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강의 정리- 2부 정리8이 어려웠던 이유는 형상적 본질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2부 정리8이 현행적 본질 형상적 본질이 뚜렷하게 나뉘는데, 들뢰즈 철학에서는 이것을 virtual 형상적 본질, actual 현행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virtual한 형상적 본질이 actualize해서 actual한 현행적 본질이 되는가이다. 이런 구분은 자칫하면 플라톤주의로 가버릴 수 있다. 플라톤주의로 빠지지 않고 이 길을 우리가 잘 찾아가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form 형상을 정의할 때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forma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리8에서 실존하지 않는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1부 정리11의 다른 증명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를 비교하며 살펴봤는데 저 실존하지 않는의 이유도 초월적인 이유가 아니라 독특한 실재와 연관된 이유였다. 이를테면 다윈의 종 멸종이론이라든가 이미 먹어버려서 없는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우리는 형상적 본질을 꼭 초월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서 알아두고 넘어가자.

 

정리9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며,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제3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의 원인을 지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된다.

 

1) 관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 곧 양태이며 따라서 양태인 한에서의 관념은 그것이 속해있는 속성, 곧 사유속성 안에서 다른 양태들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인과 관계를 맺지,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 내지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thing이다. 관념은 물체 같은 양태다. 양태로서의 물체가 연장 속성 안에서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양태로서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다른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부 정의2에서 나온 자신의 유안에서 유한하다는 점이다. 같은 유안에서. 즉 관념은 물체에 의해서는 한정될 수 없다.

 

2) 더욱이 정리9에서 문제가 되는 관념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A라고 하자)이다.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관념 역시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관념B라고 하자)이며,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관념A의 원인이 되는 관념B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 내지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스피노자가 1부 정리15에서 말하듯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 모든 건 다 신 안에 있고, 신은 무한하면서 모든 걸 품고 있다. 신 그 자체로 보면 무한하다. 동시에 신은 유한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적 우주는 신/ 연장을 이렇게 분리해버린, 매우 타동적인 세계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은, 유일한 피조물들과 초월적인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무한한 신이 아니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리18), 곧 무한하게 많은 자연 사물들 내에 내재해있는 신이며, 역으로 이러한 자연 사물들은 신의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25의 따름정리) 따라서 우리가 어떤 독특한 실재가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 다른 독특한 실재는 또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고 할 때(1부 정리28), 원인으로서의 독특한 실재는 유한한 양태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이다.

- 전체로서의 연장이 변용된 것이 바로 각각의 물체이다. 즉 물체는 유한하게 변용된 것이지만, 무한한 연장 속성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무한하다. 관념도 마찬가지다. 이게 바로 정리9에서 하는 말이다.

- 즉 정리9에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무한한 신이 정리9에서의 이유라면,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식의 신, 기복신앙의 신이 되어버린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등등. “무한한 한에서의 신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의 반대개념이다


증명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은 다른 사유 양태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특한 사유 양태이며(2부 정리8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의해)(= 관념이라는 것은 독특한 사유양태다), 따라서 (2부 정리6에 의해) 오직 신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즉 관념은 관념 안에서 인과를 맺지, 물체와 인과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1부 정리28에 의해) 신이 절대적으로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러하며, 이 후자의 사유 영태 역시 신이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그런데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2부 정리7에 의해) 원인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실재원인으로 바꿔 말하는 것. 즉 실재는 곧 원인이다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독특한 관념의 원인인 것은 바로 다른 관념, 곧 신인데, 이는 신이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며, 이 후자의 관념 역시 다른 관념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을 원인으로 지니고 있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 Q.E.D.

 

- 정리91부 정리28과 짝을 이루는 관념의 연쇄를 말하고 있다. 1부 정리28에서 A라는 독특한 실재는 B에 의해, B라는 독특한 실재는 C에 의해, C라는 독특한 실재는 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1부 정리28에서 독특한 실재가 그 대상이었다면 2부 정리9에서는 사유 속성 안에 존재하는 관념”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다른 독특한 실재의 관념에 의해 변용된 관념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증명에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 , 1부 정리28에서처럼 관념 역시, 관념A는 관념B에 의해, 관념B는 관념C에 의해, 관념C는 관념D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관념A, 관념B, 관념C.....들은 바로 신이 아니라, 신이 변용된 한에서의 관념이다.

 

따름정리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증명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2부 정리3에 의해), 이는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이 독특한 실재의 다른 관념에 의해 변주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앞의 정리9에 의해). 그런데 (2부 정리7에 의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에서 말하듯이 스피노자가 2부 정리3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면 신은 전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신이 전지한 것은 앞의 정리9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피조물들의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자리에서 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그런 것이다. 즉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변용된 한에서! 여기서 스피노자는 정리9가 뜻하는 바를 더 정확히 해명하고 있다.

-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 : 예를 들면 내가 물컵을 보면서 갖는 관념. 그런데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여기서 어떤 관념은 정신이고, 인간 정신의 독특한 대상은 신체이다. 인간이 연장 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신체로 나타나고 사유속성에 의해 표현될 때는 정신으로 나타나고 유니온에 의해 표현될 때는 코나투스로 나타나고. 그리고 정리10에서는 인간 정신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인식을 갖고 있다, 무의식적 인식이든 비자각적 인식이든, 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인간 정신이라고 하지, 왜 굳이 간주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한에서의 신신이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ㅋㅋㅋ 그냥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대체 왜 신 안에는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신이 이 동일한 대상의 관념을 갖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가ㅋㅋ

- 스피노자보다 약간 뒤에 나온 계몽시대 굉장히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인 프랑스의 피에르 벨 Pierre Bayle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라는 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 사전은 과거 사상가들에 대한 비평을 담은, 말 그대로 히스토리컬하고 크리티컬한 사전이다. 그 사전에서 피에르 벨은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과 비평도 썼는데, 거기서 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철학체계에서 가령 독일군대 만 명과 투르크군대 만 명이 싸운다면 스피노자는 독일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과 투르크군 만 명으로 변용된 신이 서로 싸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과 신이 서로 싸웠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어쨌든 2부 정리9 정리10 정리11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 정신과 신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스피노자가 계속 정신과 신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을 어떤 독특한 실재의 관념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 “변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는 뜻 그대로 하면 그냥 우리 정신, 어떤 관념인데 스피노자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서 이야기를 할까. 정리10에 가면 이 답의 실마리를 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10 인간의 본질에는 실제의 존재가 속하지 않는다. 또는 실체는 인간의 형상forma을 구성하지 않는다.

 

정리10은 인간은 본성상 실체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이것은 2부 공리1에서 말하듯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본질로부터 따라나오는 신의 특성)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변용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따라 나오는 명제다.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공리로서 제시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적으로 증명이 된 명제는 아니다. 2부 공리11부 정의1을 합쳐서 생각하면= 인간은 유한하다. 이걸 스피노자가 공리1로 깔고 2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공리1에서 정리10은 너무 쉽게 따라 나온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modificationibus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 정리10과 증명, 주석으로부터 따름정리는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들의 일정한 변양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명제는 인간이 다른 자연 사물들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니라(3부 서문의 표현을 빌면 국가 속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 여느 자연 사물들과 동일한 지위의 한 사물 내지 실재라는, 곧 따름정리의 증명에서 말하듯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 또는 양태라는 것을 확립하고 있다.

- 인간이 이처럼 제한된 존재라는 것, 인간은 실체가 아니고 다른 자연 사물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여느 변용 내지 양태들 중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역량에 둘러싸인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4부 공리)이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 4부 공리는 4부에 딱 하나 있는 공리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기보다 강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 간다 -> 이런 의미에서 유한한 존재.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연 상태무한하게 많은 타자에게 둘러싸여 실존하는. 인간이 실체라면 그럴 리가 없다. “국가 속의 국가에서 앞의 국가는 자연을 뜻하고 뒤의 국가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부분이지 별도로 왕국을 갖고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니까 따름정리를 정리10과 연결해서 요약하면- 1부 공리1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 아니면 양태다. 그런데 정리10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가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에는 뭐가 속하겠는가. 변용, 여기 표현대로라면 변양에 의해 구성된다. 그게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 modificatio modification 변양. 이 모디피카치오가 가장 처음 나왔던 것은 1부 정리8. affectio 변용과 같이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모디피카치오를 드물게 쓴다. 이 모디피카치오를 쓸 때의 용법을 보면 아펙치오와 별로 다르지 않게 쓴다. 변용, 양태, 이런 말들과 같이. 에티카에서 변용affectio, 변양modificatio, 양태modus는 같은 뜻으로 봐도 된다.

- substantia 실체 / affectio 변용 신과 다른 모든 것 (= modus 양태)

* 2부 정리14에 가면 물체 자체가 하나의 변용이고 여기에 또 변용이 일어나서 변용의 변용이 일어나는데 스피노자가 하필이면 이 물체가 겪는 변용에도 “affectio”라는 단어를 붙인다.

* 3부에 가면 affectus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감성, 정서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정신의 변용과 관련되어있다. 그러니까 단어는 둘 다 affectio인데 뜻이 다른 것.

- 들뢰즈는 양태와 변양을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의 한 양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양태인가?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양태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인간을 그냥 양태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이다. ? 정신과 신체가 합일된 게 인간인데 어떻게 인간을 단순히 정신과 신체와 같이 양태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서. 그런데 들뢰즈가 보니까 스피노자가 모modusaffectio라는 말 외에 modificatio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그는 이 말을 채택해서 인간처럼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와 연장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양태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변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인간만인가. 아니지ㅋㅋ 다른 존재자들도 관념과 물체가 다 합일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변양들 무한하게 많은 변양들이니까. 어쨌든 들뢰즈는 modificatio라는 말을 그런 용법으로 쓴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 자체에서는 그런 용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 정리10의 주석

 

- 따름정리에 함축되어 있는 쟁점들을 풀어내는 것이 주석의 내용이다. 1) 분명히 모든 사람은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1부 정리15에서 제시한 명제이며,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 문제는 사람들이 1)2) 많은 사람은 어떤 실재의 본질에는 그것이 없이는 그 실재가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 속한다고 말한다.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본질에 관한 통상적인 정의인 2)는 스피노자 2부 정리2에서 제시한 본질에 대한 정의와 매우 다른 것이다. 2부 정의2에서는 상호성이 있는데, 2)의 명제에는 그런 상호성이 없고 본질이 중심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2)는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즉 스피노자는 지금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질과 원인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읽어보면 사람들은 신이 본질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 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본질을 혼동하고 있다.

- 1)2)가 저렇게 연결되어버리면 3-1) “그들은 신의 본성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하거나3-2) “아니면 피조물들은 신이 없이는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고 믿는 셈 같은 양지택일이 나오기 마련이다. 3-1)의 경우, 피조물의 본질에는 신의 본성이 속하기 때문에 피조물, 특히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 3-2)의 경우라면 피조물은,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따라서 마치 꼭두각시와도 같은 완전히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스피노자는 그리하여 그들이 충분히 일관되지 못, 곧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관점인지 확실하고 일관되게 정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며, 이는 그들이 철학함의 순서를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제1원인이며, 따라서 인식이나 존재에서 제일 앞서는 것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혼동하며, 오히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을 제일 원인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적 실재들에 대해 숙고할 경우 그들은 다름 아닌 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최초의 허구들, 곧 그들이 자연적 실재들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그 위에 쌓아올린 그 허구들/ 허구들이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 제일 원인을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또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길게 말한 바와 같이 신인동형론적 관점을 낳기 쉽다. 이런 허구적 관점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철학함의 순서 ordo

- <에티카>의 부제는 기하학적 순서ordine에 따라 증명된이다. 그러니까 이 순서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 ”신이 인식에 있어서도 본성에 있어서도 앞선다만물의 제1원인. 신이야말로 존재론적/물리적/인식론적 원인이다. 신을 알아야 거기서 양태도 나오고, 양태가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도 알게 된다. 바로 <에티카>신에 대하여에서 출발하고, 2부 순서도 따져보면 실체와 속성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 정리8, 정리9에서 양태가 나오고, 정리10에 와서야 인간이 나온다. 즉 신에서부터 인간까지의 순서대로 도출된다.

- ”감각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의 문제는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부적합하고 아주 부분적이며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걸 다 뒤섞어 버린다. 1부 부록에서 나온 목적록적 편견, 신인동형론처럼, 자연적 실재들은 곧 사라지는 유한한 것인데 불변하는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기고 오히려 신을 인식할 때 자연사물을 통해 인식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하는 순서는 사실 논리적인 순서다. 신에 대해 일단 안 다음에, 그걸 바탕으로 세계의 체계를 세우는 것. 발견의 순서는 감각-> 신이지만 철학하는 순서는 다르다. 신이 만물의 원인이구나-> 그럼 그 원인에서 따라 나오는 본질은 뭘까, 이런 순서로 시작해야 한다.

 

-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와 발견의 순서는 다르다. 때문에 우리가 신의 본질, 신의 속성, 특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우리가 신을 발견해서 신이 만물의 제1원이구나 -> 그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뭘까 -> 그럼 신의 본질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은 뭘까, 이것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전개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철학함의 순서다. 지금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에티카>를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철학함의 순서대로 에티카를 썼지만 우리는 스피노자처럼 발견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니까.

 

스피노자는 오랫동안 히브리 공동체에서 유대인들이 받는 토라 같은 교육을 받았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물정을 알게 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철학이나 과학을 배우게 됐고, 자기가 배우던 히브리 유대교 전통과 단절하고 자기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다. 스피노자 자신도 역시 발견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견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것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순서 있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서 쓴 책이 <에티카>. <에티카>라는 것이 결국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철학함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인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각자 발견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안티 스피노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ㅋㅋㅋ

 

과학적인 인식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아마 과학적인 지식이 많이 누적이 되더라도 그것이 철학에서 이해하는 제1 만물의 원인이라든가 세계의 근거라든가 그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양자역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독교 신자도 있을 테고ㅋㅋ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의 누적과 철학적인 인식은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1부 부록에서 길게 논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대신 왜 자신이 통상적인 본질 개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떤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제거되는 것,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본질개념을 제시했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이는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과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 , 스피노자 자신은 실체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 독특한 실재들이 신이 없이는 인식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만, 신은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독특한 실재들의 본질이 아니라 원인이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만 모든 독특한 실재의 원인이지만 독특한 실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니까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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