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정리33의 주석1이 무척 좋았다. 내용도 형식도 완벽한 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적 이유로 ”우연“의 범위를 매우 협소하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건이 벌어진 앞뒤 원인 또는 과정과는 별개로 그 사건자체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상의 수치로만 따졌을 때 매우 희소한 경우 ‘우연’이라는 단어를 뉴트럴하게 붙이는 세속적 용법은 아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맥락상의 우연에 있으니까- ”우연“이라는 것이 갖는 환상성에 너무나 많은 자기 안의 것들을 투사해서 읽어내려는 욕망, 그 투사를 사실로 믿어버리고자 하는 욕망, 그 인식의 결핍을 이용해서 거기에 이것저것을 입히려드는 시도들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경계가 느슨해질 때마다 이 주석1을 나 자신에게 아주 차갑고 매몰차게 읽어주고 싶다.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가며(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실재/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실재로 나누어서) 물샐 틈 없이 논리정연하게, 불필요한 말 하나 없이 완벽하게(”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설명한 이 주석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가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판명나지 않을 때 우리는 판명나지 않았다는 틈새를 이용해서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도저도 아닌 나태한 단어를 붙여 우연적인 것이라고 얼마나 쉽게 결론 내리는지.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 정리33 주석1
우리가 간략하게 우연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필연과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해보고 싶다. 어떤 것은 그 본질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하거나 그 원인으로 인해 필연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실재의 실존은 그 본질 및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거나 아니면 주어진 작용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 다음 어떤 실재는 이 동일한 원인들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불린다.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 실재의 본질이나 정의가 모순을 함축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 실재를 생산하도록 규정된 어떤 외부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실재가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우리 인식의 결여 이외에 다른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는 실재나, 아니면 그 본질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원인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그 실존에 대해 아무것도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실재의 경우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으로도 불가능한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우연적인 것이라든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2. 좀 더 신랄한 주석2도 좋았다. ”신“의 자리에, 여러 가지 것들을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세신학자들 같은 마음으로 신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신“일 테고, 별점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한테는 ”별“ 혹은 ”별의 신“일 테고, 물질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일 테고, 우리가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자의식과 나의 욕망들을 다 걷어내고 잘 성찰하려는 의지를 갖고 세상에 제시되어있는 논리적인 증명의 계열을 올바르게 검토한다면 ”그들은 결국 지금 그들이 신에게 부여하는 것 같은 자유를 단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에 대하여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으로 완전히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래, 과학적 논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들은 대게 다 유치하고 학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적 성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게 맞다.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 잠깐 유치하게 혹은 천진하게 숨 쉴 곳으로, 알록달록한 꽃분홍, 형광연두, 파스텔 톤의 파랑, 노랑, 오렌지 빛깔까지 유아기적 감성을 과장되게 재현한 색색깔의 사탕을 입에 넣고 잠시 기분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에 품는 것과 절대성을 부여해서 신앙으로, 사주나 별점 같은 것으로, 물질이나 세속적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과 운명을 진지하게 판단하려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 와중에 잊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이, 신은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라고 깨알 같이 후자를 까는 스피노자의 섬세함에 혼자 막 웃었다ㅋㅋ
3. 1부 부록은 1부를 장중하게 마무리하고 끝내는 악장 같았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참 많아서 필사하는 느낌으로 이 단락 저 단락들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한 가지 편견- 모든 것들이 어떤 ‘목적’을 향해 행위 한다는 편견-이 그릇된 신앙관과 미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인간의 무지, 인간의 욕구와 삼각형을 만들 때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점을 거쳐, 그것이 사물들을 표현하는 흔한 통념들로 이어지는 고찰이 좋았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기질“을 언급하는 것이 너무 적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미신을, 그릇된 신앙을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만족해버리는 어리석음을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쳤다.
주석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항상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상태를 짐작하는(대개는 비난하는 경우에) 말 속에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이를테면 자신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원인이 ‘질투’이거나 자신이 미움 받는 원인이 ‘질투’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질투해서 그런 것 같다’는 분석을 가장 쉽게 내리고, 자신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혹은 그 역작용으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성공한 스스로가 지나치게 대견하면(의식하지 않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에 이미 타인을 굉장히 의식한다는 전사나 전제가 내포되어있는데) A라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 A는 그냥 행동했을 뿐인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고 분석하고, 본인이 경쟁심이 많거나 누군가에게 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A의 행동을 ‘남을 이기려고, 돋보이려고 그런다’라고 쉽게 분석한다. 너무나 높은 확률로 그런데, 스피노자 말대로 객관적인 어떤 정보가 없고 사람은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결국 ”자기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기 너무나 쉽기 때문일 것이다. A라는 사람이 점심을 안 먹는 것을 두고 마음 속 화두가 ‘건강’인 사람은 A가 아픈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우울’인 사람은 A가 무슨 우울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쉽고 화두가 ‘다이어트’인 사람은 A가 살 빼려고 그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사람은 참 투명해,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 가장.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apetito)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욕구나 의욕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인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욕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듣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해야 할 그 이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이를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다면, 그들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 그들 자신이 보통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목적들에 대하여 성찰해보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따라 다른 이들의 기질을 판단하게 된다.
4. 스피노자는 그 뒤에 ”기질“을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으로 이어가는데 거기서도 박수쳤다ㅋㅋㅋ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오컬트를 믿는 사람이나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이나 정말 자기기질대로 숭배의 대상을 정하고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자연을 포함한 세상 전체가 신의 뜻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고, 오컬트를 믿는 사람은 자연에서 인간의 운명과 성격을 읽어내려고 하고, 물질적인 것을 믿는 사람은 자연을 의식주를 포함한 물질적 제공을 해주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스피노자가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때 웃기 시작했다가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라고 말할 때 빵 터졌다ㅋㅋㅋㅋ 자연을 좀 가만히 놔두라고 인간들아! 자연이 니들이 믿는 종교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별들이 니들의 인생이나 운명 따위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연이 니들 잘 먹고 잘 살라고 해를 비춰주고 물고기를 길러내어주고 그러는 거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거라고! 인간 뭐가 그리 대단한가.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이러한 편견은 미신으로 변화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은 쓸모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그들은 다만 자연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착란에 빠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 일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한 번 보기 바란다!
5. 이 뒷 문장에서는 숙연해졌다. 가장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기도 했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되는 것.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서 논리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 점성술사가 완전 잘못 맞춘 사례들을 이야기했을 때 별점이 틀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사로잡혀서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냐’고, 전혀 얼굴 본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을 10년 본 사람의 판단조차도 무시하고 점궤에 어떻게든 꿰어 맞추려고 했던 사람들, 무언가를 사들여도 공허하다는 걸 이미 깨달았으면서도 더 좋은 것을 사지 못해서지 않을까라는 마지막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사들이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정해진 대상이 없었을 뿐이지 대상을 바꿔가며 나도 믿는 것에 대해 더욱 믿으려고 그것에 회의가 드는 순간에 고집스럽게 믿음에 종속되었던 순간들이 많다. 특히 진로에 대해 그랬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뒤엎으려고 해도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나의 문제를 쓱 묻어버리려는 유혹이 커지는 것은 나약해서일 것이다. 아니 나약해서였으면 좋겠다. 완고해서일 경우가 더 문제일 테니까.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뿌리 깊은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그들이 그 용법을 모르는 다른 미지의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고 그들이 현재 처해 있는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이 모든 구성물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성물을 고안해내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접하면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에 종속된다.)
6. 5번에 더불어서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를 더 자극하는 것에 마음이 기울게 되어있다. 이 역시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그렇게 되기 쉽다. 더 공부해야 겠다는, 특히 철학과 과학을 더 공부하고 나를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던 것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정신 차려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점점 체력은 떨어지고 사고력은 체력과 비례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반비례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 점점 달콤한 힘들에 사로잡혀 내가 듣고 싶은 것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발췌해서 세상을 보게 되지 않으려고. 철학과 과학이 ”진리의 다른 규준“을 보여주어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방식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줘서 다행이다. 아직도 갈 길이 너무나도 멀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과의 교류를 끊지 않도록.
- 우중 vulgus 스피노자는 엄청 답답했던 것이다. 저 자연의 해석자 혹은 신의 해석자로 숭배 받는 사람들은 학자도 아니고 미신을 조장하고 엉뚱한 해석을 유포하는 자들인데 대중들이 뭐가 진리인지 뭐가 논리적으로 맞는지 전혀 모르고(혹은 외면하고) 자기를 자극하는 것, 더 많이 현혹하는 것을 믿고 숭배하고 따르니까. 상상의 힘, 정서의 힘, 욕망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사람들은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상상과 어떤 일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별자리 같은 자연이나 신이 예비해놓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얻게 되는 커다란 위안의 정서,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운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운명이나 성향까지도 자기가 이미 다 파악하고 알고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힘에 너무 쉽게 사로잡히니까. 나약할수록 특히).
7. 클라이막스 중에서도 클라이막스 같은 3부는 마치 더글러스 애덤스가 근대에 태어나서 신랄하게 쓴 글 같다. 영국식 유머들이 곳곳에 있어서 숙연해지다가 반성하다가 빵터지고 감동하다가 빵터지고 그랬다. 앞에서 한 세 번 이미 웃었는데 뒤에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 만한 것은 없다“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웃은 것 같다. 스피노자의 통찰이 예리한 건지 인간은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다 뻔한 건지, 맞아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자연을 볼모로 잡고 신앙이든 오컬트든 물질적인 것이든 지나치게 빠져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빠지는 곳이 회의주의지. 다 소용없어. 다 부질없어. 다 의미 없어.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내가 틀리고 내가 무지하고 내가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걸 인정하느니 ”태생적인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냥 원래 세상이 다 인간이 다 부질없고 얕은 거야, 그게 내 운명이야, 내가 믿는 신이 예비한 나의 인생이야, 그러니 물질이 최고야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쉬우니까.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사물들을 자기 두뇌의 성향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또는 오히려 자기 상상의 변용들을 사물들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나치는 김에 이점에도 주목해두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에 놀랄만한 것은 없다. (중략)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물들을 잘 이해했다면, 수학이 입증하듯이, 사물들은 사람들 모두를 매혹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납득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 상상과 지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혼란스러운 상황은 불안정해서 견디기 어려우니까 혹은 혼란스러움은 나의 지성의 결핍을 표상하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든 혼란스럽고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A아니면 B로 결론 내리거나 애매한 것들을 다 잘라내어 네모반듯하게, 그게 나의 성마른 성정이 만들어낸 가상의 형상일지라도 컨트롤하기 좋게 만들어놓고는 쉽게 기뻐하고 안심하는 것. 그렇게 해놓고 혼란과 애매한 상태를 견디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것.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물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못하고 상상을 지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물들 및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사물들 속에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을 통해 표상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상상하고 따라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이 질서정연하다고 말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무질서하다고 또는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특히 더 기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과 독립적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은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하며, 따라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고려하여 인간이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열해놓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ㅋㅋㅋㅋㅋ
9. 그저 한없이 착하고 관대하고 낙관적인 방식으로 얻는 평온함이 아닌, 날카롭게 인식하고 명확하게 바라보며 이치를 엄밀히 따지는 방식으로 얻는 다른 종류의 평온함에 대하여. 그것을 담고 품을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문제에 대하여.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