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을 처음 들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굉장히 공감갔고 일견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프로이트에 잠시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죽음충동 이론과 (이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를 찾아 읽었었다. 소설은 그냥 그랬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멋지게 변주된).


스피노자는 죽음충동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유한적 동물들의 근저에는 현행적 본질로서의 코나투스가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사람에게는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속하려고 애쓰는 방식 중 하나가 죽음일 수 있는 역설적 상황들, 많지 않을까? 물을 양태로 인식하는 방법과 실체로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15에서 이야기했었지만, 그런 것처럼, 어차피 나라는 인간 하나가 죽어도 실체적으로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어느 순간 코나투스로서의 죽음충동을 느끼는 것은, 연장으로서 존속하는 것이 힘에 부칠 때, 연장으로서 존속해나갈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느꼈을 때, 나의 소멸이 실체의 소멸이 아님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연장으로서의 삶이 끝나도 어떤 형태로든지 실체로서는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를테면 누군가의 기억속에) 코나투스의 회로를 연장에서 실체로 바꾸는 것이 아닐까. 연장으로서의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실체로서의 세계는 또 다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을 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필수적 요소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연장으로서 더 이상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어떤 상황을 맞았을 때, 죽음으로서, 존엄이 다한 연장으로서의 나 자신은 소멸시킴으로서, 실체로서의 인간적 '존엄'은 존속시키겠다는 의지일지도. 


- 1920년에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아주 흥미로운 개념을 말하는데 바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에는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충동이 있는 것 같다는 사변적인 가설을 세운다. 하나가 삶의 충동. 에로스. 이것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아남으려는, 생존하려고 막 애쓰는. 다른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 무기물과 같이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스피노자가 2부에서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변용되는, 물을 마시든, 바람을 쐬든, 화를 내든, 뭔가 이렇게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고, 변용하고 변용되고. 이것은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유기체는 그 자극이, 자극 받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즐거운 고통도 있고 안 좋은 고통도 있겠고. 유기체는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으니까 무기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 자극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 상태가 굉장히 편안한. 이렇게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같이 이야기하며, 저 두 가지 충동이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들을 이루는 기본저인 충동인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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