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에서 돌아오니 교정지와 유니폼이 도착해있다. 이번에도 교정지와 함께 신간 네 권을 보내주었다. 이런 식으로 미팅 때마다 늘 챙겨주는 책도 책이지만(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지난 번에 원고 넘겼을 때는 고생했다고 머그컵을 선물로 줘서 무척 고마웠었다. 마침 타이밍이 잘 맞아 이번에는 나도 보답할 수 있게 됐다. 후쿠오카에서 사온  명란젓, 명란 마요네즈를 비롯해서 로이스 감자칩, 로이스 초콜렛, 곰 발바닥 쿠키 등등을 종합선물세트로 꾸려 택배로 보냈다. 역시 선물은 받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즐거워.


여행의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교정지와 유니폼을 보니 탈칵, 소리와 함께 뚜껑이 확 열리며 그 안에 잠시 넣어놨던 일상이 바로 쏟아져나온 느낌이다. 이런 거 좋아. 땅에서 발이 떨어진 채 나른하게 부유하는 느낌도 좋지만 나는 역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땅 위를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결국 땅 위에서 문득문득 발을 떼는 건 땅 위를 다른 리듬의 스텝으로 좀 더 잘 걷기 위해서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고 스피노자 공부를 하는 것도 다 스텝을 익히는 것일지도. 그나저나 교정지와 유니폼이라니. 마치 내 일상의 수많은 사물들끼리 의논 끝에 가장 대표적인 두 개를 뽑아낸 것 같은 아이템 구성이잖아. 회사 바깥 내 일상의 60프로는 저 둘이 차지할 것 같은데, 이리하여 다음주부터는 내내 교정지를 붙들고 마감을 달릴 것이고, 당장 이번 주말 경기부터 올 시즌 끝날 때까지 저 유니폼을 입고 경기가 있는 곳이라면 온갖 곳을 다 가겠지. 이렇게 다시 일상 스타트!


2. 여행 다녀오느라 이번 주에는 요가를 두 번만 갔다. 사랑하는 아쉬탕가와 빈야사. 이제 수리야나마스까A 수리야나마스까B를 포함 파르쉬보따나아사나까지는 잘 하겠는데 웃디타 하스타 파당구쉬타아사나와 아르다밧나 파드모따아사나가 여전히 잘 안 된다. 균형잡기가 너무 힘듦.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을 때는 무릎이 완전히 펴지지 않고 그 상태로 옆으로 벌릴 때는 늘 균형이 무너져서 결국 두발을 딛게 되거나 휘청휘청 겨우 버텨낸다. 안정감이라고는 1도 없음ㅋㅋ 그 상태로 앞으로 숙이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두려움마저 살짝 일었나. 이 상태로 앞으로 숙여 손바닥과 정수리를 땅에 대라고? 그게 가능해? 첫날에는 엄두도 못냈는데 이제는 하긴 한다. 아르다밧나 파드모따아사나 같은 경우에는 일단 숙이는 것을 성공하면 균형잡기는 웃디타 하스타 파당구쉬타아사나보다는 수월한 편. 하지만 이것 역시 휘청휘청 한정감이라고는 1도 없음ㅋㅋ 이걸 잘 할 수 있게 될까? 하지만 처음에 짜투랑가를 무릎대지 않으면 못하다가 이제는 무릎 안대고도 거뜬히 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 허벅지가 들 수 있게 된 걸 보면 저것들도 언젠가 되긴 되겠지? 쉬르사아사나나 부자피다아사나 류의 공중에서 몸을 띄우는 아사나들은 현재로서는 아예 목표로 삼을 수 조차 없는 다른 세계고, 일단 나의 목표는 1) 웃디타 하스타 파당구쉬타아사나 2) 아르다밧나 파드모따아사나 3)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 잘하기. 이것들을 잘 해내게 되면 매우 뿌듯할 것 같다. 그날까지 천천히 한 스텝 투 스텝. 


3. 전에 ㅅㅈㅁ님이랑 이야기하다가 "사실 나는 '심심하다'는 상태를 잘 모른다"라는 것에 둘이 매우 격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 이야기를 한참 했었다. 그러게 사실 나는 심심한 느낌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은 심심하다고 말하는 봉이한테 심심하다는 기분은, 전혀 관심 없는 강연을 억지로 들어야 하거나 미팅이 턱없이 길게 늘어질 때 느끼는 지루함이랑 비슷한 거겠지? 아니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오후의 무료함 같은 거? 라고 물었었는데 조금 다른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봉이가 "야 네가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상태인 적이 있어?ㅋㅋㅋㅋ"라며 막 웃었는데ㅋㅋ 생각해보면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아파서, 혹은 마음이 피곤하거나 아파서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는 상태인 적은 있어도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상태인 적은 살면서 거의 없는 것 같다. 늘 하고 싶고 재미있는 일이 넘쳐나서 문제지. 요가도 교정지보며 글 다듬고 글 쓰는 것도 축구장 가는 것도 책 읽는 것도 철학 공부 하는 것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만나 노는 것도 술마시는 것도 여행가는 것도 그냥 다 너무 즐겁고 이것들만으로도 시간이 늘 부족해. 


4. 그나저나 저렇게 묶어놓고 보니 교정지 꽤 두껍다... 언제 다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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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짧은 여행에서 가장 잊지못할 음식이 일본 친구가 꼭 가보라길래 첫날 저녁에 바로 갔지만 웨이팅만 두 시간인 바람에 다음날로 예약해두고 다시 찾아갔던 야끼니꾸와 생맥주였다면(아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다!), 가장 잊지못할 곳은 호텔에 들어와 씻고 유카타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다가 아무래도 그냥 잠들기 아쉬워서 "한 차 더 가자!" "내 말이! 내일 피곤해서 고생하든 말든!"하고 극적으로 의기투합,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날듯이 밖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가 소박하고 조촐한 입구가 마음에 들어 무작정 문을 열었던 이자카야일 것이다. 왜 그런 곳 있잖아. 딱히 음식이 되게 맛있는 것도 딱히 스페셜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당시의 나의 기분과 마음상태와 딱 맞아떨어지면서 최고의 공간으로 바뀌는 곳. 한눈에 봐도 전혀 유명한 곳도 아니고 요즘 후쿠오카는 포장마차에만 가도 영어 메뉴, 심지어 한국어 메뉴도 다 있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고(없을 줄 알았다) 열 테이블이 채 안 되는데 그 중 세 테이블에 어느 정도 취한 내 또래의 사람들이 "마지데에에에에?!!!!" "조또 욥빠라짯단데스께도!" 라는 추임새를 사이사이 넣으며 취한 일본인 특유의 업된 억양으로 엄청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고 서버들은 그 시간에 갑자기 들어온 한국인 두 사람을 지나치게 반기지도 않았지만 은근하게 신경 써주는, '마시고 취하는 암자'라는 가게 이름답게 너구리 굴처럼 짱박혀 아늑하게 술마시기 참 좋은 곳이었다. 아마 너구리굴 같은 느낌을 주는 것에는 적당히 침침하고 적당히 작아서도 있겠지만 솔솔히 피어올라오는 담배연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명란 계란말이와 함박스테이크를 시켜놓고 서비스로 가져다준 닭요리도 앞에 놓고 쿠로키리시마 대신 주문한 시마비진을 연거푸 비워대며 세상에 뭐 아직도 그리 할말이 많이 남아있는지에 서로 놀라며 오래오래 이야기했다. 오래 전 요코하마에 살았을 때, 요코하마를 떠난 이후에는 어쩌다 일본에 출장다녀올 때, 가끔씩 HOPE를 사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었다. 야자키 히토시 영화에서 이케와키 치즈루가 침울하게 꺼내 물어 피던 장면이 마음에 강하게 남아 일부러 찾아 사서 피웠던 날, 세상에 너무 독해서 게다가 사래까지 들리는 바람에 기침을 해대느라 네 모금도 다 못 피우고 껐었던 담배. 썩 좋은 첫만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기분이 매우 울적하거나 말 그대로 희망이 다 날아가버린 것 같은 날에 이 독한 맛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 늘 비상약처럼 한 갑 사서 서랍에 넣어놨었지. 어떤 때는 일주일만에 다 피운 적도 있고 어떤 때는 한 개와 그 다음 한 개 사이에 몇 개월이 흐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에게 HOPE는 늘 아주아주 슬프고 아주아주 씁쓸하고 아주아주 절망적인 순간에만 꺼내드는, 그게 독한 기운이 됐든 담배 이름과 연결한 말장난 같은 희망이 됐든 나에게 뭔가 주문 같은 게 필요한 날에 내 아지트 같은 곳에 가서 혼자서, 꼭 혼자서 꺼내드는 담배였다. 시마비진 언더록을 네 잔째 주문했을 때였나. 문득 HOPE 생각이 났다. 그래, HOPE가 있었지! 일본, 담배를 필 수 있는 이자카야, 시마비진 언더록, 여행 마지막 밤. 너무 좋은 조건이잖아. 물론 제1조건인 '절망'이 빠져있기는 하지만 뭐 어때. 벌떡 일어나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HOPE를 샀다. 아아 오랜만이야 호프. 담배를 끊기도 훨씬 전에 이미 어느 순간부터 HOPE를 찾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서 마지막이 2009년이었지 아마? 취기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담배갑을 보는 순간 저 담배갑 뚜껑을 열던 과거의 내 마음들이 스쳐지나가서, 그 씁쓸했던 순간들을 함께 넘었던 한 때의 회사동료를 객지에서 불시에 만난 것 같은 기분에 아, 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네. HOPE를 사들고 신나게 돌아와서 시마비진을 한 잔 더 시키고 정성을 들여 HOPE를 열고 한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내 평생 처음으로 굉장히 행복해서 피우는, 누군가와 함께 피우는 HOPE였다. 무척 좋은 밤이었다. 다음날 숙취로 매우 고생했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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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지난 시간 강의 again)

- 이사야 벌린의 아주 유명한 <자유에 관한 에세이 4Four Essays on Liberty(1969)>

- 예전에는 “liberty”를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요즘은 “freedom”을 더 많이 쓰는 추세

 

*** negative liberty 소극적 자유:

- 핵심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로부터의 자유. 자유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소극적 자유의 대표자로 스튜어트 밀, 칸트를 꼽았다.

- 다른 연구자들 중에는 소극적 자유를 근대에서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홉스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많다. 토마스 홉스: “장애물이 없으면 자유다

 

*** positive liberty 적극적 자유:

- 간섭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이것만 가지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

-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정신적, 도덕적 이런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 고귀한 목표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자유다

이 예로 드는 것이 루소와 스피노자

 

*** 냉전자유주의 : 벌린 같은 사람을 우리는 냉전자유주의라고 부른다.

- 냉전: 1940년대 말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고 ->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는 것을 냉전이라고 하는데.

- 냉전자유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서서 자유세계, 서구에서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들: 칼 포퍼는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두 권짜리 책이 대표작에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우두머리로 지목,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열린 사회를 주창한다(1권에서는 플라톤, 2권에서는 막스 헤겔에 대해 비판) 프랑스에서는 레이몽 아롱 Raymon Aron,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가 대표적. 그가 1944년에 쓴 <노예의 길>은 미국에서 수십 만권이 팔리며 그를 아주 대표적인 냉전자유주의자이자 사회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이사야 벌린.

- 이들 모두는 다 냉전시대에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자유주의의 특징은 사회주의 전체주의에 맞선 이념적 가치로서의 자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요쟁점으로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 그게 공산당이 됐든 국가가 됐든 상위세력들이 개인의 자유들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로서의 소극적 자유는 1980년대까지 자유민주주의의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 그러나 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고 신자유주의가 약속과는 다르게 사회를 엄청나게 불평등하게 만들다보니, 소극적 자유개념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팽배해졌다.

그러다보니까 소극적 자유 개념에 대한 불신 회의가 팽배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자유의 개념이 소극적 자유의 개념.

 

*** 스피노자의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 반박

- 스피노자가 자유원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반박할 때, 그릇된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소극적 자유 개념이다. 신이 전능하거나 자유로운 사람이다라고 할 때 사람들이 신의 자유로움을 신이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자유로움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그 안에서 제약을 받으면 자유의 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니냐고 착각한다.

- <신학정치론> 6장의 제목이 [기적에 대하여]인데, 이것은 기적이라는 개념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기적이라는 것이 자연적 법칙이나 현상을 위반하는, 그런 법칙이나 현상이라고 믿기 어려운, 성경의 바다가 갈라진다거나 여호수아가 해를 지지 않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인데,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자유라고 착각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조차도 넘어설 수 있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들을 자유와 전능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 2부 정리3의 주석에서 포테스타스 개념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신의 전능을 왕의 힘과 비교한다. 왕이 자기 마음에 들면 법을 세우고 내키는대로 법을 폐기하고 막 이런 것.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개념 대비.

- 스피노자한테 자유라는 것은, 정의7에서 그 개념을 제시했듯, 본성의 필연성에 입각해서 행위하고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입장에서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신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다른 존재, 타자에게 제약돼서 실존하고 행위하고 작업하도록 되어있다. -> 스피노자에게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자유는 즉, 타자가 없는 것. 타자 없이 자기원인에 의해서만, 자기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행위하는 것,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 같은 자유원인은 부조리한 것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비판

 

- 여기서 스피노자가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릇된자유개념은 데카르트의 개념이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간한 책에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16304월과 5월에 메르센 Mersenne 신부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 적혀있는 영원진리창조론. 그에게 영원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의 전능함이었다. 영원진리조차도 신에 의해 창조됐고, 신이 그러려는 의지만 있다면 이 영원진리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신은 그 정도로 파워가 있다!는 내용인데 즉 영원진리창조론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려는 것이 바로 저런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한 거부다.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는 것.

 

- 데카르트의 이야기가 너무 신학적이고 어이없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형이상학적으로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진리가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 아닌가. , 진리를 규정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 니체식으로 이야기하면 진리를 규정하는 권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권력에 의해 진리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후대에 가서 니체가 됐든 막스가 됐든 프로이트가 됐든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경로가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 이를테면 프로이트의 유명한 말, ”무의식은 모순을 모른다“. 이때 모순은 모순율이다.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영원진리 중 하나가 모순율인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모순율을 모른다, 모순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차원의 일이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이루어진다는 것. 물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고유한 규칙이나 매커니즘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편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 133의 주석에 가서 영원진리창조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정리17 주석의 또 다른 논점은,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아,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 정리15의 주석에서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연장의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가령 우리는 물이 물인 한에서는 분할되며 그 부분들은 서로 분리된다고 인식하지만, 물체적 실체인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서 물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인 한에서의 물은 생성과 부패에 종속되지만, 실체인 한에서는 생성에도 부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 양태로서의 물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이 물인 한에서(=물이 양태인 한에서)는 증발되기도 하고 고여서 썩기도 하지만, 물이 실체인 한에서(연장 그 자체인 한에서의 물)는 물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면, 물이 있던 자리가 진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진다. H20라는 분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양태로서의 물은 생겼다가 변용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실체로서의 물은 생성도 소멸도 없다.>>>>>>>> 정리17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의 본질과 엮어서 말하고 있다.

- 한 사람의 실존이 생성 성장 소멸 변형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본질은 다 똑같다(사람의 본질은 영원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본질에 관해서는 이들 모두 완전히 합치할 수 있지만 실존 속에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실존이 사라진다해도 다른 사람의 실존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의 본질이 파괴되고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사람의 본질 역시 파괴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사람이라는 본질이 사라져버리면 다른 사람이라는 본질도 사라져버린다. 구멍이 난다. 진공이 생긴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 코나투스

- 코나투스라는 개념은 라틴어로 말하면 노력. “존속하려고 애쓴다”. 이 코나투스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평범한 말이다(사실 나는 존속하려고 애쓴다는 말을 듣자마자 매우 울컥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평범한 말을 잘 뜯어보면 참 신기한 단어다. 존속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농담 삼아 왜 사니이런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산다는 것은 굉장히 평범하지만 굉장히 심오한 활동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아주 이상하다. 왜 살까, 도대체. 누군가는 죽지 못해 산다고도 하는데, 그 죽지 못해 산다는 것도 참 신기한 것이다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 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아래에는, 근저에 있는 현행적 본질은 코나투스에 있다고 말한다. 살려고, 존속하려고 애쓰는 것. 참 평범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참 신비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 산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영원성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존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여도 사르트르가 스피노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 정리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 타동적 원인 causa transiens : 자기 바깥에 결과를 생산해내는 원인.

신에게는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타동적 원인일 수 없다.

 

* 정리19: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 데카르트의 관념이론 중에서 흥미롭고 스피노자 철학에도 영향을 준 용어법이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 formal reality objective reality. 데카르트가 objective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표상적이라는 뜻이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이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는지 정리된 것을 읽어보면 낯선 용어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이런 걸 보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이후에 우리의 인식의 지평이 너무 좁아졌구나, 칸트 이전의 사람들은 이런 용어를 써가면서, 신을 호출해가면서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 사유의 영역을 막 제멋대로 상상했는데 칸트 이후에 그 반경이 너무 좁아졌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칸트의 불가지론, 우리는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이라 현상세계에만 국한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이 독창적이지만 인식의 범위를 이렇게 딱 정해버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다 가상이다, 라고 인식의 범위를 좁혀버린 그런 점에 있어서 아쉽다(존재 자체, 존재 너머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괄호로 묶어 본문 밖으로 빼어버린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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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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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2.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쓴 <소론>의 원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 누군가 이 책에 얽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나 로랑비네 풍의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 아 근데 둘 다 프랑스 작가들이네. 30대 초반까지만해도 나는 프랑스 특유의 어떤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특히 영화. 에릭 로메르 정도가 마지노선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취향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심지어 미셸 뷔시 같은 프랑스 대중 추리소설도 좋아하기 시작한 걸 보면.

 

3. 자유개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하는 의견들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우연에 대한 여지를 두는 것과 자유의 여지의 상관관계에 커다란 의문이 있다. 그래서 비판자들의 “(스피노자는)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라는 의견을 들을 때 의아했다.

일단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라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물리는 어떤 법칙에서 벗어났을 때, 즉 톱니바퀴의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를 자유로 생각하는 맥락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무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유에 대해 평소에도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일단 나 스스로를 가장 많이 제약하는 것은 결국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유체이탈을 하지 않는 한은 뭐...).

차라리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에 맞닿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작해봐야 예외’ ‘의외성정도가 아닐까(‘우연이라는 단어와 예외’‘의외성이라는 단어의 의미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만 봐도 나는 우연이 전제된 상황 뒤에 나올 결과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 같다. 뭐가됐든 우연뒤에 나오는 단어가 자유인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제약을 디폴트로 안고 살기 때문에 이 제약에서 잠시 풀려나는 순간, 혹은 이 제약이 원래의 시스템 트랙을 따라 돌아가지 않고 잠시 법칙에서 벗어난 경로로 빠질 때 의외성을 느끼고 이 예외적인 상황을 자유로 착각하기 쉬운 것 같다.

갑자기 제약이 사라져도, 그래서 우연이 발생해도, 자율적 역량에 따라서 그 제약이 사라진 상태가 자유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기도 하고 더욱 속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우연자유의 잠재성을 포함한,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더 진하다고 생각하느냐하면 그것도 솔직히 아니다. ‘자유의 잠재태로서의 밀도가 진한 건 외부적 상황보다는 내부적 상황인 것 같다. 제약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고, 제약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니까. (물론 전쟁중이라든가 국가가 선포하는 거시적 제약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세속적 의미로서의 평범한상황에서)

아무튼 비판자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이미 동의할 수 없었으므로 앞으로 나올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대가 된다.

 

- 스피노자에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연적인 게 없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체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필연적으로 규정이 돼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이 결정론 철학이다, 필연성 철학이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는 자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많이 제기된다

- 그래서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주 실천적인 비일관성이 있다”, 한편으로 필연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는. 그런데 필연적인 법칙의 체계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유, 항상 우연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자유를 이야기할까, 그러니까 스피노자 철학은 비일관적인 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니지만 꽤 있다.

 

4. 3번까지를 메모해 놓고 나서야 이사야 벌린의 자유개념에 대해 들었다. 맞다, 이런 분류가 있었지. 그래, 자유라는 개념은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인데 나는 나대로의 자유개념만을 가지고 다른 자유개념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리고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 모두 어느 것 하나에 더 동감한다고 고를 수 없을 정도로 골고루 다 동감했다. 번호가 다른 골프채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 골라서 빼어들. 하지만 "적극적 자유"의 개념,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를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음이 크게 반응했다는 점은 솔직히 고백하겠다...


 

*** Negative liberty & Positive liberty

 

-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개념을 가장 명료하게 분류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이사야 벌린. 그가 1958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정치사상사 석좌교수로 취임하면서 했던 굉장히 유명한 강연이 있는데 바로 자유의 두 개념에 관한 강연이다. 거기에 나오는 자유의 두 개념이 굉장히 유명한 개념이다. NL(소극적 자유) PL(적극적 자유)

- 이사야 벌린 같은 사람은 자유개념의 진짜 핵심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생각한다. 소극적 자유말로 진짜 자유의 핵심이고, 자유주의의 규범적인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 간섭이 없는 것. 그래서 흔히 이것을 “~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liberty from-

-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특히 자유주의적으로 이해하는 자유개념의 핵심은 이 소극적 자유개념이다. 어떤 장애물이 없거나 간섭하는 게 없을 때 그때를 두고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한다. 이사야 벌린이 이런 소극적 자유개념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 존 스튜어트 밀과 칸트를 꼽았는데,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나 칸트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의미의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하고 명시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다. 바로 홉스

홉스가 자유 개념을 정리할 때 딱 그렇게 정의한다. “장애물이 없는 것이 자유다물체가 운동을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계속 운동을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이게 바로 자유다. 장애물의 부재.

 

- 이사야 벌린은 스피노자나 루소는 PL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적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는 Liberty to- ~을 향한 자유/~로 될 자유/ ~을 할 자유.

-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이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했을 때, 달성하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어떤 자유다. 그러니까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 무엇을 이루려고 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 자유다.

- 그런데 이사야 벌린은 이 적극적 자유를 아주 위험한 자유 개념이라고 말한다.

 

- 신공화주의(Neo-Roman Republicanism) : 1990년대부터는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철학도 나오는데 그게 바로 신공화주의. Pettit 페팃 교수는 이 신공화주의의 주창자. 그는 자유의 반대 개념을 지배와 예속이라고 정의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연구하는 미국의 석학이다. 그는 원하는 일을 뜻대로 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권리가 침해당할 가능성(지배, 예속)이 있다면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 왜 네오-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르는가. 이걸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고전적인 공화주의자들과 다르다. 고전적인 공화주의는 positive liberty를 수반한 자유주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화주의는 형식적 자유개념에 입각한 공화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네오 로만 리퍼블릭카니즘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장: “자유주의는 우리와 다르다, 자유주의는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지배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비지배야말로 negative liberty의 핵심이지, 간섭의 부재만으로는 부족하다.”

 

5. 데카르트의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는 문구를 듣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혼자 살짝 웃었다. 신의 무관심이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라는 말에도, 인간의 어떤 특성을 신에게 투사해서 신을 설명하는 오류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의 투사들이 너무 1차원적인 투사였다면, 이 투사는 약간 레이어가 있는 투사라서 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인간세계에서 무관심은 전능함의 증거기도 하지. 목적인적 논리도 첨가할 수 있다. 전능해서 무관심할 수 있기도 하지만(그러니까 무관심의 원인은 전능함) 좀 더 전능하기 위해서는 무관심해야하기도 한다(전능의 원인은 무관심). 무관심할수록 승리자가 되는 그 많은 상황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게서 바로 나온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뜻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데카르트 철학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네 번째 성찰에서 그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섯번째 성찰에서는 신의 완전한 무관심은 그의 전능함의 거대한 증거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뒤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6.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저기에서 그리고 신학자자리에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사주나 별자리 같은 미신, , luck, 그밖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능을 부여하는 것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렇게 주석까지 붙여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개념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인 이유와도 직결되어서기도 하다. 마치 신을 인간처럼, 인간과 같은 의지를 갖고 있고, 왕국의 법률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없앴다 무시했다가 내키면 권한을 실행할 수도 있는 왕처럼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반박. 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대중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내 기도를 들어달라면서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며, 스피노자가 보기엑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신의 말을 아무나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신의 말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누구의 권력이 커지는 것인가. 목사나 신학자들이 그 수혜를 입는다. 대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이나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고 하는 대신에 전능한 초월자에게 다 맡겨버리려고 의지하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을 인간이나 왕 같은 자유원인으로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결국 절대군주를 정당화하게 되고 절대군주와 결탁한 신학권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백성들의 미신과 무지를 강화하게 된다. 이게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논박하려는 주요 타깃이다.

 

저런 문제의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이런 논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유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원인은 필연적인 원인이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사물들을 생산하고 행위 하는 자유원인으로서의 신.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신학자들 대신에 자연의 법칙, 자연의 필연성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이걸 잘 인식하는 것은 개개인의 윤리적인 역량과 바로 직결된다. 자기의 삶을 영위하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역량. 그러니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는 것은 미신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연에는 초월적인 주재자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자연은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라는 전제가 확고하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신학이 아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들과 그 사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어떤 인간들 간의 법칙과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개척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17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건조한, 형이상학적 이야기 같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정치적 윤리적인 함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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