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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에서 미리 봤을 때부터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무척 좋았다. 3부 서문에 나오는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인간과 사물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는 것,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단호함과 함께 무척 좋았다. 그래서 시몽동의 책을 샀다. 스피노자 수업 들으면서 읽고 싶은 많은 책들이 생겼지만 이렇게 덜컥 산 책은 처음인데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는 그의 생각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다. 정말 파격적이잖아. 인간과 사물을 동급으로 놓는 생각은 스피노자가 아니더라도 그 이후 여러 철학이나 문학에서 접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과 기술에 차이가 없다니. 인간과 기술이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계열에 속한다니 이 파격적인 주장을 어떤 논리들로 전개해나가고 논증해갈지 정말 궁금하다. 현재의 얄팍한 연상으로는 AI가 당장에 떠오르는데 어쨌든 매력적인 주장이다.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인간과 다른 자연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3[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나는 정서들의 본성과 역량, 그리고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내가 앞의 1, 2부에서 신과 정신을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개체들-이거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인간과 다른 개체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단지 정도 차이라는 것.

 

- 질베르 시몽동 Gilbert Simondon.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가 이번에 한국에 나왔는데, 그는 매우 독창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철학자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아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정작 스피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ㅋㅋㅋ 스피노자에 대한 아주 전통적인 평가인 범신론자라는 점을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것인데 하지만 생각은 스피노자와 매우 비슷하다. 처음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논문이 나왔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지만, 들뢰즈가 발굴해서 서문도 쓰고 <천개의 고원>에서 인용도 하고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논문이 프랑스어 말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지금까지 기술철학의 기조는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시몽동은 인간과 기술은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과 기술은 결코 존재와 도구의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80년대까지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8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고 현재 영미철학계에서 굉장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도 곧 번역이 되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스피노자 철학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2. 스피노자가 내린 실망의 정의를 보고 절대 미리 예습하지 않겠다는 나만의 원칙을 깨고 3부 부록을 미리 공부할 뻔했다. ’양심에 흠집을 내다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내 멋대로 해석해놓고 혼자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았던 이유는 내가 내 자신에게 가장 실망을 느끼는 순간은 내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순간, 눈앞의 나의 욕망과 양심에서부터 자라났을 나의 신념이 충돌할 때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는/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심에 구멍을 내다가 아니라 흠집을 낸다는 것이 마음에 깊게 다가왔다. 보통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거나 죄책감을 짊어질 에너지가 없어서 양심을 확 거스르거나 양심에 직격탄을 맞추는 일은 또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아예 눈 딱 감고 양심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에 실망이 희석되는, 매우 아이러니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감정이 변한다. 이런 직격탄을 맞췄던 경우의 99프로는 나의 시간을 확보하고자할 때였으므로 합리화할 근거마저 충분했다. 항상 시간이 너무 모자라니까, 그런 것에 비해 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으니까, 늘 충실했으니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정도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등등.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주체적으로‘ ’고민 끝에양심을 외면했다는 (가짜) 성취감이 실망을 희석하는 것이다. 왜 가끔씩 전혀 안 그러던 사람이 어쩌다 양심에서 완전히 일탈해서 팜므파탈처럼 구는 스스로에게 해방감을 느끼는 것, 주변에서나 소설에서 종종 보잖아. 하지만 흠집을 낼 때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냥 나는 하찮고 같잖은 이유로 양심에 흠집을 낸, 그러니까 양심을 외면하겠다는 원대한마음조차 없이 양심을 온전히 지켜내고 싶었는데 결국 몇 프로의 양심을 팔아치워 타협한 하찮고 같잖은 사람일 뿐이다. 그때 내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과 실망은 내 영혼에도 흠집을 내는 치명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흠집은 구멍보다 쉽게 날 수 있기에 때로는 더 치명적이지. 아무튼 그래서 스피노자가 실망이라는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좋았다. 나처럼 이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양심과 실망 사이를 니체와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인데 결국 비슷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같아도 어떤 순간에는 방향의 흐름이 본질을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까.

 

- 스피노자는 사실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있다. 신조어라기보다 단어들을 가지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3부 부록에서 실망이라는 정의. conscientiae morsus. consicientiae는 양심, morsus라는 말은 흠집내다, 물어뜯다 같은 뜻이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conscientiae morsus는 희망했던 것보다 더 나쁘게 일어난 과거의 것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실망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쓰는데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concientiae라는 말과 morsus라는 말을 합쳐서 쓴 것은 스피노자가 처음이다. 니체는 이 용어를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번역한다. 사실 이것이 원래 단어의 뜻에는 더 부합한다. 도덕률 도덕법칙 도덕적인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했을 때 내면적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자책하는 것을 두고 니체가 스피노자의 용어를 가져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쓰는 것. 스피노자의 용법과 니체가 가져다 쓴 용법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스피노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단어를 만들어낸 건 아니고 기존의 단어를 새롭게 결합해서 새로운 뜻으로 만든 것.

 

3. 시몽동의 책을 덜컥 사버린 것과 비슷한 크기로 아니 어쩌면 더 크게 조나단 이스라엘의 급진적 계몽이 너무 궁금하고 읽고 싶어서 아는 몇 명을 통해 번역진행상황을 수소문했는데 현재로서는 그 어디서도 이 책을 낼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존에 들러 주문할까말까 한참 고민했는데 원서까지 손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이럴 때마다 늘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로또를 맞아서 정말 공부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가까스로 참았다. <세 명의 사기꾼>은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굳이 사서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익명은 너무 귀여우면서 명확하잖아ㅋㅋ 90년대 후반 인디밴드 이름 같고 막ㅋㅋ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스피노자주의 또는 반스피노자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기에 가장 포괄적이고 제일 좋은 책은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The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이다. 200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서평만 해도 수백편이 나올 정도로 서양학계에서 엄청나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세운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계몽주의는 반쪽의 계몽주의였다는 것. 조나단 이스라엘의 표현을 빌면, moderated enlightenment.

 

그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온건한 계몽주의, 절충적인 계몽주의를 계몽주의의 본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moderated enlightenment의 기저에는 훨씬 radical enlightenment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훨씬 더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중심에는 스피노자가 있었다. 스피노자 철학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의 기원에 있었으며 동력을 제공해준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영국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반발을 불러일으켰는지의 과정을 따라간 것. 이 책은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계몽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그동안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1677년에 사망한 이후에 스피노자의 책이나 글이 어떻게 수용됐고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서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많이 나오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의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 조나단 이스라엘의 책이다. 이게 번역된다는 이야기를 7-8년전부터 들었는데 아직 안 됐다. 900페이지의 상당이 두꺼운 책인데 어렵지 않고 소설 읽듯이 역사책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세 명의 사기꾼> 18세기 유럽의 스피노자주의 문헌을 대표하는 책 중에 하나다. 저자 이름이 스피노자의 정신이다ㅋㅋ 17세기, 18세기 검열이 아주 심했던 시기에 저자 이름 없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게 내는 문헌들을 지하간행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중 하나며, 제일 유명한 문헌 중 하나기도 하다. 여기서 세 명의 사기꾼은 누굴까?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사기꾼은 아니지ㅋㅋ 바로 예수, 마호메트, 모세. 성경에서 나온 3개의 종교 창시자를 사기꾼이라고 칭한다. 아주 급진적인 종교비판론이다.

 

4. 첫 번째 갸웃함) 스피노자에게 선/, 좋고/싫음은 애초에 인간 중심적으로 자의적 개념인 건데 유용하다-무용하다라는 나눔도 역시 그런 것 아닌가? 유용-무용의 기준은 누가 어디에 잡는 거지? 두 번째 갸웃함) ‘유용하다는 개념을 십분 받아들여서 생각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단순한 작용만 하는 생물체보다 유용하겠지만, 여러 가지 작용을 하는 만큼 다방면으로 유해하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해함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서의 유용함의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은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용하다고 해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함은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위와 크기에 따라,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변용하고 변용되는방식의 다양함과 크기로 따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까 아이보다 어른이 더 우월한 것처럼 권총보다 원자폭탄이 더 우월한 것처럼. 그렇다면 더욱더 유용이라는 개념에 대해 갸웃하게 된다.

 

이와는 별개로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 것이 정말 좋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 나는 요즘 특히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내가 보기에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생각을 가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피곤한 논쟁을 해야 하거나 서로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암묵적 괄호를 쳐놓고 그 주변부만 겉도는 대화를 해야 하는 사람을 내 일상에서 도려내기 보다는 나에게 부정적 작용을 하더라도 계속 대화하고 계속 의견을 주고받고 계속 불편해지면서 일상의 한 부분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아서 가끔씩 고민하게 된다.

 

사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굳이 왜 에너지 흡혈요소를 일상에 붙여놓고 가야하는지 회의를 깊이 가졌던 사람인데 생각이 바뀐 이유는 그 몇 년 간 그런 사람을 일상에서 도려내온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결국 아집과 퇴행인 여러 사례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의 자신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평온하고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하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 있는 사람, 공감해주는 사람들만 딱 모아놓고 그들끼리 같은 의견을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와는 다른의견은 다 틀린것으로 확정짓거나 그저 타자화시켜버리는 세계는 평온할 수밖에 없다. 그 세계 안에서 나는 대부분 옳고 모두가 나의 의견을 지지해주고 공감해주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이상하고 빻은사람들이니까. 얼마나 명료하고 명쾌하고 평온하고 따뜻해. 분명 그 안에서 여러 고민을 하겠지만 그 고민의 답조차 주변에서 결국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환경이니까 자신이 진짜로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고 착각조차 하기 쉬운 완벽한 세계다. 나 역시 그런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커다란 유혹을 느낀다. 그런데 그러니까 한때 총명하고 조금 앞서 나가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다 그 안의 세계 속에서 아집의 크기를 불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집에 먹이를 주고 결국 퇴행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나니 조금 무섭다. 적어도 내가 다다르고 싶은 세계는 저 세계보다는 훨씬 흐릿하고 고민할 것도 많고 불명료하고 불편하고 피곤하더라도 수용의 가능성이 보다 훨씬 열려있는 세계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게 너무 피곤해져서 아 몰라 그냥 나도 클린한 세계를 만들고 살래라는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좀 아집이 커지고 퇴행 좀 하면 어때!)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혔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공부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그 공부를 자신의 아집을 공고히하는 사료로 쓰면서 다른’, 내 눈에는 빻아보이는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나와 다른 의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험을 자기 안에서 지성적인 방식으로 녹여가는 사람들은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는 틀을 키워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반지성의 세계 속에서 평온함을 찾고자 결정한다면 나는 공부할 필요가 없고 아니 공부하는 게 오히려 더 유해할 텐데(나의 반지성적 세계를 공고히 하는 말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테니까) 그렇게 살고 싶은가? 근데 너무 피곤해!!!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스피노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 2부 정리29가 나의 마음을 조금 다잡아줬다. 내가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여타의 책을 읽고 공부라고 할 만한 것들을 하는 어떤 이유와 목표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하는 능력. 내 정신이 조금 덜 늙을 수 있는, 안 좋은 방식으로 덜 공고해질 수 있는 중요한 능력.

 

1)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한 물체가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물체들보다 우월할수록, 그 물체의 정신은 (여기에 상응해서 여기에 비례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의해 다른 정신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겠다

 

- 능력에 의한 논변 :

물체/신체 : 동시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그 능력.

작용하다” agere -> actio 악치오, ago 수용하다 pati > passio 파시오 patior

물체/신체의 정신: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지각할 수 있는 그 능력

 

, 한 가지로 작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 아주 단순한 순환작용만 하는 생물체와 인간을 비교했을 때 여러 가지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인간 쪽이 더 유용한 것처럼. 신체의 열등과 우월도 여기서 갈린다. 아기<어른.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작용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이 수용한다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물체의 우월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그 물체/신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거기에 상응해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 어떤 물체가 외부의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신체의 정신적 능력의 발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부 정리29에서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5.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다, 라는 이야기를 스피노자가 여기서 다시 확고하게 하고 있다. 보조정리1이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겠으나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했는데(그러니까 보조정리1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멋대로의 생각을 하게 했는데) 철학자마다 실체의 범위가 다르듯이 이 실체를 일반인들에게 적용해본다면,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실체에 가까운 것, 즉 철학자들에게 실체가 갖는 위상을 갖고 있는 어떤 대상, , 그러니까 각자가 최상급의 포지션에 놓고 신처럼 믿고 있는 각자들의 신,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신념이라고 봤을 때 나 자신을 포함, 모두가 이 보조정리1이 주는 교훈을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너무나 많은 양태로서의 사람들이 각자가 하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그러니까 행동으로서 구별된다는 것을 잊고, 내가 믿고 있는 실체 자체가 나 자신이라고 믿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으니까, 나는 신과 이런 sincere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나는 민주주의를 믿으니까, 나는 철학을 믿으니까, 나는 별점을 믿으니까, 나는 정의를 믿으니까, 나는 예술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실체와 맺고 있는 어떤 추상적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우월이 갈리고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실체와 너와의 긴밀한 관계 말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는 말 말고, 직접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데? 라는 질문에 행동으로 하는 답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어떤 운동과 정지, 어떤 빠름과 느림을 행동으로 펼치고 있는지가 양태를 구별하는 것이지 어떤 실체와의 추상적 관계성만으로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믿음은 착각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의 훌륭함이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믿음이 당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 스피노자는 이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을 생물학적으로만 정의하는 게 아니라 매우 느슨하고 탄력적으로 적용하는데 운동과 정지가 (아주 사소할지라도) 어떤 실질적 행동과 정신적 태도로 나와야 비로소 구별점이 생긴다는 것. 이게 보조정리1이 나에게 다시 한 번 상기해준 교훈.

 

보조정리1 물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지, 실체의 관계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 물체들은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것

 

6. 인간의 믿음이 튀는 방향은 예측이 너무 어려워서 그 믿음의 농도와 비율을 보지 않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튀어있는 자국만 보고 그 믿음의 주인의 합리성과 이성을 판단하는 것 또한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에 접근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심지어 창조적 발견까지 해냈지만 그 결과로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과, 누군가의 논리에 기대어 과학과 이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하니까 이게 사실이겠지) 산출된 이성적인 결과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 중 누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인가. 전자인가? 과학에 대한 굳건한 최종믿음을 지켜낸 후자인가?

 

마이자의 <암호해독자>를 읽으면서도 한 생각이지만 이성과 과학의 영역과 감성과 비과학적이면서 초월적인 영역 사이의 문은 생각보다도 너무 얇아서 나 같은 범인들은 짐작도 못할 압도적인 과학과 수식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스르륵 그 문을 열고 그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따지면 전 세계 1프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과 혼란을 준다.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이 세계의 과학적 정교함에 압도당해서 본인이 논리와 이성과 과학으로 증명해내고 밝혀낸 결과를 놓고 초월적 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뉴턴에게는 그게 결국 제일 과학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창조과학의 아버지가 결국 가닿은 초월적 영역은 <암호해독자>의 룽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는데, 정말 흥미로운 지점이다. 들뢰즈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그 영역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들을 굳건하고 두꺼운 문으로 단호히 차단하고, 뉴턴에 앞서 이미 이런 목적론 미신과 그 미신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짐작해서 비판했던 스피노자는 선생님 말대로 정말 대단히 급진적인 사람이다. 스피노자의 급진성에 놀라는 게 한두번은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의 급진성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

 

- 2) 운동이 무한히 시작된다. 기원도 끝도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상당히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후 뉴턴이 <프린키피아>10년 후에 출판했고 생전에 3판까지 냈는데, 마지막 3판을 내면서 일반 주석이라고 해서 자신이 증명한 것에 보충설명을 붙인다. 그 주석에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핵심은 이렇다. 천체, 행성들의 체계를 봐라. 이 행성들의 관계와 이 행성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고 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조화롭게 아주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데, 그런 만큼 이 체계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자연적으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매우 현명한 설계자가 있었고, 그 설계자가 이걸 설계한 게 분명하다. (신을 의미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격적인 신과는 약간 다른 신이겠지만 어쨌든) 우주의 질서를 최초로 설계한 설계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스피노자를 비난한다. 스피노자처럼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만 가지고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창조과학의 뿌리인 뉴턴이시다ㅋㅋ

 

사실 스피노자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했다. 1부 부록에서. 목적론 미신에 대한 비판에서. ”그들이 인간 신체의 구조를 보고 놀라 얼이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이처럼 대단한 기예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신체구조는 어떤 역학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 또는 초자연적인 기예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의 진짜 원인을 찾으려 하고, 바보처럼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놀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전념하는 사람들은 도처에서 불경한 이단으로 간주되며 우중이 자연과 신의 해석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 이 인간 신체가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데 이게 어떻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누군가 초자연적인 기술자가 인간신체를 처음부터 설계한 게 분명하다고 말할 거라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들뢰즈 같은 경우도 뉴턴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ㅋㅋ


7.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이 점까지 자연학소론에 기술하다니 이 세심한 스피노자! 평소에 나는 이것을 ”oo의 지문이 **의 영혼에 찍히면서 만들어지는 변화라고 표현하는데 oo의 지문이 변용하는 것의 본성, **의 영혼이 변용되는 것의 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변화에 대해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식인데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스피노자식으로 찝어준 걸 보고 반가움

 

공리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물체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들의 차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며, 역으로 다른 물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체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 1부에서 변용 개념을 자주 봤었다. 양태와 비슷한 개념. 1부 정의5. 그런데 2부에서 변용이라는 개념의 다른 용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공리에서 쓰인 변용1부에서 이야기하는 양태로서의 변용이 아니라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정지해있던 물체가 외부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 동쪽으로 향해 가던 것이 충돌해서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 이런 것을 말한다. 2부에서 신체/물체와 관계해서 이 변용 개념이 상당히 자주 쓰인다.

- 변용하는 것과 변용되는 것의 본성이 동시에 반영된다는 것. 2부 정리16, 정리17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리이다.

 

8. 개체에 대한 매우 느슨하면서 매력적인 정의. 6번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데 개채성, 내재성, 본성, 본래적 본질로 개체를 정의하지 않고 개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그것들로도 제시하지 않고 철저히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입각해서 정의하는 점. 놀랍도록 담백하면서 어떤 점에서 매우 차가운 정의다. 이 정의의 틀이 나중에 코나투스라는 내적인 역량을 어떻게 모순 없이 잘 담아내는지 지켜볼 것도 흥미롭다 (아직까지 나는 개채성에 대한 이중적 기준의 문제에 동감하고 이 상반된 관점에서 오는 혼란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가 개체에 대한 정의를 개체가 지닌 어떤 본래적인 본질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이것 역시 하나의 복합물체이며, 개체들이다)의 본성에 의해서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연합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본성에 외재적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입각하여 연합체의 본성을 정의한다. 따라서 이 연합체의 본성은 이러한 외재적 관계의 결과인 셈이다.

- ,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개체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게 갖춰지면 개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개체들이 연합해 있을 때’. 그렇다면 연합은 무엇인가?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 하는 것.

 

- 개체에 대한 아주 느슨한 정의다. 그러다보니 이게 개체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단순물체에 내재성, 내면성이 없듯이 여기서 개체라고 정의된 복합물체도 마찬가지로 내재성, 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은 외부 물체들의 압력이다. 압력에 의해 서로 의지하게 되고, 연합하게 되고,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것. 일정한 운동을 전달하며(= 운동과 정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며) 개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본성이라는 말이 없다. 내면적인 본성이 없는 개체기 때문에.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의 주석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정신: 신체의 관념- 신체: 정신의 대상이라고 정의했고, 그게 합일(연합)을 이루는 게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거기서 스피노자의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도 다르고 데카르트와도 다르다. 스피노자의 개체에는 형상, 질료는 나오지 않거니와 내면성도 없다. 매우 담백하다.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라고 정의내릴 뿐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정의는 물체에만 해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좀 멀리 가볼까? 4부 정리3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다른 관계[비율]을 갖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4부 정리39의 주석 한 부분 나는 5부에서 이것들이 정신에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는지 설명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상이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비율, ratio)을 갖도록 배치될 때 신체가 죽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의 신체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그 신체가 살아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피의 순환 및 다른 것들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테면 호흡 같은) 그 자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근거도 나로 하여금 신체는 오직 시체로 변화되었을 경우에만 죽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더라도 신체가 사실상 사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경우들이 있다). 더욱이 경험 자체는 그와 다른 것이 옳다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때로는 사람은 과연 그가 동일한 그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변화를 겪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어떤 스페인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은 뒤에 비록 회복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썼던 우화들 및 비극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 삶을 망각해버렸으며, 그가 자신의 모국어까지 망각했다면, 사람들이 그를 얼마든지 성인 어린애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면, 우리가 어린애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은 어린애들의 본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사례]로부터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추측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이 예전에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납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다른 비율을 가지면 심한 경우 죽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어려서부터 어린애와 노인은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형,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의 변형,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2부 정리13과 자연학소론에서 개체를 정의할 때 어떤 내면성, 영원 같은 확고하고 불변적인 정체성에 따라 개체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단지 물체들의 차원에서만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기능이 곧 정지되어야만 신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좁은 의미의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 기준 말고도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다른 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계=비율은 단지 생물학적 관계만이 아니라 훨씬 느슨하고 탄력적인 관계다. 그런 면에서 개체에 대한 이 정의는 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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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6강은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은 보물찾기 같은 시간이었다. 5부 정리2122와 연결해서 2부 정리8과 따름정리에 묻어있는 플라톤의 표식을 찾아내었지만, 바로 플라톤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라이프니츠를 다시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특한 실재가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찾기고 마음먹고 그래서 손에 쥐게 된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 속에서 마침내 형상적 본질의 의미를 찾아낸, 복잡하지만 근사하게 짜여진 보물찾기였다. 선생님을 비롯한 과거의 여러 탐사대들이 지도를 읽어내는 대로 그저 따라갔을 뿐이지만. 플라톤주의로 가버리거나 보물찾기를 주최한 스피노자의 일관성을 의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도를 붙잡고 아주 작은 것들까지 실마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다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며 스피노자 철학에 잘 맞는 길을 낸 누군가들의 학자적인 집념과 태도에 대해 걷는 내내 깊이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본질에 대해 분명하게 두 가지로 나눈 것처럼 보이는 흔적들을 앞에 두고 두 개념이 사실은 하나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2부 정리4를 가지고 평범해 보이는 문장 뒤에 숨겨진 물음표들을 끄집어 올리셨듯이, 1부 정리8 주석2의 한 대목, “이 때문에 우리는 실존하지 않는 변양들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지성 바깥에서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의 본질은 다른 것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에서 이미 답이 자명해 보여 그냥 자기가 할 소임을 다하고 제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 같던 다른 것이 사실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일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하셨을 때 미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2부 정리4때도 느낀 거지만 난 이런 방식으로 평범한 문장이 실마리로 바뀌는 논증의 과정에 약간 열광하는 것 같다(“이 다른 것이 실체, 또는 물체의 경우라면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자명한 만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거의 없으니까, 우리는 약간 더 구체화시켜 명시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 되게 좋았다).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같은 다른 것’.

 

그리고 이미 먹어버린 아이스크림(멋진 예시였다!)과 함께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이, 그렇게 틀림없이 다르게 보였던 두 개의 본질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 순간 정말 마음속으로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본질 개념이 다른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 그리고 지금은 현행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적합한 관념에 따라 언제든지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형상적 본질이 갖고 있는 의미가 내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한, 현행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내가 찾은 보물이었다. 명백해 보이는 플라톤주의로 가지 않은 탐사대들의 노력의 흔적을 따라 풀숲을 헤치고 스피노자적인 길을 찾았던 이날의 여정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2. 조금 다른 길이지만 이런 식의 길도 좋았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2부 정리8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되어/파악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뜻하려는 것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괄/파악되어 있는 이 관념들에 상응하는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참된 또는 적합한 관념, 곧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형상적 본질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이 신의 지성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형상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존재이며,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형상적 본질

- 또한 스피노자가 2부 정리8의 증명에서 언급하는 앞의 정리는 사실 정리7의 따름정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2부 정리7의 따름정리가 말하는 것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에 상응하는 형상적 본질이 신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

-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6의 따름정리, 2부 정리8,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형상적 본질= 현실적 실재표상적 존재= 관념구별이다. 실재= 관념의 관계. 렇다면 스피노자가 형상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3. 그동안 <에티카>에서 여러 번 봐왔던 스피노자의 플라톤주의 비판의 토대 위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부록으로 덧붙여진 <형이상학적 사유> 12장을 읽으니 플라톤주의와 스피노자 철학의 거리가 매우 명료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플라톤적인 이데아, 영원진리를 가리킨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나니 1부 정리17의 주석과 연결되어 그동안의 스피노자의 비판들이 머릿속 서랍 하나에 깔끔히 정리되는 느낌(저런 집약적인 한 문장을 만나게 되면 수사법적으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형상적 본질은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창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실재가 현행적으로 실존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데, 모든 실재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들의 본질들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한다

- ”그 자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창조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는, 17세기 철학에서 영원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창조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지속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형상적 본질은이 양자와 다르다고 주장. 왜냐하면 형상적 본질은 신적 본질에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티카> 1부 정리25에 보면 신적 본질에만 의존한다는 뜻에 대해 스피노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다.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본질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원인과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이 생산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실존뿐만 아니라 본질까지도 신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4. 피에르 벨이 스피노자를 두고 한 말, 텍스트로 하는 피에르 벨의 스피노자 성대모사ㅋㅋ를 듣고 크게 웃었다. 나도 가끔 봉이에게 말장난처럼 스피노자적 용어를 끌어다가 장난치기도 하고이를테면 어제도 퇴근하고 나니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오늘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가 양태로서 소멸할 것만 같아라고 했더니 너는 나의 실체니까 본질적으로 실존을 포함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고 답을 했다ㅋㅋ- 넌센스 퀴즈처럼 문제를 내기도 하는데-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가 무슨 뜻인 줄 알아?“ ”뭔데?“ ”인간 정신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게 뭐야!(동공지진ㅋㅋ)“- 위대한 학자가 위대한 비평서에서 저 비슷한 방식으로 스피노자에 대해 비평했다니 어쩐지 반갑고ㅋㅋ 이유가 있는 스피노자의 저런 화법에 이제 익숙해졌는데 스피노자와 주디스 버틀러가 대화하는 거 너무 보고 싶다. 정말 외계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보는 느낌일 것 같아ㅋㅋ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5. 하지만 스피노자의 화법은 난해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시적이기도 하다. 사실 난해해 보이는 저런 표현도 가만가만 따져보면 매우 시적이다(그러니까 스피노자의 난해한 표현과 시적 표현은 두 개의 다른 개념처럼 보이지만 한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ㅋㅋㅋ). 이런 표현 좀 봐. 인간은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진 하나의 양태일 뿐이라는 말을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하다니 너무 좋잖아ㅠㅠㅠ 1부 공리1와 정리10을 연결해서 깔끔하게 나온 답은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 게다가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점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출발점이라는 것도 너무 좋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6. 사람들의 경험과 지각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어떤 상황에 대해, 사물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짐작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팩트인지 정확하게 구별해보는 것이 그나마 오류를 가장 줄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구별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편견이 반영된 짐작으로 만들어진 허구위에 허구들이 쌓이면서 최초의 허구에 나의 주관적 심상에 불과한 짐작과 객관적 사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섞여있는지를 찾아보기 점점 힘들어지고, 그러다보면 그것을 팩트로 믿게 되고(“내 판단이 틀릴리는 없어”), 그 허구들이 어떤 사고의 틀로 굳어져버리면서 틀로 찍어낸 듯한 판단들만 계속하게 되어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것,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믿으면 동요할 게 분명한 것들 앞에서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알기에, 가끔 매우 괴로워하면서도(싫은 걸 떠올리다못해 면밀히 들여다봐야하니까) 노트에 짐작과 팩트를 나누어서 정리를 해보곤 하는데, 그러다보면 내 두뇌와 마음이 그 대상을 나쁜 쪽으로,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쪽으로 판단하려고 얼마나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미 내 마음속에 호불호가 생겨버린 것에 대해 그 호불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굳이 노력을 들이고 괴로움을 무릅쓰고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계속 멋대로 흘러가버릴 게 분명하다. 많은 경우에 판단에 대해 짐작과 팩트로 엄정하게 나누어서 쓴 다음, 짐작- 내 생각에 아무리 예리하게 들어맞는 짐작인 것 같더라도!-을 다 날려버리고 팩트만 남기고 나면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많잖아? 같은 반문이 생겨나면서 판단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불필요한 감정들이 다 사라진다. 단언할 수 없고 단언해서는 안 되는 감정들.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감정에 맞춰 감각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다보면 이성의 일부분이 마비되며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게 되는데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신인동형론이나 별자리 같은 점성학 같은 것들 다 이렇게 체계화되고 일부분 과학의 형식까지 흉내내며 자리잡았을 테지.

 

그냥 정리10의 주석에서 자신의 (부분적이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대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들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허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반성이 되어서. 사고의 순서를 그렇게 거꾸로 해놓으면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며, 자기모순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인 존재다라는 말을 그러니까 나의 모순도 사랑하고 안고 가야지라고 너무 쉽게 자기위안으로 삼지 않고 왜 모순적인가를 계속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사고의 순서를 조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에티카>의 형식이 철학함의 순서그 자체라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다시 울렸다. 내용과 별개로 기하학이라는 이 책의 방식과 신에서 출발하는 이 책의 순서, 그러니까 형식에서부터 이미 우리가 나아가야할 바를 명확하고 단호하게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 신에서 출발해서 실체와 속성을 지나 양태가 나오고 2부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게에 주는 메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바뀌어가고 있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

 

과학적 지식의 누적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과 별개라는 점을 짚어주신 것도 좋았다. 양자역학자 중에도 기독교 신자 있고 천문학자 중에도 별점 믿는 사람 있으니까ㅋㅋㅋ 과학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한 인간의 미신에 대한 신뢰에는 요만큼의 균열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몸이 이것을 믿고 싶다‘ ’이것이 좋다‘ ’이것이 위안이 되고 편하다같은 감정에 맞춰 조율되어 있다 보면 이성도 감정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만 모으고 모아서 감정에게 갖다 바치며 최선을 다해 복무하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이 누적이 된다고 한들 감정에 조율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지식들은 한쪽에 정보로서 힘없이 쌓여있을 뿐 모순의 괴리를 좁히는 데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테니까.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7.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enterndre 할 수는 있지만 comrehendre 할 수는 없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8.아 ... 이 정리가 영혼불멸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구나... 아름답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8.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와 바슐라르의 책이 매우 읽고 싶어졌다. 번역 괜찮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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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설명을 통해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가 기원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아니라, 관념이라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틀이라는 의미가 더 명확히 다가왔다. 재미있는 설명이었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 신이 원인이지 대상은 원인이 아니다.“ : 대상이 우리를 자극해서 관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눈앞의 컵을 인식한다. 컵이라는 물체/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컵이라는 대상이 여기 있으니까. 컵이라는 대상이 촉발돼서 내가 이것을 지각한 것. 그렇다면 컵이라는 대상이 원인이 될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컵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

 

스피노자의 따라 나온다는 말은 신의 관념이 기원이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든가 시원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관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틀이라는 이야기다. 신의 관념으로 인해 모든 관념이 가능하다. 신의 관념을 통해 모든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의 관념 없이는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인식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2. 알튀세르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강의 첫 시간부터 거칠게 말하자면 시치미를 뚝 떼고 약간 의뭉스럽게 을 가져다 쓰는 스피노자의 방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피노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에티카 1부를 하나하나 따라가다가 어떤 정리나 문장들은 차후에 신학자들에게 먹일 한 방을 위한 밑밥들처럼 느껴져서, 참으로 밑밥도 촘촘히 깔아놓으시네 진짜 못 당하겠다 싶어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에티카> 초반부는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정밀하고 신랄하면서도 우아한 블랙코메디 아닐까. 더글러스 애덤스의 근대 철학자 버전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 덕에 혹은 그 탓에 유난히 스피노자는 오해를 많이 받는 철학자인 것 같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 스피노자를 교조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신을 초월적 영역에 놓고 생각하는 범신론자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몇 년 전에 A”B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다라고 한 걸 듣고 사람들이 B가 의외로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했었던 것도 생각나고. 지금도 얼핏얼핏 스피노자에 대해 묻거나 찾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가 신을 찬양하고 신 안에서 은총과 평안을 얻어 지구 종말의 그 날에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온건한 사람 정도의 느낌으로 알고 있다.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과격(?)했던 사람인데.

 

나도 스피노자를 오랫동안 오해했었다. 내가 읽었던 책들에 언뜻언뜻 나오는 스피노자 인용구들을 보면 그는 너무나 구조주의자고 너무나 유물론자로 보였던 것. 이 오랜 오해가 풀린 건 주디스 버틀러 세미나에서였다. 그 세미나가 아니었으면 스피노자 <에티카>를 강독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고 나는 평생 그가 구조주의자 아니면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에티카 1부 강의 중반까지도 나는 그런 틀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서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적을 내파하는 것. 사실 메갈에서 썼던 미러링이 일종의 이런 방식인 건데 그 판의 성격과 미러링 하는 대상의 성격과 수준 때문에 메갈의 미러링은 혐오발언 문제와 겹치며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었지만(여기에 대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발언>에 대체로 동의한다. 물론 언어의 상처에 저항하는 언어들은 상처를 재실행하지 않고서 그 상처를 되풀이해야 한다.“라는 게 현실적으로, 특히 물리적 위협과 연결되었을 때 어디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스피노자식으로 마무리해서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ㅋㅋ),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은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것 같다. 어쨌거나 10년 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 페미니즘 이슈를 보이는 것으로 리부트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굉장한 위력이었던 것. 미러링 그 이후-(”그 이후에 이미 찍어야할 마침표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에 대해 더욱 같이 고민해야겠지만.

 

아무튼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언어로 적을 해체하는 스피노자 멋있어. ”너희가 말하는 그런 신 따위 없어!“라는 외침을 이렇게 길고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쓰고 있는 걸 본다는 것.

 

* 스피노자는 왜 자연법칙이라고 쓰지 않고 이라고 썼을까.

 

스피노자가 기독교신학적인 용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게릴라 전술이다라고 말했다ㅋㅋㅋ 적진에 들어가서 적으로 단장하고 적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다. 만약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법칙’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어휘를 갖고 이야기했으면, 스피노자 적수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쟤하고 나는 어차피 노선이 다르니까, 쟤는 아예 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니까 각자 갈길 가자. 그런데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신이 무한하시고, 신이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신에 의지하고, 마치 교조적인 독실한 신자인 것처럼, 아주 철저한 신학적인 어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신학하고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게릴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적의 진지 속에 들어가서 파괴하는.

 

3. 자크알랭 밀레가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개념에 적용했고, 저 적용이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는지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여의치 않다. 언젠가 만약 내가 구조주의를 공부하게 된다면 그때 풀 숙제로 남겨 두기로.

 

자크알랭 밀레는 60년대에 이런 개념을 쓴다. 구조의 작용/ 구조의 행위. 구조화하는 작용/ 구조화되는 작용. 스피노자의 철학의 용어법,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을 가지고 와서 구조주의의 핵심개념인 구조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가 들어가면서 가령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구조 개념이라든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구조 개념이 굉장히 다이나믹해진다. 60년대에 이런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전에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60년대-70년대 프랑스 철학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원천을 준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4. 그 유명한 2부 정리7을 들어가는 날, 강의 시작 전에 어쩐지 폭풍전야같은 고요한 긴장이 내 마음에서 느껴졌다ㅋㅋ 자세히 파고들자면 한 달은 다뤄야할 정리7에서 기본적으로 꼭 알고 넘어갈 것만 뽑아서 설명해주신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매우 명료하게 다가왔고 그 이전 정리들에서 구름 사이로 보듯이막연하게 보였던 어떤 의문들도 같이 또렷해졌다. 들뢰즈의 3중 평행성을 찾아 읽은 게 이해를 돕는 데에 한 몫 했다. 무엇보다 정리7이 좀 더 깊게 다가왔던 것은 선생님의 이 표현 때문이었는데, 내가 언젠가의 스피노자 일기에도 썼었던, 무한하게 많은 속성 가운데 두 개의 속성이면 표본이 너무 작지 않은가라는 의문.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이었는데 이날 마침 선생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7이다라고 했을 때 정리7이 좀 굉장하게 느껴졌다. 저 정리7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입장의 상당부분을 결정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결정적 모멘트 같은. 그 이전에도 여러 논쟁적이고 당대 및 후대 철학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던 마치 스피노자의 선언 같은 정리들이 있었는데도 나에게는 정리7이 그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커다란 세계를 결정짓는 최종 결제 도장 같은.

 

들뢰즈의 3중의 평행성

1) 양태들의 평행성 (관념과 그 대상(가령 물체)의 평행성) <- 이것이 평행한 이유는 2)

2) 속성들의 동등성/상동성 (사유속성, 연장속성...) <- 이것이 동등/상동하는 이유는 3)

3) 존재의 동일성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5. 정리7의 주석을 보면서 스피노자가 <정신교정론>에서 했던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 같이 생각났다. 수업을 듣기 전인 과거의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싶다.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모순이게 아니게? 분명 모순이지!“라고 대답했을 것이다ㅋㅋ

 

어떤 히브리인들이 신과 신의 지성 및 신이 인식한 실재들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구름 사이로 보듯이 보았던 게 바로 이 점인 듯하다.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causarum connexionem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6.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세 가지 모델을 통한 설명과, 거기에 페히너가 덧붙인 네 번째 모델, 스피노자의 방식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페히너의 방식을 두고 수업시간에 다른 분들이 억지 같다고 했지만, 선생님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아마도 떨어져있는에 방점이 찍히는)가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지만, 그래도 페히너의 의도가 매우 명료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비유를 최대한 살려주고 싶어서 잠깐 생각 해봤는데. 그럼 하나의 커다란 몸체에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 같은 매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몸체에 달려있는 태엽과 초침을 움직이는 힘이 양쪽에 매달려있는 두 개의 시계에 동시에 작용하니까 같은 질서와 연관으로 움직이게 되는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을까? 이 시계라면 두 개의 다른 시계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같은 시계이기도 한, 두 개의 시계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하나의 시계라고(가게에서 저런 모양의 시계를 산다고 했을 때 분명 저거 하나주세요라고 말할 테니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역시 억지고 무리일까?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해서 서로 독립적인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라이프니츠가 1695년에 짧은 글을 하나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실체들 사이의 소통에 관한 새로운 체계>. 정신이라는 실체, 신체라는 실체 사이에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일치가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을 두고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거기에 반해서 라이프니츠가 몇 차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해명을 쓰는데, 그 중 하나의 해명이 동일한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동일한 두 개의 시계는 평행성에 대한 비유다. 하나의 시계는 관념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다른 시계는 사물의 질서에 속해있는 시계. 이 시계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킨다는 것은 상응한다는 이야기.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이 있다.

 

1)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동하여 작용하게 만드는 방식. (데카르트주의)

하나의 시계가 작동하면 다른 시계도 따라서 작동하도록 연결을 만들어놓은 시계

2) 두 개의 좋지 못한 시계가 서로 항상 일치하게 만드는 길은, 능력 있는 시계공이 두 시계를 조정해서 그들이 매 순간마다 서로 일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 이것은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한 것이다. 17세기의 프랑스의 사제이며, 포스트 데카르트주의자라고 불리는.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노선은 조금 다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occasionalism 기회원인론. 기회라는 말을 썼냐면, 예를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하면 그에게는 내가 손을 드는 것이 하나의 occasional, 내가 손을 들 때,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 자신이 원인이 돼서 손을 든 것도 아니고, 나로 하여금 신이 손을 들게 하도록 원인으로서 작용을 미친 것이다, 라는 의미다. 어떤 기회에 어떤 작용이나 사건, 어떤 행위가 일어나면 그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신이라는 것이 기회원인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구조주의 같은 느낌. 이 두 번째 방식은 기회원인론적 방식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두 개의 별로 좋지 못한, 자꾸 느려지거나 해서 오차가 나는 시계는 방향이 안 맞을게 분명한데, 이 두 시계의 방향이 계속 일치하도록 아주 능력이 뛰어난 시계장인이 매 순간마다 두 시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 때 신이 나를 통해 작용하듯이 시계에도 매번 시계공이 작용해서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 엄청 바쁘겠죠ㅋㅋㅋ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3) 두 시계를 처음부터 대단한 기술과 정교함으로 제작하여 그것들이 이후에 서로 일치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방식.

- 이게 라이프니츠 자신이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정조합.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서 알아서 둘이 일치하게 만드는 것.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설명에 제일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했을까?

 

19세기 후반 독일의 아주 유명한 학자 게오르그 페히너 georg fechner, psychophysics라는 학문을 만든 사람이다. 심리물리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한 사람.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뇌과학? 신경생리학? 같은 것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람이다. 프로이트 초기저작에서 페히너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지를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심리물리학. 그냥 psychology도 아니고 physics도 아니고 psychophysics 학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ㅋㅋㅋ 이 결합된 이름 자체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일치하는, 이것을 통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parallelism을 가지고 온다. 평행성, 평행론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심리물리학에 저것의 기본원리들을 채택했다. 심리적인 사건과 신체적인 사건이 일치하는 이유, 그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페히너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이 두 개의 시계의 세 가지 모델을 이렇게 언급한다.

 

라이프니츠는 세 개의 방식만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방식들 이외에 네 번째 방식이 있다. 그 네 번째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페히너의 답은 두 개의 시계가 사실은 하나다“ ”두 개의 동떨어진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같은 시계다“, 그러니 당연히 시계가 일치한다. 이게 스피노자의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히너의 취지는 이해가능 하지만, 사실 이게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스피노자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신체의 관계,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 관계를 두 개의 떨어져있는 시계라는 모델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의 틀로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가 여기에 스피노자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도 뭔가 스피노자의 철학, 2부 정리7이나 3부 정리2에 나오는 설명이 자기 모델에 맞지 않고 부적절해서였을 수도 있다.

 

7.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8. 나에게는 에티카 질문노트가 있다. 수업을 듣다가 질문이 생기면 적어두는 노트인데 바로바로 질문하지 않고 노트에 적는 이유는 나중에 가면 그 답이 나오겠지 싶어서다. 이미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어서 현재까지 나의 질문노트에 적혔던 23개의 질문 중에서 11개가 지워지고 12개 남아있다. 이번에 지웠던 열한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들에 비해 우월한 속성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의에서 그 답을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스피노자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담긴 답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답을 듣는 순간 너무나 납득했고 조금 감동했다. “어차피 무한한데.” 아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근사한 답 아닌가. 어차피 무한한데 무한한 것에 400을 곱하나 10000000을 곱하나 무슨 상관이야, 진짜. 스피노자에게는 시간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인데. “무한이라는 가늠도 상상도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커다란 세계에서 사유속성이 연장속성보다 더 양이 많네 적네 따지는 것이 정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2가지 색 물감 중에 보라색이 특권을 얻어 다른 색깔 물감보다 600000배의 양으로 물에 풀어진다고 한들 바다 색깔에는 변함없다.

 

*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A속성에서는 a가 따라나오고 B속성에서는 b가 따라나오고 연장속성에서는 물체가 따라나오고, 사유속성에서는 관념이 따라 나오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속성들은 동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생각해 보면, 저기서 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을 테고, a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b에 대한 관념도 있을 테고. 게다가 또 관념 자신에 대한 관념도 또 있을 것이다. 관념1에 대한 관념2, 관념2에 대한 관념3, 관념3에 대한 관념4..... 그리고 저 관념에 대한 관념은 분명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이고, 관념이니까 다 사유속성에 속할 것이다. 게다가 관념1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관념에 대한.... 이런 식으로 나가다보면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보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있으니까 + 게다가 각각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가 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관념에 대한 관념으로 배가가 될 수 있으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이 훨씬 더 커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제기.

 

스피노자는 여기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어차피 무한한데...ㅋㅋㅋㅋ 무한 곱하기 9를 하나, 무한 곱하기 30000을 하나 다 무한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ㅋㅋ 1부 정리15의 주석에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무한 양을 가정한 것에서부터 이런 부조리한 결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누군가 직접 스피노자에게 저 질문을 던진다면 스피노자가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물체에는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만 관념들의 경우에만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무엇에 대한..... 관념의 관념의 관념의.... 이게 생겨나니까, 다른 속성에 비해 사유속성은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 평등 이런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9.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정리로도 유명하고, 스피노자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평행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정리7을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가 정리8로 넘어가면서 조금 마음을 놓았는데, 웬걸. 의외로 정리8이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과 마찬가지인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에티카에서 만났던 어떤 것들 중에서도 가장 생경하고 낯설었다. 형상적 실재성-표상적 실재성의 개념도 이렇게까지는 낯설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이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걸 말한다고? 살면서 이런 류의 개체를 상상한 적이 없어서 낯선 걸까?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과장적인 비유로서 일상에서 들어본 적은 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숨만 쉬는 사람“ ”밥만 축내는 사람“ ”잠만 자는 기계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렇게 한 가지 특성만 갖고 있는,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이기만 한 것은 아닌(부분적인 진실이 있는) 존재에 대해 이렇게 유형화를 하고, 거기에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게 SF소설이 아니라 철학책, 그것도 스피노자 <에티카>의 정리에 등장을 한다고? 이 사실이 어쩐지 생경하고 어색해서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던 것이다. 재밌어ㅋㅋㅋ

 

따름정리도 재미있었다. 저 정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키포인트인 글자는 인 것 같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실존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경험할 수도 없고 실존하는 개체로서 우리가 표상할 수도 없는 실재들이니까 오직 신의 무한지성 안에존재한다는 의미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나 관념들은 신의 무한지성이 실존하는 한에서실존할 수 있고, 그것들을 유일하게 파악/포함하고 있는 신의 지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들도 사라진다.

 

이어서 나오는 신의 속성 안에서 파악되고+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에 속하는 실재들은 정리8과는 다르게 시공간적인 개체성을 갖는, 아직 실존하지 않고 그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피노자의 우주가 무한한 우주라는 것을 배워왔지만 정리8과 정리9는 정말 뭔가 우주적이고 SF소설 같은 느낌이잖아? 하지만 나에게 아직 주석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면 주석에서 예로 든 원 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선 이외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과 직사각형들은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가 아니라 정리9의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원 안의 선이나 직사각형은 시공간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그림 속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 내가 저 원 안에 당장 선 하나만 그어도 생겨날 수 있는, 어떤 개체 형태를 갖고 있는지 우리가 분명 알고 있는 것들로서의 실재 아닌가? 주석에서 이런 커다란 의문이 남은 채로 일단 강의가 끝났는데 다음 강의에서 정리8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으니 기다려봐야겠다.

 

정리8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의 형상적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continentur)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 또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파악되어(comprehendi) 있어야 한다.“

증명 이 정리는 앞의 정리로부터 명백하지만 앞의 주석으로부터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독특한 실재들이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동안에는, 그 실재들의 표상적 존재 또는 관념들은 신의 무한한 관념이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그리고 독특한 실재들이, 단지 신의 속성 안에 파악되어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또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도 실존하는 경우, 이 실재들의 관념들 역시 그것들이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실존을 함축한다.

-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에는 뭐가 있을까. 우리는 2부 공리1에서 신/실체는 본질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원인과 다르게 인간은 본질상 실존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 사이의 존재론적 괴리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것들의 특징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들의 사례로 생각되기 쉬운, 이를테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아직 출시되지 않은 아이폰 13 같은 것들은 정리9에 나오는 사례들이다. 정리8의 따름정리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따름정리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고 있다. 1) 신의 속성 안에 포함/파악되어 있는 한에서만(이게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것), 2)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실존하는 것.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시공간적인 어떤 개채성을 갖고 있는 어떤 것이다. 아이폰13이라든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아직 실존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보면 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게 시공간적인 개체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정리8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와는 다른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가령 인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본질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특성들, 웃을 수 있다/직립할 수 있다 같은 득성들을 갖고 있다. 그럼 여기서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란 직립할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앉아있다는 특성만 갖고 있는 소크라테스같은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이것들은 지속을 갖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 없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고 말할 수 있는 특성만 갖고 있는 인간같은 것. 그렇다고 이게 아주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특성으로만 파악된 독특한 실재,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이다.

- 그렇다면 신의 무한한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직립하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웃을 수 있는 성질만 갖고 있는 인간, 이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실존하는 개체로서 개별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오직 무한지성 안에만 있다는 그런 의미다.

- 스피노자가 정리8에서 이런 사례들을 든 이유는 그래야 정리8과 정리9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정리8지속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인 개체라고 상정할 수 있는 어떤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리8과 정리9는 구별되어야 하고, 정리8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존하지 않는 현행적 실재라는 것은 아직 지속의 차원이 들어가지 않은, 구체적인 개체성을 갖지 않는 그런 독특한 실재다.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것.

- 스피노자의 주석을 보면 그림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예시하는 이 원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3권 정리35에 증명의 대상으로 나오는 도형이다.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을 가진 원. 스피노자는 여기서는 이렇게 두 개의 선만 존재하지만 이 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선 또는 직사각형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존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실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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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는 말. 나는 스피노자가 그 장대한(적어도 나에게는 장대하게 느껴졌던) 1부의 마지막을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정리로 마무리 지은 것이 좀 감동적이었다. 이걸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내가 <다뉴브>에서 묘하게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구절, ”나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모든 단역 엑스트라처럼 내게도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토끼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든 것만은 확실하다에서 받았던 슬픈 위안과 뒤따르는 혼란스러운 책임감과도 비슷하다.

 

나는 <다뉴브>의 저 구절을 어제, 416일에도 떠올렸었는데 가끔씩 인간 따위, 혹은 나 따위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실체로서의 나는 양태로서 소멸해도 우주의 작은 진공 하나 만들지 않는존재라는 사실이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줄 때가 있는데- 그게 세상에서의 나일 때나 누군가에게 있어서 나일 때나 어떤 조직에서의 나일 때나 단 한 번도 존재의 미미함에 대해 서운해 본 적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본 적도 없는데- 나는 이런 위안이 매우 비겁한 거라고 생각한다. 존재감에 대한 욕심이나 인정욕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나를 뭔가 굉장히 초연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대하는데, 실상은 존재감의 무게만큼 얻게 되는 책임감이 두려워서일 뿐이다. 내가 무언가의 원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무언가를 산출하고 싶지도 않고 그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어떤 것일수록 아무런 관여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세상의 연극이라는 비유를 끌어올 필요도 없이, 나는 유치원 때부터도 학예회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 어떤 꾀병을 부려서라도 단역 엑스트라를 맡고야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사회 구조를 만들며 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시에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정책결정권자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도 아닌 그냥 소시민이라, 나는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단역 엑스트라이며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이 있다는 것에 너무 괴롭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어떤 책임을 어떻게 지고 어떻게 응답해야하는지, 그 적정선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서 안개 속을 질척질척 헤매는 기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실질적 보탬이 될 수 있는 어떤 굿즈나 책을 사고, 내 주변 타인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혹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피해는 적어도 주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조심하며 사는 것? 투표를 열심히 하고 내 자리에서 공부를 하는 것?

 

가끔은 내가 뭐라고, 나는 그냥 이 세상에 먼지 같은 존재인데 세상의 중심인 것 마냥 어떤 일에 책임감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느냐고, 오만이라고, 너는 단역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 엑스트라 역할로 쉽게 도망치곤 한다. 나 하나 여기서 동선 잠깐 틀려도 연극을 망칠 일은 없으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어? 나 어제보다 율동을 잘 하네? 어제보다 다른 사람들 대사가 잘 들리네? 이런 걸로 혼자 소소하게 재밌어하며 사는 게 나에게는 세상의 연극을 즐기는 최고의 방식이자 행복이고 평안이니까. 하지만 어떤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할 때면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 침대같이 폭신한 유혹적인 위안인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도 가시지 않는 두통처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1부의 막을 내릴 때, 마음 놓고 무대 뒤에서 놀고 있다가 연출감독에게 너희들 중 이 연극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역할을 하나도 없다(그러니 정신차려라)“라는 말을 듣고 뜨끔해진 아이처럼, 어제까지는 별 생각 없이 무대 위에서 까불까불 놀았는데 갑자기 나의 팔 동작, 나의 표정 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진 아이처럼, 마치 이런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일기장을 열고 저 문장을 조심조심 옮겨 적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서 정말 무겁고 무서운 말.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말.  


 

2.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순서로 좌측에서부터 죽 나열을 한다면 초월이라는 것은 당연히 가장 오른쪽에 위치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가장 지상에서 붕 떠있고,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킬 것만 같은데 완전히 허를 찔렸다. 초월이 기본적인 것을 초월해서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초월이었다니, 이거야말로 상상 초월()이다. 아니 보통 초월이라고 하면 땅 위의 하늘을 생각하지 땅 아래 더 깊은 땅을 생각하지는 않잖아. 칸트의 transzendental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강의에서 초월의 뜻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은 나 역시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철학은 꽤 오래전 선험적 원리라고 번역된 버전으로 접한 게 전부라서 처음에 초월론적이라고 들었을 때 선뜻 이어지지가 않았던 것. 그래, 초월론적이라고 이해하니까 훨씬 더 명료하고 명확해진다. 칸트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이 풀림 (그러니까 칸트도 스피노자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을 풀었으면 좋겠.......)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3.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지금의 나로서는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으라는,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자는 칸트의 철학에 반 정도만 공감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저 말에는 공감이 갔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시간과 공간의 자리에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겠다. 칸트가 말하는 감성즉 직관과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은 전혀 다른 것이라지만, 그리고 나는 속성에 대한 객관적 해석론을 주관적 해석론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스피노자와 칸트의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시간과 공간의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임의의형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도 저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4. 명제에 숨어있는 공리,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5. 그렇게 (불구스들을 향해) 차이점을 부르짖었던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가, 스피노자의 철학 안에서 결국은 같은 뜻의 말이 되는 것. 나는 이런 게 너무 멋지다고 생각한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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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예전에 썼던 글과 2부 정리35의 주석의 내용이 너무나 비슷해서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역시 아주 가끔씩 보면 사람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하다. 근대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성적인 철학자든 불구스든. 줄여서 태양 200걸음 이론으로 나 혼자 부르고 있는 정리35의 주석과 비슷하다는 나의 예전 글.

 

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 후설의 생활세계. 스피노자의 상상생활세계인 것은 확실히 전환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면서도, 그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라는 것. 어떻게 보면 상상은 인식의 부모 같은 것이잖아? 조건이자 전제로서의 출발점이지만 결국에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것. 넘어서야하는 것. 사유의 인식의 근간이 되는 첫 생활세계를 부모가 만들어놓는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이런 비유는 매우 좋지 않다. 부모가 존재하는 가족의 형태를 기본이고 일반적으로 전제 삼고 만들어내는 비유. 이것 역시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우리의 사유 활동의 조건, 전제가 되고 결국은 멀어져야 하는 것. 세상의 많은 클리셰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고 또 멀어져야 할 의무도 있고.

 

그런 점에서 감정인식의 관계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일 때 감정이란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감정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감정이 없으면 인식도 있을 수가 없다. 평소에 감정이 일상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감정의 존재를 모르고 살지만 나나 타인의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서야 감정이 거추장스럽고 거대하게 다가와서 그렇지. 감정은 인식과 기억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통찰을 보여줄지 3부가 기대된다.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3.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4.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관념을 신의 관점에서 다 참된 관념이라고 규정해놓고 그 참된 관념의 덩어리에서 잘려나온조각조각을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식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거대한 참된 관념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부딪힌 접촉면을 보고 그것의 아주 작은 일부를 지각한다고 생각하니 참된 관념이 매우 내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라 정겨우면서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져서 아득하다. 내 좁은 시야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참된 관념으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으면 눈에 담길까. 전에 트위터에 스타벅스 이론을 적어서 많은 공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한토막, 누가 들어도 이건 A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지만 사실은 B였다는 작은 반전이 있는 글이었다. 그 글 아래 붙은 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들 그런 일을 경험했고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어 보이는 찰나의 대화로 찰나의 순간으로 무엇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추리게임입니다라고 누군가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또한 힘들다. 그래서 뭔가를 쉽게 유형화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침대는 프로크루스테스에게서 사지 말고 차라리 이케아에서.....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기보다 불행한 소식이다. 어떤 사진을 놓고 이 사진이 합성이거나 조작된 사진이라는 것은 기술적인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알아볼 수 있고,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명료하게 밝혀낼 수 있다. 거짓은 거짓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하지만 누군가 크롭해서 크기만 맞춘 사진을 보면서 이게 사실은 어떤 사진의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어렵다. 부분은 진실이 맞으니까 이것도 진실이라고 합리화하기도 쉽고, ’부분이 진실이면 그러면 됐지라고 나태해지기도 쉽다. 그릇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보는 이것이 부분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그 부분에 진실이 섞여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별해내는 데에 있어 더욱 정교하고 능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거짓의 문제가 아닌 참-부분의 참의 문제는 더 복잡하니까.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5. 이번 강의에서는 다른 철학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복습하면서 알튀세르의 생활세계, 일반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후설의 현상학을 조금 찾아본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슐라르에 한나절 넘게 빠져있었다. 인용으로서 바슐라르를 읽은 적은 있지만 바슐라르 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내가 한때 매우 좋아했던 미셸 투르니에가 매우 좋아했던, 그의 대학시절 교수였다는 것이 내가 바슐라르에 대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정도다. 언젠가 바슐라르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왜 무인가라는 느낌의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나는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5. 이날 들은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저 유형에 해당하는 많은 사례들을 나와 타인으로부터 갖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사람은(또는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는 경우에는) 정말 1종의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유형화를 좋아하고 그 유형화를 합리화시키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을 쉽게 내리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도, 내 안의 그런 부분도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특히나 더 하고 있어서 저 말이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한때는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 행복해보였다. 뭔가에 사로잡혀있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옳다고 믿고 그런 것들을 강화해주는 사람들만 주변에 컬렉팅해서 둘러놓고 살면, 그러니까 단순한 세계 안에 갇혀 살면 갈등도 없고 균열도 없고 평화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너에게 달콤한 말만 던져주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불편하고 신랄한 말을 던져줄 줄 아는 사람과도 가까이 살아야 한다 같은 말들이 버거웠다. 나 그냥 1종의 세계 속에서 고민 없이 편하게 살다가 1종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면 안 될까? 타인 따위. 세상 따위. 유치하고 부조리하게 살면 어때.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유치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면 되는데. 이런 생각들. 내 주변만 봐도 2, 3종의 인식에 가닿은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피곤하고 힘들게 살던데.

 

하지만 1종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나가는 일부 친구들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걸 보면서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여전히 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 편안하고 단순하고 내가 그들(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도 현명하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냥 저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마구 울려댔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생각해도 1종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내가 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여전히 1종의 늪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합리화시키며 단단히 만들어나가기까지 하면 정말 어느 순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23종의 세계에 가닿아 있는, 더욱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은 1종의 세계 속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게 산다. 보이는 만큼 아프고 보이는 만큼 분노하고 보이는 만큼 싸우고 보이는 만큼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를 보면서 산다. 피곤할 것 같은데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삶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깊숙하게 즐긴다. 그들의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한 즐거움과 자족감이 얼마나 강건하고 깊은지 옆에서 볼 때 마다 느낀다.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릴 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엉망진창인 와중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꿋꿋이 버틸 줄 안다. ’마음에 안 드는 주변을 쳐내는 게 아니라 주변을 품어 안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로 감화시킬 줄 아는 힘을 갖고 있다. 주변에 그런 존경할만한 친구들이 있어서, 1종의 세계에 눌러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일으켜 세워 등을 떠미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세계로 넘어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지만 차근차근 그 곁으로 가고 싶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6. 스피노자의 관념과 정신에 대한 개념이 좋다.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라는 점.

 

7. 스피노자의 2부 정의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정의7이 나도 정말 흥미롭고 좋았다. singularis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했다가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 있다는 독특한 실재. 그리고 이게 1부에서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의 진공이 없다-> 원자가 없다와도 이어졌을 때 무릎을 쳤다. 이미 원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세계에는 복합체가 아닌 단독 개체가 있을 수 없었던 거였어.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8. 우연히 하나가 되어 획득한 유일성과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의 유일성의 구분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9. <방법서설>(라틴어 버전으로는 그 이후의 <철학원리>) cogito ergo sum<성찰>ego sum ego existo의 차이를 몰랐다. <성찰>ego sum 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므로 고로같은 연역 따위 필요 없다는, 텍스트 문장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런 현장성이 반영된 명제였다니, ego sumego existo 사이의 콤마는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것이 압축된, 가장 단호하고 시적인 문장부호 아닐까.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10. 이 글을 읽고나서 한나절 동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들을 면밀히 듣고 텍스트 메시지를 면밀히 읽었는데 정말로 대부분이 performative로 수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굉장히 피곤해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constative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욕망 바람 기대 공격 방어 자기어필 등이 꽉꽉 눌려 담겨있는, 수많은 performative. 이것의 정점은 아마 수동공격일테고. 조금만 과장 보태서 말하면 constative 형식으로 구성된 performative야말로 코나투스들이 드글드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름 topikㅋㅋㅋ)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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