을 표상하는 것 자체는, 관념이나 표상 자체는 참/거짓이 아니다 + 그것을 참/거짓으로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의지가 작용할 때는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기능이자 수행.

 

- 스피노자는 정의3에서 데카르트의 저런 생각을 잘못이라고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관념과 의지, 표상과 의지를 구별하는 게 잘못이라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표상이 아니라 관념 자체에 긍정/부정의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2부 정리49 따름정리에서 스피노자는 관념과 의지는 하나다라고 말한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 데카르트의 놀라운 이것에 주목한 사람이 레비나스. 레비나스가 데카르트가 경이롭게 생각한 바로 이것, 나는 유한한데 저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이데아가 내 안에 있을까라는 것을 무한한 타자의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3. 명석함과 판명함

 

- 데카르트 <철학원리> 145: ”나는 어떤 지각이 주의 깊은 정신에게 현존하고 그것에게 접근 가능할 때 그것을 명석한 clarus(클라루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떤 것이 눈의 시야에 현존하고 충분한 정도의 강도와 접근성으로 눈을 자극할 때 우리가 그것을 명석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나는 어떤 지각이 명석할 뿐만 아니라, 정신이 자기 안에 단지 명석한 것으로서 포함하고 있는 다른 모든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될 때 그것을 판명한 distunctus(디스팅투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 명료하고 두드러진 지각. 다른 말로 하면 생생한, 우리 정신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 지각. 반면에 어떤 지각은 미미하고 뿌옇고 obscure한 지각. 불분명한 지각.

- 명료하기만 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되는 또 다른 지각이 있다는 것.

 

- 하지만 명석하지만 판명하지는 않은 지각들도 존재한다.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두드러지지는 않는.

- <철학원리> 146: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판명함은, 다른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판명한 지각이 이처럼 다른 지각들과 분리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지각들과 다른 모종의 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판명한 지각을 다른 명석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내적 특성은 어떤 것일까?

- 그것은 판명한 지각이 어떤 사물과 관련하여 그것에 속하는 것과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직각 삼각형에 대해 우리는 클리어한 아이디어를 명료하게 가질 수 있지만 이게 꼭 판명하지는 않다. 우리가 판명하려면 직각 삼각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각삼각형에 속하는 성질(세 내각의 합은 180도와 같다), 속하지 않는 성질(네 각을 갖고 있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관념과 관련된 대상의 특성이나 본질을 제대로 제시해주는 것이 명석판명한 지각이다. 스피노자도 이 용법을 받아들여서 많이 사용한다.

- 따라서 명석 판명한 지각 내지 관념 자체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성질에 대한 참된 정보를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데카르트의 관점에 따를 경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을 경우, 우리는 필요한 경우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그 대상이 지닌 다른 성질을 도출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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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절한 순간에 쫀득쫀득한 욕을 구사하는 여자들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욕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즐겨할 생각도 전혀 없지만 가끔 살다보면 이 순간에는 욕이 터져주어야 분위기가 사는, 다른 여타의 언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순간 있잖아. 적절한 순간에 터지는 쫀득쫀득한 욕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 나는 이걸 잘 못했다. 욕이 나와 주어야 하는 타이밍 포착은 제법 잘 하는데 막상 욕을 하려고 하면 마음속 여러 종류의 방어기제들이 빨간불을 키고 웅웅대기 시작하며 내 입을 가로막아 버렸다. 본인이 먼저 웃겨서 웃어버리면 안된다가 농담의 제 1법칙이듯이 욕은 본인이 하면서 민망하거나 쑥쓰러워하면 안된다가 제 1법칙쯤 될 텐데 욕을 하려고 하면 내가 이미 쑥쓰러워져서 차마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주량은 타고나는 거라지만 욕설은 트레이닝에 따라 얼마든지 개발 가능한 부분이잖아? 그래서 한 때, 아주아주 오랜 옛날 고3 시절에 욕을 잘하려고 잠깐 노력해봤던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친한 친구 층이 좀 다양했다. 같이 학생회를 했던 모범생 친구들 한 그룹, 같이 맨날 귀에 헤드셋 꼽고 일본 밴드와 만화책에 푹 빠져 살았던 덕후 친구들 한 그룹, 그리고 내가 키가 컸던 편이어서 교실 뒷줄에 주로 앉게 되며 친해진, 방과 후 제일 많이 몰려다녔던 좀 놀았던 친구들 한 그룹. 내 친구 P는 이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친구였고 당시 P와 나 외에도 너뎃 명이 몰려다니며 친했었는데 이 친구들은 교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서 좀 유명한 친구들이라 행동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다. 술도 굉장히 잘 마시고 싸움(....)도 굉장히 잘 하고 춤도 굉장히 잘 추고 당연히 욕도 잘했다. 그렇게 맛깔나게 욕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당시 일반 남자애들이 쓰는 욕에서도 조금 더 레벨업 한,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뭔가 참 낭창낭창하면서도 파워풀하고 밀어붙일 때 밀어붙이고 잡아주어야 할 때 적절히 잡아주는, 참 절제됐으면서도 질펀한 그런 욕이었다.


특히 나는 체다치즈맛, 바베큐맛, 사워크림맛 등 무수히 많은 변종이 나와도 고집스럽게 오리지널 프링글스만 죽자고 집어 드는 사람처럼 걔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재기 넘치고 다채로운 욕들 중에서도, 욕설계의 클래식인 "씨발"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걔들의 씨발은 여느 일반적인 씨발과 다르게 상황에 따라 퇴폐적이기도 했다가 격정적이기도 했다가 장난스럽기도 했다가 서글프기도 한, 씨발 하나에 세상만사의 모든 감정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나름의 미학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씨발이 정말 부러웠고 그것만큼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욕이 부러웠던 것에는 개그 욕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욕설이 들어가야만 개그적 상황이 완성되는 순간에 욕하는 걸 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야말았던 유머의 스팟들이 늘 돌아서면 은근히 아쉬웠다. .. 그 상황에서 걸쭉한 씨발 한번만 넣어주었으면 분위기 바로 끝장나는 건데. 화룡점정을 찍었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쌓이며 욕에 대한 욕구불만이 커져갔고 그래, 안 되겠어, 내 영혼을 덕지덕지 감싸고 있는 방어기제들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유머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확 지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19년 인생동안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않았던 씨발을 내 인생에 데뷔시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걸리기만 해봐. 할거야 한다고.



2.

그러던 어느 겨울 같이 놀던 친구 중 한명이 이렇게 추운 날에는 떡볶이를 먹어줘야 한다고 해서 과자들, 음료수들을 사서 친구네 집에 떡볶이를 해 먹으러 갔다. 떡볶이를 다 먹고 과자를 뜯어먹으며 깔깔거리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수다를 떠는데.. 그 순간이, 테트리스에서 길다란 작대기 하나면 블럭 네 줄을 한꺼번에 깨부실 수 있듯이,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저 위에서 쌍시옷 모양 하나만 떨어지면 모든 블럭이 줄줄이 깨부셔질 그런 순간이 포착되었다. 이 타이밍이다. 나의 씨발 데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이 순간을 잘 넘기면 나는 이제 드디어 씨발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흥분과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19년 묵은 유교 소녀의 거리낌과 눈앞에 바로 닥친 최상의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마음이 마구 흔들리다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어설프고 수줍은 씨발이 내 입에서 나왔다.


"씨발"


......... 내가 뱉어놓은 씨발을 내가 들으면서도 괴로워 죽을 뻔했다. 보통 씨발 프로들을 보면 이게 "씨파" "씨바" 사이에서 물 흐르듯 굴러가며 발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나의 씨발은 아나운서가 뉴스 중에 씨발을 했어도 이렇게는 못하겠다 싶을 정도의 너무도 깔끔하고 굴곡 하나 없는 씨발이었다. 평소 씨발을 눈여겨봐오던 내 나름의 고찰을 돌이켜봤을 때 씨발 프로들의 ""는 뭔가 바람소리가 많이 섞여 듣기만 해도 야성적이며 ""라는 소리보다는 이 공기 마찰음이 더 많이 나오는 ""였는데 내가 뱉은 씨발의 ""는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임찰리 씨" "김 아무개 씨"라고 부를 때의 깔끔한 ""였고, 이게 "" 쪽으로 가면 더 가관인데 프로 씨발러들의 """"""사이의 어떤 음, 약간 모던한 씨발의 경우 가끔씩 "바아알" 에 가까운 모호한 발음이 나오기도 하던데, 나의 씨발은 정말 깔끔한, 한국어 듣기 시험 문제로 내 씨발의 ""을 내보내면 100명중 96명은 논란의 여지없이 ""로 적어낼 것이 분명한 그런 ""이었다. 간호사 억양의 ""와 너무나 깔끔한 ""의 결합이 내 입에서 나왔을 때 이미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욕이 아니라 말을 뱉은 본인에게 욕스러운 그런 욕이 되었다.


그래도 타이밍이 워낙에 잘 맞았고 평소 욕을 입에 올리지 않던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던진 욕이라 다들 우하하하 뒤집어 지기는 했지만 (다행이다..거기서 내 생애 첫 씨발을 쥐어짰는데 싸한 분위기에 연민의 시선이 오갔으면 난 너무 챙피해서 집에 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트라우마로 씨발포비아가 돼서 더욱 욕이랑 담쌓는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몰라.) 나는 혼자 너무 민망해서 괜시리 일어나서 테이블에 늘어서 있던 과자 봉지, 빈 음료수캔들을 주섬주섬, 나의 씨발의 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치웠다.


집에 돌아가려고 현관문을 여니 눈발이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그게 첫눈은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 어쨌든 흩날리는 눈발은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눈발 속으로 뛰어들자마자 친구들은 "! 하얀 솜사탕 같은 눈이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어!"라는 감상을 역시 "~씨발. 존내 춥잖아"라는 쉬크한 말 한마디로 압축,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씨바씨파씨바알 거리는 소리가 눈 오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흩날리는 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 쟤네들의 씨발은 정말 멋지구나.. 저런 멋진 씨발이 나오기까지 쟤들은 얼마나 많은 씨발을 듣고 말하고 살았을 것이란 말인가.


애들과 문 앞에서 헤어져서 P와 함께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나는 P에게 말했다.

"P. "씨발"이라고 말해봐."

"?"

"씨발- 해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씨발을 잘 해?"

"우하하 미친년. 나 세상에 또 씨발 잘한다고 칭찬받는 건 처음이네"


얘나 지금이나 공부를 하면 꾸준히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속성으로 며칠만에 왁- 달려버리는 걸 좋아하던 나의 심보는 여전해서 나는 씨발도 속성으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그래, 사실은 너 아까 씨발하는 데 좀 어이없더라."

"그치? 이상했지?"

". 앞으로 왠만하면 하지 마라"

"뭐야. 제대로 좀 하게 뭔가 조언을 좀 해 봐."

"근데 우리들이 너무 걸져서 그렇지, 니가 한 씨발도 나쁘지 않았어"

"아냐. 나는 니들처럼 맛깔나게 하지 않을 거면 평생 안하고 살꺼야. 무난한 씨발이라니... 그런건 용납이 안 돼"

"아 됐어. 그냥 생긴대로 살어. 너 같은 목소리로는 맛깔나게 하기 힘들어."

", 씨발. 빨리 안 가르쳐 줘! ........?.. , , 이번 씨발은 좀 괜찮않지? 그치?"

"아까보단 난데.. .. .. 씨발, 이걸 어떻게 가르쳐 줘야해..?"

"그러니까 "" 따로 "" 따로 떼어서 하나씩 차근차근 말해줘 봐.“


나는 정말 배울 자세가 되어있었다. 분석도 끝나있었다. 일단 내가 이해한 걸로는... ""는 일반적인 ""를 발음할 때처럼 육성이 많이 섞여서 나오면 안 된다. 혀랑 입모양은 ""를 발음할 태세를 갖추지만 그 사이로 공기를 더 많이 내보내야한다. 그러니까 윗니랑 아랫니를 딱 붙히고, 좀 더 카리스마있게 하려면 아랫니를 주걱턱처럼 약간 앞으로 내보내고, 그랬을 때 생긴 윗니랑 아랫니 사이 공간으로 공기를 확 내뿜으며 ""하면 그럴듯해진다. 이렇게 아랫니를 주걱턱처럼 내밀면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효과까지 생겨서 더 그럴 듯하다.


그리고 발. 그들이 하는 걸 들어보면 "씨발"이 단독으로 쓰일 때와 형용사로 명사를 수식할 때가 좀 달랐다. 단독으로 쓰이는 씨발은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하면 맛이 안 살았다. 살짝 ""이 굴리듯이 들어가면서 끝 발음이 약간 흐지부지되게 해야 하는데 대신에 "씨발넘" "씨발새끼"처럼 형용사로 들어갈 때는 ""의 정확한 발음이 다시 중요해졌다. K는 이런 경우도 ""을 흘리듯이 흐지부지하게 하던데 그건 영 별로였다. K가 단독 씨발은 괜찮은데 그 형용사 씨발 때문에 P보다 조금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끔 P"" 발음을 자음동화 비슷하게 연음해서 발음하는 게 좋았는데, 이를테면 "씨발라마" 발음 비슷하게 """"로 넘어가서 발음되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요령은 알겠는데 왜 발음하면 안 되는 거지 근데? 내가 계속 조르니 P도 슬슬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한 번 해봐"

"씨발"

".. 해봐"

"씨발"

"..내가 봤을 때 니가 ""하고 ""사이를 잘 처리 못해서 그러는 것 같애"

"그래?"

". 그게 씨를 약간 길게 발음하게 되는데.. "씨이발-"이렇게. 중간에 낀 ""에 톤을 넣어봐


! 그거였어. 그러니까 "씨이발" 이런 식의 발음인 건데 그 중간에 잠깐 끌어주는 그 ""에 톤이 좀 들어가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이 톤의 질에 따라서 씨발의 운명이 무난함과 맛깔짐 사이에서 갈리게 되는 거구나. , """" 사이에 들어가는 ""가 바로 씨발의 정수였던 것이다. 타이밍에 따라서 이 ""를 짧게 끊어치느냐, 그냥 길게만 끌어주느냐, 약간 톤을 넣어서 살짝 꺾어주느냐, 이걸 TPO에 맞춰서 잘 선택하는 것이 프로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에 강하게 액센트를 주고자 할 때, ""을 살짝 올려서 말하기 직전의 "도움닫기 역할"까지 ""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 를 끌어주는 시간 속에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살짝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세상에 늘 보이는 것에만 혹해서 살면 안된다. 이렇게 "씨발"에는 제 3의 존재, 하마터면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뻔했던 ""가 있었던 거였다.


"씨이이발. 이렇게?"

"그건 너무 억양이 길고 인위적이잖아"

"그럼, 씨이발. 이건?"

"낫긴 한데 너무 밋밋하잖아."

"그럼 씨발. 이건?"

",진짜. 씨이발. 이렇게 못하겠어?!"

"씨이발.했잖아."

"그건 그냥 길게 끌었을 뿐이지 감정이 없잖아. 씨이발. 씨이발. 이거야, 이거!"

눈발이 흩날리던 밀레니엄 직전의 겨울. 우리는 그렇게 씨발씨발 거리면서 눈이 내린 길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3.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나는 "" "" 사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내 친구들처럼 멋진 씨발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서부터 걔네들이 멋지고 쫀득한 씨발로 쓸데없이 내 눈높이 귀높이를 올려놓아서 이제는 웬만한 씨발은 전혀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별로 따라하고 싶지도 않았다. P에게 했던 말처럼 "너희처럼 멋지게 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하지 않고 살겠다"는 심정으로, 그 이후로 살면서 두 번인가 더 써본 게 내 씨발의 연대기이다. 그래, 어쩌면 이 """"사이에 들어갈 감정의 진폭, 인생의 정수에 깊이와 연륜이 없어서 걔네들처럼 멋진 씨발이 나오지 않는 지도 몰라. 열심히 공부하고 인생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서 """"사이 숨겨진 ""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내 마음에 썩 드는 씨발을 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4.

......라는 이상한 글을 9년 전에 썼던 걸 파일 정리하다가 어제 우연히 발견했다. 나 대체 이런 걸 왜 쓴 거야ㅋㅋㅋㅋㅋ 그런데 정말 감정의 진폭과 연륜이 쌓인 건지 2018년의 나는 저때보다는 씨발을 잘 한다. 잘 됐네.......사실 여기에는 이명박근혜 정부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정부에 커다란 빚을 졌다 씨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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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고 바람불고 쌀쌀한 축구장에서는 팩소주지! 하며 신나서 사러갔다가 없어서 대신 포켓 소주를 홀짝이며 경기를 봤다. 유달리 정신 없던 한 주라 7일동안 맥주 한방울 입에 안 대다가 마시니 한쪽에 쌓여있던 긴장이 어느 정도 녹는다. 평생 동물원과 수족관, 동물들이 나오는 쇼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이전에는 동물원을 좋아했었다. 특히 비오는 날 유독 진동하는 특유의 동물 냄새를 맡으며 빨대 꽂은 팩소주를 들고 빈 팩이 될 때까지 돌아다니는 거 참 좋아했었는데. 오늘 문득 그랬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생각났다. 이제 동물원 갈 일은 없겠지만 축구장이 있다. 역시 비 추적추적 오는 축구장에서는 팩소주야!

 

*

지지난주에 요 며칠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바나나, 군밤, 꼬마김밥이 먹고 싶은데, 바나나는 위스키와 군밤은 샤도네와 꼬마김밥은 소주와 먹고 싶다. 대체 술안주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셈인가....”라고 페북에 썼더니 모님께서 마지막 단계, 생수, 까지.. 파이팅!”이라고 한게 문득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ㅋㅋ 난 안주:술의 비율이 보통 3:1이라서 아마 마지막 단계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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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정리33의 주석1이 무척 좋았다. 내용도 형식도 완벽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적 이유로 우연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건이 벌어진 앞뒤 원인 또는 과정과는 별개로 그 사건자체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상의 수치로만 따졌을 때 매우 희소한 경우 우연이라는 단어를 뉴트럴하게 붙이는 세속적 용법은 아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맥락상의 우연에 있으니까- ”우연이라는 것이 갖는 환상성에 너무나 많은 자기 안의 것들을 투사해서 읽어내려는 욕망, 그 투사를 사실로 믿어버리고자 하는 욕망, 그 인식의 결핍을 이용해서 거기에 이것저것을 입히려드는 시도들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경계가 느슨해질 때마다 이 주석1을 나 자신에게 아주 차갑고 매몰차게 읽어주고 싶다.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가며(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실재/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실재로 나누어서) 물샐 틈 없이 논리정연하게, 불필요한 말 하나 없이 완벽하게(”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설명한 이 주석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가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판명나지 않을 때 우리는 판명나지 않았다는 틈새를 이용해서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도저도 아닌 나태한 단어를 붙여 우연적인 것이라고 얼마나 쉽게 결론 내리는지.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 좀 더 신랄한 주석2도 좋았다. ”의 자리에, 여러 가지 것들을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신학자들 같은 마음으로 신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일 테고, 별점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한테는 혹은 별의 신일 테고, 물질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일 테고, 우리가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자의식과 나의 욕망들을 다 걷어내고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세상에 제시되어있는 논리적인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래, 과학적 논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들은 대게 다 유치하고 학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적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게 맞다.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잠깐 유치하게 혹은 천진하게 숨 쉴 곳으로, 알록달록한 꽃분홍, 형광연두, 파스텔 톤의 파랑, 노랑, 오렌지 빛깔까지 유아기적 감성을 과장되게 재현한 색색깔의 사탕을 입에 넣고 잠시 기분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에 품는 것과 절대성을 부여해서 신앙으로, 사주나 별점 같은 것으로, 물질이나 세속적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과 운명을 진지하게 판단하려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 와중에 잊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라고 깨알 같이 후자를 까는 스피노자의 섬세함에 혼자 막 웃었다ㅋㅋ

 

3. 1부 부록은 1부를 장중하게 마무리하고 끝내는 악장 같았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참 많아서 필사하는 느낌으로 이 단락 저 단락들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한 가지 편견- 모든 것들이 어떤 목적을 향해 행위 한다는 편견-이 그릇된 신앙관과 미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인간의 무지, 인간의 욕구와 삼각형을 만들 때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점을 거쳐, 그것이 사물들을 표현하는 흔한 통념들로 이어지는 고찰이 좋았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기질을 언급하는 것이 너무 적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미신을, 그릇된 신앙을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만족해버리는 어리석음을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쳤다.

 

주석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항상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상태를 짐작하는(대개는 비난하는 경우에) 말 속에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원인이 질투이거나 자신이 미움 받는 원인이 질투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질투해서 그런 것 같다는 분석을 가장 쉽게 내리고, 자신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혹은 그 역작용으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성공한 스스로가 지나치게 대견하면(의식하지 않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에 이미 타인을 굉장히 의식한다는 전사나 전제가 내포되어있는데)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A는 그냥 행동했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고 분석하고, 본인이 경쟁심이 많거나 누군가에게 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A의 행동을 남을 이기려고, 돋보이려고 그런다라고 쉽게 분석한다. 너무나 높은 확률로 그런데, 스피노자 말대로 객관적인 어떤 정보가 없고 사람은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결국 자기 자신의 기질에 따라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기 너무나 쉽기 때문일 것이다. A라는 사람이 점심을 안 먹는 것을 두고 마음 속 화두가 건강인 사람은 A가 아픈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우울인 사람은 A가 무슨 우울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다이어트인 사람은 A가 살 빼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사람은 참 투명해,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 가장.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4. 스피노자는 그 뒤에 기질을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으로 이어가는데 거기서도 박수쳤다ㅋㅋㅋ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오컬트를 믿는 사람이나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이나 정말 자기기질대로 숭배의 대상을 정하고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자연을 포함한 세상 전체가 신의 뜻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오컬트를 믿는 사람은 자연에서 인간의 운명과 성격을 읽어내려고 하고,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은 자연을 의식주를 포함한 물질적 제공을 해주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스피노자가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때 웃기 시작했다가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라고 말할 때 빵 터졌다ㅋㅋㅋㅋ 자연을 좀 가만히 놔두라고 인간들아! 자연이 니들이 믿는 종교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별들이 니들의 인생이나 운명 따위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연이 니들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를 비춰주고 물고기를 길러내어주고 그러는 거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거라고! 인간 뭐가 그리 대단한가.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5. 이 뒷 문장에서는 숙연해졌다. 가장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기도 했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되는 것.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논리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 점성술사가 완전 잘못 맞춘 사례들을 이야기했을 때 별점이 틀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사로잡혀서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냐, 전혀 얼굴 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을 10년 본 사람의 판단조차도 무시하고 점궤에 어떻게든 꿰어 맞추려고 했던 사람들, 무언가를 사들여도 공허하다는 걸 이미 깨달았으면서도 더 좋은 것을 사지 못해서지 않을까라는 마지막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사들이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정해진 대상이 없었을 뿐이지 대상을 바꿔가며 나도 믿는 것에 대해 더욱 믿으려고 그것에 회의가 드는 순간에 고집스럽게 믿음에 종속되었던 순간들이 많다. 특히 진로에 대해 그랬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뒤엎으려고 해도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나의 문제를 쓱 묻어버리려는 유혹이 커지는 것은 나약해서일 것이다. 아니 나약해서였으면 좋겠다. 완고해서일 경우가 더 문제일 테니까.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6. 5번에 더불어서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를 더 자극하는 것에 마음이 기울게 되어있다. 이 역시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 더 공부해야 겠다는, 특히 철학과 과학을 더 공부하고 나를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던 것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정신 차려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점점 체력은 떨어지고 사고력은 체력과 비례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반비례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 점점 달콤한 힘들에 사로잡혀 내가 듣고 싶은 것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발췌해서 세상을 보게 되지 않으려고. 철학과 과학이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어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방식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줘서 다행이다. 아직도 갈 길이 너무나도 멀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도록.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어떤 일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이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7. 클라이막스 중에서도 클라이막스 같은 3부는 마치 더글러스 애덤스가 근대에 태어나서 신랄하게 쓴 글 같다. 영국식 유머들이 곳곳에 있어서 숙연해지다가 반성하다가 빵터지고 감동하다가 빵터지고 그랬다. 앞에서 한 세 번 이미 웃었는데 뒤에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 만한 것은 없다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웃은 것 같다. 스피노자의 통찰이 예리한 건지 인간은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다 뻔한 건지, 맞아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자연을 볼모로 잡고 신앙이든 오컬트든 물질적인 것이든 지나치게 빠져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빠지는 곳이 회의주의지. 다 소용없어. 다 부질없어. 다 의미 없어.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내가 틀리고 내가 무지하고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걸 인정하느니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원래 세상이 다 인간이 다 부질없고 얕은 거야, 그게 내 운명이야, 내가 믿는 신이 예비한 나의 인생이야, 그러니 물질이 최고야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쉬우니까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 상상과 지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혼란스러운 상황은 불안정해서 견디기 어려우니까 혹은 혼란스러움은 나의 지성의 결핍을 표상하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혼란스럽고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A아니면 B로 결론 내리거나 애매한 것들을 다 잘라내어 네모반듯하게, 그게 나의 성마른 성정이 만들어낸 가상의 형상일지라도 컨트롤하기 좋게 만들어놓고는 쉽게 기뻐하고 안심하는 것. 그렇게 해놓고 혼란과 애매한 상태를 견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것.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ㅋㅋㅋㅋㅋ


9. 그저 한없이 착하고 관대하고 낙관적인 방식으로 얻는 평온함이 아닌, 날카롭게 인식하고 명확하게 바라보며 이치를 엄밀히 따지는 방식으로 얻는 다른 종류의 평온함에 대하여. 그것을 담고 품을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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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33 주석2

실재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었다면, 우리는 신에 대하여, 가장 완전한 존재자에 대한 고찰에 의해 우리가 신에게 부여하도록 강제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주장을 부조리한 것이라 거부하고 검토해보려고도 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신에 대하여 우리가 말했던 것(정의7)과 아주 다른 종류의 자유, 곧 절대적 의지를 부여하는 데 익숙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이 문제를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우리가 제시한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영원성 속에는 언제라는 것도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오직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신은 어떤 것도 다른 식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결코 그렇게 결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또는 신은 자신의 결정 이전에 존재하지 ㅇ낳았으며, 그러한 결정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나는 이런 스피노자의 섬세함이 너무 좋다ㅋㅋ)“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증명 왜냐하면 오직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원인이며(정리11에 의해) 만물의 원인이라는 점(정리16 및 그 따름정리에 의해)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 자신과 만물이 그것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왜냐하면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앞의 정리에 의해)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도록 신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36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

- 자연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결과에서 따라 나온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증명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정리25의 따름 정리에 의해). (정리34에 의해) 실존하는 모든 것은 만물의 원인인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와야 한다. Q.E.D.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1부 부록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편견이 있는데(“내가 설명한 방식대로 실재들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수의 편견) 한 가지 원초적 편견에서 생겨난다.

 

내가 여기서 밝혀보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생겨난다. 곧 사람들은 모든 자연 사물들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으로 인해 행위 한다고 공통적으로 가정하며, 신 자신이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인도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한가지 [편견]을 고찰해볼 것이며, 첫째,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따져볼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이러한 편견의 거짓됨을 보여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선과 악, 상과 벌, 칭찬과 비난, 질서와 혼란, 미와 추 및 이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다른 편견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보여줄 것이다.

 

목적론적 편견: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향해 존재한다고 믿는 것. 목적을 상정해버리고 자연이 그 목적대로 움직이도록 주재하는 초월자 을 상정한다. 초월자 신에 의해 자연 사물들이 인간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 모든 인간은 (그 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지한 채로 태어난다.

- apetitio 인간의 본질인 욕구. 프로이트의 용어로 하면 drive. ’충동과 굉장히 가까운 의미인데, 그래서 예전에는 충동이라고도 번역했지만 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욕구라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건 가상이다. 자신이 뭘 욕구하는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잇는지는 인식하지만 그 욕구의 원인을 모르고, 그 원인을 모르겠으니까 그냥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그냥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원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우리가 자유의지로 욕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랑 굉장히 비슷하다. 무의식의 규정.

 

원시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이렇게 많은 과일들이 있고, 낮에는 해가 나오고 물고기를 길러내는 바다가 있고(나의 미래와 운명을 알려주는 별자리가 있고ㅋㅋㅋ) 내가 스스로 만든 게 아닌데 쓸모 있는 게 왜 이렇게 있지? -> 누군가 인간을 위해 설치해놓은 것 같다 -> 그 존재는 대체 왜 인간에게 쓸만한 것들을 만들어놨을까? -> 생각해보니 이 존재가 나로 하여금 감사와 숭배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그 존재를 숭배하고 감사를 많이 표할수록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 존재가 나에게 더 좋은 걸 많이 해줄 것 같다 -> 신앙과 미신 생김 (또한 그들은 이러한 지배자의 기질에 관하여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목적론적 편견을 갖고 있다가 더 나아가 인간의 편익/이익을 위해 설치한 초월적 존재를 숭배하기 시작하고 미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재앙이 생기면 우리가 모자랐구나 하면서 희생제물도 바치고 하면서 더 열심히 숭배한다.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중략)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목적들이 아니라 오직 도형의 본질 및 특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수학(목적 따위에 관심이 없는 학문)이 인간들에게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점만으로도 진리가 영원히 인류에게 감춰진 채로 남아있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학 이외에도 인간들이 이러한 공통의 편견들을 깨닫고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에 관한 이러한 학설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킨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원인인 것을 결과로 간주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학설은 본성상 앞에 오는 것을 뒤에 오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 22, 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된 것들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면, 마지막으로 생산된 것들, 곧 그것들을 위해 처음의 것들이 만들어진 이 마지막 것들이야말로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들이 될 것이다.

 

-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 직접적 무한양태

이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생겨나는 것: 매개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보다 완전성이 덜 한 것: 유한양태

목적론적 관점에 따르면 직접적 무한양태가 수단이 되어버리고 매개적일수록 근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어버림

 

이 학설은 신의 완전성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신이 자신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열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목적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그 추구하는 것이 결핍되어 있는 말이니까. 그러니 신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다 -> 신은 불완전하다

- 목적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필요의 목적과 동화의 목적(<- 나는 갖고 있는 이걸 안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로 끌어들이는 목적)

- 목적론적 관점에서보면 동화의 목적이었어도 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기독교 신학자 중 창조를 굉장히 숭배하고 그걸로 모든 걸 설명하려드는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복잡하고 섬세하고 딱딱 들어맞는 구조가 자연의 진화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냐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6장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대 구약성서를 분석해보면 구약의 기적은 사실 그냥 사람들이 자연적 사건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그냥표현이 신의 입김이었는데, 해석되는 과정에서 그게 곧이곧대로 기적이 되어버렸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많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언어적 표현법+ 자연적 이치에 무지하니 사실 자연적 현상인데도 그냥 초자연적으로 이해함 -> 이게 기적으로 둔갑한 것이다.

 

- 바보들일수록 세상에 대해 잘 놀라는 얼빠짐 놀람 stupor. 어떻게 신체가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별자리가 이렇게 내 성격이랑 딱 맞을 수 있지!ㅋㅋㅋ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의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 이런 우중을 상대로 정치론 신학정치론을 쓰려고 하니까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에티카>에서는 오히려 불구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에티카>를 불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인들,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지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려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론> <신학정치론>에는 많이 나온다. 스피노자는 그 사람들이 철학을 통해 설득되거나 수학적 과학적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될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에 맞춰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맞춰 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 그래서 <신학정치론>에 가면 신, 초월적인 신, 때로는 영원불멸의 신에 대한 상상적인 믿음을 스피노자가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그런 것도 믿지 않으면, 내세나 초월적인 신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나쁜 일 하면 지옥가고 좋은 하면 천국 간다 같은 건 상상적인 생각이고 진리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이런 상상마저 하지 않는다면, 대중이 더 타락하고 방탕한 길로 갈 것을 우려했다. 그것 자체는 상상적인 생각들이고 미신이지만, 그것의 유용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올바른 대중들을 유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에티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목표다. 하지만 실천적인 철학으로 가게 되면, 그러니까 정치학 같은 쪽으로 가게 되면 진리만을 추구할 수 없다. 일단 대중들이 철학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진리에 귀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귀찮아하며 때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천철학에서는 철학의 역할이 조금 다른 것이다.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과하며, 우리의 상상의 취약함으로 인해 아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도 아마 그들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 다음 다른 통념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을 변용하는 상상의 방식에 불과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사물의 주요속성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귀를 움직이는 것들은 소음이나 소리, 화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데, 이는 심지어 신 역시 화음에 즐거워한다고 믿을 정도로 사람들이 제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실로 천계의 운동이 일종의 화음을 이룬다고 믿었던 철학자들도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신이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도록 모든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이는 신에게는 가장 높은 정도의 완전성에서부터 가장 낮은 정도의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들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전혀 질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정리16에 증명한 바와 같이, 신의 본성의 법칙은 무한 지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아주 광대했기 때문이다.

 

- 신학적 어법을 빌려서 이야기한 것. 너희 신학자들의 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신의 질료가 무궁무진해서. 그 뒤의 문장이 스피노자의 입장에 가까운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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