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11 인간정신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는 이미 2부 정의3에서 관념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나는 관념을 정신이 생각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인간 정신을 관념이라고 명확히 제시한다. “인간정신은 관념이다라고 정리하는 첫 정리. 스피노자의 관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대로 표상이라고 받아들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이 없는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사유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관념이며, 따라서 관념은 자신의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고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실재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는 실재다. “관념은 양태다라는 말은 관념이 실재다라는 말과도 같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달리 말하면 인간 정신과 동일한 관념이 있으며, 또한 뒤에서 계속 보겠지만, 인간정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관념으로서의 정신이 산출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이다. ,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인간 정신이 만들어내는, 혹은 소유하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관념이 담겨있는 상자나 틀 같은 그런 것.

-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데 존재는 라틴어로 하면 esse, 어떤 경우에는 essentia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현행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현행적 본질과 같은 뜻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리11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정신은 관념이다이다. 어떤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그렇다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는 무엇일까? 아직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신체다. 그러니까 정리11신체의 관념이 바로 정신이다라는 말이다.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 신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 정리11의 증명

 

-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 정리10의 따름정리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그랬고, 여기서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스피노자가 변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태로 대체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에는 예를 들면 사랑, 욕망, 의지 등등이 있다.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실재의 관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2부 정리8의 따름정리에 의해) 관념 그 자체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관념일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실재는 아닌데, 왜냐하면 무한한 실재는 (1부 정리21과 정리22에 의해) 항상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2부 공리1”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인간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이다. Q.E.D.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이것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명제다. 유한지성을 지닌 인간 정신은 무한 지성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서부터 따라가기 다소 어려운 결과들(이어지는 내용들)을 도출한다.

- ”인간정신의 본질은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 ”인간정신은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라는 점은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과 반대에 있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 창조론은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다. 영원진리가 어떻게 창조가 되는가. 영원하다면서?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데카르트가 1630년에 메르센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논리적 참과 거짓, 필연적 법칙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 1+1=2 같은 영원진리를 신이 창조했다는 말은 이미 이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가 있다. “창조가 됐다는 말은 어떤 일에 시작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 그리고 영원진리창조론의 맥락에 생각하면 지성과 의지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의지가 지성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즉 의지의 힘이니까. 신학적인 면에서 신이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의지다. 지성이라는 것은 진리를 의식한다는 것. , 영원진리랑 관련된 것이 지성. 그러니까 영원진리를 창조한다고 하면 당연히 의지가 지성의 위에 있는 것이다.

- 이 논리를 따르면 또한 신과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게 되어버린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없으니까. 영원진리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폐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이 전능하다는 이야기는 신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고작) 영원진리를 이해하는 것이니까.

- 데카르트는 자연법칙에 신이 따라야 한다. 신이 자연법칙을 준수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스토아 철학처럼 신을 운명에 종속시키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에세 신의 전능은 그 모든 필연을 초월하는 것.

 

-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유한해서) 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알긴 알되 두 개의 단어로만 안다. entendre comprendre. 데카르트는 저 두 단어를 구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entendre 할 수는 있겠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후자는 거대한 나무를 완전히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의 본질을 완전히 다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신에 대해서 우리는 entendre할 수는 있지만 comprendre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comprendre는 라틴어의 adaequatio 같은 것. 외부 사물과 우리의 지성이 일치하고 합치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아다이콰치오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며, 인간 지성과 신의 지성에는 괴리가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괴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들으면 아니, 인간지성이 신의 지성의 일부라니!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지각한다고 말할 때 신이 지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한다고 말할 때,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또는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이 신은 무한한 신이 아니다.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자연전체로부터 개체화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신이 어떻게 개별정신으로 분화되어가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덧붙이면 <인간 정신과 본성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 인간 정신에 변용되는 한에서>는 인간정신이 개체화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유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지는 정리13에 가면 알 수 있다.

- 이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 정신이 다른 관념들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과 연쇄를 이루고 있는,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속에 실존하는 한 양태인 한에서, 인간 정신이 이것 또는 저것을 지각하는 것은 정리9에서 말하듯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 지각하는 것과 같다. 또는 인간정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다. 이는 1부 정리34, 36, 그리고 2부 정리3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인간 정신에 의해 전개되는 한에서의 신의 사유역량이라고 말할 수 있으, 나중에 3부 정리7의 표현을 선취한다면,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인간 정신: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 인간 정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는 한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 코나투스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인간 정신과 동시에 그것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 이 관념 또는 저 관념을 갖는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 정신이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부 정리14에서 정리29까지 전개될 부적합한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한에서의신이라는 것은 인간 정신의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 따라서 인간 정신이 적합한 또는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 정신은 바로 무한한 사유역량으로서의 신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그 뒷문장은 인간 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관념도 갖는 한에서의 신을 말하고 있다. 이때의 신은 앞문장 속 신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내적인 사유역량을 구성하는 신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인간정신의 역량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정신은 신의 사유역량을 부분적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 지각한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때의 신은 인간정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구성하는 신 -> 인간의 정신은 그 일부일 뿐이다 -> 그러므로 부적합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 즉 결론은 인간정신은 진리의 역량을 갖고 있지만, 부분적/제한적으로 가질 수 있다

 

*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에서 표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이 표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 중에 하나로 그는 “pli”라는 어간이 들어가는 세 가지 용어에 주목 한다. le plithe fold ‘주름이라는 뜻으로 그는 이 말을 키워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설명하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라는 책을 1988년에 펴낸다.

implicare/ explicare/ complicare

- implicare는 함축하다, explicare는 보통 뜻으로 말하면 설명하다가 되겠지만 존재론적인의미로 하면 펼치다’. 가령 본질을 설명하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펼치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complicare는 원래대로 하면 무언가를 뒤엉키게 하다’, ‘서로 얽히게 하다라는 뜻인데 들뢰즈가 complicare를 주목할 때는 신 또는 실체가 만물을 감싸안는 것, 포괄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들뢰즈는 <표현의 문제>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 사실 스피노자는 implicare라는 용어를 에티카에서 한 번 밖에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implicare 대신에 involvere를 쓴다. 1부 정의1,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도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에서 involvere를 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함축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이 involvere를 쓰면서 어떤 경우에는 implicare를 쓴다. 사실 들뢰즈는 속으로 굉장히 아까웠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왕 같은 뜻이라면 involvere 대신에 implicare를 써줬으면 어미가 딱딱 맞을 텐데. 어쨌든 그는 스피노자를 직접 인용할 때는 involvere를 쓰지만 같은 뜻이니까 involvere라고 쓴 것도 implicare라고 간주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implicare를 써서 세 개의 구도를 쓴다. 들뢰즈의 의도, “pli”라는 어간을 갖는 세 개의 용어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표현 개념을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정리12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 정신에 의해 지각되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관념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곧 만약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 물체라면, 이 물체 안에서 정신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우리가 2부 정리7에서 살펴본 이른바 평행론명제, 또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명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과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은 같은 것이고, 신의 사유역량과 신의 현행적인 행위역량이 동등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나오기 때문에, 정리12의 증명에서 말하듯 정리9의 따름정리의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스피노자가 정리12의 주석에서 말하듯 정리122부 정리7의 주석에도 근거를 하고 있다.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안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안에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그러니까 항상 어떤 속성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른 속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상응하는 것이다. 정리12에 들어가면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 다 지각이 된다고 말하는데 연결된다.

 

- 따라서 2부 정리12의 명제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2부 정리12의 명제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제의가 된다. 다음 같은 회의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이 자신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각해야 한다, 또는 정신 속에는 이것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지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가령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변화들을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일까? 세포 하나하나의 생성과 소멸까지 다?

정리7의 주석의 저 문장을 잘못 읽게 되면 굉장히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이것을 가령 인간의 정신과 신체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은 사건과 그 사건에 상응하는 정신 안의 관념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신체라고 하지만 신체의 수준이 다 다른데,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 들어가면 세포가 있겠고, 그렇다면 이 세포가 죽으면 정신 안에 이 세포의 죽음을 인식한다거나 이 세포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념이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에 봉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포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저 문장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에 다 1:1 상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다 상응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스피노자가 하려는 말은 그것과는 다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전체로부터 인간을 돌출해내는 마지막 정리이다.

-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물체(‘신체물체는 똑같이 corpus), 다시 말하면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라고 주장한다. 만약 신체 또는 연장의 어떤 양태가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면, 관념 역시 실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2부 정리11의 증명). 그러니까 정신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잠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 이것은 나중에 5부에 가면 신학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4부에서 정신과 신체는 어떤 관계인가, 신체가 사라져도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5부에 가서 영혼불멸에 대해 비판한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바로 그 영혼불멸론에 대한 부정.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은 유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니까.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신체와 분리된 영혼,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는 5부에서 영혼불멸론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데 정신에는 영원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의 불멸성의 차이가 뭘까. 그런 질문이 많이 제기가 된다.

 

* 정리13의 증명

 

1) 만약 신체가 인간 정신의 대상이 아니라면-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은 신이 우리의 정신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실재의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 신 안에 존재할 것이고 ->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은 그 다른 실재의 정신에 있지 우리의 정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고 ->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신체다.

2) 만약 신체 이외에 또 다른 정신의 대상이 존재한다면- (1부 정리36에 의해) 그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정신 안에는 이 다른 대상의 결과에 대한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할 것이고 -> 하지만 2부 공리5에 의해 그것에 대한 관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 따라서 우리의 정신의 대상은 실존하는 신체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벌써 다 예측하고 공리로 넣어 놨다ㅋㅋㅋ 우리가 공리를 읽을 때는 이 이야기가 왜 여기 나와 있나 했는데 이때 써먹으려고ㅋㅋㅋ 공리로 넣어놨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겠다, 우리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명한 진리로서 공리로 설정해놓은 것이다. 아마 스피노자가 물리학 자연학에 관한 책을 썼다면 이것을 공리로 놓지 않고 아마 증명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연학책이 아니라 윤리학책이니까,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가 이 책에서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신체가 무엇인지, 우리 신체의 본성이 무엇이고 특성이 무엇이고, 근육은 어떻게 되어있고 같은 생리학적 설명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인가. ? 우리의 신체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과 우리의 인식 능력, 지적 역량이 향상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우리의 신체 역량이 향상되고, 우리의 지적 역량이 향상되어야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능동성을 갖게 되고, 우리가 능동성을 획득해야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스피노자 에티카의 목표인 것이다.

- 하지만 (2부 공리4에 의해) 우리는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공리4에서는 느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느낀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지각, 인식방식이다. 스피노자가 느낀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는데, 아마 칸트였으면 이것을 내감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 인간이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지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 여기에서 느낀다라는 말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2부 공리4에서 이미 느낀다sentimus sentir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스피노자가 느낀다고 쓴 표현은 감각적인 지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각하다는 동사가 주로 외부 대상이 우리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일 내지 사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가리킨다면, “느낀다는 동사는 우리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느낌은 부적합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느낌이 다 부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표현도 다소 애매하다. 에드윈 컬리는 “The human body as we aware of it”이라고 번역했다. sentimusbe aware of로 번역. 그런데 저 영어 번역도 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라틴어에 prout라는 단어를 컬리는 as로 번역했다. 느끼는 대로, 자각하는 대로, 감지하는 대로. 그런데 이 prout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좀 불분명하다. 여기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1) ‘인간 신체가 우리가 느끼는 바와 똑같이, 실제 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느낌이 신체의 본성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말은 인간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경우에만 실존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우리가 대상으로서의 신체를 느끼는 경우에만,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에만 신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가 느끼지 않으면 신체는 존재론적으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존재론적으로 무. 이것을 철학사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험론자였던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같은 사람이 한 유명한 말 존재는 지각이다로 대표되는.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이 전제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의 명제로 이해하는 것이니까, 같은 명제를 주장한다는 의미이니까 역시 부적절하다.

3) 아니면 2)와 다르지만, 신체는 우리가 느낌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CT를 찍고 MRI를 찍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의학교과서나 생물학교과서를 통해서 인간의 신체가 어떤 것인지 아주 정확한 인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신체를 느끼는 것, 배고프면 허기가 느껴지고 졸리면 졸음이 느껴지고 아프면 고통스럽고 이런 방식이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인식하는 가장 1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 적합한 인식을 얻기 전에 원초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지각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이다.

- 스피노자가 해야 한다내지 필연적으로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모종의 예외나 통계적 경향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반드시 지각해야 하고, 정신 안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관념이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재론적 질서에서 볼 때 우리가 2부 정리7 이하의 명제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리12의 명제가 따라 나오게 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리12의 명제는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1) 원칙적인 인식의 가능성: 스피노자는 정신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노력을 기울이면(여기에는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즉각적으로 다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해볼 수 있다.

2) 관념의 대상의 본성: 스피노자가 여기에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했을 때, 이 대상은 관념에 상응하는 대상, 곧 관념과 합일을 이루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곧 이때의 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입각하여 우리의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지, 우리의 경험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 가령 내시경이나 전자현미경 또는 CTMRI 등을 통해서 비로소 식별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 정리13의 주석

 

이로써 우리는 인간 정신이 신체와 단지 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의 연합을 무엇이라 이해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긴 말 하지 않고ㅋㅋ 이 한 문장으로 여러 사람(데카르트 중세스콜라철학 기독교 철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 데카르트. 데카르트도 정신도 실체고 신체도 실체고 상이한 두 실체가 합일을 이루는 게 인간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말처럼 유한 실체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합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데카르트처럼 이러한 합일이 실체들 사이의 합일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게 된다. 이는 2부 정리73부 정리2, 5부 서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합일은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그 대상으로서의 합일이다.

- 중세 스콜라철학. 따라서 정신 내지 영혼을 인간의 실체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철학적인 관점도 배격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정신 내지 영혼이라는 형상과 신체라는 질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혼이 능동적이고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영혼의 능동성과 신체의 수동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콜라철학적 관점과 데카르트는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 데카르트는 이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는 신체가 정신 내지 영혼에 대해 수행하는 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정념들의 힘을 제어하는 것, 따라서 능동적인 정신이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유덕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 후기 데카르트 철학의 어려운 점은, 데카르트 자신이 정신이라는 것은 사유의 질서에 속하고 신체라는 것은 연장의 속성에 속한다, 이 양자는 서로 섞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해놓고 합일을 이루고 있다고도 이야기하는 것. 어떻게 서로 섞일 수 없는 게 합일을 이루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 더 나아가서 데카르트가 나중에 <정념론>에서 정념 passion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정신에 능동적으로 작용해서 영혼에 생겨난 관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신체가 우리 영혼에 작용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신체가 능동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우리 정신이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정념을 갖게 된다고. 그런데 정념의 영향을 받게 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 사람은 뭔가 일관성 있는 삶을 살기 어렵고, 유덕한 삶을 살기 어렵고, 도덕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유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정념을 억제해야하고, 그러려면 반대로 정신과 의지가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서 신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신체의 능동성을 억제해야 정념의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경우 신체와 정신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데카르트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이 명제를 가지고 데카르트의 심신상호작용을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간학도 잘못됐고 데카르트의 윤리학도 문제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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