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스피노자와의 대비로서 잠깐씩 접할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받는 인상은, 조금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의 세계는 어쩐지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아무 것도 없는 라는 상태도 존재와 대등한 것이라며 던졌던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그의 질문도 그렇고, 관념이 어떻게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정신을 굉장히 내면화되고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이런 개별적인 정신과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던지는 질문도 그렇다. 나에게 그의 철학적 세계는 어쩐지 (신을 향해서든 스피노자에 대해서든) 구애적이고 다소 맹목적이고 따뜻하고 의리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약하고 나이브한 소년의 그것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스피노자는 매우 냉정하고 단호하면서 이성적이고 강건한 느낌(물론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로맨틱하고 나이브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지ㅋㅋㅋㅋ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을 보기 전에는 스피노자의 관념론에 개별적인 정신, 마음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정신만 존재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닫지 못한 건 아니다.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물성이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계량이 가능하고 법칙화가 가능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면에 숨어있는 뜻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정신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당연히 정신을, 선생님 표현을 빌면, public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히 public한 것이고 사물 같은 것이고 계량화할 수 있고 법칙화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좀 더 거칠게 말해 개개인마다 갖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어떤 결여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을 접할 때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외부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마다 갖는 감정 느낌 기억들은 다 다르고 그것대로 특별하겠지만, 그것들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죽 늘어놨을 때(그렇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그걸 건져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면 정신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해독해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문제제기를 한 것을 보고나서야 아,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자기 자신, 혹은 인간이라는 종의 어떤 내면이나 정신을 유달리 특별하고 내밀하고 굉장히 사적이며 조금 중22한 표현을 빌면 아무도 내 마음 알 수 없어“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라고 여기는 유형의 사람을 매우 피곤해하는 편인데 이런 상태를 뜻하는 창문이 없는이라는 표현이 무척 좋았다.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지상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창문으로 그 안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만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한 번도 보지 않는 바람에 자신의 집에 창문이 달려있는 줄 전혀 모르는. 그래서 아무도 이 집 안을, 집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혹은 니까 나의 정신이나 내면 안에 무언가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함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고, 나의 감정은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기에 스피노자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라이프니츠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것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관념은 사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확 깨부수어 버리는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참 무자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 나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다 못해 어떤 특출한 정신과의사도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몇 번의 상담, 백 마디도 안 되는 말들 속에서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냐며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다거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 피해의식의 집을 쌓고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버린다거나(아마도 그 집은 매우 높은 천장에 창문이 달린 지하에 지어져있는 집일 것이다), 아집 속에서 듣기 좋은 말,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는 것은 더 무자비한 일이다.. 그러다가 결국 "특별한 나"를 잘 알아줄 것은 과학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것 밖에 없다고 여겨 오컬트나 신앙에 빠져 별점으로 세상과 나 자신과 타인을 파악하고 읽어내려든다거나 성경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여 가치판단을 내린다거나 하는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고. 

 

나는 관념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독자적인 사물,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스피노자 철학이,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정신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모든 것이 정신화 되어있다는 말도 무척 좋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를 라이프니츠의 비판 덕에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라이프니츠의 [보편정신 학설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이 정신화되어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2부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정신을 신체의 관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라이프니츠 비판의 또 다른 논점은 관념과 정신, 관념과 영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영혼(정신) 안에 관념들이 담기는 것이고 영혼(정신) 안에서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 스피노자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신을 관념이라고 생각한다니.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수 있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담겨있다.

 

심리학 또는 심리철학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 인간의 심리적인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이다라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정신, 심리가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과학적으로 법칙화하거나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introspection이라는 말을 한다. 내성. 자기성찰. 어떤 심리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이런 시기에는 내성의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20세기 중반쯤 미국에서 행태주의라는 게 나오면서 심리적인 것을 어떤 외재적인 행동처럼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식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인간의 심리, 정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방식, 스피노자는 후자의 방식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정신, 심리적인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 말하자면 창문이 없는 것.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이라는 건 관념이고, 나중에 정리11에 가게 되면 정신은 무한지성의 일부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서 정신이라는 건 전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있고 개방되어 있는 것. public한 것. 그러니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의 생각은 참 이상했을 것이다. 스피노자를 반박한 이 글의 제목에 보편정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라이프니츠가 볼 때 스피노자 철학에는 개별적인 정신, 마음, 이런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무한지성 같은 보편적인 정신만 있지 개별화되고 내면화되고 사적인 그런 정신은 없는 것이다. 개채성.

 

어쨌든 우리가 라이프니츠 인용문에서 보듯이 라이프니츠가 parallelism을 쓰는 맥락을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우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 아니라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구별되는 자기 철학을 말하기 위해 쓴 용어다. 이 용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고 이론화하기에는 이 용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 평행론을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평행론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평행론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정리7, 따름정리, 주석에서 말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주장인데, 표현들은 약간 다르지만 요점은 이거다. 1)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고 2) 인식론적 평행론이 있다. 존재론적 평행론이란, 하나의 동일한 질서와 연관이 모든 속성에 걸쳐서 펼쳐지고, 각각의 속성에 따라서 때로는 연장속성 아래서 때로는 사유속성 아래서 표현된다는 바로 이 부분. 평행론을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이걸 존재론적 평행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그 관념의 대상 사이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이고, 이것을 바로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본다. 스피노자의 2부 정리7에 두 가지 상이한 쟁점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두 측면이 다 가능한 것 같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가 이 관념들을 형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관념들을 표상적 실재로 이야기하면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으로서의 실재가 2부 정리 7에 들어가 있는 것.

 

2부 정리32의 증명을 보면 왜냐하면 신 안에 있는 모든 관념은 그 대상이 되는 것들과 완전히 합치하며(2부 정리7의 따름정리에 의해) 따라서 (1부 공리6에 의해) 이 관념들은 모두 참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7의 따름정리를 혼용하는 방식이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다. 그러니까 표상으로서의 관념과 표상의 대상과의 일치. 그래서 이것을 두고 어떤 주석가들은 인식론적 평행론이라고 부른다.

 

*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관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에 대한 표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점에서 표상적 실재라는 말은 상당히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냥 하나의 독자적인 실재,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재, 사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과작용을 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a는 관념b를 낳을 수 있고 관념b는 관념c를 낳을 수 있고... 이런 게 바로 형상적 실재다. 관념을 하나의 사물처럼 생각하는 것. 이게 스피노자의 특징이다. 우리는 자동차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관념을 이렇게 표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 반론한 게 바로 그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관념일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무언가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작용 받을 수도 있는 사물처럼 생각하니까, 그래서 정신도 관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정신이나 관념이나 다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말하자면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이것을 스피노자식을 말하면 관념들은 형상적 실재가 아니다라고 라이프니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은 결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의 원천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관념을 표상적 실재로서의 관념, 형상적 실재로서의 관념으로 구별한다. , 스피노자의 철학의 독특성은 관념이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독자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처럼 제시했다는 것, 그러니까 형상적 실재로서 제시했다는 것이다. 관념이 하나의 사물이니까 이게 당연히 표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면, 관념이든 정신이든 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public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을 사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3부에 가서 정서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감정을 굉장히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 대한 나의 애틋한 사랑, 누군가의 비극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 이런 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나만의 고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정을 우리 개개인의 굉장히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라는 것을 굉장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서라는 것을 그렇게 내밀하고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퍼블릭한 것으로 여겼다. 이게 나중에 모방의 문제로 이어진다. 모방 욕망. 뒤에 가면 자세히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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