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축하다

스피노자가 1부에서 함축한다는 말을 매우 전문적으로 쓰는데, 자기원인을 정의할 때도 그랬고 정리24에서도 그랬다. 함축한다: involvere involve 불어로 번역할 때는 envelopper라고 번역한다. 이게 좋은 번역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들뢰즈가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에서 함축한다를 쓸 때 저렇게 쓴다. 이 단어가 편지를 봉인하다라는 의미가 있기도 해서 어떤 사람들은 저걸 봉인한다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특히 들뢰즈를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은 이걸 envelope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ㅋㅋㅋ 2부 정리49의 증명을 보면 스피노자의 함축하다의 아주 테크니컬한 의미를 볼 수 있다.

*** 정리25는 신플라톤주의자를 겨냥한 것이다. 이데아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이 구분되고 이데아는 본질적이고 영원하고, 반면에 현상계는 생성됐다가 소멸됐다가하는 시간적인 것이고, 본질의 세계(이데아)- 실존의 세계(현상)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바로 신의 지성과 의지가 본질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런 생각을 한다.

- 데카르트는 자신이 생산한 자연이 신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신이 한 번 생산을 하고나면 신이 관여하지 않고 자연이 알아서 작동하고 굴러감. 데카르트에게서 자연세계는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신이 처음에 만들어놓고 충격을 주는 것, 그러니까 엄청나게 오래가는 태엽이 있어서 한번 감았다가 푼 것이다. 자연세계라는 작동장치. 이게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연세계다. 내재적 운동역량이 없는. 그러나 스피노자는 1부 정리15에서 자연세계는 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신 안에 있다, , 신이 만물에 내재해서 자연만물에 내재적 원인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이 정리26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 사르트르의 매우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라는 것.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 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으로, 돈 많은 부모, 멋있는 부모 아래서 태어났으면 떵떵거리며 좋은 데 가서 있을 텐데 이러고 태어났다ㅋㅋㅋ 내가 이 모습 이대로 태어난 것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존재와 내 모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것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스피노자 철학이나 17세기 철학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그걸 잘 이해하고 해석해보면. 사르트르가 스피노자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도 하고.

 

정리26: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으로 신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신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실재는 자기 스스로 작업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

 

- 작업하다= produce on effect 농부가 땅을 일궈서 수확하는 것, 장인이 물건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작업. 사람들은 어떤 작업을 한다고 규정된다고 했는데 이 작업에는 에너지와 힘이 필요하고 이 힘은 신에게서 온다.

- 정리26은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놨다는 의미다. 실재가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다음 시간에 이 문제를 살펴볼 예정이다)

- 신이 필연적으로 양태의 작업을 규정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신이 나의 인생을 다 정해놓았다는 말인가? 우리 점보러 많이들 가잖아요. 사주도 보고. 제가 아는 선배는 하이데거를 하신 분인데 부지런히 10년 넘게 점집을 찾아 다닌다고 해서, 저 양반이 미쳤나했는데 갑자기 역학에 관심이 생겨서 역술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10년 다녀봤더니 별거 없더라고ㅋㅋㅋ 우리가 사실 알게 모르게 이런 생각들 많이 하죠. 난 전생에 뭐였을까.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지 않을까. 좋은 미래가 정해져 있었으면. 과학문명 시대에 사니까 겉으로는 거부해도 속으로는 우리의 삶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고 싶어 하고. 서양애들 점성술 믿는 거랑 비슷한데요. 내가 철학을 하게 된 것도 누가 정해놓은 것 아닌가, 어떤 한 개인, 개체, 출생에서부터 성장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면, 이게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결정론이 되겠죠.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정적인 것이니까

 

- 하지만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양태들의 출생 성장 개별적인 여러 행동들을 하나하나 다 지정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양태들이 실존하고 행위하고 작업하는 방식, 패턴, 어떤 규칙 같은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것이다. 사람 같은 생물들은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공기를 마셔야 산다 같은 법칙처럼. 몇월 몇일 몇시에 밥을 먹고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신다 이런 걸 정해놨다기보다 인간의 생존리듬, 법칙들, 패턴들, 이런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의미. 그러니까 신은 우리들 각자가 어떤 물을 마셔야 하고 무엇을 섭취하고 몇 시간을 자야하는지 하나하나를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기체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해야 하고 하루에 일정한 시간의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해놓았다는 것이다.

 

*** 말브랑슈 malebranche: 기회원인론 occasionalism

- 유한한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사물들이 행위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다. 내가 이렇게 손을 든다면, 내가 손을 드는 이것이 바로 오케이션, 이 기회의 원인이 신이다. 말브랑슈 철학에서는 개인과 개체는 꼭두각시다. 신에 의해 규정되어 움직이는. 하지만 생각보다 미묘하다. 손을 드는 원인은 신인데, 말브랑슈 이야기는 이 근육의 운동,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팔근육의 작용방식, 그러니까 팔을 들 때 근육이 이완되고 팽창되고 하는 방식, 이것을 신이 정해놓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신체를 규정하는 생리학적인 법칙. , 내가 움직이는 것은 임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규정하는 근육의 운동 패턴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 스피노자가 정리26에서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있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말브랑슈 이야기처럼 어떤 개체, 개인, 사물이 수행하는 작용을 규정했다는 의미다. 그 개체가 임의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규칙이나 패턴에 따라 이루어진다. 1부 정리8의 두 번째 주석. 동화적 상상력을 비판한 내용. 근거와 규칙에 따라 작용하지 임의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나무가 되고 그러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 말브랑슈가 스피노자를 상당히 싫어했는데, 다른 비판가들한테는 저 사람 변장한 스피노자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 신이 몸짓 하나하나에 작용해서 매우 바쁠 거라는 상상과는 다르다ㅋㅋㅋ 신이 일단 규칙만 정해놓으면 알아서 작동하는 원리다. 신이 하나하나 작용하는 것은 신의 지혜와 어울리지 않는다. 신이 지혜롭다면 그렇게 번잡하고 바쁘게 멍청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신은 그냥 일정한 규칙 법칙을 만들어놓으시고 거기에 따라서 자연만물이 알아서 잘 작동하도록 세계를 창조하셨다.

- 그런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신의 전지함 지혜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신의 기적, 전지함의 포스가 약해지죠. 기적이라는 것은 신이 세워놓은 객관적 규칙이나 법칙을 위반하고, 벗어난다는 것인데 말브랑슈식으로 말하면 신이 자꾸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신이 뭔가 설계를 잘못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가며, 말브랑슈가 신의 지혜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기적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기적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신의 초자연적인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게 뭐 스피노자주의자지ㅋㅋㅋㅋ 이렇게 되는.

 

정리27 신에 의해 어떤 작업을 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자기 스스로 그렇게 규정되지 않게 만들 수 없다

 

- 원인으로 규정된 실재가 나 그 원인이 싫어! 안 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요. 잠을 자도록 되어있는데 잠 안 잘거야! 중력의 법칙을 거스를거야!(안티에이징 시술, 성형수술 같은 것도 이런 범주일까?)

심지어 정리28에서까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정리28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 아주 특이하고 상당히 중요한 정리. 상당히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이 일종의 연쇄과정을 표현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뭔가 여기서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역량과 자발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실존하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AB에 의해 규정되고 BC에 의해 규정되고... 뭔가 계속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연쇄가 아니라 매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연쇄로 보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유한양태들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정리28의 증명.

- 정리21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영원하고 무한하다(=직접적 무한양태) = 다른 말로 하면 신은 어떤 개별적인 실재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 무한에서는 무한한 것만 나온다.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으로부터 절대 나오지 않는다. 유한-> 유한, 무한-> 무한.

- 어떤 양태가 만약에 어디에서 따라 나온다라고 하면, 신에게서 직접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양태에 의해 변용된 한에서 따라나오는 것. 유한하고 규정된 양태는 무한에서 따라 나올 수 없다. 변용된 한에서만 따라 나올 수 있다!

- 변용되는 방식이 두 가지인데, 신의 절대적 속성에서 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를 거쳐서 나오는 것이 매개적 무한양태. 유한한 실재는 신의 본성에서 따라나올 수 없다. 신은 무한하니까. 매개적 무한양태에서도 나올 수 없다. 유한 양태는 유한한 실재에 의해 변용된 신으로부터(=유한 양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한에서의 신으로부터(=유한 양태) 나온다.

- 정리25의 따름정리를 다시 보자. 독특한 실재, 특수한 실재 자체가 신이다.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한에서의 신. 다시 말하면 유한한 방식으로 변양된 한에서의 신. 이게 바로 독특한 실재다. 그러니까 독특한 실재는 신의 본성으로부터 나올 수도 없고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나올 수도 없고 매개적 무한양태로부터 나올 수도 없다. 오직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변양된 한에서의 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 최초의 유한양태는? 아마 스피노자는 이게 의미 없고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한자에서 유한자가 나올 수 없으며, 그러니까 아담과 같은 것이 신에게서 처음 창조된다고 해야 최초의 유한자가 뭔지 같은 질문이 의미 있을텐데 스피노자 정리28에서보면 무한하게 계속된다고 한다. 기원도 없이.

- 구조주의에서 언어를 뭐라고 하는가. 구조언어학에서. 기호라고 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 언어는 기표들의 연쇄라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기표에 의해 규정되고, 그 기표는 다른 기표에 의해 규정되고... 이런 식의 기표들의 연쇄가 언어다.

-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의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를 한다. ”언어학이라는 것이 자율적인 학문이 되려면 언어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에 대한 이런 관점. 이 관점이 뭘까? 소쉬르가 이런 표현을 쓴다.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 언어를 목록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17, 18세가 학자들이 언어의 생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런 말을 한다. 가령 원시인이 하늘에 떠있는 저걸 태양이라고 하자 해가 지고 나면 떠오르는 저걸 달이라고 하자. 그 뒤에 솟아있는 것은 산이라고 하자. 저 앞에 차갑게 흘러가는 것은 강이라고 하자. 이렇게 해서 언어가 생겨나게 됐다, 라고. 원시인들이 자기 주변에 가까이에 있는 것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의 목록이 언어다. 라고. 이게 언어의 목록주의.

- 근데 소쉬르는 언어학을 자율적으로 만들려면 언어학을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다. ?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관점의 전제는 이미 사물의 질서가 다 존재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원시인이 태양이라고 부르기 전에 이미 태양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고 달이라고 부르기 전에 달이라는 것이 정해져있고 산과 강과 바다와 문제는 거기에 다 그냥 명칭을 붙이는 것. 이게 목록주의가 전제하는 것.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언어라는 것은 그냥 실용적인 도구다.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질서를 표시하는 편의적인 도구.

- 그러면 언어학이라는 것은 학문이 안 된다. 소쉬르가 언어라는 것을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고 언어라는 것은 기표들의 연쇄다라고 했을 때 깔려있는 생각은 언어 이전에는 세상에 질서가 없다는 것. 기호 이전에는 세상은 카오스다. 아무 것도 없다. 언어라는 것이 세상의 질서를 비로소 만든다.

- 그러니까 소쉬르는 언어를 목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소쉬르의 관점에 따르면 언어가 없으면 구별을 할 수 없으니까. 태양인지 달인지 산인지 강인지 같은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

- 그러니까 이련 경우에 최초의 기호가 뭐냐 최초의 언어가 뭐냐 라고 묻는 것은 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다. 최초의 단어가 뭔지 최초의 기호가 뭔지, 그런 것은 여기에 없다. 그래서 구조주의에 대해 역사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름 일리가 있는 비판이면서 초점이 나간 비판이기도 하다.

 

- 띵스가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최초의 무한양태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스피노자는 이 문제에도 별로 관심 없었다. 원래부터 있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스피노자가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몇몇 구절들이 있는데 <에티카>말고 <지성교정론>에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 원시인들이 망치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면서(이것도 데카르트 비판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스피노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망치가 있으려면 망치를 만들기 위한 모루라는 틀이 있어야 한다. 모루가 있으려면 그걸 만들 재료와 틀이 있어야 하고 모루를 단련하기 위한 망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망치가 있으려면 또 모루를 만들어야 하는데 모루가 있으려면 망치가, 망치가 있으려면 모루가.... 무한퇴행. 우리가 참된 관념을 가지려면 전제가 되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무한하게 나가는데. 원시인들이 어떻게 망치를 썼냐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그들은 떨어진 나뭇가지나 돌을 망치로 썼다는 것. 처음에 망치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망치로 쓰게 되면서 망치가 기원했다는 것. 이게 스피노자가 기원의 문제를 다루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처음에 기원을 이룬 것을 원래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쓰면서 그게 기원이 됐다, 라고 이야기하는, 기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그런데 아마 양태에 관해서라면 스피노자가 아마 기원에 대한 문제를 답변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을 것이다. 그건 언어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냐, 언어의 시작이 뭐냐, 그런 문제와 마찬가지니까.

 

- 소쉬르와 스피노자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뭔가 구조적이라는 바에서는 비슷. 하지만 다른 게 있다. 소쉬르는 스피노자처럼 양태가 실체의 변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체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각각의 개별적인 기호가 무엇의 변양이다, 어떤 중심의 변용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지금 양태라는 것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고, 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 이 각각의 양태가 전체의 변양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그래서 구조주의의 전성기 때 스피노자 철학에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 이를테면 사르트르가 먼저 스피노자를 채택을 해서 자기 철학에 한 번 쓴다. 지난 시간에 다룬 정리29의 주석에서능산적 자연-> 산출하는 자연, 소산적 자연-> 산출된 자연으로 바꾸었었는데, 사르트르가 이것을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총체화하는 총체성, 총체화되는 총체성 totalizing totality totalized totality라고. 이게 구조주의 전성기에 가게 되면 사르트르의 이 용어법을 따라가지고 사람들이 구조화하는 구조 구조화되는 구조 structuring structure structured structure ”. 구조주의자들의 생각에서는 소쉬르의 책에는 구조화되는 구조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역동성이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용어를 가지고 와서 이런 표현을 쓴다.

정리29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주석 좀 더 나아가기 전에 나는 능산적 자연 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 Natura naturata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싶다. 또는 독자들에게 알려두고 싶다. 왜냐하면 앞선 논의를 통해 이미 능산적 자연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들(정리14의 따름정리1 및 정리17의 따름정리2에 의해), 곧 자유원인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신으로 이해해야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소산적 자연을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또는 신의 속성들 중 하나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 곧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실제들로 간주되는 한에서 신의 속성들의 모든 양태로 이해한다.

 

* 능산적 자연 Natura naturans: 원인으로서 산출하는 자연

소산적 자연 Natura naturata: 결과로서 산출되는 자연

스피노자가 처음 쓰는 말은 아니다. 아퀴나스도 쓰고, 중세철학자들도 쓴 개념을 가지고와서 스피노자가 다시 고쳐서 쓰는 중

* 즉 스피노자가 산출하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 신의 속성

스피노자가 산출되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태들의 전체.

 

정리30: ”현행적인 유한 지성이든 현행적인 무한 지성이든 간에, 지성은 신의 속성들 및 신의 변용들을 파악해야 하며,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지성은 그게 무한이든 유한이든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신의 속성들과 변용뿐이다.

지성은 실체와 양태 외에는 아무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 존재하는 것이 실체 혹은 양태 밖에 없으니까

- comprehendere (comprehend) : 영어 comprehend에 비해 라틴어 comprehendere의 의미가 훨씬 다양하다. 포괄하다, 포함하다, 붙잡다 등등.

- idea 관념과 ideatum이 합치할 때 -> 진리 (공리6) :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진리라는 것은 우리 정신 안에 있는 것과 정신 밖에 있는 것이 합치하는 것이다.

 

* 데카르트 전집. 7. <성찰> 성찰에 대한 반박과 데카르트의 답변을 수록한 책. 1641년에 출간되는데 참 이상한 책이다. 영어로 하면 Meditations 라틴어로 하면 Meditationse, 6개의 성찰로 이루어져있는데 사실 우리나라 성찰이라는 제목보다는 원래 용어의 뜻에 부합하려면 명상이어야 한다. 이 책은 데카르트의 책 중 가장 중요하고 데카르트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연구자들도 그렇게 꼽는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책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유럽의 다른 학자들과 토론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찰> 출간 전에 원고를 유럽의 신학자나 철학자에게 미리 보내고 반론할 것이 있으면 미리 반론해보라고 요청하고, 거기에 따라 데카르트 본인이 답변도 하는. 2중적 텍스트. 본문-반박-답변 이런 형식. 여기에 인용할(표상적 실재성에 관한) 내용은 두 번째 성찰에 반박한 것에 데카르트가 대답한 것이다

 

*** 표상적 실재성 objective reality : 이것을 절대 객관적 실재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관념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표상으로서의 실재성.

 

책상. ideatum ---------------------------- 책상에 대한 관념

: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 objective reality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우리 관념 안에 표상되어 있는,

우리 관념이 갖고 있는 실재성

= ,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 formal reality ------------------------ 신에 대한 관념 objective reality

 

-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인데, 책상과 신 중에 무엇이 더 완전한가? .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말하는 formal reality에는 완전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말에서 책상은 양태)

그러면 책상에 대한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은 무엇이 더 완전한가? 신에 대한 관념

- 그러니까 관념의 완전성이 큰 것과 비례해서 objective reality도 큰 것이다. , 관념의 대상의 완전성의 크기에 따라.

- 하지만 관념이라는 점에서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렇다. ‘관념이라는 기준에서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objective reality라는 기준에서는 양자 사이에 완전성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관념 1) objective reality -> 2) 관념의 대상과 관련된 측면:

관념이 무엇을 represent하는 지에 따라 평가되는 것.

1) formal reality -> 2) 하나의 양태다.

formal reality라는 점에서 보면 그냥 다 관념이다.

 

- 요약하면, formal reality의 측면에서는 책상은 연장속성의 한 양태라는 점에서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 관념은 사유속성의 한 양태라는 점에서 formal reality를 갖고 있다. 물론 연장속성인 책상은 objective reality를 갖고 있지 않다. objective reality는 사유속성의 한 양태인 관념에만 있다. 그러나 objective reality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관계하는 대상의 완전성에 따라 다르게 측정됨.

- 데카르트는 왜 formal realityobjective reality를 구별할까? 관념이면 관념이지 왜 이렇게 두 개로 나눠서 복잡하게 이야기하는가.

1) 관념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어떤 대상과 관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완전성에 있어서. 이것을 설명하고자 objective reality라는 개념을 쓰는 것

2) 하지만 관념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 formal reality

 

다시 풀어서 정리하면,

 

책상에 대한 관념 1) 사유속성의 한 양태

2) 표상적 실재성

신에 대한 관념 1) 사유속성의 한 양태

2) 표상적 실재성

 

1)의 측면에서는 사유속성으로 책상과 신은 같다

2)의 측면에서는 책상과 신의 완전성 차이가 있으니까 표상적 실재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 이게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관념에 대해 갖는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1)만 생각하므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2)는 매우 낯설다. 관념이 왜 다 같아. 우리는 1)만 생각하는데 이들은 2)까지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나 단순한 것일까 (사실 나는 실재성의 우열을 나누고 관념의 우열을 나누는 이런 위계적 관점에 매우 반감이 있다. 스피노자의 세계에 이렇게 반감 갖는 거 에티카 시작하고 처음이야ㅋㅋ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너무 잘 알겠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엘리트주의적인 생각이잖아. 물론 그 당시 철학자들, 혹은 지식인들의 어떤 사명 중 하나가 계몽이기는 하지만.)

 

- 다른 말인 듯 같은 말인데, 예전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나누었다는 대화가 있다. 이성계가 스님은 왜 그렇게 돼지 같아요?“ 하니까 무학대사가 장군님은 왜 그렇게 부처 같아요?“라고 되묻고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그러니까 관념은 다 다르다ㅋㅋㅋㅋ 그럼 그건 일종의 어떤 수준 같은 것인가? 신에 대해 생각하면 수준이 높고 책상에 대해 생각하면 수준이 낮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자라고 하지만 우리하고는 벌써 이런 부분에서 인식론적인 단절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부분이 벌써 다른 것이다. (정말 스피노자와 처음으로 인식론적 단절을 느낀다ㅋㅋ)

- 이런 생각이 나중에 데카르트 같은 사람에게 가면, 신 존재 증명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완전성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 안에, 우리는 유한한데 우리는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이상하다. 신은 무한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지고하게 완전한 분인데 유한한 우리가 어떻게 그런 큰 분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이상하다. 이런 맥락에서.

- 이런 측면이 우리의 근대철학이 칸트 이후에 상실하게 된 어떤 철학의 관념론적 세계다.

- 어쨌거나 요약하면: 형상적 실재성이 어떤 관념이 사고하는 실체인 정신의 양태라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런 한에서 관념들은 모두 동등하다는 점을 뜻한다면, 표상적 실재성은 이러한 관념들을 말하자면 그 관념의 내용의 측면에서 또는 그 관념의 대상과 관련하여 파악한 것이다. 형상적 실재성은 존재 그 자체로서 갖게 되는.

 

정리31: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간에 현행적 지성은, 의지, 욕망, 사랑 등과 마찬가지로 능산적 자연이 아니라 소산적 자연과 관련되어야 한다.“

증명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을 (자명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지성은 절대적 사유가 아니라(=사유속성이 아니라) 다만 사유의 일정한 한 양태, 곧 욕망, 사랑 등과 같은 다른 양태들과 다른 것이며, 따라서 (정의5에 의해) 그것은 절대적 사유에 의해, (정리15 및 정의6에 의해) 사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신의 속성에 의해 인식되어야 하며, 그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리29의 주석에 의해) 지성은 사유의 다른 양태들과 마찬가지로 산출하는 자연이 아니라 산출되는 자연과 관련되어야 한다 Q.E.D

 

- 지성, 의지, 욕망, 사랑 이 모든 것은 변용 또는 양태라는 이야기

- ”현행적 지성 intellectus actu / actual intellect) 이라는 표현: 스피노자는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현행적 지성이라고 쓴 것은 잠재적 지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와 정 반대다. 그는 오히려 잠재적 지성’,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적인 능력 faculty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행되고 있는 지성의 활동으로서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바로 지성활동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행적 지성과 잠재적 지성

-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행적 지성의 반대말로 잠재적 지성을 말한다. ‘현행적 지성이라는 말은 원래 뜻대로 하면 지금 실행되고 있는 지성이고, 잠재적 지성은 지금 실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성의 본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그리스 학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목수가 왜 목수인가. 지금 목수일을 하지 않는데? 집이라도 짓고 일을 해야 목수지.“라는 재미있는 의문을 제기하는데, 여기에 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이걸 구분한다. 잠재태와 현행태.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지금 비 오고 있는데 무슨 집을 져. 쉬어야지. 근데 쉰다고 해서 목수가 아닌가. 아니다, 목수다. 지금 발휘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지만 잠재적인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것. 잠재태. 가능태. 이걸 사람의 인식과 관련해서 보는 보면-

 

*** faculty 라틴어로 하면 facultas 파쿨타스.

 

- 우리말로 보통 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능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 서양의 인식론은 보통 faculty와 관련된 faculty psychology 라는 개념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에서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몇 개의 faculty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정신 중에는 욕망을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이성적 능력 지적인 능력만 담당하는 faculty가 있고, 어떤 부분은 의지라는 정신의 활동을 전담하는 faculty가 있다는. 이성의 파쿨타스, 감각 또는 상상의 파쿨타스, 의지의 파쿨타스. 이런 개념.

-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그것을 마차와 말의 관계로 표현한다. 말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잘 듣고 하나는 자기 멋대로 날뛰고, 후자의 말이 욕망이고.

 

- 스피노자는 이 파쿨타스라는 개념을 굉장히 싫어한다. 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정신이 몇 개의 파쿨타스로 구별되어 있다는 이 개념을 부정한다. 정신은 이런 게 아니다. 스피노자가 주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현행적 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떤 잠재적 지성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지 않지만 지성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잠재된 게 있다고 생각해서 현행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다. 내가 볼 때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행되고 있는 지적인 활동, 그게 바로 지성이다. 실행되지 않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실행되지 않고 나중에 작용하려고 지금은 쉬고 있는 지성, 이런 것은 없다. 지성이라는 것은 항상 작용 중에 있고 작용 중에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지성이다. 현행적 지성이야말로 지성 그 자체다.

 

- 주석의 마지막 문장, 왜냐하면 우리는 지성활동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으로 인도하지 않는 어떤 것도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는 스피노자가 전하려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이것을 좀 더 간명하게 풀어서 번역한다면,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지성활동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지성활동이며 따라서 이러한 지성활동을 발휘하여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지성활동에 대해 더 완전한 인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지성활동을 통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현행적 지성. 이게 우리의 지적활동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이용해서 쓸수록, 머리는 쓰면 쓸수록 우리는 지적작용을 더 잘하게 된다. 지적작용을 신체가 도와줄 수도 있다. 2부에 나올 텐데 우리의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정신도 능동적일 수 있고 정신이 능동적일수록 신체가 능동적일 수 있듯이.

- 어쨌거나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생각을 더 많이 할수록, 현행적 지성을 더 발휘할수록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귀족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 정리31에서 주목할 만한 두 번째 지점: ”지성이라는 게 산출된 자연이다라는 것. 스피노자는 이미 정리17의 주석에서 지성도 의지도 신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 박듯이) 이야기 했다. 신의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상당히 긴 주석에서 이른바 창조적 지성 창조적 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니콜라 말브랑슈까지해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정리31에서 그는 유한한 지성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성까지도 신의 절대적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에 속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 정리17의 주석 강의 노트 일부분:

 

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님

- 스피노자가 논박하고 싶어하는 적수들의 주장: 인간이 가진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 의지와 지성이다 > 그러니 신의 그것은 그보다도 더욱 무한할 것이다 > 그러니 신의 무한한 의지와 무한한 지성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다!

- 신의 지성과 의지, 곧 무한지성과 무한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나중에 가면 나오지만 스피노자에게 지성과 의지는 무한양태이다)

 

2-1) 신의 지고한 의지야말로 신의 전능함의 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 지금은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가진 사람: 잠재적 인식자

지금 인식하는 것을 수행중인 사람: 현행적 인식자

- 신을 옹호하는 스피노자 적수들의 주장: 신은 (무한지성을 통해) 무한하게 많은 것을 현행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무한의지를 통해) 그걸 하나하나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게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신이 인식하는 대로 모든 것을 계속 창조해야한다면, 당연히 지성보다 우위에 있어야할 신의 자유의지가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식하는 대로 다 창조해야한다는 당위에 제한을 받는 자유의지는, 이미 자유의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그들은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걸 다 창조해서 실존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 게다가 그들의 관점에서 신이 인식하는 대로 계속 창조를 한다면, 남아있는 비장의 뭔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고, 신의 전능함을 폄하하는 것 아닌가. 신은 인식하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니라 창조해야 되겠다고 의지하는 것만 창조하신다(결국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가 없을 때는 필연적 법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함도 전능함에 들어가고, ”의지로서 필연적 법칙을 위배하고 거스르는 것도 전능함에 들어가니, 의지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지하는 것만 창조한다고 주장)

 

-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의 전능함은 여분을 남겨두고 부분만 수행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현행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이다. 신이 무한하게 많은 것을 인식해놓고 나서는 무언가는 창조하고 무언가는 창조하지 않고 남겨두면 그거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깎아먹는 것 아닌가. 신의 잠재적 역량, 현행적 역량을 나누는 것을 스피노자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전능함인가.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있고, 발휘되는 능력이 있는 게 무슨 전능함이야.

- 스피노자에게 전능함이라는 것은 막 흘러넘치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풍부함이고 전능함이지 뭐가 부족해서 아껴뒀다가 나중에 꺼내 쓰고ㅋㅋㅋㅋ 이런 게 무슨 전능함이냐는 이야기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가 10년 입산수도를 하고 어느 날 해 뜨는 아침에 나와 해를 보면서 , 풍요로운 태양아, 너 어떻게 그렇게 나랑 비슷하냐ㅋㅋ 너 넘치도록 풍요로운 태양아 세상만물을 다 너의 열기로 빛으로 넘치도록 가득한 빛으로 비추는 태양아, 나의 지혜가 바로 그렇다. 내 지혜가 너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으니 사람들에게 이제 나눠주러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전능함은 이렇게 넘치도록 주체할 수 없이 매순간 발휘되는 것이다. 넘치도록 만들어내는 게 전능한 거지, 아껴놓다가 나중에 풀어주고 그런 게 무슨 전능한 것인가.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전능함은 영원히 현행적이었으며, 영원히 같은 현행성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전능함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관념이 확립되게 된다. 더욱이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이들은 바로 반대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무한하게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창조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곧 만약 그가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들에 따를 경우,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모두 소진시키고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이것은 신의 전능함에 대한 너무 소심한 생각이다. 다 써버리고 고갈된다는. 상당히 생태주의적인 생각. 신의 전능함이라는 건 너무 넘쳐서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매순간 만들어내는 것인데 너희들은 그게 고갈될 까봐 두려워하다니 신의 전능함에 대해 못 믿는 건 혹은 반대하는 건 너희들 아니냐) 따라서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도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2-2) 신의 지성과 의지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다르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름만 같을 뿐,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과 신의 지성과 의지를 지성과 의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르다.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 스피노자가 초기에 썼던 <정신교정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원은 둥글지만, 원에 대한 인식인 원의 관념은 둥글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2부에 가서 보게 되겠지만) 스피노자가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과, 앞서 봤던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의 맥락이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에 속하는 관념과 연장속성에 속하는 신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 원이라는 연장에 속하는 도형은 둥근 모양을 갖지만 관념은 둥글다 네모나다는 모양을 갖지 않듯이,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는 전혀 다르다.

- 여기서도 그렇다. 신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의지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비교하고 있다. 양자가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 ”신의 지성은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아까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이야기를 하면서 창조는 신이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중세철학 근대철학의 또 다른 신학자들은 신의 지성이라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지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냐면-

-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지성/정신 바깥에 있는 어떤 현실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한다= 인간이 관념을 갖는다에는 항상 사물/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사물/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이 사물이나 대상을 인간이 나중에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지성보다 먼저 있는 사물을 전제한다.

-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하면 representation. 인식이라는 것은 representation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프리젠테이션한다, 무엇을? 여기 present에 있는 presence, 현존하고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우리의 지성 안에서 다시 representation 재현하는,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인식이다. 인간의 인식의 성격.

 

- 그렇다면 신의 지성은 어떨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만약 인간의 그것과 같다면, 신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사물이 있어야한다. 그러면 그 사물은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신 이전에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없는 인식이다. 그러니까 원형으로서의 관념이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에 입각해서 신의 의지가 창조를 하는 것이다.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원형으로서의 관념은 일종의 모델이다. 우리가 건물을 짓거나 어떤 것을 만들 때 모형을 만들 듯이, 신이 지성으로 인식한다= 신이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형, 이 시계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신의 의지. 그러니까 신의 관념= 신의 인식이라는 것은 미리 전제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

-스피노자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실재라는 게 먼저 있고-> 실재 다음에 지성이 인식하고-> 그래서 실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사물이 먼저 있고 지성의 인식이 있다)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뭔가를 새롭게 처음으로 구상하고 처음으로 원형을 만드는 것이 신의 지성이니까 신의 지성자체가 창조적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라는 테크니컬한 텀이 쓰였는데

- ”형상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식과 지성과 독립해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인간이 인식한다 = 인간이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 즉 리프리젠테이션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표상적으로 인식한다“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때 표상적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오브젝티바. 뜻은 by representation. ”리프리젠테이션을 통해서 이것의 본질을 지성 안에 담는다라는 맥락에서. 영어로는 objective지만 흔히 쓰는 객관적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 , 오브젝티바=표상적: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다는 뜻.

- 이게 바로 objective essence라는 말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 <에티카> 영역본에 objective essence라고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이다.

 

- 인간의 인식의 경우 이런 순서: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사물이 갖고 있는 형상적 본질이 먼저 있고) -> 그 다음에 by representation을 통해서 사물의 형상적 본질을 지성 속에 다시 한 번 담는. <- 이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objective essence라고 부른다. objective essence = 머릿속에서 재현된 사물의 본질.

-그러니까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먼저 있고, 관념을 통해 재현되는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나중에 있는.

 

- 그런데 신의 경우에는 관념이 먼저 있다.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있고 그 관념으로부터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는 거니까.

-, 신의 경우: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가 먼저 있고-> 그것에 입각해서 신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그 표상적 본질 objective essence에 합치하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형상적 본질 formal essence가 나중에 온다는 것.

-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는 이런 이야기다. 신의 지성 안에서 신의 관념으로서(원형의 관념으로서= 표상으로서) 미리 존재했기 때문에 그걸 모델 삼아서 사물이 형상적 본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요약

왜냐하면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지성과 의지는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야 하며, 이 후자의 것들과는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개의 별자리와 짖는 동물인 개 사이에 이름 말고는 합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을 나는 다음과 같이 증명해보겠다.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면, (<- 적수들이 하는 주장) 그러한 지성은 우리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본성상 인식된 실재 다음에 오거나 그것들과 동시에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과성에서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실재들의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진리와 형상적 본질이 신의 지성 안에서 표상적으로(objective) 그처럼 실존하기 때문이다.“

= 만약 신의 지성이 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그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이름만 같지, 본질은 전혀 다르다. ? 우리 인간의 지성은 사물이 먼저 있고 나중에 그 사물의 표상이 있으니까. 사물의 재현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인식이니까. 하지만 신의 경우, 원형으로서의 관념이 먼저 있고 여기에 입각해서 사물들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념이 먼저 있고 거기서 formal essence를 가진 사물들이 창조된다, 이 이야기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인식되는 한에서의 신의 지성은 사실은 실재들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다.“ <- ? 이때 신의 지성은 사물들을 창조하는 지성이니까.

 

- 이러한 창조적 지성의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철학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각이며, 근대철학에서는 말브랑슈 Nicholas Malbranche에 의해 계승되는 생각이다.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오직 신만이 존재했으며, 신은 인식 및 관념들 없이 창조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이 갖고 있던 이 관념들은 신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진리탐구>

 

- 이어지는 스피노자의 논점. 신의 지성이 실재들의 본질과 실존의 원인이기 때문에 신은 본질과 실존에서 필연적으로 실재들과 달라야한다. 왜냐하면 원인지어진 것(결과)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것이 원인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인해 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 원인이 되는 것과 그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말.

- 이것은 정리29의 주석과도 연결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다르다. 소산적 자연은 항상 능산적 자연의 결과지 원인이 될 수 없다. 능산적 자연은 항상 원인일 수밖에 없다. 원인-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두 자연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정리17의 주석에서 만물이라는 것이 산출된 자연을 가리킨다면 신은 산출하는 자연인 것이고, 이 경우 만물과 신의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인 것이다.

- , 신의 지성은 우리 지성의 본질 및 실존의 원인이며, 따라서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성은 이름 말고는 우리의 지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의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논점이다, 땅땅! >>>>>>>>>>>>>>>>>>>>>>>>>>>>>>>>>>>>>>>>

 

정리32: ”의지는 자유원인이라 불릴 수 없으며,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 불릴 수 있다.“

 

- ”필연적 원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나온 것은 정의7, 자유에 대한 정의. 정리32필연적, 정의7의 제약되어있는 바로 그 필연적이다. 규정된 실재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상황 아래서의.

- 사실 정리31에서 의지는 양태고, 변용이고, 산출된 자연이라고 말했으니 정리32는 당연한 말이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양태는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는 것, , 의지가 양태라면 자유원인일 수가 없다. 제약된 원인일 수밖에 없다. 의지는 지성과 마찬가지로 양태니까 당연히 필연적 원인, 제약된 원인이다.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 나온다. 1. 신은 의지의 자유에 따라 작업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가 보기에 의지의 자유를 신에 대해 쓰는 것은 용어모순이다. 왜냐면 의지라는 것은 산출된 자연인데 그게 신의 활동을 규정할 수 없으니까. 의지는 양태인데, 양태가 신과 같은 실체를 규정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신이 의지의 자유에 따라 작업한다는 말은 스피노자에게 너무나 모순적인 말인 것. 다 신의 의지, 신의 자유의지, 신의 초월적 의지 같은 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스피노자가 하는 말들이다.

- 따름정리2동등한 관계, 직접적 무한양태.

 

직접적 무한양태- 사유: 지성

연장: 운동과 정지 <- 연장속성 안에 존재하는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

 

- 의지와 지성은 신의 본성에 대해 운동과 정지가 맺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 의지와 지성은 직접적 무한양태다.

 

정리33: ”실재들은 신에 의해 그들이 생산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질서 속에서 생산될 수 없었다

 

- 실재들은 지금 존재하는대로, 지금 작업하는대로, 그렇게 존재하고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 필연적이었다 = 그 외의 다른 방식은 있을 수 없었다

- 증명 첫 번째 문장 왜냐하면 모든 실재는 신의 주어진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왔으며<- 실재가 따라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따라 나왔다.

- 스피노자는 정리33에서 주석가들이 대개 필연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실재들이 신에 의해 생산되어 지금 존재하는 이 방식과 다른 방식의 질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이러한 실재들의 질서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신학정치론> 3장에 나오는 신의 선택에 대한 새로운 재규정

 

- 신의 선택 Dei electio (election of God)

- <신학정치론> 3장의 제목은 [히브리인들의 부름에 대하여]이다. , 히브리인들의 숙명에 대하여. 히브리인들을 누가 불렀단 이야기일까? 신이.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손으로 선택한 민족이라고. 이들이 쓰는 신의 부름, 신의 선택, 같은 말이 내포하고 있는, 혹은 전제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는,

- 1) 신이 마치 인간처럼 행위하고 있다는 것. 누구는 특별히 더 총애하고 누구는 더 미워하고. 히브리 민족, 모세, 여호수아를 선택하고. 그러니까 신의 선택에는 신이 인간처럼 행위한다는 뜻이 다겨있다.

- 2) 신이 선택하는 이것은 아주 예외적이라는 것. 인간의 선택과 달리 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내가 사랑하는 이 민족을 위해서 신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 홍해 바다를 갈라주기도 하고.

- 그러니까 정리하면 신의 선택이라는 말에는 1) 마치 인간처럼 행위하고 2) 아주 특별한 예외를 두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신이 전제되어있는 것이다.

 

-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성경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1) 신은 인간처럼 행위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2) 기적이란 없다. 그러니까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것은 없다는 것.

-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연에 예외라는 것은 없다. 신이 특별히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예뻐하고, 누구를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이런 거 절대 없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고 영원히 수행되는 것이다.

- 히브리 민족의 부름과 관련해서 자주 성경에 쓰이는 용어들, ”신의 인도“ ”신의 내적인 도움“ ”신의 외적인 도움“ ”신의 선택스피노자는 이런 말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자기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의 말을 재규정하는 것. 신의 선택을 스피노자가 어떻게 재규정하냐면-

- ”이러한 고찰로부터 신의 선택이라는 말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쉽게 추론된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연의 예정된 질서에 따라서, 곧 신의 영원한 인도와 법령에 따라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이로부터, 누구도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앞서 이 일이나 저와 같은 삶의 방식을 실행하도록 선택한 신의 독특한 부름이 아니라면, 그 스스로 어떤 사람의 방식을 선택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원래 신의 선택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아주 특별한 사람, 아주 소수의 사람을 신이 점지해서 특별한 재능을 주거나 특별한 운명을 주거나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하고 살아가고 존재하는 방식이 다 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신비한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자연 일반의 보편적인 선택이 신의 선택이다.

 

- <신학정치론> 4장의 제목은 [신법에 대하여]이고, 법에 대한 이야기, 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법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영어로 1) description 우리말로 하면 서술 기술.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2) prescription.

- 만약에 1)의 의미로 법을 이해한다: 법은 어떤 자연적인 필연성을 보여주는 법칙으로서의 법. 이를테면 만유인력의 법칙 / 2)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 , oo를 하기 위해 신의 본질을 파악해야하고 이성을 따라야하고 등등의 당위성. 규정. 명령. 처방. 이를테면 정치법이나 도덕법 같은.

- 스피노자가 가끔 드는 예인데, <신학정치론> 16장에 보면, 철학자만이 아니라 주정뱅이도 자신의 본질에 따라 본성의 권리에 따라 본성의 법칙에 입각해서 살아간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철학자만이 아니라 주정뱅이도 코나투스를 갖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 자기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의지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철학자나 주정뱅이는 1) 의미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법칙에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코나투스를 갖고 있고 그것에 따라 살고, 그 권리에 따라 살 권리가 있고. 누구도 그렇게 살라 말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 하지만 2)의 법에 입각한 관점에서 보면 저 두 사람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철학자는 신의 본질을 인식하려고 하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 지고한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prescription에 따라서. 하지만 주정뱅이는 그렇지 않다. 이걸 다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

 

*** 인간과 자유의지

- 스피노자는 의지의 자유, 자유 의지를 별로 믿지 않는다. 1부 부록의 1부의 서두에 그 내용이 나온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원인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지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갖고 태어나며,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그 욕구를 의식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인간은 자기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랑 굉장히 비슷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기본적인 논점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원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프로이트에게는 우리의 행동이나 사고나 말을 규정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어떤 원인이다라고 생각한다.

-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도록 욕구를 규정하는 원인이 있는데 우리가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 원인을 모른 채 우리가 욕구한다는 것을 의식은 하고 있어, 그러니 이건 우리가 자유의지로 욕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욕구의 원인이 나의 의지구나라는 착각.

- 그러니 자유의지라는 것은 무지의 산물로서, 항상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자유의지는 없고, 원인은 있고, 그럼 그 원인은 신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 원인은 코나투스다.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규정하는 욕구. 그 욕구를 규정하는 어떤 원인. 코나투스. 스피노자가 나중에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욕구를 잘 이해하는 것, 자기가 뭘 욕구하는지, 무엇이 자기로 하여금 이걸 욕구하도록 규정하는지 그 원인을 잘 이해하는 것, 이것이 능동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을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굉장히 공감갔고 일견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프로이트에 잠시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죽음충동 이론과 (이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를 찾아 읽었었다. 소설은 그냥 그랬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멋지게 변주된).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근저에는 현행적 본질로서의 코나투스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사람에게는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속하려고 애쓰는 방식 중 하나가 죽음일 수 있는 역설적 상황들, 많지 않을까?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15에서 이야기했었지만, 그런 것처럼, 어차피 나라는 인간 하나가 죽어도 실체적으로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어느 순간 코나투스로서의 죽음충동을 느끼는 것은, 연장으로서 존속하는 것이 힘에 부칠 때, 연장으로서 존속해나갈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느꼈을 때, 나의 소멸이 실체의 소멸이 아님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연장으로서의 삶이 끝나도 어떤 형태로든지 실체로서는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를테면 누군가의 기억속에) 코나투스의 회로를 연장에서 실체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연장으로서의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실체로서의 세계는 또 다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을 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필수적 요소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연장으로서 더 이상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죽음으로서, 존엄이 다한 연장으로서의 나 자신은 소멸시킴으로서, 실체로서의 인간적 '존엄'은 존속시키겠다는 의지일지도.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 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리20 ”신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증명 신과 (앞의 정리에 의해) 그의 모든 속성들은 영원하다. (정의 8에 의해) 신의 각각의 속성은 실존을 표현한다. 따라서 (정의 4에 의해) 신의 영원한 본질을 설명하는 이 동일한 신의 속성들은 동시에 신의 영원한 실존을 설명한다. 곧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것이 동시에 신의 실존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의 실존과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Q.E.D.

따름정리1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따라나온다. 1. 신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신의 실존은 영원 진리다.

따름정리2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도 따라나온다. 2.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불변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실존의 관계에서 변화된다면, (정리 20에 의해) 또한 본질의 관계에서도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명증한 것처럼) 참이 거짓이 되어야 할 텐데, 이는 부조리하다.

 

* 1) 1부의 전반부: 정리1~정리15

- 우주의 논리적 구성에 대한 이야기.

- 스피노자의 우주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가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다.

 

2) 1부의 후반부: 정리16~정리36

- 만물의 근원인 실체와 신, 신과 만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 만물의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신이 산출하는) 무한한 만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것.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신이 어떻게 산출하는지)

 

* 1부 정의3 실체에 대한 정의 + 정의5 양태에 대한 정의 +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다.“

* 정리16: 신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 = 만물

* 정리18: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 일시적 원인 이행적 원인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이 외재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바로 신이다.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는 외재적이고 타동적이지 않다. 1부 정리15을 염두한다면 정리16은 사실 당연하다. //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 역으로 말하면, 신은 만물에 내재해있다.

 

* 정리21~23: 스피노자가 양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야기하는 첫 번째 대목. 무한양태에 대해서도. 그동안 우리가 양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1부 정의5, 공리1이 전부였다.

* 정리24~25에서 어떻게 신이 만물 안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작용하는지 부연한다

 

* 1부 정의5에서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이 매우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데카르트에 비해서도 독특하다. 라틴어의 Modus. 방식. 데카르트는 양태를 물체의 색깔이나 촉감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개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모드라고 한다.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과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

 

*** 여기에 더해 스피노자 양태 개념의 충격적인 점은 바로 정리21~23에 걸쳐 나오는 무한양태 개념이. ? 양태는 어디에 의존하고 있고 실재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닌데 이걸 무한하다!라고 말하니까. 유한한 양태라는 것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무한하다니. 이 무한양태 개념은 스피노가 실체가 우주 전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유한양태에 말하기 앞서서 무한양태를 21~23에서 말하고 있다.

 

정리21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항상 실존해야 했으며 무한한 것이어야만 했다. 또는 이 동일한 속성에 의해 영원하고 무한하다.

 

- 항상 실존했고 실존하고 있고 -> 영원하다는 이야기. 무한하다는 이야기.

- 무한양태의 무한성과 영원성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갖게 되는 것. 만약 자기 자신에 의해 무한성 영원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실체다. 그러나 양태라는 것은 정의5에서 실체의 변형.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이때 다른 것이 바로 실체. 실체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것. 즉 여기서 갖는 양태의 무한성은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속성에 의해.

- , ”신의 어떤 속성으로부터 무한하고 영원한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정리22 “신의 어떤 속성이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한에서, 그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해야 한다.”

 

- “이 동일한 속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정리21의 무한양태

- 변양: modification 모디피카치오 (정리8의 주석2에 나온다). 스피노자는 양태(모두스)라는 말을 더 자주 쓰고 변양(모디피카치오)는 거의 쓰지 않는데 변양과 양태를 같은 의미로 쓴다. 여기서는 양태라고 쓰지 않고 변양이라고 썼다. 양태라고 썼으면 덜 헷갈렸을 텐데ㅋㅋ

 

1) 속성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실존하고(=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무한양태가 따라 나온다

(= 속성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변양된다)

2) 그리고 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이 속성으로부터 -> 또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가 따라 나온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영원하고 무한한 양태에 의해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이다

1) 신의 속성으로부터 직접 따라 나오는 무한한 양태

2) 이 직접 따라 나온 무한양태에 의해서 변양된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무한한 양태

*** 스피노자 연구자들끼리 1)을 직접적 무한양태, 2)를 매개적 무한양태라고 부른다.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해서 따라 나오는 무한양태기 때문에.

 

***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따라 나오는 것은 또 없는가. 없다. 뭐가 나올 것도 같은데. 이를테면 유한양태. 여기서 유한양태가 따라 나올 것도 같은데. . 유한한 양태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 누가 이렇게 생각했냐면 헤겔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신-> 속성->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유한양태, 이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우주가 환원하는 순서다, 라고 말했다. 완전한 신에서부터 덜 완전한 속성, 덜 완전한 직접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매개적 무한양태, 덜 완전한 유한양태 순서로.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매개적 무한양태에서 끝이다.

 

***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은 그냥 속성과 다른가. 다르다.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속성이라고 스피노자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면,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매개적 무한양태가 직접적 무한양태로 변양된 한에서 속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 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다 원인은 속성이다. 출처는 속성.

*** 가령 연장속성을 예로 들면, 스피노자가 직접적 무한양태를 운동과 정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물질적 우주에서 바로 따라 나오는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운동과 정지.

*** 스피노자가 생각한 직접적 무한양태는, 속성이 갖게 되는 특성 중 하나다. , 직접적 무한양태를 산출하지 않으면 이 속성은 속성일 수 없는 것. 어떤 속성이 속성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산출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물질이 물질이려면, 물질은 운동을 해야하고 정지를 해야 한다. 이 운동과 정지를 스피노자는 연장이라는 속성의 직접적 무한양태라고 보는 것이다. 물질은 항상 운동과 정지 중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매개적 무한양태는?

- 2부 정리14 보조정리의 주석(55P) : 어떤 개별적인 개체라는 것은 복합물체. 개체들이 모여가지고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 상위의 개체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또 다른 상위의 개체가 있고... 이렇게 죽 나아가다보면 자연전체를 하나의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다. 자연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이며, 그 부분들, 곧 모든 물체들은 전체 개체의 변화 없이도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된다그러니까 단 하나의 개체로 사고되는 자연,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스피노자는 슐러에게 보내는 예순네 번째 편지에서 이것을 우주전체의 모습이다라고 이야기 (강의록 10)

 

- 여기서 말하는 우주전체는 실체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연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전체로서의 자연. 실체는 개체가 아니다.

- 부분과 전체를, 스피노자는 notion이라고 부른다. 통념이라고 부르지, 부분-전체를 real thing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분과 전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상의, 상대적인 부분과 전체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체로서 인식된 자연전체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다르다. 개체로서의 자연전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태양계, 은하계, 우주 이런 것들. 우리가 자연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물체들.

- 사람-> 국가-> 지구-> 태양계 -> 우주, 이런식으로 죽 나아가다보면 이 자연 안에 우주라는 것을 여러 개의 개체들이 합성해서 만든 최상위의 개체처럼 인식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매개적 무한양태. 하지만 이 최상위의 개체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로서의 자연과는 동일하지 않다. ?? 이것은 원인이 아니니까.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원인으로서의 실체가 생산해낸 결과다.

*** 직접적 무한양태도 매개적 무한양태도 실체가 원인. 이 직접적 무한양태나 매개적 무한양태는 결과들의 집합이지, 여기에는 논리적으로서의 원인은 빠져있다.

- ”매개로 해서원인으로 해서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분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주전체 모습이라는 것이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원인으로해서 따라나오는 게 아니다. 우주전체 모습의 원인은 속성이다. 이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라는 매개로 해서가능하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운동과 정지라는 직접적 무한양태를 매개로 해서“, 연장속성이 원인이 돼서따라 나온 결과가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원인으로서의 연장개념이다. 1부 정리14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이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데카르트의 자연은 물질적인 자연, 내재적 원인이 없고 내적 동력이 없는 기하학적 자연. 여기서 운동이라는 것은 단지 위치이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처럼 연장이 신의 속성이 되면, 그러니까 물질적인 연장이 신의 바깥이 아니라 신의 안에 들어와 있고 신을 구성하는 것이면, 신이 갖고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 자연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은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자연이 아니라 무한하고 다이나믹한 동력학적인 자연. 그러니까 연장개념이 없으면 운동과 정지는 단지 기하하적인 장소 이동, 위치 이동에 불과할 텐데 스피노자에게는 연장개념 자체에 동력학적인 원인개념이 들어가 있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운동과 정지 역시 동력학적인 것이 된다. 이게 두 사람의 차이이며, 스피노자의 연장개념에 원인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근거.

- ”운동과 정지를 전제로 했을 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공간이라는 것은? 정리15에서 스피노자와 데카르트는 진공을 부정했다. 진공을 부정했다= 우주 전체가 물질로 가득 차있다, 충만하다, 공백이 없다. 그러므로 연장이라는 것 자체와 공간은 구별이 안 된다. 공간 자체에 다 물질이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 정리21의 증명

첫 번째 부분: 무한성 증명/ 두 번째 부분: 영원성 증명

-”신의 관념에서 주의해야할 점! 신의 관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신의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념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 스피노자는 2부 정리3과 정리4에서 이 신의 관념이 무한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연장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가 운동과 정지라고 이야기했다면, 사유속성에서 직접적 무한양태는 바로 무한지성이다.

- 그렇다면 사유속성의 매개적 무한양태는 뭘까? 아무도 모른다. 다 추측만 할 뿐이다. 이것은 다 슐러라는 사람 때문이다ㅋㅋㅋ

- 63번째 편지에서 슐러는 직접적 무한양태와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를 알고 싶다고 했고, 스피노자는 64번째 편지에서 답을 한다. “직접적 무한양태의 사례들로는, 사유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지성이 있고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가 있습니다. 매개적 무한양태의 사례로는 우주 전체의 모습이 있는데 이는 무한한 방식으로 변이됨에도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

- 이상하지 않은가. 두 번째 정리의 사례로 우주전체의 모습 하나만 이야기했다. 슐러가 한 번 더 편지를 보냈어야지! 선생님, 하나 빠지셨는데요? 사유의 경우에 매개적 무한양태가 뭔지 말씀해 주셔야죠, 라고 질문을 했어야지. 이거 분명 궁금했을 텐데. 이게 지금 사람들을 몇 백년째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주석가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이게 뭘까, 대체. 어떤 사람은 평행론에 따라서 우주전체 모습의 관념이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가 이 하나를 가지고 두 개 모두에 답했다(연장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사유에도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왜 여기에서만 찾냐 5부에서도 찾자고 하고 제각각이다. 그래서 논문 쓰기 굉장히 좋다ㅋㅋㅋ 스피노자가 아무 이야기도 안 했으니까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생겨나는 시간과 소멸하는 시간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규정된 실존을 갖는다는 것 = 기원과 종말이 있다는 것. 시작 이전과 끝 이후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때는 사유속성으로부터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가. 따라 나오겠지. 하지만 신의 속성과는 무관하겠지.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가진 신의 관념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는 가설에 모순이다.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의 관념이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하려면 무한해야 한다(귀류법)

- 창조론은 우주의 영원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신 이전에 무가 있었어야 하니까. 창조라는 시작이 있어야 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창조라는 시작은 없다. 영원히 계속 존재해있었다.

 

정리23: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모든 양태는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거나 아니면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에 의해 변양된 어떤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했다.”

 

정리24-29는 유한양태에 대한 이야기 (딱 부러지게 유한양태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어쨌든 정리28, 28가면 singular thing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정리24: “신에 의해 생산된 것들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 스피노자가 따름정리에서 신이 단지 생성원인일 뿐 아니라 존재원인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이나 신체, 인간 같은 개별적 존재자를 유한실체라고 간주하고 있고, 신에 의해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자기 스스로 실체처럼 존립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의5, 공리1, 정리15에서 일관되게 실체와 양태를 구별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스피노자에게 신을 제외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더욱이 유한실체는 논리적 모순에 불과하다(양태도 무한한데, 실체가 유한할리가!!!).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고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신에 의존한다면,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처음 생성될 때만이 아니라 생성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 이것이 따름정리의 의미다.

- 정리25에 가서 다시 할 이야기지만, 마지막 문장처럼 이야기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개체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자립성을 박탈한 것처럼 보인다. 생성될 때뿐만 아니라 재생산될 때도 지속될 때도 항상 신이 있어야 존립할 수 있으니까. 신이 없으면 유한한 양태들은 존립할 수 없으니 매순간 신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니까 비실재적, 비자율적으로 보이는데. 정리25로 가보자.

 

정리25: “신은 실재들의 실존의 작용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의 작용인이기도 하다.”

따름정리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점에 대한 증명은 정리15 및 정의5로부터 명백하다.

 

- 존재하는 개체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이다.

- 정리15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데, 이유는, 정리15가 신과 만물 사이에 가장 원초적인 관계를 제시한 명제라서 그렇다. 정리16부터 정리36까지가 신과 만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 증명할 때 다 정리15로 돌아간다. 정리15가 이하의 논의들의 출발점이라서.

- 정리24가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면 정리25는 플라톤주의를 겨냥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의 요체는 이데와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 이게 중세철학에서 나타날 때는 영원한 본질의 세계와 유한한 실존의 세계로 구별이 된다. 본질이라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사물의 본질과 실존은 엄밀히 구분된다. “사물들의 실존이 시간적이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것이라면, 사물들의 본질은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원형(이데아로서)에 입각한 것으로 영원히 존립하는 것이다

- 신이 창조한 것은 사물들의 실존. 사물들의 본질은 스콜라 철학식으로 말하면 가능태로, 잠재태로 있는 것. “possibility 가능태로 존재(본질) + 신이 existence를 부여 -> actuality를 갖고 현실태” -> 이게 바로 창조. 본질 자체는 actuality는 없지만 possibility 가능태로서는 계속 영원히 존립하고 있다

- 스피노자는 정리25에서 이러한 플라톤주의 모델을 반박한다. “하지만 증명에서 공리4와 정리15에 근거를 두고 있듯이, 스피노자가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한에서, 사물들의 본질이 신이라는 궁극적 원인과 무관하게 영원히 존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이 만물의 실존만이 아니라 그 본질들에 대해서도 작용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석에서처럼 기분 나쁠 때는 생산 안 했다가 기분 좋을 때는 생산했다가 이런 거 아니고 만물을 필연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넘치도록 전능해서. 무한한 생산자로서.

 

-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개체들로부터 일체의 독자적인 실존과 행위의 역량, 또한 사유의 역량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인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체들은 아무런 자율성과 실재성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으니까. 신은 만물의 존재의 원인이자 지속의 원인이기도 하니까. 신 없이는 인간은 아무런 역량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대목은!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이라는 점이다.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점은, 신의 속성이 지니고 있는 본성, 곧 그의 무한한 역량을 양태들 역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절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중세식으로 말하면 분유’)할 뿐이다.

 

*** 스피노자의 존재론의 윤리적인 함의를 이야기할 때 항상 유념해야할 점

- 신이 양태하고 맺는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스피노자식 신의 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양태들이 표현한다’, ‘신이 양태들의 원인이다’, ‘신이 양태들의 실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본질의 원인이다’, ‘양태들을 생산한다같은 표현들에서 나오는 신과 양태의 관계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신은 양태들에 있어서 타자가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자, 어떤 개체 사물과 타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항상 염두하는 것인데, ‘유한하다는 말은, 자신과 타자의 것에 대해서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자신의 타자를 전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유한한 사물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동물을 먹기도 하고 식물을 먹기도 하고, 먹고 먹히는 생태 사슬을 거부할 수 없다. 유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존재하려면 타자와 positive한 관계만 맺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유한자와 타자의 관계의 기본적인 측면인데-

 

-신은 그렇지 않다. 신은 무한자다. 신은 어느 경우에도 양태를 배제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신은 양태들로부터 무언가를 뺏거나 박탈하지 않고 양태들에게 항상 근거와 역량을 제공한다. 존재할 수 있는 역량,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주는 존재. “신은 타자가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신과 양태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다. 신은 양태에 대해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으니까. 신은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무언가를 제한하고 박탈하는 게 아니라.

-문제는 양태가 신으로부터 신의 절대적인 무한한 역량을 다 갖고 올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게 바로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의미.

- 그러니까 양태의 자율성의 근거!!는 신이 준 긍정성과 역량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는 점. 물론 그걸 얼마나 표현하는지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개체마다 다르지만. 나중에 가면 코나투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역량. 그러니까 신과 피조물, 신과 양태들과의 관계는 신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 ‘실체가 양태의 원인이다라는 말과 실체가 양태의 본질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신은 양태의 원인이기는 해도 양태의 본질은 아니다. 양태는 각각 개별본질이 따로 있다. 이 개별본질이 코나투스. 양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립하려는 노력. 양태들의 본질이 코나투스.

- 그 근거를 꼭 으로 놓았어야 하는 이유. 이 당시에는 신이 만물의 근거, 만물을 사고하기 위해 거쳐가지 않을 수 없는 전제였기 때문에 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 당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를테면 동양철학자였다면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자연만 이야기한다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요일에는 FA컵 64강전이 있었다. 수없이 온 곳이지만 여전히 축구장 앞에 서면 떨린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도심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게 가끔씩 새삼 신기하다. 일 하나를 마감하느라고 유독 피곤한 몸으로 빽빽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눌리다시피해서 오면서도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매주 축구장에서 경기를 본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다. 이날은 올해 첫 야간경기. 야간 경기 너무 좋아 게다가 이겼다!


목요일에는 드디어 교정지를 보냈고 아쉬탕가 요가를 갔다. 새로 나온 4월 요가 스케쥴을 보니 아쉬탕가 요가가 일주일에 두 번 있었던 3월과 다르게 4월에는 딱 하나 있는데 그마저도 세미나 시간이랑 겹쳐 당분간 아쉬탕가를 못하게 됐다. 3월에는 아쉬탕가, 빈야사, 코어요가 사이에서 뭘 가고 뭘 안 갈지 행복한 고민을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그 어느때보다 정성들여 아쉬탕가를 하고 왔다. 이날의 성과는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를 할 때 드디어 매트에서 머리를 떼었다는 것. 물론 3초도 못 갔지만ㅋㅋ 이제 요가한 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 붙은 근육들이 느껴진다. 배도 한결 단단해졌고 특히 허벅지 뒷쪽과 삼두근이 단단해졌다. 근육이 붙고 단단해지고 있어! 요가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올 때의 봄밤은 어쩐지 더욱 포근하고 설레고 황홀해서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와인을 마시고 푹 잤다. 


금요일인 오늘은 아침에 빈야사 요가를 다녀왔다. 이제 수리야나마스카라A와 B에는 매우 익숙해져서 내 몸이 내 이상을 제대로 실천하는지 아닌지와 별개로 누군가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걸 매우 두려워하는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운동갈 시간을 따로 못 내고 있는 봉이가 지난주부터 유튜브로 홈트를 찾아보는 걸 봤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상보면서 혼자 할 거라면 내가 가르쳐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퇴근하고 같이, 혹은 주말마다 같이 30분씩만 해도 좋을 것 같아서. 봉이는 처음이니까 일단 블럭도 필요할 것 같고. 블럭이랑 요가매트를 알아봐야겠다. 그나저나 요즘 읽고 있는 책 두 권이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만 시간 빼서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고 싶은데(두 권 다 한 번 잡으면 푹 빠지기에 딱 좋은 책이어서) 이번 주는 뭔가 계속 바쁘다. 스피노자 한 줄을 못 읽었네. 출퇴근 시간에 짬짬이 나눠 읽기에는 몰입도가 너무 커서,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다음에 읽고 싶어서 두 권 중 한 권은 따로 빼놓았다. 아껴둬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말에는 (지난 번에 못 간 나에게는) 올시즌 첫 홈경기를 봤고

너무나 반가운 사람들이랑 우르르 몰려가 술을 마셨고 

신나게 취한 나머지 돌아오는 길에 난데없이 치솟아 오르는 마이클 잭슨 소울을 주체할 수가 없어

일행 빼고는 지나다니는 사람 없는 지하철역에서 저러고 놀았다...

이래저래 주말이 휙 지나가버렸다. 주말아 문워킹으로 뒷걸음쳐서 다시 와주면 안 되겠니 


월요일은 정신없이 바빴고(와중에 중요한 어떤 것에서 깔끔하게 통과했다 만세!)

화요일 저녁에는 친구와 오랜만에 단둘이서 오키나와 식당에서 오리온 생맥주를 마셨다.

두툼한 카츠산도도 끊이지 않고 몇 시간동안 이어지는 이야기도 최고의 술친구.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빨간 코트와 역시 무척 좋아하는 스타킹이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눈앞에 아른거리며 귀갓길 친구가 되어주었다. 

춤추듯이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봄밤 참 좋더라. 

미세먼지만 아니면 하염없이 걷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걷고 싶은 날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