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에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통일로를 죽 타고 북한산에 가서 정상까지 올랐다...... 는 좀 결과론적인 왜곡이고ㅋㅋ 하루 전날인 월요일에 봉이가 매우 대단한 일을 해주는 바람에- 클릭 대기인원이 9천명 가까이 된데다 2분도 안 돼서 매진된 올댓스케이트 2018” 예매에 성공했다 그것도 키스앤크라이존 맨 앞줄로! 만세~ - 고마워서 평소였으면 절대 안 따라왔을, 뭐라고 꼬득여도 절대 안 왔을 북한산에 같이 와줬다ㅋㅋ 20대에는 히말라야 트래킹, 지리산 종주 이런 거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아이슬란드 트래킹까지 찍고나니 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기분이 들며 언젠가부터 등산/등반에 좀 시들해져서 요즘은 일년에 한두 번 정도 가는 게 전부다. 북한산 정상까지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 가파른 길과 완만한 길의 갈림길에서 가파른 길을 택해 올라가니 1시간 49분이 걸렸다. 눈 쌓인 벌판 같은 하얀 암석을 타고 올라갔던 마지막 15분은 진짜 너무 힘들었지만 아아 재밌었다! 정상에서 한참 우리만의 정상회담을 나누고 내려왔다. 거칠고 선 굵은 붓질 같은 북한산 멋지다. 산 좋아. 힘든 산행 끝나고 먹는 고기도 좋아ㅋ 험한 산 탄 여파로 다리가 천근만근일 때는 고기도 천근만근 먹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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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참 염치 있는 표지판



토요일에는 대전에 다녀왔다. 극적으로 이겼고 1위! 

계속 못하고 헤맬 때도 너무나 사랑하는 내 팀이었는데 잘 하니까 그것대로 또 좋아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못한 것은 한때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한 팀의 쓸쓸한 현재가 너무 생생히 다가와서.

운행이 중단된 채 한참동안 방치된 놀이동산을 볼 때의 쓸쓸한 기분이 승리의 기쁨 위에 함께 묻어 따라왔다. 



일요일에는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중국집에서(드디어 내 입에 꼭 맞는 짜장면을 찾았다!) 다같이 저녁을 먹었고

목관절에 좋다고 유명한 베개 한 쌍도 선물 받았다.

아직은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지만 나이 먹을수록 목과 허리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는데

그래서 안 그래도 이 베개를 살까말까 예전부터 고민했었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베개가 생겨서 무척 기쁘고 정말정말 고마웠다. 며칠 베고 자보니 정말 확실히 다르다. 



회사가 쉬는 월요일에는 축구를 갔다와서 하루종일 스피노자스피노자 

요즘 스피노자 공부하는 시간이 제일 좋다. 이날처럼 하루종일 푹 빠져있을 수 있는 날은 더욱. 

문제는 이렇게 열 시간 가까이 책상 앞에 있던 날이면 이 세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서

번번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새벽까지 붙들고 있느라 잠이 모자라다는 게 문제.

고민 끝에 아침요가를 다음날 꼭 넣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요일에는 퇴근하고 한동안 남프랑스에 가있을 친구를 만나서 신나게 이야기 듣고 하고.

가게 문 닫는 시간까지 있고도 모자라서 친구와 합정역에서 홍대역까지 한 정거장을 같이 걸었다.

친구를 보내고는 근처에서 일하던 봉이와 만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화를 봤다. 

끝나고나니 새벽 1시가 넘었는데 영화의 여운 때문에 너무나 술이 마시고 싶었고... 

그러나 우리는 내일 출근을 해야하고... 그런데 술이 너무나 마시고 싶었고... 

그래서 고민 끝에 영화관에서 집까지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며 술을 마시기로 했다ㅋㅋ

팩소주를 하나씩 들고 마시면서 간간히 건배도 하고ㅋㅋ 영화 이야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왔던 새벽. 



수요일에는 퇴근하고 요가를 갔다오니 집에 책이 도착해있었다.

언제나 이렇게 신간들을 챙겨주셔서 너무나 고맙다ㅠㅠ 

책에도 표정이 있어서 이렇게 화사하게 바뀌니까 새로운 기분.

이미 정이 든 탓에 아직은 구판의 표지들이 더 좋지만

바뀐 표지만큼 달라졌을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전혀 읽어보지 못한 책을 펴는 기분으로 좀 설렌다.

직접 보시면 어쩐지 쑥스럽고 민망해서 페북에는 차마 쓰지 못하니까 여기에다 써야지

옛날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는 구병모님은 올타임 베스트! 



목요일에는 오랜만에 아침 요가를 갔다가 퇴근하고 친구들과 곱창을 먹었다. 

기자인 친구에게 축구 뒷얘기를 잔뜩 들었고 축구로 시작해서 축구로 끝나는 아름다운 자리였다ㅋㅋ

친구가 이번에 공들여 쓴 책도 선물로 줬다.

사실 나에게 월드컵은 매우 관심 밖의 일이지만 친구 책을 넘겨보다보니 어쩐지 좀 기다려도 지고. 



오늘도 아침 요가를 다녀왔고 역사적인 날을 맞아 일하면서 틈틈이 뉴스 영상 찾아보며

어쩐지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다ㅠㅠ 여러 소회들과 많은 말들이 머리속과 마음을 꽉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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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그러다가 결국 "특별한 나"를 잘 알아줄 것은 과학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것 밖에 없다고 여겨 오컬트나 신앙에 빠져 별점으로 세상과 나 자신과 타인을 파악하고 읽어내려든다거나 성경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여 가치판단을 내린다거나 하는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고.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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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1 인간정신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는 이미 2부 정의3에서 관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나는 관념을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인간 정신을 관념이라고 명확히 제시한다. “인간정신은 관념이다라고 정리하는 첫 정리. 스피노자의 관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대로 표상이라고 받아들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이 없는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사유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관념이며, 따라서 관념은 자신의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실재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는 실재다. “관념은 양태다라는 말은 관념이 실재다라는 말과도 같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달리 말하면 인간 정신과 동일한 관념이 있으며, 또한 뒤에서 계속 보겠지만, 인간정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으로서의 정신이 산출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이다. ,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혹은 소유하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관념이 담겨있는 상자나 틀 같은 그런 것.

-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데 존재는 라틴어로 하면 esse, 어떤 경우에는 essentia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리11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정신은 관념이다이다. 어떤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그렇다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는 무엇일까? 아직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신체다. 그러니까 정리11신체의 관념이 바로 정신이다라는 말이다.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 신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 정리11의 증명

 

-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 정리10의 따름정리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그랬고,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스피노자가 변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태로 대체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에는 예를 들면 사랑, 욕망, 의지 등등이 있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실재의 관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 의해) 관념 그 자체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관념일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실재는 아닌데, 왜냐하면 무한한 실재는 (1부 정리21과 정리22에 의해) 항상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2부 공리1”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다. Q.E.D.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이것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명제다. 유한지성을 지닌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서부터 따라가기 다소 어려운 결과들(이어지는 내용들)을 도출한다.

- ”인간정신의 본질은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 ”인간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은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과 반대에 있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은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다. 영원진리가 어떻게 창조가 되는가. 영원하다면서?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데카르트가 1630년에 메르센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신에 대해서 우리는 entendre할 수는 있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comprendre는 라틴어의 adaequatio 같은 것. 외부 사물과 우리의 지성이 일치하고 합치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아다이콰치오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며, 인간 지성과 신의 지성에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괴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들으면 아니, 인간지성이 신의 지성의 일부라니!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지각한다고 말할 때 신이 지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이 신은 무한한 신이 아니다.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자연전체로부터 개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신이 어떻게 개별정신으로 분화되어가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덧붙이면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는 인간정신이 개체화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유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지는 정리13에 가면 알 수 있다.

- 이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관념들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과 연쇄를 이루고 있는,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속에 실존하는 한 양태인 한에서,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하는 것은 정리9에서 말하듯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 지각하는 것과 같다. 또는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다. 이는 1부 정리34, 36, 그리고 2부 정리3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인간 정신에 의해 전개되는 한에서의 신의 사유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으, 나중에 3부 정리7의 표현을 선취한다면,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부 정리14에서 정리29까지 전개될 부적합한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의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따라서 인간 정신이 적합한 또는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 정신은 바로 무한한 사유역량으로서의 신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그 뒷문장은 인간 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의 신을 말하고 있다. 이때의 신은 앞문장 속 신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내적인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인간정신의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정신은 신의 사유역량을 부분적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때의 신은 인간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구성하는 신 -> 인간의 정신은 그 일부일 뿐이다 -> 그러므로 부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 즉 결론은 인간정신은 진리의 역량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제한적으로 가질 수 있다

 

*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에서 표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이 표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 중에 하나로 그는 “pli”라는 어간이 들어가는 세 가지 용어에 주목 한다. le plithe fold ‘주름이라는 뜻으로 그는 이 말을 키워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설명하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라는 책을 1988년에 펴낸다.

implicare/ explicare/ complicare

- implicare는 함축하다, explicare는 보통 뜻으로 말하면 설명하다가 되겠지만 존재론적인의미로 하면 펼치다’. 가령 본질을 설명하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펼치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complicare는 원래대로 하면 무언가를 뒤엉키게 하다’, ‘서로 얽히게 하다라는 뜻인데 들뢰즈가 complicare를 주목할 때는 신 또는 실체가 만물을 감싸안는 것, 포괄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들뢰즈는 <표현의 문제>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 사실 스피노자는 implicare라는 용어를 에티카에서 한 번 밖에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implicare 대신에 involvere를 쓴다. 1부 정의1,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도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에서 involvere를 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함축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involvere를 쓰면서 어떤 경우에는 implicare를 쓴다. 사실 들뢰즈는 속으로 굉장히 아까웠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왕 같은 뜻이라면 involvere 대신에 implicare를 써줬으면 어미가 딱딱 맞을 텐데. 어쨌든 그는 스피노자를 직접 인용할 때는 involvere를 쓰지만 같은 뜻이니까 involvere라고 쓴 것도 implicare라고 간주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implicare를 써서 세 개의 구도를 쓴다. 들뢰즈의 의도, “pli”라는 어간을 갖는 세 개의 용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표현 개념을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정리12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 정신에 의해 지각되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곧 만약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 물체라면, 이 물체 안에서 정신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우리가 2부 정리7에서 살펴본 이른바 평행론명제,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은 같은 것이고, 신의 사유역량과 신의 현행적인 행위역량이 동등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나오기 때문에, 정리12의 증명에서 말하듯 정리9의 따름정리의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스피노자가 정리12의 주석에서 말하듯 정리122부 정리7의 주석에도 근거를 하고 있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안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안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그러니까 항상 어떤 속성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른 속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상응하는 것이다. 정리12에 들어가면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 다 지각이 된다고 말하는데 연결된다.

 

- 따라서 2부 정리12의 명제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2의 명제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제의가 된다. 다음 같은 회의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이 자신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각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지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변화들을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일까? 세포 하나하나의 생성과 소멸까지 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 정리13의 증명

 

1) 만약 신체가 인간 정신의 대상이 아니라면-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이 우리의 정신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실재의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신 안에 존재할 것이고 ->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은 그 다른 실재의 정신에 있지 우리의 정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고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2) 만약 신체 이외에 또 다른 정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1부 정리36에 의해) 그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정신 안에는 이 다른 대상의 결과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할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5에 의해 그것에 대한 관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 따라서 우리의 정신의 대상은 실존하는 신체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벌써 다 예측하고 공리로 넣어 놨다ㅋㅋㅋ 우리가 공리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왜 여기 나와 있나 했는데 이때 써먹으려고ㅋㅋㅋ 공리로 넣어놨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명한 진리로서 공리로 설정해놓은 것이다. 아마 스피노자가 물리학 자연학에 관한 책을 썼다면 이것을 공리로 놓지 않고 아마 증명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까,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가 이 책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신체가 무엇인지, 우리 신체의 본성이 무엇이고 특성이 무엇이고, 근육은 어떻게 되어있고 같은 생리학적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인가. ? 우리의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과 우리의 인식 능력, 지적 역량이 향상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신체 역량이 향상되고, 우리의 지적 역량이 향상되어야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능동성을 갖게 되고, 우리가 능동성을 획득해야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스피노자 에티카의 목표인 것이다.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공리4에서는 느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지각, 인식방식이다. 스피노자가 느낀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칸트였으면 이것을 내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 인간이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지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 여기에서 느낀다라는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2부 공리4에서 이미 느낀다sentimus senti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스피노자가 느낀다고 쓴 표현은 감각적인 지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각하다는 동사가 주로 외부 대상이 우리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일 내지 사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리킨다면, “느낀다는 동사는 우리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느낌은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느낌이 다 부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표현도 다소 애매하다. 에드윈 컬리는 “The human body as we aware of it”이라고 번역했다. sentimusbe aware of로 번역. 그런데 저 영어 번역도 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라틴어에 prout라는 단어를 컬리는 as로 번역했다. 느끼는 대로, 자각하는 대로, 감지하는 대로. 그런데 이 prout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좀 불분명하다. 여기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1) ‘인간 신체가 우리가 느끼는 바와 똑같이, 실제 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느낌이 신체의 본성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말은 인간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경우에만 실존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우리가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느끼는 경우에만,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에만 신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느끼지 않으면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존재론적으로 무. 이것을 철학사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험론자였던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같은 사람이 한 유명한 말 존재는 지각이다로 대표되는.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이 전제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명제로 이해하는 것이니까,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는 의미이니까 역시 부적절하다.

3) 아니면 2)와 다르지만, 신체는 우리가 느낌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CT를 찍고 MRI를 찍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의학교과서나 생물학교과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인지 아주 정확한 인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신체를 느끼는 것, 배고프면 허기가 느껴지고 졸리면 졸음이 느껴지고 아프면 고통스럽고 이런 방식이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인식하는 가장 1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 적합한 인식을 얻기 전에 원초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지각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긴 말 하지 않고ㅋㅋ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후기 데카르트 철학의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은 사유의 질서에 속하고 신체라는 것은 연장의 속성에 속한다, 이 양자는 서로 섞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해놓고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도 이야기하는 것. 어떻게 서로 섞일 수 없는 게 합일을 이루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 더 나아가서 데카르트가 나중에 <정념론>에서 정념 passion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정신에 능동적으로 작용해서 영혼에 생겨난 관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체가 우리 영혼에 작용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신체가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정념을 갖게 된다고. 그런데 정념의 영향을 받게 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 사람은 뭔가 일관성 있는 삶을 살기 어렵고, 유덕한 삶을 살기 어렵고, 도덕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유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정념을 억제해야하고, 그러려면 반대로 정신과 의지가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서 신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신체의 능동성을 억제해야 정념의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경우 신체와 정신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데카르트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 명제를 가지고 데카르트의 심신상호작용을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간학도 잘못됐고 데카르트의 윤리학도 문제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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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강의 정리- 2부 정리8이 어려웠던 이유는 형상적 본질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2부 정리8이 현행적 본질 형상적 본질이 뚜렷하게 나뉘는데, 들뢰즈 철학에서는 이것을 virtual 형상적 본질, actual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virtual한 형상적 본질이 actualize해서 actual한 현행적 본질이 되는가이다. 이런 구분은 자칫하면 플라톤주의로 가버릴 수 있다. 플라톤주의로 빠지지 않고 이 길을 우리가 잘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form 형상을 정의할 때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forma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리8에서 실존하지 않는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1부 정리11의 다른 증명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를 비교하며 살펴봤는데 저 실존하지 않는의 이유도 초월적인 이유가 아니라 독특한 실재와 연관된 이유였다. 이를테면 다윈의 종 멸종이론이라든가 이미 먹어버려서 없는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우리는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서 알아두고 넘어가자.

 

정리9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며,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제3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의 원인을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된다.

 

1)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 곧 양태이며 따라서 양태인 한에서의 관념은 그것이 속해있는 속성, 곧 사유속성 안에서 다른 양태들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인과 관계를 맺지,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 내지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thing이다. 관념은 물체 같은 양태다. 양태로서의 물체가 연장 속성 안에서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양태로서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부 정의2에서 나온 자신의 유안에서 유한하다는 점이다. 같은 유안에서. 즉 관념은 물체에 의해서는 한정될 수 없다.

 

2) 더욱이 정리9에서 문제가 되는 관념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A라고 하자)이다.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관념 역시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B라고 하자)이며,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관념A의 원인이 되는 관념B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내지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스피노자가 1부 정리15에서 말하듯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 모든 건 다 신 안에 있고, 신은 무한하면서 모든 걸 품고 있다. 신 그 자체로 보면 무한하다. 동시에 신은 유한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적 우주는 신/ 연장을 이렇게 분리해버린, 매우 타동적인 세계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유일한 피조물들과 초월적인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무한한 신이 아니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리18), 곧 무한하게 많은 자연 사물들 내에 내재해있는 신이며, 역으로 이러한 자연 사물들은 신의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따라서 우리가 어떤 독특한 실재가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 다른 독특한 실재는 또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고 할 때(1부 정리28), 원인으로서의 독특한 실재는 유한한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전체로서의 연장이 변용된 것이 바로 각각의 물체이다. 즉 물체는 유한하게 변용된 것이지만, 무한한 연장 속성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무한하다. 관념도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정리9에서 하는 말이다.

- 즉 정리9에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무한한 신이 정리9에서의 이유라면,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식의 신, 기복신앙의 신이 되어버린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등등. “무한한 한에서의 신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의 반대개념이다


증명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다른 사유 양태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사유 양태이며(2부 정리8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의해)(=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사유양태다), 따라서 (2부 정리6에 의해) 오직 신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즉 관념은 관념 안에서 인과를 맺지, 물체와 인과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1부 정리28에 의해) 신이 절대적으로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러하며, 이 후자의 사유 영태 역시 신이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2부 정리7에 의해)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실재원인으로 바꿔 말하는 것. 즉 실재는 곧 원인이다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독특한 관념의 원인인 것은 바로 다른 관념, 곧 신인데, 이는 신이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며, 이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Q.E.D.

 

- 정리91부 정리28과 짝을 이루는 관념의 연쇄를 말하고 있다. 1부 정리28에서 A라는 독특한 실재는 B에 의해, B라는 독특한 실재는 C에 의해, C라는 독특한 실재는 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1부 정리28에서 독특한 실재가 그 대상이었다면 2부 정리9에서는 사유 속성 안에 존재하는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된 관념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증명에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 , 1부 정리28에서처럼 관념 역시, 관념A는 관념B에 의해, 관념B는 관념C에 의해, 관념C는 관념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관념A, 관념B, 관념C.....들은 바로 신이 아니라, 신이 변용된 한에서의 관념이다.

 

따름정리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증명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2부 정리3에 의해),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이 독특한 실재의 다른 관념에 의해 변주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앞의 정리9에 의해). 그런데 (2부 정리7에 의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에서 말하듯이 스피노자가 2부 정리3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면 신은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신이 전지한 것은 앞의 정리9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피조물들의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자리에서 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그런 것이다. 즉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변용된 한에서!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리9가 뜻하는 바를 더 정확히 해명하고 있다.

-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 : 예를 들면 내가 물컵을 보면서 갖는 관념. 그런데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여기서 어떤 관념은 정신이고, 인간 정신의 독특한 대상은 신체이다. 인간이 연장 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신체로 나타나고 사유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정신으로 나타나고 유니온에 의해 표현될 때는 코나투스로 나타나고. 그리고 정리10에서는 인간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인식을 갖고 있다, 무의식적 인식이든 비자각적 인식이든, 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어쨌든 2부 정리9 정리10 정리11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정신과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스피노자가 계속 정신과 신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을 어떤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는 뜻 그대로 하면 그냥 우리 정신, 어떤 관념인데 스피노자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서 이야기를 할까. 정리10에 가면 이 답의 실마리를 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10 인간의 본질에는 실제의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또는 실체는 인간의 형상forma을 구성하지 않는다.

 

정리10은 인간은 본성상 실체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은 2부 공리1에서 말하듯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본질로부터 따라나오는 신의 특성)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따라 나오는 명제다.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공리로서 제시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적으로 증명이 된 명제는 아니다. 2부 공리11부 정의1을 합쳐서 생각하면= 인간은 유한하다. 이걸 스피노자가 공리1로 깔고 2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공리1에서 정리10은 너무 쉽게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modificationibus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니까 따름정리를 정리10과 연결해서 요약하면- 1부 공리1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 아니면 양태다. 그런데 정리10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가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에는 뭐가 속하겠는가. 변용, 여기 표현대로라면 변양에 의해 구성된다. 그게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 modificatio modification 변양. 이 모디피카치오가 가장 처음 나왔던 것은 1부 정리8. affectio 변용과 같이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모디피카치오를 드물게 쓴다. 이 모디피카치오를 쓸 때의 용법을 보면 아펙치오와 별로 다르지 않게 쓴다. 변용, 양태, 이런 말들과 같이. 에티카에서 변용affectio, 변양modificatio, 양태modus는 같은 뜻으로 봐도 된다.

- substantia 실체 / affectio 변용 신과 다른 모든 것 (= modus 양태)

* 2부 정리14에 가면 물체 자체가 하나의 변용이고 여기에 또 변용이 일어나서 변용의 변용이 일어나는데 스피노자가 하필이면 이 물체가 겪는 변용에도 “affectio”라는 단어를 붙인다.

* 3부에 가면 affectus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감성, 정서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정신의 변용과 관련되어있다. 그러니까 단어는 둘 다 affectio인데 뜻이 다른 것.

- 들뢰즈는 양태와 변양을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의 한 양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양태인가?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양태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인간을 그냥 양태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된 게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을 단순히 정신과 신체와 같이 양태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그런데 들뢰즈가 보니까 스피노자가 모modusaffectio라는 말 외에 modificatio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그는 이 말을 채택해서 인간처럼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와 연장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변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만인가. 아니지ㅋㅋ 다른 존재자들도 관념과 물체가 다 합일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변양들 무한하게 많은 변양들이니까. 어쨌든 들뢰즈는 modificatio라는 말을 그런 용법으로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는 그런 용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 정리10의 주석

 

- 따름정리에 함축되어 있는 쟁점들을 풀어내는 것이 주석의 내용이다. 1) 분명히 모든 사람은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1부 정리15에서 제시한 명제이며,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 문제는 사람들이 1)2) 많은 사람은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없이는 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본질에 관한 통상적인 정의인 2)는 스피노자 2부 정리2에서 제시한 본질에 대한 정의와 매우 다른 것이다. 2부 정의2에서는 상호성이 있는데, 2)의 명제에는 그런 상호성이 없고 본질이 중심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2)는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즉 스피노자는 지금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질과 원인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읽어보면 사람들은 신이 본질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 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본질을 혼동하고 있다.

- 1)2)가 저렇게 연결되어버리면 3-1) “그들은 신의 본성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하거나3-2) “아니면 피조물들은 신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고 믿는 셈 같은 양지택일이 나오기 마련이다. 3-1)의 경우, 피조물의 본질에는 신의 본성이 속하기 때문에 피조물, 특히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 3-2)의 경우라면 피조물은,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따라서 마치 꼭두각시와도 같은 완전히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그리하여 그들이 충분히 일관되지 못, 곧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며, 이는 그들이 철학함의 순서를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제1원인이며, 따라서 인식이나 존재에서 제일 앞서는 것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혼동하며, 오히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원인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적 실재들에 대해 숙고할 경우 그들은 다름 아닌 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최초의 허구들, 곧 그들이 자연적 실재들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그 위에 쌓아올린 그 허구들/ 허구들이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 제일 원인을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길게 말한 바와 같이 신인동형론적 관점을 낳기 쉽다. 이런 허구적 관점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안티 스피노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ㅋㅋㅋ

 

과학적인 인식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아마 과학적인 지식이 많이 누적이 되더라도 그것이 철학에서 이해하는 제1 만물의 원인이라든가 세계의 근거라든가 그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양자역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 신자도 있을 테고ㅋㅋ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의 누적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1부 부록에서 길게 논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대신 왜 자신이 통상적인 본질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떤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것,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본질개념을 제시했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이는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과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 , 스피노자 자신은 실체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인식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독특한 실재들의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만 모든 독특한 실재의 원인이지만 독특한 실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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