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만나서 아무런 계산 없이 서로 디스하고 위로하고 비웃고 뼈있는 조언도 하고 격려도 하고 놀리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미친듯이 웃느라 헤어질 때 되면 진짜로 배가 아프고 정신이 번쩍 나있고 마음이 따뜻해져있는,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제대로 잘 살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런 모임 너무 좋다. 곧 또 만날 친구1은 최근에 정희진 선생님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부럽고 그리워서 그만 소리쳤다. 아 정희진 선생님 보고싶어!! 친구1이 어느 순간부터 정희진 선생님 특유의 어투와 톤, 속도를 흉내내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바람에 더 보고 싶어졌네. 서울 외곽에 사는 친구2의 집은 지금 한창 연두빛에 봄꽃들로 한창이라고 했고 작은 개울이 흐르는 친구의 아늑한 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꽃들이 지기 전 5월 마지막 주에 모두들 다같이 그녀의 집에 소풍가기로 했다. 친구3의 책은 매우 잘 팔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가 보내주고나서도 한참 있다가 손에 잡게 됐는데 한번 붙든 후에는 멈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면서 대중에게 사랑받을 지점 어느 사이를 정확히 잘 잡아내서 친구에게도 독자에게도 좋은 기억의 책이 될 거라고, 이건 분명 잘 될 거라고 우리 모두 확신했는데 역시. 어제 오고갔던 대화들과 어떤 표정들을 떠올리다가 혼자 여러번 웃고만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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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4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따라 나온다라는 표현을 쓴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걸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냐면, 구약성경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가 누구를 또 낳고... 이런 식의 기원, 기원을 따지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원이 없다고 말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철학과 맞지 않는다. 신의 관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창조론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 나온다는 말을 마치 시간적으로 어떤 큰 강의 원류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피노자의 의도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다. 그렇다면 따라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을 소쉬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구조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는 뭔가 책을 써서 유명한 게 아니라 강의록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인데(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제외하면 생전에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습관마저 지니고 있었다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강의노트를 모아서 책으로 냈다. 소쉬르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부각된 것이 <일반 언어학 강의>인데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하려고 했던 작업을 두고 보통 사람들이 처음으로 구조 언어학을 만들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이 구조언어학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기호학이다. 그러니까 소쉬르는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

 

<일반언어학 강의>를 보면 소쉬르가 언어학/기호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데 가장 장해가 되는 것으로 꼽았던 것이 언어의 목록주의적 관점이다. 언어를 마치 목록처럼 사고하는 것. 그 목록이라는 것은 사물들에 대한 명칭의 목록. 언어를 마치 사물들을 지칭하는 목록들의 집합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록주의다. 왜 목록주의가 근본적인 장해물일까.

 

언어가 목록의 집합이라고 했을 때 거기 깔려있는 생각은 언어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기호, 명칭이라는 것이다. 언어를 이렇게 기호나 명칭으로 본다는 것에는 또 무슨 생각이 깔려있냐면 언어보다 사물이 앞선다’, ‘언어 이전에 사물이 미리 있다라는 것.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원래 있는 거 맞지 않나? 원래 미리 있잖아? 대상의 질서가 인식 주관의 질서에 따른다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전환인데, 예전에 칸트에 대한 학위논문 심사를 할 때 교수들이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아니 근데 밖에 이미 진짜 있잖아? 주관 이전에 실제 세계에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근데 맞다. 실제로 있다ㅋㅋㅋ 언어 이전에 사물이 있다.

 

소쉬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언어 이전에 사물이 먼저 있고, 언어라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인간이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서 이것은 산이라고 부르자, 이것은 달이라고 부르자 라고, 사물의 질서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목록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언어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든 도구, 기술일 뿐인데, 그런 도구에 학문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소쉬르가 자율적 학문으로 언어학을 구성하려고 할 때 이 목록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의 주장은- 언어 이전에는 질서가 없었다. 카오스였다. 언어 이전에는 산, 바다, 달로 구별해서 지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가 사물의 질서를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야 언어학이 비로소 학문이 된다. 왜냐면 이것을 통해 세계의 질서, 사물의 질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 기호는 하나의 이름에 하나의 대상을 연결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기호를 결합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시니피앙과 시그니피에로 구별했다. 매우 간단한 구별 같지만 굉장히 대단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정리다. 시그니피앙은 청각이미지, 시그니피에는 관념. 내가 나무(시니피앙)“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관념(시니피에). 정리18의 주석에 가면 소쉬르랑 아주 비슷한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기호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사물 같은 것은 없다. 소리와 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관념이 결합하는.

 

더 나아가 소쉬르는 기호라는 것은 하나하나가 따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쉬르의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체계라는 개념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호라는 것은 체계다. 우리가 목록주의적인 관념을 벗어나면 당연히 기호나 언어는 하나하나 성립하는 게 아니다. 다른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구성되는, 변별적 차이가 낳는 것이 언어랑 기호다. 우리가 나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일반 개념으로서의 나무(참나무도 있고 너도밤나무도 있고), 풀하고 구별되는 개념어로서의 나무, 또 동물과 구별되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그 결과 구조언어학에서는 당연히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측면으로 언어를 보게 된다. 공시성synchrony은 같은 시간, 일정 시점에 존재하는 언어의 상태와 구조, 통시성diachrony은 시간에 따른 언어의 흐름. 그러니까 구조언어학에서는 언어의 기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언어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같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아동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서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단어를 하나, 두 개, 세 개 이렇게 순차적으로 배울지, 언어를 형성하는 어떤 규칙이나 체계를 동시에 배울지, 그런 것도 생각해볼만한 것 같다. 어쨌든 구조언어학에 의하면 언어의 기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어는 동시에 생겨날 수밖에 없다. 소쉬르는 이런 공시적인 언어의 집합을 랑그langue’라고 불렀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공시적인 집합.

 

구조언어학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 말하자면 랑그와 비슷해서다.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이 이렇다. 운동과 정지의 법칙 없이는 신체나 물체의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운동과 정치의 법칙에 의해서 물체가 행위를 하고 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념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신의 관념이라는 사고의 틀,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관념이다. 그러니까 따라 나온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최초의 원인에서 무언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관념들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스피노자 철학의 성격에 잘 맞는다.

 

그럼 스피노자는 17세기의 구조주의인가ㅋㅋㅋ 스피노자는 구조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인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만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인, 사유의 역량 등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 이야기가 바로 정리5와 정리7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관념이라는 관념이 성립할 수 있는 틀, 그 틀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작용, 아주 역동적인 인과작용이 존재한다고 봤다. 아무튼 신의 관념이라는 게 17세기 철학의 문법에서는 굉장히 생소해보일 수 있지만 따져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아이디어와 통하는 바가 있다.

정리5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곧 신의 속성들 및 독특한 실재들에 대한 관념은, 관념의 대상들 자체, 다시 말해 지각된 실재들을 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실재로서의 신 자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 관념들이 표상하는 대상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로서의 관념.

- 사유속성.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사유속성을 통해 나타나는 신이 바로 관념들의 원인이다.

 

증명 이는 2부 정리3으로부터 명백하다. 우리는 정리3에서 신은 그가 자신의 관념의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본질 및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념을 내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이나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이는 다른 식으로도 증명된다.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의 양태다(자명한 것처럼).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의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1부 정리10 ”하나의 실체의 각 속성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에 의해) 다른 어떤 신의 속성의 개념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부 공리4에 의해) 그것은 다른 어떤 속성도 아닌 오직 사유 속성의 결과일 뿐이다(관념들끼리의 인과관계는 사유 속성 안에서). 따라서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는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 ”[사유 이외의] 다른 속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단지 사유하는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인정한다.“/ 사유속성의 실재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 : 1부에서 봤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과관계라는 것은 같은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끼리만 가능하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은 관념끼리, a속성은 a속성끼리 인과관계가 있다. 속성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즉 신체는 정신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정신은 신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형상적 존재로 고려된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신

다른 관념들을 생산해내는 관념들 (= 신의 속성 안의 관념들)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의 어휘를 쓰지 않았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훨씬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어휘를 쓰지 않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논쟁의 목적, 논쟁의 효력을 생각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어휘를 같이 써야 논쟁이 될 테니까.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만들지 않은 사람이다. 물론 무한양태, 직접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이런 말들은 다른 철학자들은 쓰지 않았던 어휘니까 하나도 안 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피노자가 쓰는 대부분의 개념들은 다 다른 철학자들이 썼던 것들이다. 데카르트라든가 홉스라든가 스콜라 철학이라든가. 그들의 언어들을 가져다 쓰면서 그 의미를 뒤집어 버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가 대체 신을 찬양하기 위해 쓴 건지 헷갈리게 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피노자는 아주 효과적으로, 적수들의 언어로 적수들의 철학적 틀을 흔들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구조주의 철학자들 가운데 스피노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 들뢰즈는 구조주의를 한편으로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 구조주의를 좀 더 다이나믹하게 변형시키고 싶어 했었다. 알튀세르. 그 역시 구조주의의 중요한 문제의식에 동의는 했지만, 구조주의가 너무 형식주의적이고 정태적이니까 만족하지 못했다. 그걸 가지고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을 가져온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에 나중에 라깡의 사위가 되는 자크-알랭 밀레도 그렇다. 자크-알랭 밀레는 라깡의 <세미나>를 비롯한 라깡의 모든 지적 성과를 관리하는 책임자이기도 해서 다른 나라에서 라깡의 책을 번역하는 것을 허락할지 말지도 관리하고, 한국어판 책을 낼 때도 다 직접 감수하고 있다. 그 말은 자신의 제자 아니면 번역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자크알랭 밀레는 알튀세르의 제자였는데 라깡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에서 쫓겨나 오도갈 데 없는 시절에 알튀세르가 라깡을 초빙해서 강의를 하도록 해준다. 이때 라깡이 했던 첫 번째 강의가 그 유명한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개념에 대한. 이 세미나 강의를 할 때 자크알랭 밀레가 단연 눈에 띄었다. 라깡이 다른 데서 강의할 때는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강의를 마친 라깡이 알튀세르에게 편지를 쓴다. , 네 제자 되게 똑똑하다ㅋㅋㅋ 그래서 알튀세르가 라깡에게 자기 제자 몇 명을 붙여주는데 그 중 하나가 자크알랭 밀레였다.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정리6 ”각 속성의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 각 속성의 양태들: 가령 사유 속성의 양태들로서의 관념

- 다른 어떤 속성: 가령 연장 속성

-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가령 관념은 사유속성의 양태를 이루므로, 관념들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의 원인을 갖는다.

 

증명 왜냐하면 각각의 속성은 다른 것들 없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기 때문이다(1부 정리10에 의해). 따라서 각 속성의 양태들은 다른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따라서 (1부 공리4에 의해) 이 양태들은, 신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가 아니라, 이 양태들이 그것의 양태를 이루는 바로 그 속성 아래에서 고려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갖는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가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이는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준 바, 관념들이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 실재들이 그것들 자신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도출되기 때문이다.

 

사유의 양태들이 아닌 실재들의 형상적 존재: 가령 연장속성에 속하는 물체들

 

* ”신이 실재들을 미리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

- 신의 지성은 창조적 지성이 아니라 무한 양태라는 것, 곧 사유속성의 결과라는 것(1부 정리17의 주석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1부 후반부에서 비판 했던 창조적 지성을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제빵사가 미리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구상-> 창조, 이런 식으로 미리 한 구상에 따라 물질들을 구성하는 것이 창조적 지성이다. 이것은 따라 나온다를 기원의 의미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비판하는 것이다.

- 동일한 방식,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가령 사유 속성 안에서 관념들이 생산되는 방식은 연장 속성 안에서 물체들이 생산되는 방식과 동일한 필연성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

 

- 따름정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유속성에서 양태가 따라 나오는 것처럼 동일한 필연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속성에서 다른 양태가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앞에서처럼 기원에서 따라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관념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물질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속성a에 속하는 a들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법칙, 이 모든 게 동일하다. 동일한 인과관계, 동일한 산출의 방식.

-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동일한 인과 법칙에 따라서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산출한다는 것이다.

- 정리5가 사유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정리6은 이것을 모든 것으로 확장했다

 

- 1부 정리17의 주석 중 만약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지성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지성, 곧 만물을 창조하는 것으로서의 지성, 창조적 지성이라는 뜻.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니콜라 말브랑슈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 탐구>

 

- 정리31에서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지점: ”지성이라는 게 산출된 자연이다라는 것. 스피노자는 이미 정리17의 주석에서 지성도 의지도 신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이) 이야기 했다. 신의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상당히 긴 주석에서 이른바 창조적 지성 창조적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 말브랑슈까지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정리31에서 그는 유한한 지성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성까지도 신의 절대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정리17의 주석 강의 노트 일부분: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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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강의들이 그랬지만 22강은 특히 내가 이런 강의를 매주 듣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무척 감사했던, 살다보면 이런 강의들을 만나는 날들이 있구나 세상에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파고들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구나 싶은 생각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꽉 채웠던, 그런 강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강의라 그 어떤 날보다 몰입도가 커서 끝나고 나니 마치 2시간짜리 중요한 PT를 혼자 진행하고 나온 직후의 상태가 되어 홀가분한 마음에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았다. 새벽까지 이날의 수업과 스피노자 이야기만 계속 했던 것 같다.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에 대해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정치학적 의미로 나누어서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그러는 와중에 잠시 뻗어갔던 다른 철학자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번역에 대한 선생님의 조용한 분노ㅋㅋ와 그에 따른 고민도 좋았다.

 

존재론-신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항상 현행적인 힘이지만(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의 인간의 문제가 되므로 인간은 신처럼 항상 능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 대신에 이 포텐샤가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되는 코나투스로 표현되고, 그러면서 포텐샤가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의 문제가 되는 것, 그래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가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쟁점을 갖게 되는 것, 그 쟁점의 핵심이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의 문제이며, 이것이 던져주는 목표가 인간의 수동적인 정서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동성을 얻는 길이라는 것. 이렇게 죽 이어지는 흐름이 참 좋았다. 그 이전까지는 나도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막연하게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텐샤와 포테스타스가 그 원 개념의 코어는 유지한 채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를 얻어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이 두 단어의 세계가 내 안에서 확장되면서 좀 더 살아 움직이는 개념들로 다가왔다.

 

그런데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은 들을 때마다 마치 요즘 시대의 노오~~!” 만능주의 같아서, 이건 또 다른 맥락 내지는 지나치게 1차원적 대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회구조적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덮어버리고 개인의 삶을 수동화 보수화시키는 노오~~!이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를 반비례로 생각하면서 했던 말 중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는 조금 흥미로웠다. 학문적인 흥미는 아니고 그 예로 든 게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 그러니까 수다스러움과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하는 문제여서. 뭐야, 너 비밀 지키기로 해놓고 안 지켰어? 역시 넌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해! 이런 거 중22한 먹물 룸펜 캐릭터의 대사로 꼭 써보고 싶다ㅋㅋㅋ

 

그러면 상대방은 아니,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게 아니라 나의 코나투스의 발현이었을 뿐이었어라고 대답하는 캐릭터여야겠지?ㅋㅋㅋ 지난 강의에서 선생님도 이야기하셨지만 이런 부분들이 정말 프로이트나 행동심리학의 이론들과 비슷한 것 같다. 그냥 부주의해서 한 실수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비밀을 발설해버린 것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한 말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리고 대개 그 무의식은 욕망과 바로 이어져있다. 저 위의 상황, 수다스러움이나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대입해서 데카르트와 비교해보니 스피노자의 해석이, 가상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고 꼬집은 것이,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허상을 지적한 것이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인 지금도 아직도 한 인간의 행동을 두고 데카르트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도 친구와 결국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의 욕망과도 관계를 맺는 것과 같고, 그 욕망과 어떻게 지내는지가 결국 관계를 결정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욕망을 빼놓고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정치학적 의미를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을의 민주주의>의 어떤 부분들도 겹쳐서 생각났고, 시에예스의 pouvoir constituantpouvoir constitué를 거쳐 벤야민을 거쳐 네그리, 우리의 네그리ㅋㅋㅋ 그래도 네그리의 포테스타스 노선과 포텐샤 노선을 나눠 근대사회까지 관통하려드는 패기어린 담론도 흥미로웠다(이런 사람은 절대 정치가가 되면 안 될 것 같다....).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선생님의 예로 드신 민족 해방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뤘지만, 제국주의를 물리쳤더니 독재를 맞이하고 내전에 휘말려 더 큰 비극을 겪는 나라들도 그렇고(제국주의에서 독재로 빠지게 되는 맥락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새삼 너무나 씁쓸했다) 한국 현대사도 그렇고 당장 페미니즘 운동부터가 그렇고 개개인들의 개인사만 살펴봐도 포텐샤가 포테스타스가 되었을 때 단지 제헌적‘ ’제정적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도 포테스타스가 되는 경우들, 너무 많으니까.

 

그나저나 역능같은 너무나 기괴한 말로 한 분야에서 이어져오는 말의 계보를 흐뜨려버리는 거, 내가 학계 사람이었으면 진짜 질색했을 것 같다. 예전에 석사논문 쓸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외국 원서보다 한국 학자들의 박사논문이 읽는 게 훨씬 어려웠다는 점이다. 물론 공부를 시작한 게 외국이었다보니 전문 용어나 전문 개념들을 애초에 영어로 익혀놨기 때문에 번역된 용어나 개념들이 눈에 익지 않아서도 있었겠지만 너무나 생경하고 대체 왜 이렇게 번역했지?? 싶은 용어들이 너무 많았다. 언어의 계보가 그렇게까지는 상관없는 그쪽 분야도 그랬을 진데, 철학 같은 학문은 번역 하나가 좌우하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 같다. 특히 한국의 학계 규모에서는 더욱. 그래서 가끔 선생님이 단어 하나를 두고 고민을 하시거나 이건 왜 이렇게 번역을 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 설명해주실 때 좀 좋다. 저 단어를 최근 몇 년 갑자기 보신 것도 아닐 텐데 아직까지, 최소 몇 년 길게는 십 몇 년 이상의 두께를 가졌을 고민을 내비치실 때 반성도 좀 하게 된다. 한 땀 한 땀을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기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기울 옷이 없더라도 어쩐지 내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역량이라는 번역에 대해 강의록 마지막에 덧붙이신 글이 무척 좋았다. 역량이라는 단어에 이런 세계가 숨어있는지 몰랐다. 너무나 당연한 듯 가져다 써온 역량이라는 단어에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해온, 심지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까지 양적인 세계 안으로 들여놓기 위해 노력해온 철학자들의 뜻에 대한 존중과 리스펙트도 함께 담겨있는 거였다. 학자로서의 당연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거 좀 멋지다고 생각한다. 대문자P와 아포스트로피에 달라붙어있는 고민 같은 것.

 

<<<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완전성의 정도또는 포텐샤의 차이”(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날의 잊지 못할 피날레. 정리4의 미스테리. 최근 몇 년간 머리를 풀가동해서 풀어봤던 수수께끼 중 가장 근사한 수수께끼 아니었을까. 평범해 보이는 정리4의 저 한 문장을, 단어들의 배치를 살짝살짝 바꿔가며, 정체를 감추고 조용히 숨어있던 대명사 하나하나를 파헤쳐 수면 위로 올려놓아가며, 미스테리한 문제적 문구로 조금씩 만들어나가던 선생님의 추리를 따라가며 약간의 서스펜스마저 느꼈다.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나의 안일한 생각: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1부에 나왔던 정리들과 슐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비교 대조해보니 검은색 물감이 묻은 두꺼운 붓으로 도화지를 슥슥 그은 자리마다 흰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밑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이상한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신의 관념의 자리에 한 쌍으로 볼 수 있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까지 따져볼 때는 브라보! 외치고 싶었다ㅋㅋ

 

이렇게 평범해보이던 문장이 의문투성이의 수수께기가 됐는데 그 실마리를 찾아오는 곳이 <에티카>의 다른 정리나 주석도 아니고 하필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초기저작인 <소론>의 한 페이지라는 점도 너무 극적이지 않아? 무슨 고문서에서 실마리를 찾아 암호해독하는 것도 아니고ㅋㅋ 게다가 그 열쇠가 표상적으로였다니 진짜 좀 감동받았다.

 

저 문장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서 그 답까지 찾아가는 이 과정 전체와 그 답이, 철학을 잘 모르고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해봤다 싶은 경험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이런 게 철학의 매력인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수수께끼의 답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가, 내가 처음에 했던 안일한 생각인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와 언뜻 보면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ㅋㅋㅋㅋ 하지만 이제 알지, 저 두 문장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형이상학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 정말 아름다웠다 정리4의 미스테리.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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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에 산업혁명기 영국에서 태어나 직물공장에서 반평생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쏟아져들어온 기계들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바람에 기계에 천추의 한을 품고 러다이트 운동 단체에 가입해 밤마다 복면을 쓰고 엄청나게 기계들을 때려부수고 다니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은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생에서 이렇게 삼십몇평생 기계들과 지독히 사이가 나쁠리 없어! 고장난 기계, 복잡한 기계, 복잡한 주제에 고장난 기계, 새로운 기계, 새롭고 복잡한 기계 다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엉엉. 오늘도 기계랑 두시간동안 씨름하다가 완전 패닉. 다들 4차 산업혁명을 논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아직도 1차 산업혁명의 업도 해결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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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사회과학에서 이 포텐시아를 가져다가 역능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냥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말인데, affection정동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한국의 사화과학자들은 신조어 만드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가 수입될 때 흔히 그렇듯이 포텐샤라는 스피노자 철학 개념의 번역어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이 두 가지 번역어가 서로 경쟁하듯 사용되고 있다. ”역능“”이라는 단어는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사용을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이 점에 대해 곧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번역어를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렇게 신조어로서의 역능을 남용할 경우의 문제는, ‘말의 계보의 측면에서의 혼돈이다. 스피노자만 포텐시아를 쓴 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이 단어를 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고, 니체의 Wille zur Macht를 불어로 쓰면 volonté de puissance, 여기서 ”puissance“가 바로 불어로 포텐시아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포텐시아에서 가져간 개념이다.

 

*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번역 문제에 부딪혔을 영어권의 예를 보자. potentia는 불어로 puissance 이탈리아어로 potentia, potestas는 불어로 pouvoir 이탈리아어로 potere, 이렇게 유럽어들은 라틴어의 개념을 살릴 수 있는 언어지만, 영어 같은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power라는 단어 한가지 밖에 없다.

 

Edwin Curley<The collective words of Spinoza>(1985) 1권에는 <에티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편지들이 실려 있다. 작년에 2권이 나왔다. 1권과 2권 사이에 30년이 걸린 것인데... 2권에는 <신학정치론>, <정치론>, 편지들, 스피노자가 쓰는 히브리어 문법 등이 들어있다. 아마 이 두 권을 다 번역하는 데에는 50년 가까이 걸리지 않을까... 그런데 컬리는 1권에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power“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이 번역에 대해 유럽철학자들은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power면 충분하다.’라고 뒤에 덧붙였다. 그런데 <신학정치론><정치론>이 없었던 1권과 달리, 2권에서 이것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학술대회에서 [troublesome term]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언급했다.

 

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제목부터 이미 잘못 번역했다. 이 책은 네그리가 당시 스피노자의 철학은 서양 근대 철학계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별종 같은 철학이다, 정해진 틀로 설명이 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savage라는 말을 붙인, 그러니까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야생의가 훨씬 적합한 번역인데 이걸 야만적이라고 번역해버렸다. 네그리의 철학에서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네그리는 <포테스타스: 지배권력, 맑스 입장에서 보면 부르주아 권력 / 포텐시아: 다중, 민중, 민중의 해방된 힘>으로 해석한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서양철학 전체가

 

*** 포테스타스 노선: 부르주아 자본가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철학

-> “제국을 정당화하는 사상이 되는.

대표적인 사람들: 홉스, 루소, 헤겔

*** 포텐시아 노선: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하고 변혁하려는 철학 > 다중 노선

대표적인 사람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맑스

 

이렇게 두 개로 분리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네그리 사상 전체를 뒷받침하는 핵심개념이 포테스타스, 포텐시아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네그리의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Michael Heart도 아마 이 단어를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아마 한국의 학자들이였다면 신조어를 막 만들어냈을 텐데, 유럽이나 미국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하트는 고민 끝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어떻게 구분하냐면 포텐시아의 power를 대문자 Power로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럼 컬리는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컬리는 apostrophe 아포스트로피를 붙인다. 포테스타스에 아포스트로피를 붙여 power’라고 표현.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저것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말 하나 그냥 만들어내면 되지, 신조어 하나 만들어서 영어를 풍부하게 만들면 되지, 이렇게 생각할 듯...ㅋㅋ 

 

아무튼 포텐시아라는 말에는 네그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해서 굉장히 긴 역사가 있는데 저걸 이상한 신조어로 다 번역해버리면 같은 포텐시아가 다른 말의 갈래로 나뉘면서 말의 계보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이게 오래된 용어라는 것도 모르고 스피노자만 쓰는 단어라고 착각하기도 쉬워진다. “말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스피노자는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데카르트 철학이나 스콜라 철학에서 쓰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새로운 의미의 말로 바꾸어낸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 potentia과 권능/권한/권력 potestas>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타나낸다.

 

* 포텐샤

 

1)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 실행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 신이 역량을 갖고 있는데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기존의 역량을 되풀이 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럼 신이 퇴보하거나 적어도 정체되어 있다는 말 아닌가. 신에게는 잠재태가 없으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 정확히 말하면 신에게는 새로운 것이라는 게 없다. 1부 정리16에서 봤듯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데, 그 무한하게 따라 나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파악할 수가 없다. 신에게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잠재태가 있었다는 말인데 VS 신에게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미 다 했으니까 잠재태가 없다는 것인데,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스피노자가 보는 신의 능력이다.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나온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세계 모든 우주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신에게서 나왔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니까,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가 있는 곳에서 사니까 시공간을 따지는데 신은 그런 걸 따질 수 없다. 스피노자가 상정하는 신의 차원에서는 논리적 가능성과 시공간의 한계 사이에 아무런 괴리도 생겨나지 않는다.

 

2)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

 

만물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학 1부가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포테스타스

 

- 초월자(이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에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

- 스피노자는 이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런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1부 정리33 주석2

- 신의 포텐시아를 자유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신의 임포텐시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므로(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는 주인공이 신이었다면),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기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포텐샤는 코나투스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욕구 또는 욕망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2의 주석과 5부 서문에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또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는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러니까 정신이 능동이면 신체도 능동, 정신이 수동이면 신체도 수동으로 같이 비례해서 간다는 것.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그들은 신체의 힘이 너무 커지면 정신이 압도된다고 생각했다. 의지력 같은 정신이 커져서 신체를 통제한다는 개념으로 이해 <- 반비례 관계. 데카르트가 특히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니까 누가 너무 수다스럽거나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것이다. 정신이 신체를 통제 못하는 상태.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로 지껄이고 있다고 믿는 것.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고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또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는 점을 인식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어떻게 수동성을 줄이고 능동성을 높일 것인가, 윤리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정신과 신체의 역량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능동화시킬 것인가. 스피노자의 중요한 화두

 

3. 정치학적 의미

 

앞에서와 달리 정치학의 영역에서 두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 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시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도로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32.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법과 제도가 없이는 역량이 제도화되거나 공동의 정치권력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처럼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그가 저술한 <야생의 별종- 바루흐 스피노자에서 권력과 역량에 대한 고찰>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걸작 중 한권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처음으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다중 multitudo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해명했으며(‘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룰 것이다),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 책에서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을 스피노자 철학,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삼는다. 네그리는 한편으로 권력의 노선, 곧 홉스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노선과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노선, 곧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다중의 역량의 노선을 대립시킨다. 네그리에 의하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대중의 자유로운 생산력과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사이의 또는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의 근대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은 다중의 역량의 존재론과 정치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네그리 해석의 문제점은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관계, 또는 다중의 역량 대 지배 권력- 또는 구성/제헌 권력(constituent power) 대 구성된 권력(constituted power)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외재적 대립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에 낯선 관점일 뿐만 아니라 제도 바깥의 대중운동과 제도적인 정치영역 사이의 갈등적/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적절치 못한 관점이다.

 

*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pouvoir constituant VS pouvoir constitué

 

그러니까 구성/제헌 권력 대 구성된 권력. 이게 바로 정치학적인 의미에서 콘티스타스의 용법이다. 스피노자가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는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했는데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가 바로 숨마 포테스타스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다중의 역량 대중들의 역량 power of multitude(multitudo)

 

pouvoir constituant

pouvoir constitué

 

이것은 현대법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인데,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신부인 시에예스 Emmanuel Sieyes17892,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의 해에 발표한 [3신분이란 무엇일까]라는 논문에서 도입한 구별이다. 100쪽 남짓 되는 얇은 책인데, 여기서 시에예스 신부는 제3신분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신부가 이 책을 딱히 혁명적인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 혁명의 아버지가 된다ㅋㅋ 여기서 도입한 굉장히 중요한 구별이 바로 저 두 가지.

 

영어나 불어에서 constitution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구성이라는 뜻과 법학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는 뜻,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constituant은 제일 일반적인 뜻으로 이야기하면 구성하는 권력, 구성하는 힘이지만 이 단어에는 헌법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이중의 의미가 다 들어가서 헌법을 구성하는 힘,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제헌권력.

 

시에예스가 여기에 쌍으로 쓰는 것이 pouvoir constitué이다. 이건 과거분사형으로 썼는데 영어로 하면 constituded power. 그러니까 이미 헌법이 제정되고 난 다음에 헌법에 따라 실행되는 힘, 권력이라는 의미다. 구성된 헌법적인 힘.

 

이를테면 촛불 시위에서 표현되는 것이 말하자면 pouvoir constituant. 기존체계를 무너뜨리고 무언가를 설립하고 제정하는 그런 힘. 반면에 이렇게 해서 새 정권이 들어서고 개헌을 해서 새로운 헌정질서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게 바로 pouvoir constitué. 새롭게 국가가 수립되면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힘.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은 촛불집회 정신에 입각했다라며 촛불집회의 의미를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다라고 했는데, 사실 헌법 12항에 보면 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그렇다면 문재인이 말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연 국민’, 헌법 12항에서 말하는 국민constituant로서의 국민일까 constitué 일까.

 

법학적인 의미에서 보면 후자다. 제정된 헌법에 입각한, 거기에 기초를 둔 권력. constituant는 아주 이상한 개념이다. 이것은 헌법에 표현될 수 없는 권력이다. 정의상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그래서 헌법으로 포괄이 안 되는 힘. 그러니까 헌법 입장에서 보면 유령 같은 힘이다. 헌법을 가능하게 한 힘이지만 헌법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저걸 표현하는 순간 헌법은 자기의 외부, 자기의 바깥을 자기 안으로 들여와야 하니까. constituant 해당하는 것이 혁명같은 것이지만 헌법이 그것 자체를 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결성인데, 완결적이고 내재적이어야 하는데 법이 저것을 담게 되면 자기의 완결성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 된다.

 

스피노자의 포텐시아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대중들의 역량, 다중의 역량이라는 게 바로 constituant.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다중의 포텐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루소식으로 말하면 인민, 일반의지, 인민주권 같은 것이다. People's sovereignty. 여기서 “people”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 말이다. constituant의 주체일 수도 있지만 constitué의 주체일 수도 있는.

 

아무튼 네그리는 이 포텐시아를 민중의 해방적인 힘이라고 부르고 포테스타스를 지배권력이라고 했는데 스피노자의 용법과는 다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스피노자의 구별법은 오히려 세이예스의 구별법이랑 비슷하다.

 

시에예스의 구별법을 가져다가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초기 논문에서 법 정초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이라고 변형해서 쓴다. 이때 폭력이라는 단어는 gewalt. 게발트는 한국어의 폭력보다는 뜻이 더 많다. 이 게발트는 스피노자식으로 하면 포테스타스이기도 하고, 교회가 갖고 있는 영적인 권능이라고 할 때도 게발트를 쓰고 법적인 권한을 말 할 때도 게발트라고 쓴다. 물론 벤야민의 저 구별법이 시에예스의 구별법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법 정초적 폭력

법 보존적 폭력

 

벤야민 논문을 보면 이 구별은 벤야민의 여러 구별 중에 그냥 한 가지 구별이다. 사실은 벤야민은 글의 뒷부분에 가서 신화적 폭력/ 신적인 폭력을 다시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목표로 하고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정의를 목표로 한다. 이런 구별을 염두에 두면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법 정초적 폭력 중에서도 신화적 폭력을 제외한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 순수하게 정의로운 힘, 그것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ㅋㅋㅋ 하여간 이것은 뭔가 새로운 권력, 새로운 법질서를 구현하려고 하기보다는 오로지 정의를 추구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벤야민에게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어떤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어떤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나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많은 신생국들이 생겨났다, 민족의 해방운동을 통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그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법 정초적 폭력이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힘. 여기서 비극인 것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이 민족해방운동, 독립투쟁의 영웅들이 새로운 나라를 구성한 뒤에는 대개 독재자로 변모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래서 신생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독립국가들이 독재국가로 변질되거나 아주 오랫동안 내전을 경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나라가 알제리. 알제리가 프랑스에게서 반 식민투쟁을 해서 힘겹게 독립을 했는데 독립하자마자 20년 넘게 내전에 들어가서 독립투쟁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만 봐도 법 정초적인 폭력이 해방적이거나 긍정적인 힘이다, 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런 걸 너무 무시한다. 포텐시아, 그것을 그 자체로 해방적인 힘이라고 이야기 해버리기 때문에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변증법이 들어갈 여지가 네그리 철학에서는 많지 않다.

 

* 다시 번역에 대하여-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완전성의 정도또는 포텐샤의 차이”(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 2부 정리3과 정리4는 스피노자 철학의 용법대로 하면 무한양태에 관한 이야기다. 특히 사유속성에 속하는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가 편지에서는 무한 지성이라고 썼는데 에티카 정리4에서는 신의 관념“ idea Dei 이데아데이 idea of God이라고 썼다. 이것도 번역할 때 조심해야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갖는) 신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의 관념을 말한다.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 첫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의 증명을 보자. 사유속성 내의 신의 관념을 예로 들어보자 <- 여기서 벌써 사유속성 안에 있는 신의 관념을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다.

- 문제의 그 슐러의 편지. 슐러에게 보내는 스피노자의 답이 스피노자 입으로 직접적 무한양태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답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불확실하다. 무한양태에 이것만 있다고 말하는 건지, 무한양태에 다른 어떤 사례들이 더 있는데 이것만 예로 들어 이야기한 건지 여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 스피노자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는 말을 쓰는 경우인 1부 정리16을 다시 보자.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것들,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그 밖의 속성a 속성b 속성c... 등등에 속하는 것들이 다 들어간다(모든 속성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절대적 본성에서부터 따라 나온다“)

- , ”무한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신의 본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무한하게 많은 것들에는 사유속성, 연장속성,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a b c 속성들도 다 들어가고, 이것들이 다 신의 절대적인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래야 신의 역량이 절대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신 자체인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데, 정리4에서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의 관념만이 문제가 된다는 것.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 어떻게 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로부터 어떻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 다시 말해서 1부 정리16에서 벌써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무한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 abc... 등등. 그러니까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 지성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신의 관념은 사유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것이다. 이것은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데, 어떻게 한 속성 안에 속하는 이 양태 안에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들 많이 아니라 연장속성에 속하는 것들, 속성 a,b,c... 등등에 속하는 것들까지 다 여기 이렇게 들어온다, 따라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 그렇다면 우리가 사유속성에 속하는 신의 관념이라는 직접적 무한양태 대신에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운동과 정지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벌써 관념들이 연장속성에 속하는 이 물체들이 따라 나오는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지 않나. 그러니까 운동과 정지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물체들만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유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신의 관념으로부터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온다. 1부 정리16에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이미 했고 정리4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속성은 아닌데 사유속성만 대체 왜? 왜 신의 관념에 대해서만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왜 사유속성만 이런 특권을 누리는가? 다른 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데 왜 신의 관념만.

 

* 두 번째 이상한 점

 

- 1부 정리2123에서 알게 된 것은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신의 관념이 무한양태니까 무한한 것이 따라 나올 것이고, 신의 관념이 양태니까 무한하게 많은 속성일 수는 없고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따라 나올 것이다. 무한양태. 그런데 지금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무한양태는 무한하게 많다고. 그냥 무한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이것도 이상하다.

- 슐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딱 세 가지만 예로 들고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신의 관념, 운동과 정지, 우주 전체 이렇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두고 스피노자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데,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이런 논의의 전제는 무한양태가 딱 네 개있다, 세 개 아니면 네 개 있다인데ㅋㅋㅋ 그런데 지금 정리4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마치 무한양태가 3, 4개가 아니라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무한하게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사유속성, 연장속성, 속성a, b, c... 등등의 속성이 있고, 거기에도 각각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무한하게 많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스피노자는 그냥 무한하게 많다고 하지 않고,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다고 하니까 그것은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에도 스피노자가 사례로 들지 않은 무한양태의 종류가 더 있다, 그것도 몇 종류 더 있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많이 더 있다, 이런 말인데, 아니 그게 대체 뭐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 실마리 <소론>

  

스피노자가 초기저작에서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소론>.

소론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록을 보면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 또는 신은 1), 그에 대하여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말해지고, 그 자체로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포함하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2), 이 모든 것 3)에 대하여 사유 속성 안에서 무한한 관념 4), 곧 자연 전체를 존재하는 그대로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하는 관념이 산출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1) 에티카에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하는데 소론에서는 자연 또는 신

2) 여기서도 신은 하나라고 말하며 신을 정의한다.

3) 이 모든 것 :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

4) 이 무한한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 여기서대로 하면 신의 관념

 

- 신의 관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다. 이 모든 것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과 창조된 실재들의 모든 본질을 다 포괄한다. 여기서 주목할 말, 2부 정리4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론에는 나오는 말 표상적으로“ 1부에서 여러 번 봤던 표상, objectiva. 그러니까 우리가 1부 정리16에서 무한지성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 이 들어온다는 말이 소론에서는 표상적으로 그 자체 안에 포함된다로 표현되어있다. 그러니까 무한지성 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표상적으로 들어온다라는 이야기다, 이 표현법대로 하면. 소론의 그 다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때문에 나는 또한 이 관념을 1)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피조물 2)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표상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단지 하나만 존재하는데,4) 속성들의 모든 본질 및 이러한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이 단 하나의 무한한 존재의 본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5)

 

1) 무한한 신의 관념을

2) <소론>에서는 아직 창조“ ”피조물이라는 창조론의 용어를 쓰는 흔적이 남아있다. <에티카>에서는 따라 나온다“, 편지만 봐도 산출된이라고 말하는데. 아무튼 저 창조적 피조물이 가리키는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라는 말이다.

3) 다음 시간에도 보겠지만 2부 정리7과 그 이후부터 형상적, 표상적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용어다. 여기서도 말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 안에 모든 실체들의 형상적 본질을 누락이나 추가 없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의 관념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포함하냐면 표상적으로포함한다.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 포함한다-> 관념으로 포함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념으로서 포함한다.

4) 즉 신의 관념은 하나만 존재하는데

5) 왜냐면 그것은 속성들의 모든 본질들이 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표상적으로 포함하는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이런 이야기다.

 

2부 정리4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신의 관념은 단 하나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2부 정리4<소론>과 달라진 점이 뭐냐면 표상적으로라는 말의 여부다.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라고 표상적으로를 넣으면 소론의 이야기하고 거의 똑같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관념으로서 따라 나오는. 이렇게. 그러니까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 신의 관념이 모든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포함한다

- 무한하게 많은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라고 할 때는 그건 형상적으로 따라나온다기 보다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사실 정리4 이하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바로 형상적, 표상적의 용어의 의미와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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