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정신mens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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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도 mens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쓴다. 여기서는 정신이라고 번역했지만, 주로 우리의 어떤 지적/인지적 기능을 가리킬 때 쓴다. mens에 비해 덜 쓰이지만 animus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animus의 경우 마음이라고 번역했는데, animusmens에 비해 좀 더 감정적 정서적인 걸 말한다. 그러니까 정신은 정신 똑바로 차려!” 마음은 마음이 지옥이야같은 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anima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도 갖고 있는 걸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책 <영혼론>이 바로 <De Anima>. 이 단어가 넓은 의미로 확장되었을 때는 생명과도 관련된다. 스피노자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anima는 이미 너무나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적 말이고, 정신과 육체가 섞여있는 의미라서 스피노자의 논리에 적절치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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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2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정리1 ~ 정리13 :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2부 정리1에서 정리13까지의 논의는 상당히 난해하다. 1부의 고비를 넘기자마자 다시 직면하게 되는 난해한 논의 때문에 대부분의 <에티카> 독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심지어 스피노자가 독자들에게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텐데 날 믿고 따라오라고 따뜻하게 말함ㅋㅋ)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신의 기원과 본성을 해명하면서, 또한 정리13과 정리14 사이에 나오는 [자연학 소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1-1) 정리1 ~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전반부 첫 번째 부분에서 아주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정리7 평행론.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들뢰즈는 무려 두 챕터에 걸쳐서 설명한 바 있다. 최근 영미 스피노자 연구자들도 이 명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작년에 한국에서도 이걸로 박사논문). 정리1에서 정리7까지에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해명되고,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는 것이 해명, 결국 평행론으로 귀결된다.

 

1-2) 정리8~ 정리13: 신체의 관념으로서의 정신

여기는 앞의 평행론 명제를 전제로 인간의 정신을 도출한다. 사유속성에 무한하게 많은 양태가 있는데 거기서 인간의 정신이라는 한 양태를 도출. 사유속성의 존재론적 자율성이 확립되고 난 뒤, 스피노자는 무한양태(사유속성의 경우 신의 관념), 곧 관념들의 생산의 연쇄를 다룬다. 그 다음 인간의 정신은 일종의 관념이며, 이 관념의 대상은 곧 인간의 신체라는 것을 증명 -> 인간이란 정신과 신체의 합일union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게 인간이다.

 

2) 정리13 ~ 정리14 사이: 자연학 소론- 물체의 본성에 대하여

정리14가 바로 나오지 않고 뜬금없이 공리1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연구자들이 [자연학 소론]이라고 이름 붙인 부분. 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물체의 한 종류로서의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부록 내지는 보론. 자연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긴 한데 길게 이야기하기는 힘들고(이 책의 주제는 자연학이 아니라 윤리학이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꼭 필요한 내용만 보론격으로 붙였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끝내고 자연학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마 10년만 더 살았으면 정치론을 다 쓰고 자연학을 쓰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당시 뉴턴의 책도 나왔던 데다가 참 재미있었을 텐데. 자연학소론은 분량은 적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스피노자도 과학혁명에 관심이 많아서 이걸 논의에 적용시키고 싶어 했다. 책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는 스피노자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을 모르지만 여기서 그 편린들을 볼 수 있다. “물체란 무엇인가

 

자연학 소론도 2-3개로 나눌 수 있다.

 

2-1) 공리1, 2에서 공리, 까지 : 단순물체의 본성

1부에서 진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원자 이야기도 했는데, 정리15에서 스피노자는 진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원자론을 이야기하려면 진공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스피노자는 원자도 진공도 다 부정한다. 공리1, 2에서 스피노자는 가장 단순한 물체의 본성에 대해 다루는데 이 단순물체는 원자인가? 미리 말하면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모든 것을 복합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말하는 개체는 다 복합체.

 

2-2) 개체에 대한 정의에서 6개의 요청까지: 복합물체의 본성

공리 VS 요청- 둘 다 증명이 불필요한 자명한 명제로 참인 명제로 받아들여진다. 차이는 공리는 모든 영역에 걸쳐서 참, 요청은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만 참. 요청은 어떤 영역과 관련된 건지 말해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신체로 말해졌고 인간신체에 관해서만 타당하다. 시간이 있으면 이걸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냥 참이라고 하겠다고 요청하는 것. 에티카에는 총 8개의 요청이 나오는데, 6개가 여기에 나오고 3부 앞부분에 인간신체에 대한 2개의 요청이 나온다.

 

2. 정리14~ 정리49: 인식의 세 가지 유형

 

1) 정리1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기원과 본성

 

1-1) 정리14~ 정리23 : 상상의 매커니즘

정의4에서 다룰테지만 스피노자는 인식을 크게 부적합한 인식/ 적합한 인식으로 나눈다. <에티카>에서는 상상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신학정치론>에서는 아주 풍부한 상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예언의 본질은 상상이다. 그가 보기에 예언자들은 지적능력이 풍부한게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하다. 스피노자에게 이마지나치오는 우리가 쓰는 상상보다 범위가 넓다. 감각, 지각 자체도 포함된다. 나중에 정리16~정리18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2) 정리24 ~ 정리31 : 부적합한 인식의 성격

 

2) 정리32 ~ 정리49: 적합한 인식

 

2-1) 정리32 ~ 정리39: 공통통념의 형성

공통통념 common notion notio communis. 아주 독창적이고 새로운 논의다. 들뢰즈가 평행론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common notion. 2부에서도 <에티카> 전체에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부 부록에서도 스피노자가 상상적 통념notion에 대해 언급했었다. 미추, 질서와 혼란, 선악 이 모든 게 notion이라고.

 

2-2) 정리40 ~ 정리49 : 인식의 세 가지 유형

- 1종의 인식 imagination 상상

2종의 인식 참된 인식

3종의 인식 scientia intuitiva 스키언티아 인튜이티바 직관적 지식

 

- 1종의 인식: 오류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렇다고 1종의 인식이 다 잘못이고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1종의 인식에는 참된 인식도 있다. 그런데 오류라고 이야기한 것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찍어서 어쩌다 맞은 것 같은 것. 맞을 수도 있지만 잘못일 가능성이 많은.

- 2/3종의 인식: 왜 그런지 근거를 파악한 인식. 공식도 알고 있고 논증도 알고 있고.

- 정리49는 지성과 의지가 다른 게 아니라는 내용이다. 주석이 붙어있는데 이 주석이 2부의 부록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가 의지와 지성을 구분한 것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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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서문

- =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자

- 1부에서 신에 대해 다루었고(신의 본질, 신이 존재하는지, 원인으로서 무엇을 생산하는지) 2부에서는 양태들(=신이 필연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모든 것),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 윤리적= 1) 어떻게 하면 정신을 파악하고 2) 그것을 지복으로 이끄는지.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스피노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윤리학><나의 철학>이라는 잠정적 제목으로 부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철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이름 붙었고, 2부 서문이 바로 왜 최종적으로 <윤리학>이라고 붙였는지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 길물어보면 손잡고 끌어주듯이 확실하게!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데려가 주겠다. (여기서 어쩐지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뭉클했다...ㅠㅠㅠ)

 

정의1

나는 물체를, 연장되는 실재로 간주된 한에서의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로 이해한다. 1부 정리25의 따름정리를 보라 (물체에 대한 정의)

- 물체 corpus/ body. 영어에서 body가 신체이자 물체이듯이 corpus도 마찬가지다. 비유적으로 쓰면 저작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막스의 corpus- 막스가 남긴 저작

 

정의2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본질에 대한 정의)

 

- 본질에 대한 아주 독특한 정의다. 스피노자의 본질은 종적 본질또는 여러 개체들이 공유하는 형상으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매우 개체적인 본질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동물의 한 으로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말을 할 줄 아는에 있다고 보는 것. 곧 여러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줄 알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 중 어떤 한 사람이 사망한다고 해서 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본질 개념에 따르면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은 둘 중 하나가 정립되면 다른 것도 정립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는 3부 정리7에 나오는 코나투스’, 정리9에 나오는 욕구내지는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현행적 본질 essentia actualis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2부 정리40에서 스피노자는 ‘ ’을 상상적인 관념/통념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인간 전체‘ ’돌고래 전체같은 집합적 를 비판하고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를 불신한다.

 

- 그러면 스피노자에게는 이런 개별화된 본질개념 말고 다른 본질 개념은 없는가. 이를테면 종적인 본질같은 것. 있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에 나오는 형상개념. forma.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부르는 전체가 forma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 말은 forma라는 것이 우리가 방금 정의2에서 본 것처럼 개체화된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공유하는, 종적인 성질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forma 개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적인 본질 개념이 녹아들어있는 것. (이 주석에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정서를 갖는다라는 성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는데 이건 다른 종끼리 forma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인간도 정서를 갖고 동물도 정서를 갖지만 이것 역시 forma가 다른 것이다. 인간과 고양이는 forma가 다르니까 인간이 갖는 정서 forma와 고양이가 갖는 정서 forma는 다른 것이다)

 

-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4부 서문. ”변형된다“ mutetio mutation. 여기서 스피노자가 변형된다는 말을 어떻게 쓰냐면, 말의 고유한 form이 있는데 이게 벌레의 고유한 form으로 바뀌게 되면 말의 고유한 form이 해체되니까 파괴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의 form이 다른 form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스피노자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 종적인 형상, 종적인 본질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본질 개념을 가지고서는 개별적인 본질, 개체적인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하지 않으니까 2부 정의2에서는 바로 개체화된 본질을 정의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이것은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과도 또 다르다.

 

<<<<<<<<<<<<<<<<< *** 현행적 본질 VS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가면 재미있는 논의로 이어지면서 어떤 문제가 제기가 된다. 한번 2부의 정의2로 가보자. 2부의 정의2는 실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본질개념을 정의해놓은 것이다. 나는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속한다고,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

- 그러니까 여기에 따르면 A라는 사물이 있고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러면 이 A라는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립하면 A도 성립, 이것이 사라지면 A도 사라지는. 반대로 A가 성립하면 A의 본질도 성립하고 A가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지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본질이다.

- 그런데 이 정의2에 나오는 이 본질개념의 아주 독특한 특징은, 이 본질은 굉장히 개체화된 본질이다. A라는 개체, A라는 사물과 뗄레야 뗄 수 없게 긴밀하게 연결된 본질. 이게 정의2에 나오는 본질이다.

- 그런데 우리가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 사람의 본질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정리해보자. A라는 사람이 생겨나서 살다가 사라졌다. 2부 정의2에 따르면 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1부 정리17의 주석에 따르면 A라는 사람의 본질은 남아있어야 한다. 영원본질이니까. 그런데 2부 정의2를 따르면 A라는 사람이 성립하면 A의 본질이 성립하고 A라는 사람이 사라지면 A의 본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상호관계가 성립. 그러나 1부 정리17의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호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리고 아까 1부 정리17의 주석에 삼각형의 본질 이야기도 나온다. 삼각형A의 본질이라고 안 하고 삼각형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본질은 보편적인 본질, 류적인 본질, 종적인 본질이다. 어떤 특정한 개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삼각형의 본질은 삼각형A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사람의 본질도 사람 하나가 없어져도 남아있다. 그런데 2부 정의2에 나오는 것은 A가 사라지면 이 본질도 당연히 사라진다. 뭐지?????

 

- 3부 정리7로 가보자. “각각의(each)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actual essence)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코타투스를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현행적 본질이 바로 2부 정의2에서 내리는 이 본질이다. 이것은 그 사물이 성립하면 이 사물의 코나투스도 성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성립하면 이 사물도 존립하고, 이 사물의 코나투스가 없어지면 이 사물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이 사물과 이 사물의 본질 사이에는 상호성, 상호전제관계가 성립한다. 이걸 스피노자가 actual essence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2부 정의2는 사실은 3부 정리7의 코나투스를 염두해두고 제시된 정의다.

 

- 그럼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이 본질은 현행적 본질인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영원진리로서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영원진리로서의 본질과 현행적 본질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답은 나중에 5부에 나온다. 그것도 아주 첨예한 문제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람과 관련해서 영원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데, 지금 영원한 것은 다 신, 속성 이런 것들인데, 5부에서는 인간 같은 유한한 것과 관련해서 영원성을 이야기한다. (1부 정리17의 주석에 나오는 본질: 영원진리로서의 본질 VS 2부 정리2에 나오는 본질: 현행적 본질) >>>>>>>>>>>>>>>>>>>>>>>>>>>>>>>>>>

 

- 여기서 1부 정리13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이 정리에서 신이 물체라면, 신도 분할될 것 아니냐, 물체는 분할되니까라는 적수들의 반론에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체의 분할은 실체로서의 분할이 아니라 양태로서의 분할이다. 모든 물체가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양태적으로 구별되는 것들로 물체를 이해할 때만 물체는 분할된다. 하지만 연장속성, 물질전체로서, 실체로서의 물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도 딱 떨어지는 멋진 반박이다)

 

정의3

나는 관념idea,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res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지각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concept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지각이라는 명칭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작용을 수동적으로 겪는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념은 정신의 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정신도 res고 관념도 res->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 나는 개념이라는 것이 외부자극이 촉발해서 맺히는 상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개념을 훨씬 적극적, 능동적 활동으로 이해한다.

- 정의3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념은 정신의 개념”, 정신의 작용을 표현한다는 점, 이것은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관념은 사물에 대한 정태적인 표상과 다르고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데카르트를 겨냥한 것이다.

 

- 정의3/해명과 아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2부 정리49/따름정리다.

-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은 정신 안에는 상이한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 표상으로서의 관념 2) 이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의지.

그러니까 관념 자체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고, 참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 스피노자는 정리49에서 이를 반박한다. 정신 안에는 관념인 한에서의 관념이 함축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의지 작용 또는 긍정과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하고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지성과 구별되는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갖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념 자체에 긍정 또는 부정이 이미 다 들어있다. 관념은 수동적으로 형성된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언가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부정하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부 정리49의 따름정리에서 의지와 지성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 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려면 데카르트의 관념이론에 대해 먼저 더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앞으로 2부를 하게 되면 관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명석판명이라는 말도 굉장히 많이 쓸 것이다. 이 용어의 뜻들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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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관념 이론

 

관념에 대한 정의

- 넓은 의미의 관념: 정신적 상태 일체. 인지적 관념뿐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내용도 다 포함

- 좁은 의미의 관념 : 이미지와 같은 외양을 지닌 의식의 상태. 사물의 상을 갖는 것.

내 생각들 가운데 흡사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만이 본래적인 관념이라고 명명될 수 있으며, (중략) 그러나 나머지 다른 것은 이런 상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의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나는 내 생각의 대상으로서 항상 어떤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또한 그 사물과의 유사성 이상의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또는 정념으로, 다른 것은 판단으로 불린다” - <성찰> : 내가 어떤 걸 의지한다고 하면 의지고, 어떤 걸 두려워하거나 좋아하거나 희망한다고 하면 정념, 어떤 걸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면 판단이다.

 

-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주장하려고 했던 점은, 비록 내가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 여부(내 앞에 탁자가 실제로 놓여있는지 등)나 특성(저 바깥의 사람이 실제의 사람인지 아니면 자동인형인지) 등에 관한 이런저런 판단에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이런저런 대상이나 그 대상의 특성에 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관념은 정신이 무매개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관념을 갖고 있다고 혹은 내가 이런저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확실할 수밖에 없다.

- 그러니까 관념을 표상하는 것 자체는, 관념이나 표상 자체는 참/거짓이 아니다 + 그것을 참/거짓으로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의지가 작용할 때는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것은 의지의 기능이자 수행.

 

- 스피노자는 정의3에서 데카르트의 저런 생각을 잘못이라고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데카르트처럼 관념과 의지, 표상과 의지를 구별하는 게 잘못이라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표상이 아니라 관념 자체에 긍정/부정의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2부 정리49 따름정리에서 스피노자는 관념과 의지는 하나다라고 말한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 데카르트의 놀라운 이것에 주목한 사람이 레비나스. 레비나스가 데카르트가 경이롭게 생각한 바로 이것, 나는 유한한데 저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이데아가 내 안에 있을까라는 것을 무한한 타자의 이념으로 발전시켰다.

 

3. 명석함과 판명함

 

- 데카르트 <철학원리> 145: ”나는 어떤 지각이 주의 깊은 정신에게 현존하고 그것에게 접근 가능할 때 그것을 명석한 clarus(클라루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떤 것이 눈의 시야에 현존하고 충분한 정도의 강도와 접근성으로 눈을 자극할 때 우리가 그것을 명석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나는 어떤 지각이 명석할 뿐만 아니라, 정신이 자기 안에 단지 명석한 것으로서 포함하고 있는 다른 모든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될 때 그것을 판명한 distunctus(디스팅투스) 지각이라고 부른다

 

- 명료하고 두드러진 지각. 다른 말로 하면 생생한, 우리 정신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 지각. 반면에 어떤 지각은 미미하고 뿌옇고 obscure한 지각. 불분명한 지각.

- 명료하기만 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되는 또 다른 지각이 있다는 것.

 

- 하지만 명석하지만 판명하지는 않은 지각들도 존재한다. 아주 명료하게 나타나지만 두드러지지는 않는.

- <철학원리> 146: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의 정의에 따르면 판명함은, 다른 지각들과 아주 확연하게 분리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판명한 지각이 이처럼 다른 지각들과 분리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지각들과 다른 모종의 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판명한 지각을 다른 명석한 지각들과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내적 특성은 어떤 것일까?

- 그것은 판명한 지각이 어떤 사물과 관련하여 그것에 속하는 것과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직각 삼각형에 대해 우리는 클리어한 아이디어를 명료하게 가질 수 있지만 이게 꼭 판명하지는 않다. 우리가 판명하려면 직각 삼각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각삼각형에 속하는 성질(세 내각의 합은 180도와 같다), 속하지 않는 성질(네 각을 갖고 있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그러니까 관념과 관련된 대상의 특성이나 본질을 제대로 제시해주는 것이 명석판명한 지각이다. 스피노자도 이 용법을 받아들여서 많이 사용한다.

- 따라서 명석 판명한 지각 내지 관념 자체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성질에 대한 참된 정보를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데카르트의 관점에 따를 경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을 경우, 우리는 필요한 경우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그 대상이 지닌 다른 성질을 도출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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