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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그러다가 결국 "특별한 나"를 잘 알아줄 것은 과학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것 밖에 없다고 여겨 오컬트나 신앙에 빠져 별점으로 세상과 나 자신과 타인을 파악하고 읽어내려든다거나 성경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여 가치판단을 내린다거나 하는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고.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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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강의들이 그랬지만 22강은 특히 내가 이런 강의를 매주 듣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무척 감사했던, 살다보면 이런 강의들을 만나는 날들이 있구나 세상에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파고들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구나 싶은 생각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꽉 채웠던, 그런 강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강의라 그 어떤 날보다 몰입도가 커서 끝나고 나니 마치 2시간짜리 중요한 PT를 혼자 진행하고 나온 직후의 상태가 되어 홀가분한 마음에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았다. 새벽까지 이날의 수업과 스피노자 이야기만 계속 했던 것 같다.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에 대해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정치학적 의미로 나누어서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그러는 와중에 잠시 뻗어갔던 다른 철학자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살펴봤던 것도 좋았고, 번역에 대한 선생님의 조용한 분노ㅋㅋ와 그에 따른 고민도 좋았다.

 

존재론-신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항상 현행적인 힘이지만(신은 항상 능동적일 뿐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의 인간의 문제가 되므로 인간은 신처럼 항상 능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 대신에 이 포텐샤가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되는 코나투스로 표현되고, 그러면서 포텐샤가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의 문제가 되는 것, 그래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가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쟁점을 갖게 되는 것, 그 쟁점의 핵심이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의 문제이며, 이것이 던져주는 목표가 인간의 수동적인 정서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동성을 얻는 길이라는 것. 이렇게 죽 이어지는 흐름이 참 좋았다. 그 이전까지는 나도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막연하게 일의적인 대립관계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텐샤와 포테스타스가 그 원 개념의 코어는 유지한 채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를 얻어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이 두 단어의 세계가 내 안에서 확장되면서 좀 더 살아 움직이는 개념들로 다가왔다.

 

그런데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이 주장한 신체에 대한 정신 내지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은 들을 때마다 마치 요즘 시대의 노오~~!” 만능주의 같아서, 이건 또 다른 맥락 내지는 지나치게 1차원적 대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회구조적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고민을 덮어버리고 개인의 삶을 수동화 보수화시키는 노오~~!이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를 반비례로 생각하면서 했던 말 중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는 조금 흥미로웠다. 학문적인 흥미는 아니고 그 예로 든 게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 그러니까 수다스러움과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하는 문제여서. 뭐야, 너 비밀 지키기로 해놓고 안 지켰어? 역시 넌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해! 이런 거 중22한 먹물 룸펜 캐릭터의 대사로 꼭 써보고 싶다ㅋㅋㅋ

 

그러면 상대방은 아니, 정신의 포테스타스가 약한 게 아니라 나의 코나투스의 발현이었을 뿐이었어라고 대답하는 캐릭터여야겠지?ㅋㅋㅋ 지난 강의에서 선생님도 이야기하셨지만 이런 부분들이 정말 프로이트나 행동심리학의 이론들과 비슷한 것 같다. 그냥 부주의해서 한 실수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비밀을 발설해버린 것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냥 한 말 같지만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리고 대개 그 무의식은 욕망과 바로 이어져있다. 저 위의 상황, 수다스러움이나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대입해서 데카르트와 비교해보니 스피노자의 해석이, 가상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고 꼬집은 것이, 인간들의 자유의지의 허상을 지적한 것이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인 지금도 아직도 한 인간의 행동을 두고 데카르트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도 친구와 결국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의 욕망과도 관계를 맺는 것과 같고, 그 욕망과 어떻게 지내는지가 결국 관계를 결정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욕망을 빼놓고는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존재론-신학적 의미,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로서의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정치학적 의미를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을의 민주주의>의 어떤 부분들도 겹쳐서 생각났고, 시에예스의 pouvoir constituantpouvoir constitué를 거쳐 벤야민을 거쳐 네그리, 우리의 네그리ㅋㅋㅋ 그래도 네그리의 포테스타스 노선과 포텐샤 노선을 나눠 근대사회까지 관통하려드는 패기어린 담론도 흥미로웠다(이런 사람은 절대 정치가가 되면 안 될 것 같다....). 법 정초적 폭력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선생님의 예로 드신 민족 해방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뤘지만, 제국주의를 물리쳤더니 독재를 맞이하고 내전에 휘말려 더 큰 비극을 겪는 나라들도 그렇고(제국주의에서 독재로 빠지게 되는 맥락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새삼 너무나 씁쓸했다) 한국 현대사도 그렇고 당장 페미니즘 운동부터가 그렇고 개개인들의 개인사만 살펴봐도 포텐샤가 포테스타스가 되었을 때 단지 제헌적‘ ’제정적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도 포테스타스가 되는 경우들, 너무 많으니까.

 

그나저나 역능같은 너무나 기괴한 말로 한 분야에서 이어져오는 말의 계보를 흐뜨려버리는 거, 내가 학계 사람이었으면 진짜 질색했을 것 같다. 예전에 석사논문 쓸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외국 원서보다 한국 학자들의 박사논문이 읽는 게 훨씬 어려웠다는 점이다. 물론 공부를 시작한 게 외국이었다보니 전문 용어나 전문 개념들을 애초에 영어로 익혀놨기 때문에 번역된 용어나 개념들이 눈에 익지 않아서도 있었겠지만 너무나 생경하고 대체 왜 이렇게 번역했지?? 싶은 용어들이 너무 많았다. 언어의 계보가 그렇게까지는 상관없는 그쪽 분야도 그랬을 진데, 철학 같은 학문은 번역 하나가 좌우하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 같다. 특히 한국의 학계 규모에서는 더욱. 그래서 가끔 선생님이 단어 하나를 두고 고민을 하시거나 이건 왜 이렇게 번역을 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 설명해주실 때 좀 좋다. 저 단어를 최근 몇 년 갑자기 보신 것도 아닐 텐데 아직까지, 최소 몇 년 길게는 십 몇 년 이상의 두께를 가졌을 고민을 내비치실 때 반성도 좀 하게 된다. 한 땀 한 땀을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기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기울 옷이 없더라도 어쩐지 내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역량이라는 번역에 대해 강의록 마지막에 덧붙이신 글이 무척 좋았다. 역량이라는 단어에 이런 세계가 숨어있는지 몰랐다. 너무나 당연한 듯 가져다 써온 역량이라는 단어에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해온, 심지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까지 양적인 세계 안으로 들여놓기 위해 노력해온 철학자들의 뜻에 대한 존중과 리스펙트도 함께 담겨있는 거였다. 학자로서의 당연한 고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거 좀 멋지다고 생각한다. 대문자P와 아포스트로피에 달라붙어있는 고민 같은 것.

 

<<< 우리가 포텐샤를 역량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기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이나 실재성” “완전성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완전성의 정도또는 포텐샤의 차이”(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비교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날의 잊지 못할 피날레. 정리4의 미스테리. 최근 몇 년간 머리를 풀가동해서 풀어봤던 수수께끼 중 가장 근사한 수수께끼 아니었을까. 평범해 보이는 정리4의 저 한 문장을, 단어들의 배치를 살짝살짝 바꿔가며, 정체를 감추고 조용히 숨어있던 대명사 하나하나를 파헤쳐 수면 위로 올려놓아가며, 미스테리한 문제적 문구로 조금씩 만들어나가던 선생님의 추리를 따라가며 약간의 서스펜스마저 느꼈다.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나의 안일한 생각: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1부에 나왔던 정리들과 슐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비교 대조해보니 검은색 물감이 묻은 두꺼운 붓으로 도화지를 슥슥 그은 자리마다 흰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밑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이상한 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신의 관념의 자리에 한 쌍으로 볼 수 있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직접적 무한양태인 운동과 정지를 놓고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까지 따져볼 때는 브라보! 외치고 싶었다ㅋㅋ

 

이렇게 평범해보이던 문장이 의문투성이의 수수께기가 됐는데 그 실마리를 찾아오는 곳이 <에티카>의 다른 정리나 주석도 아니고 하필 원본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초기저작인 <소론>의 한 페이지라는 점도 너무 극적이지 않아? 무슨 고문서에서 실마리를 찾아 암호해독하는 것도 아니고ㅋㅋ 게다가 그 열쇠가 표상적으로였다니 진짜 좀 감동받았다.

 

저 문장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서 그 답까지 찾아가는 이 과정 전체와 그 답이, 철학을 잘 모르고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해봤다 싶은 경험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이런 게 철학의 매력인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수수께끼의 답  형상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지만, 표상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가, 내가 처음에 했던 안일한 생각인 아니, 신으로부터도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니까, 그냥 관념도 아니고 바로 그 대단한 신의 관념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와 언뜻 보면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ㅋㅋㅋㅋ 하지만 이제 알지, 저 두 문장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형이상학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 정말 아름다웠다 정리4의 미스테리.

 

정리4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은 유일할 수밖에 없다.“

 

정리4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신의 관념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스피노자 용법대로 하면 신의 관념은 직접적 무한양태니까 다시 바꿔서 말해보자.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이 따라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에티카 원문을 봐도 대명사로 표현되어있지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일단 1) 상위개념인 실체나 속성은 아니라는 것, 2) 양태로부터는 양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무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만 따라 나오기 때문에 유한양태도 아니라는 것(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이 나온다라고 하면 이건 그 이전의 창조론으로 가야한다ㅋㅋ)

- 그렇다면 무한양태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무한양태가 무한하게 많다는 결론이니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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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오래 전의 일기 (feat.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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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을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굉장히 공감갔고 일견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프로이트에 잠시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죽음충동 이론과 (이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를 찾아 읽었었다. 소설은 그냥 그랬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멋지게 변주된).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근저에는 현행적 본질로서의 코나투스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사람에게는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속하려고 애쓰는 방식 중 하나가 죽음일 수 있는 역설적 상황들, 많지 않을까?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15에서 이야기했었지만, 그런 것처럼, 어차피 나라는 인간 하나가 죽어도 실체적으로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어느 순간 코나투스로서의 죽음충동을 느끼는 것은, 연장으로서 존속하는 것이 힘에 부칠 때, 연장으로서 존속해나갈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느꼈을 때, 나의 소멸이 실체의 소멸이 아님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연장으로서의 삶이 끝나도 어떤 형태로든지 실체로서는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를테면 누군가의 기억속에) 코나투스의 회로를 연장에서 실체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연장으로서의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실체로서의 세계는 또 다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을 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필수적 요소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연장으로서 더 이상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죽음으로서, 존엄이 다한 연장으로서의 나 자신은 소멸시킴으로서, 실체로서의 인간적 '존엄'은 존속시키겠다는 의지일지도.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 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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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스피노자와 연관시켰을 때 스피노자가 부각시킨 작용인과 스피노자가 질색했던 목적인개념이 흥미로웠다. 나도 많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촘촘한 결들을 목적으로 소급해버릴 위험이 다분한 목적론이 질색인데(‘먹고사니즘같은, 천박하지만 강력한 원인소급도 결국 이런 맥락), 과거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 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 이 시간의 혼란이 가져다주는 욕망의 혼란이 흥미로웠다.


강의에서 목적인의 예로 든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는 사실 산책은 건강의 원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목적인적인 논리로서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진다.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으므로 건강이 산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산책을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이미 산책이 건강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명사의 순서를 반대로 뒤바꾸어도 말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후자는 뻔하지만 전자는 나의 의지가 좀 더 강조되기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느낌이 나고, 거기에 시간을 살짝 헝클어놓는 맛이 나기 때문에 매력적이지. 재미를 위해 약간의 맥락을 지우면 건강의 결과가 산책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살짝 비트는 표현, 재미있잖아.


게다가 건강 때문에 산책을 시작했다 같은 단순한 상황묘사에서 좀 더 나아가면 별 의미 없었던 과거의 어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여지조차 있다. 이를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그동안 (시행착오인) 연애들을 계속 해온 것 같다” “내가 (현재 너무나 의미 있는) 이 일을 하게 되려고 그동안 많은 기회들을 놓쳤나보다같은 것.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이나 후회나 회한으로 남겨진 사건들에, 그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기 위한, 나에게 커다란 충만함을 안겨주는 당신이나 이 일을 만나게 만든 결과라는 의미를 덧대면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조금 더 그럴듯해진다.


매력적이자 기만적인. 스피노자와는 다른 이유지만 역시 나도 목적인이 마음에 안 든다ㅋㅋ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위안이나마 적절히 섞는 게 필요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 나 스스로가 목적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경계하되, 누군가의 목적인적 태도를 함부로 기만이라고 폄하하지는 말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1. 질료인 material cause : “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 조각상의 원인이고...” , 질료인은 그것으로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형상인 formal cause :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과 그런 유들)의 정의이다.” ,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이다.

3. 작용인 efficient cause : “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 , 운동인/작용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질료인과 형상인은 사물에 내재해 있지만, 작용인은 사물에 외재해 있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라는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4. 목적인 final cause : “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 , 목적인은 ?”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작용인은 과거에 존재하고, 목적인은 미래에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형상인,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 중에 스피노자는 작용인을 부각시켰다. 사실 이건 17세기 후반에 과학혁명을 정당화하고, 과학혁명에 부합하는 어떤 형이상학 철학을 만들려고 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작용인을 중심으로 해서 재구성하려는 작업.

- 작용인 외에 목적인이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했던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비판하는 입장.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네 가지 원인 중에서 작용인만이 실제로 자연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원인인 것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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