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는 말. 나는 스피노자가 그 장대한(적어도 나에게는 장대하게 느껴졌던) 1부의 마지막을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정리로 마무리 지은 것이 좀 감동적이었다. 이걸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내가 <다뉴브>에서 묘하게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구절, ”나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모든 단역 엑스트라처럼 내게도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토끼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든 것만은 확실하다에서 받았던 슬픈 위안과 뒤따르는 혼란스러운 책임감과도 비슷하다.

 

나는 <다뉴브>의 저 구절을 어제, 416일에도 떠올렸었는데 가끔씩 인간 따위, 혹은 나 따위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실체로서의 나는 양태로서 소멸해도 우주의 작은 진공 하나 만들지 않는존재라는 사실이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줄 때가 있는데- 그게 세상에서의 나일 때나 누군가에게 있어서 나일 때나 어떤 조직에서의 나일 때나 단 한 번도 존재의 미미함에 대해 서운해 본 적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본 적도 없는데- 나는 이런 위안이 매우 비겁한 거라고 생각한다. 존재감에 대한 욕심이나 인정욕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나를 뭔가 굉장히 초연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대하는데, 실상은 존재감의 무게만큼 얻게 되는 책임감이 두려워서일 뿐이다. 내가 무언가의 원인이 되고 싶지도 않고 무언가를 산출하고 싶지도 않고 그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어떤 것일수록 아무런 관여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세상의 연극이라는 비유를 끌어올 필요도 없이, 나는 유치원 때부터도 학예회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 어떤 꾀병을 부려서라도 단역 엑스트라를 맡고야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며 사회 구조를 만들며 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시에 나는 권력자도 아니고 정책결정권자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도 아닌 그냥 소시민이라, 나는 세상의 연극에 출연하는 단역 엑스트라이며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이 있다는 것에 너무 괴롭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어떤 책임을 어떻게 지고 어떻게 응답해야하는지, 그 적정선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서 안개 속을 질척질척 헤매는 기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실질적 보탬이 될 수 있는 어떤 굿즈나 책을 사고, 내 주변 타인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혹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피해는 적어도 주지 않기 위해 정신 차리고 조심하며 사는 것? 투표를 열심히 하고 내 자리에서 공부를 하는 것?

 

가끔은 내가 뭐라고, 나는 그냥 이 세상에 먼지 같은 존재인데 세상의 중심인 것 마냥 어떤 일에 책임감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느냐고, 오만이라고, 너는 단역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 엑스트라 역할로 쉽게 도망치곤 한다. 나 하나 여기서 동선 잠깐 틀려도 연극을 망칠 일은 없으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어? 나 어제보다 율동을 잘 하네? 어제보다 다른 사람들 대사가 잘 들리네? 이런 걸로 혼자 소소하게 재밌어하며 사는 게 나에게는 세상의 연극을 즐기는 최고의 방식이자 행복이고 평안이니까. 하지만 어떤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할 때면 내게 "어떤 중심역할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직접적으로 떠맡은 정확한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 침대같이 폭신한 유혹적인 위안인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도 가시지 않는 두통처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1부의 막을 내릴 때, 마음 놓고 무대 뒤에서 놀고 있다가 연출감독에게 너희들 중 이 연극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역할을 하나도 없다(그러니 정신차려라)“라는 말을 듣고 뜨끔해진 아이처럼, 어제까지는 별 생각 없이 무대 위에서 까불까불 놀았는데 갑자기 나의 팔 동작, 나의 표정 하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진 아이처럼, 마치 이런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일기장을 열고 저 문장을 조심조심 옮겨 적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서 정말 무겁고 무서운 말.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말.  


 

2.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순서로 좌측에서부터 죽 나열을 한다면 초월이라는 것은 당연히 가장 오른쪽에 위치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가장 지상에서 붕 떠있고,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킬 것만 같은데 완전히 허를 찔렸다. 초월이 기본적인 것을 초월해서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초월이었다니, 이거야말로 상상 초월()이다. 아니 보통 초월이라고 하면 땅 위의 하늘을 생각하지 땅 아래 더 깊은 땅을 생각하지는 않잖아. 칸트의 transzendental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강의에서 초월의 뜻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은 나 역시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철학은 꽤 오래전 선험적 원리라고 번역된 버전으로 접한 게 전부라서 처음에 초월론적이라고 들었을 때 선뜻 이어지지가 않았던 것. 그래, 초월론적이라고 이해하니까 훨씬 더 명료하고 명확해진다. 칸트에 대해 오해했던 부분이 풀림 (그러니까 칸트도 스피노자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을 풀었으면 좋겠.......)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3.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지금의 나로서는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으라는,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자는 칸트의 철학에 반 정도만 공감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저 말에는 공감이 갔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 시간과 공간의 자리에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겠다. 칸트가 말하는 감성즉 직관과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은 전혀 다른 것이라지만, 그리고 나는 속성에 대한 객관적 해석론을 주관적 해석론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스피노자와 칸트의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시간과 공간의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임의의형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도 저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4. 명제에 숨어있는 공리,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5. 그렇게 (불구스들을 향해) 차이점을 부르짖었던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가, 스피노자의 철학 안에서 결국은 같은 뜻의 말이 되는 것. 나는 이런 게 너무 멋지다고 생각한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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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사유하는 실재다

정리2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연장되는 실재다

 

- 1부에서 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했고 2부 서문에서 신에게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모두가 아니라 인간 정신 및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 이라고 에티카에서 논의할 대상을 한정했다. 한정 -> ”인간에 관한 것 -> 그래서 정리1과 정리2에서 딱 (인간이 지각 가능한) 연장과 사유에 대해서만 말한다.

- 스피노자는 속성개념을 아주 제한적으로 쓴다. 속성이랑 구별해서 쓰는 것이 특성. 스피노자에게 속성이란,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 본질. / 특성이란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그 사물의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신의 본질로서의 속성에는 사유와 연장, 신의 본질로서의 특성에는 자기원인, 무한성, 유일성 등이 있다.

- 스피노자가 속성, 특성 이외에 또 이야기한 다른 한 가지: 상상적인 성질

* 2부 정리3의 주석에 상상적 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은 자비롭다같은, 인간이 인간의 특성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

 

- 정리1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사유는 신의 본질이다같은 뜻이다

정리2의 연장은 신의 속성이다= 연장은 신의 본질이다.

- 1부 정리13 따름정리에서 연장속성/사유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매우 대담한 주장이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 정리1의 증명:

- 자연 안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로부터 무언가가 따라 나올 수 있는 원인들을 갖고 있다. ,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하니까.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신을 표현한다 =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

- 양태를 양태로서 존재하게 성립하게 해주는 것= 속성.

양태가 다른 것 안에있다에서 다른 것“= 속성

- ”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는 그 사유역량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 어떤 사유든지 바로 이 사유라는 속성에 의해 가능하다.

 

- 1부 정리14의 따름정리2에서 연장되는 실재와 사고하는 실재신의 속성들이든가 아니면 (공리1에 의해)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변용이 아닌 속성으로서의 연장되는 실재와 사유하는 실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바 있지만, 신의 속성은 2부 정리1과 정리2에서 처음으로 제시된다.

- 정리1의 증명은 후험적 증명, 주석은 선험적 증명

 

* 선험적 a priori 아프리오리. (priori 앞서서)

- 선험적 인식: 굳이 경험을 통해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식. 칸트는 이 특징이 보편성이고 필연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수학적 진리, 논리학적 법칙들, 이런 것들이 선험적 인식에 해당한다고 본다.

- 선험적 증명: 원인이나 근거에서 출발하여 경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

 

* 후험적 a 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posterior 나중에)

- 후험적 증명: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런저런 개별적인 사물, 개별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의 원인이나 근거가 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 1부 정리11 다른 식의 증명. 유한한 존재자들= 나 자신. 증명을 여기서 시작한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실존하는데 무한한 존재자가 왜 실존을 못하는가? 유한-> 무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경험적으로 지각하기 쉬운 데에서 시작하니까 이해하기 쉽다

 

- 주의할 점: 칸트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transzendental 개념이다. 이 개념이 종종 선험적이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a priori와 혼동을 빚는 일이 벌어진다. 전자를 선험적으로 번역할 경우에 후자는 선천적이라고 번역된다. 역시 혼란스러운 번역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주로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나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로 옮겨지는데 이 번역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깝고 혼동을 피할 수 있어 더 낫다고 생각한다.

- 이게 다 칸트 연구자들 때문이다. 칸트 연구자들은 대체 왜 저렇게 원래의 뜻과 맞지 않는 선험적이라는 번역을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칸트 연구는 대부분 그대로 일본에서 다 가져왔기 때문이다.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 더구나 칸트는 이 두 단어를 자주 같이 쓴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 빚어진다. transzendental 철학 자체가 a priori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분석하기 위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 초월론적/ 초월범주

 

- 스피노자도 이 transzendental이라는 말을 쓴다. 에티카에 딱 한 번 나온다. 2부 정리40의 주석1.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존재자, 실재, 어떤 것과 같이 초월적이라고 불리는 용어들 termini transcendentales dicti“

- 초월적 언어란 중세철학에서 매우 자주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는 책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파트 중에 하나인 범주론. 범주론은, 기본적인 개념, 우리가 사고하고 대화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을 말한다. 그러니까 범주를 다른 말로 하면 근간이 되는 개념/ 기초적인 개념.

- 그런데 이 중세철학이나 신학에서 쓰이는 초월적 언어는 기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기본적인 용어들을 말한다. 범주를 초월하는. 이를테면 존재자, 실재, 어떤 것, 일자, . 이 얼마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들인가. 존재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 즉 초월범주란 범주를 넘어서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것.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서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한 재밌는 작명이다ㅋㅋ 일반적인 걸 초월해서 독특해지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일반적인 degree를 초월해서 더더 일반적인 것이 되다니...)

- 스피노자는 이 초월범주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초월범주라는 것은 사실 아주 부적합하고 혼동된 용어라고.

 

* 칸트 철학에서 tranzendental은 두 가지 기본적 의미를 가진다

 

1) 가능성의 조건

 

- 가장 일반적인 뜻. 칸트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transcendental을 쓸 때는 가능성의 조건/근거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쓴다. 이를테면 데리다의 초월론적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 데리다가 초월론적 기의라고 말하는 것은 신이라든가 기원이라든가 옛날의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근원이 된다, 토대가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초월적인 기의 transcendental signified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화의 영역과 유희는 끝이 없다고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기의라는 단어 자체의 개념조차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칸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 특히 중세철학에서 우주의 근거는 신이었다. 스피노자가 정리1에서 사유가 신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증명에서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생각들은 양태이며, 양태들이 가능하기 위한 근거는 속성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게 바로 가능성의 근거라는 말의 전통적인 용법이다.

- 그런데 칸트는 다르게 말한다. ’칸트가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했다고 말하는 이유이자 칸트 철학이 특별한 이유다. 그는 우리 인식과 진리의 근거가 우리 주관 바깥의 객관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인식이 주관 바깥에 있는 객관 세계의 근거를 이룬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예전에는 우리의 인식이나 진리의 근거가 우리 바깥의 객관적인 실체 안에 있다고 봤는데, 칸트는 이것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나 객관세계의 근거는 우리의 주관 안에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주관이야말로 외부 세계나 우리 인식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이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 칸트가 transzendental이라고 말했을 때, 그 가능성의 조건을 칸트는 우리의 주관, 우리 주관 안에 내재해있는 선험적인 인식의 틀, 경험적인 틀에서 찾았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역시 객관적이고 자연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범주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사물을 사유하고 추론하고 인식하기 위한 제일 기본적인 개념들도 우리의 주관에 내재해있는 인식의 틀이라는 이야기다. 이게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 , 사유 인식의 존재의 근거를 우리 주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우리 주관 내부에 내재해있다고 보고, 인식의 근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transzendental 철학. 초월론적 철학.

- transzendent 철학은 외부에서 객관적인 세계에서 근거를 찾는 것(가령 신이라거나) transzendental 철학은 내부에서 찾는 것. 가능성을 내부에서 찾는 것.

- <순수이성비판>에서 초월()이라는 말은, 우리의 인식(경험)의 조건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 같은 감성의 형식 및 우리의 사유 범주들과 같은 지성의 형식, 그리고 초월()적 주체가 바로 우리의 인식(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2)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 이러한 인식(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한 탐구를 칸트는 초월()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 강의와 연관해서의 결론: 그러니까 transzendentala priori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꼭 염두에 두자

 

* 그럼 칸트와 스피노자를 비교한다면?

- 1부 정의4를 보면서 속성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Harry Wolfson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이런 식이다. “이라는 절대자의 통일성을 생각해봤을 때.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한하게 많이 있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자로서의) 신일 수가 있는가. ,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 유대신학에서는,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바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유대신학과 스피노자철학을 비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세유대신학에서 뻗어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

 

- 20세기 전반까지 해서 헤겔 + 울프슨의 주관적 해석론을 학계에서 대세로 수용.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주관적 해석론은 거의 사라지고 객관적 해석론이 대세가 되었다. 왜냐면 스피노자 텍스트를 고려해보면 그가 실제로 속성과 실체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 여러 텍스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254p에도 나와 있다.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아래 객관적해석론을 펼치는 주장을 보고 정리해본다면, 그 무한하게 많은 본질이 ->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 수렴되고(그러니 그 무한한 본질 자체가 이미 유일함으로 수렴), 이 실체가 때로는 이 속성으로 때로는 저 속성으로 때로는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비유를 하자면 무한까지는 아니지만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라는 하나의 인간이 때로는 이 상황에서는 이 속성으로 저 상황에서는 저 속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결국은 는 유일하다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스피노자가 말한 지성은 인간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 , 객관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해석론이 옳다. 저 구절이 객관적 해석론자들이 많이 근거 삼는 지점

 

C. 칸트의 경우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 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하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을 객관주의적 해석론으로 받아들이면, 칸트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칸트는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NO! 물 자체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 중)

 

- 속성의 주관적 해석론을 따르는 사람은 칸트적 해석을 따라는 것이다.

- , 우리의 지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

- 속성이라는 것을 지성이 세계를 지각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틀이라고 본다면,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은 범주가 될 수도 있고 시공간과 같은 감성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이런점에서 보면 스피노자 철학은 칸트와 아주 대조적이다. 실제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칸트는 스피노자를 대표적인 교조주의적인 철학자로 본다.

- 하지만 스피노자가 속성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 그렇다고 지각하는 것이라고 보게 되면, 이건 칸트식의 범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와 칸트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객관적해석론과 주관적해석론에 따른 입장이 칸트와 스피노자를 대조적으로 보느냐 비슷하게 보느냐를 좌우)

 

* 칸트용법 중 감성의 형식에서의 감성직관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 범주는 지성, 지적인 추론, 인식의 틀이고, 직관은 감성의 틀인. 칸트는 우리가 하는 감각적인 경험, 감각하는 자료들을 직관이라고 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관과는 상당히 다르다.

 

* 다시 2부 정리1의 주석으로 돌아가면-

 

- 스피노자가 2부 정리1의 증명에서는 독특한 사유, 이러저러한 생각에서 출발해서 사유속성으로 진행을 해간다면, 정리1의 주석에서는 아프리오리의 방식으로 증명을 시도하고 있다.

-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 증명의 마지막에 나온 문장인데, 주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

- 이 정리는 또한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명백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정확히 말해 논증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인 자명함을 제시하는 명제.

 

- 이 명제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이러한 자명성을 부여하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가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1부 정리9에서 다루었던 명제다.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이나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이러한 명제 자체에는 숨은 공리가 있다. 그것은 무는 특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부터 가장 완전한 존재자또는 절대적인 존재자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이나 완전성의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 2부 정의6도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것을 사유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그 사유하는 존재자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완전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무한한 사유하는 존재자무한하게 많은 것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자그 사유 역량(virtue)에 의해 필연적으로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역량을 포텐시아라고 하지 않고 vitrue, virtus 비르투스라고 한 것이 흥미롭다.

- 영어 virtue에는 라틴어 virtus에 들어있는 중요한 뜻이 빠져있다. 라틴어 vir라는 어근은 vis에서 나온 말인데 이 vis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르투스에는 이미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vir라는 어근이 담고 있는 이라는 의미가 탈락하고 도덕이라는 뜻만 남게 됐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이 나온다. virtu하고 fortuna.

- virtu 비르투라는 말은 비르투스의 이탈리아어. 포르투나는 우연, 운이라는 의미고 우연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여건을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두 가지를 정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말한다.

- 한국에 대입시켜본다면 비르투는 촛불, 태극기ㅋㅋ 같은 것이고 포르투나는 러시아나 일본, 중국 같은 외부 세력.

-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를 우리말로 역량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스피노자가 여기서 쓴 비르투스는 이라기보다는 사유가 자신의 본성으로 인해 갖게 되는 힘, 역량을 표현하는 말이다.

- 4부 정의8. ”나는 덕(virtus)과 역량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는 virtus이라고 번역했다. 4부가 주로 윤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1차적인 뜻으로 했는데, 이 말이 딱 맞는 말이다. 비르투스는 포텐시아다. 그런데 이것을 역량이라고 번역하면 역량은 역량이다라는 동어반복이 되는데, 어쨌든 뜻은 그렇다. 비르투스와 포텐시아는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

 

* 2부 정리1,2가 속성(신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2부 정리3,4는 직접적 무한양태에 대한 이야기다.

- 사유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무한지성

연장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 운동과 정지

연장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1부 정리16무한지성이 최초로 등장한다. 신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들(곧 무한 지성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 1부 정리30 현행적인 유한 지성이든 현행적인 무한 지성이든 간에, 지성은 신의 속성들 및 신의 변용들을 파악해야 하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 1부 정리17에서 정리33까지 이야기하면서 신과 관련한 스피노자의 독특한 점은 무한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고 무한양태로 간주한 점이다.

 

정리3 ”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의 본질 및 그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

 

* 정리3의 증명.

- 자신의 본질 및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 신학으로 말하자면, 전제한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정도의 의미.

신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 신의 능력을 갖고 있는 모든 것

 

* 정리3의 주석

 

우중들은 신의 포테스타스를 포텐시아라고 오해한다.

- 곧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understand himself 또는 인식한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을 지칭한다. 곧 어떤 사물의 정의에서 그 정의가 논리적으로 포함하는 특성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듯이(스피노자에게 definition이란 어떤 사물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그 본성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

- 스피노자는 1부 정리16의 증명에서 어떤 실재의 정의가 주어져 있을 때 지성은 그로부터 다수의 특성들을 도출해내는데, 그것들은 사실 그로부터(곧 실재의 본질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1부 정리34에서 우리는 신의 역량은 신의 활동적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신이 행위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부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다“.

- 저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활동적 본질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본질은 잠재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활동으로 필연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행위하는 본질또는 행위로 표현되는 본질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 ”현행적 지성 intellectus actu / actual intellect) 이라는 표현: 스피노자는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쓴 것은 잠재적 지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와 정 반대다. 그는 오히려 잠재적 지성’,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적인 능력 faculty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행되고 있는 지성의 활동으로서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바로 지성활동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행적 지성과 잠재적 지성

-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행적 지성의 반대말로 잠재적 지성을 말한다. ‘현행적 지성이라는 말은 원래 뜻대로 하면 지금 실행되고 있는 지성이고, 잠재적 지성은 지금 실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성의 본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그리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목수가 왜 목수인가. 지금 목수일을 하지 않는데? 집이라도 짓고 일을 해야 목수지.“라는 재미있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걸 구분한다. 잠재태와 현행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지금 비 오고 있는데 무슨 집을 져. 쉬어야지. 근데 쉰다고 해서 목수가 아닌가. 아니다, 목수다. 지금 발휘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지만 잠재적인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것. 잠재태. 가능태. 이걸 사람의 인식과 관련해서 보는 보면-

 

*** faculty 라틴어로 하면 facultas 파쿨타스.

 

- 우리말로 보통 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 서양의 인식론은 보통 faculty와 관련된 faculty psychology 라는 개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몇 개의 faculty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정신 중에는 욕망을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이성적 능력 지적인 능력만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어떤 부분은 의지라는 정신의 활동을 전담하는 faculty가 있다는. 이성의 파쿨타스, 감각 또는 상상의 파쿨타스, 의지의 파쿨타스. 이런 개념.

-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그것을 마차와 말의 관계로 표현한다. 말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잘 듣고 하나는 자기 멋대로 날뛰고, 후자의 말이 욕망이고.

 

- 스피노자는 이 파쿨타스라는 개념을 굉장히 싫어한다. 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이 몇 개의 파쿨타스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 개념을 부정한다. 정신은 이런 게 아니다. 스피노자가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현행적 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잠재적 지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지 않지만 지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잠재된 게 있다고 생각해서 현행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다. 내가 볼 때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행되고 있는 지적인 활동, 그게 바로 지성이다.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작용하려고 지금은 쉬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지성이라는 것은 항상 작용 중에 있고 작용 중에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지성 그 자체다.

 

- 존재하는 것은 항상 현실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목수가 목수로 존재하려면 365일 내내 집만 져야 한다, 자고 있는게 무슨 목수냐. ”앉아있는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이 비가 와서 쉴 때도 있지만 가지고 있는 잠재태. 가능태. potential potentia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능력. , 능력이 때로는 actualize되지만 포텐셜 상태로 있을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 그러나 신의 본질 자체는 신의 포텐셜리티가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게 아니라 신의 포텐셜리티는 필연적으로 actualize된다는 것이다.

- 신에게는 발휘되지 않은 여운의 능력이란 없다. 잔여를 남기지 않고 모두가 actualize. 가능태 현실태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

 

- 그러니까 저 앞의 활동적 본질은 풀어서 말하면, 행위로 다 표현되는 본질을 말한다.

- 저들처럼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따라 행사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해방식일 뿐만 아니라, 신의 역량을 무기력 impotentia’로 이해하는 것이다.

- 신은 자신의 역량, 곧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행사하며 이것이 신의 본질 자체이지만, 인간의 경우는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필연적으로 행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과 수동성의 존재론적 뿌리다. 따라서 신의 역량을 자유의지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모델에 기초하여 신을 이해하는 것(신인동형론)일 뿐만 아니라, 신이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무기력한 존재자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가 보통 능력이라는 말을 쓸 때 그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이해된 능력이다. 완전히 actualized 되지 않는, 무언가 잠재된 여분이 남아있는 것으로서의 능력.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역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1부 정리35 우리가 신의 권능potestas 안에 존재한다고[신의 권능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스피노자가 여기서 이 능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능력이라는 말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고 좀 덜 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1부 정리35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포테스타스는 그렇게 실현되고 말고 덜 되고의 여지가 없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라며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 즉 역량으로 그 뜻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이해하면 그건 필연적인 역량으로서 포텐시아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 그러니까 원래 있던 포테스타스라는 말을 스피노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능력이라고, 포텐시아라고 의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 보면 포테스타스라는 말과 포텐시아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이나 불구스들 같은 경우에는 자유의지에 따르는 능력하고 이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실행되고 실행되지 않는 능력의 여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능력,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능,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둘 다 필연적인 능력으로서의 포텐시아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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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근처는 어쩔 수 없이 힘들다. 오늘은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며 이런저런 것들을 다 건드리는 바람에 깊은 우울감에 빠져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하지를 못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 상태가 이 지구에서의 나 그 자체 같다. 대체 무엇을 위해? 라는 의문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마다 따라붙었다. 며칠 사이 잔뜩 쌓인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의문부호들을 일단 툭툭 털어내고 내 앞에 펼쳐진 내 몫의 삶의 계단을 한발한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늘 그랬듯이. 정말 그러는 수밖에 없나 갈 곳 없는 미안함들과 죄책감들과 괴로움들을 어딘가에 토로하는 것도 사치스러워서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에다가만 잠깐만 부려놓는다 답답해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계단을 오르겠다 내일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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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타임 에코백.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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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오래 전의 일기 (feat.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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