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33 주석2
”실재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산되었다면, 우리는 신에 대하여, 가장 완전한 존재자에 대한 고찰에 의해 우리가 신에게 부여하도록 강제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주장을 부조리한 것이라 거부하고 검토해보려고도 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신에 대하여 우리가 말했던 것(정의7)과 아주 다른 종류의 자유, 곧 절대적 의지를 부여하는 데 익숙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이 문제를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우리가 제시한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영원성 속에는 언제라는 것도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오직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신은 어떤 것도 다른 식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결코 그렇게 결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또는 신은 자신의 결정 이전에 존재하지 ㅇ낳았으며, 그러한 결정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나는 이런 스피노자의 섬세함이 너무 좋다ㅋㅋ)“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증명 왜냐하면 오직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원인이며(정리11에 의해) 만물의 원인이라는 점(정리16 및 그 따름정리에 의해)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 자신과 만물이 그것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왜냐하면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앞의 정리에 의해)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도록 신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36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
- 자연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결과에서 따라 나온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다
= 자연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은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증명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정리25의 따름 정리에 의해). 곧 (정리34에 의해) 실존하는 모든 것은 만물의 원인인 신의 역량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와야 한다. Q.E.D.

1부 부록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편견이 있는데(“내가 설명한 방식대로 실재들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수의 편견”) 한 가지 원초적 편견에서 생겨난다.
내가 여기서 밝혀보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생겨난다. 곧 사람들은 모든 자연 사물들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으로 인해 행위 한다고 공통적으로 가정하며, 신 자신이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인도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한가지 [편견]을 고찰해볼 것이며, 첫째,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따져볼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이러한 편견의 거짓됨을 보여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선과 악, 상과 벌, 칭찬과 비난, 질서와 혼란, 미와 추 및 이와 같은 종류에 속하는 다른 편견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보여줄 것이다.
목적론적 편견: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향해 존재한다고 믿는 것. 그 “목적”을 상정해버리고 자연이 그 목적대로 움직이도록 주재하는 초월자 “신”을 상정한다. 초월자 신에 의해 자연 사물들이 인간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 모든 인간은 (그 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지한 채로 태어난다.
- apetitio 인간의 본질인 욕구. 프로이트의 용어로 하면 drive. ’충동‘과 굉장히 가까운 의미인데, 그래서 예전에는 ’충동‘이라고도 번역했지만 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욕구‘라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건 가상이다. 자신이 뭘 욕구하는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잇는지는 인식하지만 그 욕구의 원인을 모르고, 그 원인을 모르겠으니까 그냥 그것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그냥‘ 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원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우리가 ’자유의지‘로 욕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랑 굉장히 비슷하다. 무의식의 규정.
원시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이렇게 많은 과일들이 있고, 낮에는 해가 나오고 물고기를 길러내는 바다가 있고(나의 미래와 운명을 알려주는 별자리가 있고ㅋㅋㅋ) 내가 스스로 만든 게 아닌데 쓸모 있는 게 왜 이렇게 있지? -> 누군가 인간을 위해 설치해놓은 것 같다 -> 그 존재는 대체 왜 인간에게 쓸만한 것들을 만들어놨을까? -> 생각해보니 이 존재가 나로 하여금 감사와 숭배를 받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그 존재를 숭배하고 감사를 많이 표할수록 인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 존재가 나에게 더 좋은 걸 많이 해줄 것 같다 -> 신앙과 미신 생김 (“또한 그들은 이러한 지배자의 기질에 관하여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목적론적 편견을 갖고 있다가 더 나아가 인간의 편익/이익을 위해 설치한 초월적 존재를 숭배하기 시작하고 미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재앙이 생기면 우리가 모자랐구나 하면서 희생제물도 바치고 하면서 더 열심히 숭배한다.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중략)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목적들이 아니라 오직 도형의 본질 및 특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수학(목적 따위에 관심이 없는 학문)이 인간들에게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점만으로도 진리가 영원히 인류에게 감춰진 채로 남아있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학 이외에도 인간들이 이러한 공통의 편견들을 깨닫고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원인들을 지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에 관한 이러한 학설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킨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원인인 것을 결과로 간주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학설은 본성상 앞에 오는 것을 뒤에 오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 22, 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된 것들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면, 마지막으로 생산된 것들, 곧 그것들을 위해 처음의 것들이 만들어진 이 마지막 것들이야말로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들이 될 것이다.
-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 직접적 무한양태
이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생겨나는 것: 매개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보다 완전성이 덜 한 것: 유한양태
목적론적 관점에 따르면 직접적 무한양태가 수단이 되어버리고 매개적일수록 근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어버림
이 학설은 신의 완전성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신이 자신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열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목적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그 추구하는 것이 결핍되어 있는 말이니까. 그러니 신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다 -> 신은 불완전하다
- 목적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필요의 목적과 동화의 목적(<- 나는 갖고 있는 이걸 안 갖고 있는 사람을 위해 신에게로 끌어들이는 목적)
- 목적론적 관점에서보면 동화의 목적이었어도 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기독교 신학자 중 창조를 굉장히 숭배하고 그걸로 모든 걸 설명하려드는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복잡하고 섬세하고 딱딱 들어맞는 구조가 자연의 진화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냐고 주장한다.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6장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대 구약성서를 분석해보면 구약의 ’기적‘은 사실 그냥 사람들이 자연적 사건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그냥‘ 표현이 “신의 입김”이었는데, 해석되는 과정에서 그게 곧이곧대로 기적이 되어버렸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많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언어적 표현법+ 자연적 이치에 무지하니 사실 자연적 현상인데도 그냥 초자연적으로 이해함 -> 이게 ’기적‘으로 둔갑한 것이다.
- 바보들일수록 세상에 대해 잘 놀라는 얼빠짐 놀람 stupor. 어떻게 신체가 이럴 수 있지! 어떻게 별자리가 이렇게 내 성격이랑 딱 맞을 수 있지!ㅋㅋㅋ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의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 이런 우중을 상대로 정치론 신학정치론을 쓰려고 하니까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에티카>에서는 오히려 불구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에티카>를 불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인들,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지복한 삶을 추구하며 살려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론> <신학정치론>에는 많이 나온다. 스피노자는 그 사람들이 철학을 통해 설득되거나 수학적 과학적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될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에 맞춰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상상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맞춰 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 그래서 <신학정치론>에 가면 신, 초월적인 신, 때로는 영원불멸의 신에 대한 상상적인 믿음을 스피노자가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그런 것도 믿지 않으면, 내세나 초월적인 신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나쁜 일 하면 지옥가고 좋은 하면 천국 간다 같은 건 상상적인 생각이고 진리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이런 상상마저 하지 않는다면, 대중이 더 타락하고 방탕한 길로 갈 것을 우려했다. 그것 자체는 상상적인 생각들이고 미신이지만, 그것의 유용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올바른 대중들을 유복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에티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목표다. 하지만 실천적인 철학으로 가게 되면, 그러니까 정치학 같은 쪽으로 가게 되면 진리만을 추구할 수 없다. 일단 대중들이 철학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진리에 귀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귀찮아하며 때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천철학에서는 철학의 역할이 조금 다른 것이다.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과하며, 우리의 상상의 취약함으로 인해 아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상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도 아마 그들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 다음 다른 통념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을 변용하는 상상의 방식에 불과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사물의 주요속성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귀를 움직이는 것들은 소음이나 소리, 화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데, 이는 심지어 신 역시 화음에 즐거워한다고 믿을 정도로 사람들이 제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실로 천계의 운동이 일종의 화음을 이룬다고 믿었던 철학자들도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신이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도록 모든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단지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이는 신에게는 가장 높은 정도의 완전성에서부터 가장 낮은 정도의 완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들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전혀 질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정리16에 증명한 바와 같이, 신의 본성의 법칙은 무한 지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아주 광대했기 때문이다.
- 신학적 어법을 빌려서 이야기한 것. 너희 신학자들의 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신의 질료가 무궁무진해서. 그 뒤의 문장이 스피노자의 입장에 가까운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