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에게는 정신 자체도 관념이다. 그에 따르면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다
- 정의4에서 말하는 ‘적합성’은 합치와는 다르다. 합치는 외적인 일치까지 이루는 것인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적합성은 어떤 이유로 합치하는 지를 파악하는 내적 근거까지를 말하는 것. 부적합한 인식이 늘 오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찍어서 때려 맞출 수도 있다. 이런 외적 합치는 적합성이 아니다.
- 자연의 공통질서에 입각한 지각 방식 – 부적합한 인식 – 잘려나가고 혼란스러운 인식
정의5
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해명
나는 무한정한 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실존하는 실재의 본성 자체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고 또한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지 제거하지 않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한정한“이라는 표현. indefinitus 인데피니투스. 1부에서는 주로 ‘무한한’과 ‘유한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영어로 하면 infinite finite. 무한정한은 영어로 하면 indefinite.
- ‘무한정’은 사물과는 관계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무한정이라는 범주는 굉장히 유동적이다.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고 끝날지도 모르는.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다.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 사물의 본성하고도 관련이 없고, 또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것을 스피노자는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으로서 ‘지속’이라고 규정한다. 지속 duratio 듀라치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을 수밖에 없는 게 무한에서는 무한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중요한 1부 정리 21-23의 명제는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신, 또는 신의 본질을 이루는 속성에서 ”유한“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선 무한한 것이 나온다.
정의6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 실재성과 완전성 개념은 1부에 이미 몇 차례 등장했다
- 1부 정리11의 주석 ”어떤 외부원인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는 실체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외부 원인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은 그것들이 많은 부분을 포함하든 적은 부분을 포함하든 간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완전성 또는 실재성을 외부원인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의 실존은 오직 외부원인의 완전성에서 비롯할 뿐이며, 그것들 자신의 완전성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실체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은 어떤 것이든지 어떠한 외부원인에 의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체의 실존 역시 실체의 본성으로부터만 따라 나와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실체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실재의 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정립한다. 반대로 불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며,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실재의 실존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무한한 또는 완전한 존재자, 곧 신에 대해서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은 모든 불완전성을 배제하고 절대적 완전성을 함축하므로, 그에 따라 그의 실존에 대해 의심할 모든 이유를 제거하며 그의 실존에 대해 가장 큰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1부 부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22,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 완전성/불완전성에는 degree가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는 양태 중 가장 완전한 것이고 유한양태는 덜 완전한 것이다.
* 실재성
- 1부 정리9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 1부 정리 11의 주석 ”왜냐하면 실존할 수 있음은 역량이므로, 어떤 실재의 본성에 더 많은 실재성이 속할수록, 그 실재는 실존하기 위한 힘을 스스로 더 많이 지니게 된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스스로 지니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절대적으로 실존한다.“
- 1부 정리16의 증명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도 실재성이 degree를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실재는 실재성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어떤 실재는 덜 갖고 있고.
- 1부에서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는 완전성=실재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완전성과 실재성은 같은 것이고 정의6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의6에서 한 가지 빠져있는 것은 1부 정리11의 주석에도 나오는 ”역량“이다. 사실상 실재성=완전성=역량
- 4부 서문의 초반부는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철학적/추상적 개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따져보는 니체의 계보학적 인식과 비슷한데, 여기에 따르면 완전성도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 2부 정의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면서 흥미로운 정의다.
- 첫 번째 문장은 1부 정리28에서 접했던 규정이다. 핵심은 그 뒷부분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res singularis / singular thing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체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이나 개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행위하느냐 여부가 어떤 것을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데모를 해서 정권이 퇴진한다면 또는 탄핵이 된다면, 그것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독특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공통의 작용에 같이 협력을 한 것이니까. 따라서 어떤 하나의 공통의 작용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냈다면 그게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스피노자 관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singular thing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이런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정의다.
- 즉, 다수의 개체들이 어떤 같은 작용을 수행해서 공동의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면 스피노자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의 독특한 실재다. 다수가 분리되어 있는 개체들이라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에게 수백만의 개체도 singular thing이 될 수 있다. 즉, 스피노자에게 singular thing의 범위는 매우 가변적이다. ‘개체’와 오해해서는 안 된다.
-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를 이렇게 정의한 것은 아마 복합물체를 주로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복합물체는 다수의 물체가 합쳐져서 형성된 것. 물리적인 의미에서 개체의 본질은 운동과 정지의 관계(2부 자연학 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 참조). 그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체들이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것은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깨지면 다른 개체들로 또는 독특한 실재들로 분할되는 것.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과 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에 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사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인데, singularis라고 하면, ”하나의, 단독의~“ 라는 의미이며 원래 쓰이는 단어의 용법도 하나, 단수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이 단어의 원래 용법을 내용상으로 뒤집은.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 그런데 singularis는 그런 의미의 유일성과는 다른,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된 다음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도 있다.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다. 300년전 철학이지만 매우 현대적인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점이다.
2부에는 5개의 공리가 있다 (1부는 7개였다). 주로 인간의 사유, 실존과 관련된 공리들이다.
공리1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 우리는 1부 논의를 통해 실체는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인 데 반해, 후자는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만큼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근거 내지 원인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다른 것은 바로 실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간은 양태이며 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실존하느냐 실존하지 않느냐는 ”자연의 질서 ordo naturae에 달려있다.
공리2
인간은 사유한다 Homo cogitat
-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철학은 코기토cogito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유명한 명제가 ‘코키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에서 프랑스어로 이 명제를 처음 사용했으며(“je pense, donc je suis.”) <철학원리(1644)> 1부 7항에서 라틴어로 이 명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 cogitare: 생각한다. cogito라는 동사변형 자체(1인칭 현재형)에 이미 “나는 생각한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스피노자는 ego cogito하지 않고 3인칭을 써서 “homo cogitat”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 코기토의 철학은 주관성의 철학, 주체성의 철학. 나라는 사유하는 주체를 기반으로 둔 근대의 주관성의 철학. 이것을 강조한 사람이 하이데거고, 저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든 말들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데카르트의 이 말을 ich denke, 독일어로 번역한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예전에는 ‘초월적 통각’이라고 번역했었는데 요즘은 수반 의식,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 우리가 외부 사물을 표상하거나 생각할 때 항상 수반되어있는 생각, 모든 표상들에 수반해야 하는 의식이 바로 ich denke다. 태양에 관한 생각이든, 다른 사물에 대한 생각이든 거기에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항상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수반되어 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번역하면서 자기 철학을 transzendental philosophy 초월론 철학, 초월 철학으로. 그리고 “근대철학에 근거한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시작을 데카르트가 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코기토의 철학, 코기토의 형이상학, 이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들었다. 하이데거가 쓴 <니체> 2권 4부를 보면 서양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하이데거가 재구성한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코기토 이야기가 한참 나온다. 하이데거가 볼 때 데카르트에서부터 니체에 이르는 400년 가까운 시간이 근대철학의 시작인 것이다.
- <방법서설> Discours dela methode. 뭔가 ‘방법에 대한 담론’이라고 번역해야할 것 같은데 ‘방법서설’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17세기에는 discours라는 말이 서설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저 방법서설이라는 제목은 데카르트가 과학자였던 시절 1637년에 과학논문 세 편을 발표할 때, 그 앞에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런 논문을 쓰게 됐는지 철학적 서론을 붙인 것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가 이 과학적인 논문을 쓰게 된 방법론적인 서론이라는 뜻인데, 이게 워낙 유명해지면서 과학논문은 다들 잊어버리고ㅋㅋ 저 서론만 논의하게 됐다. 과학논문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논문인데. 이 방법서설은 근대철학서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다. 책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바로 이 방법서설에서 이 유명한 명제가 불어로 처음 쓰이게 되고, 1644년에 <철학원리>에서 1부에 불어로 썼던 것을 라틴어로 표현한 cogito ergo sum이 등장한다. sum도 역시 1인칭 현재동사로 영어로 하면 be동사의 1인칭. I think therefore I am.
- 데카르트의 제일 유명한 책은 <성찰>인데 이게 제일 유명한 책인데다가 코기토 명제가 제일 유명한 명제다 보니 cogito ergo sum이 <성찰>에 등장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ㅋㅋ <성찰>에는 조금 다른 명제가 나온다. ego sum, ego existo
- <철학원리>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게다가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쉽게, 신도 하늘도 신체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손도 발도 마지막으로 신체도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생각하는 것인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과 같은 식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이 그것이 생각하는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러한 인식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차적이며 가장 확실한 인식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 현대언어철학에서 저것을 performative, 수행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찰>에 나오는 저 명제가 현대언어철학의 통찰에 훨씬 가까운 명제다.
- 수행문, 서술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존 오스틴 John Langshaw Austin이라는 언어철학자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 <화행론> <말과 행위>가 있다. 서술문/진술문 constative는 우리가 말을 하거나 어떤 문장을 쓸 때 어떤 사실에 관해 서술하고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날이 덥다” “밤 9시다” 같은 것들. 수행문 performative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산출하는 문장을 말한다. “물 좀 가져와라” 같은 것.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짐 싸세요”ㅋㅋㅋ “지금부터 청문회를 싲가하겠습니다” 같은 것.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존 오스틴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오스틴이 직접 책으로 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제자가 강연을 묶어서 낸 것.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공리2에서 스피노자가 cogito를 homo cogotat로 바꾼 것은 ego -> homo의 간단한 변화 같지만, 사실 매우 복잡한 결과를 낳는 변화다. 사실 “인간은 사유한다”는 명제는 무척 간단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관적으로 분명치는 않다. 몇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고려해보자.
1) 이 명제는 가령 “인간(만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곧 무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식물, 더 나아가 동물도 생각하지 못하는 반면, 인간은 생각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2부 정리13의 주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와 충돌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sunt)- 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정신화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어떤 방법으로든(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사유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의미다.
2) 그렇다면 이 명제는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보다 더 많이, 또는 더 높은 정도로) 생각한다.”로 바꿔서 표현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왜, 어떤 근거로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몇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다. <- 알파고 때문에 이 해석도 달라질 것 같긴 하다. 알파고는 인간보다 더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3) 우선 “(생각은 인간의 유일한 본질이므로) 인간은 생각한다”고 바꿔 표현할 수 있다.
4) 또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들 중 하나이므로) 인간은 생각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5) 아니면 “(생각이 인간의 본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생각”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적 성질, 아키댄스가 될 것이다.
- 이 가능성들 중에서 5)는 뒤에 나오는 논의와 어긋난다. 2부 정리11의 증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2. 곧 (2부 공리2에 의해) 사유 양태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3. 이 사유양태 전체 중에서 본성상 앞서는 것은 (2부 공리3에 의해) 관념이며,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존재해야 한다. 4.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 3과 4는 뒤에 나오는 공리3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하고 1과 2를 통해 우리는 공리2에 나오는 ”인간은 사유한다/생각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명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3)을 의미하는지 4)를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정리13의 따름정리인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3부 정리7과 정리9까지 가야 조금 더 정확히 답변될 수 있다.
- (그러니까 인간이 3) ”생각한다“는 것을 유일한 본질로 갖고 있는지, 4) ”생각한다“ 이외에 인간에게 또 다른 본질이 있는지 이것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아직 결정이 안 된 문제다. 이것은 뒤에 가봐야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2부 공리2에서는 인간은 ”생각한다“고 하고 있고, 뒤에 나오는 논의를 고려해봤을 때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정도로 알 수 있다)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누구인가?
6) 그 ”인간“은 개별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집합적인 또는 유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인가?
7)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데카르트의 cogito가 함축하는 의미에서 ”나“라고 하는 ego I같은 독자적인 ”주체“ 또는 적어도 독립적인 개체인가? ( 1) 독자적인 주체, 개별적인 주체인지, 아니면 2) 이런 개별적인 주체와는 다른 어떤 것인지 이것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 가령 프로이트에게 생각의 주체, 코기타치오의 주체는 누구일까?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프로이트의 초기저작 <꿈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할 수 있는 7장에 가보면 그는 인간의 정신장치를 망원경에 비교해서 그린다. 사이킥 아파라투스. 정신장치. 정신모델
W 지각(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하는 기관) -> ll Er 기억 ll 기억‘ ll 기억’‘ 무의식 llll (<- 전의식의 장벽을 통과) -> M 운동
2. W 지각 -> M 운동 : 제일 원시적인 정치장치. 지각하고 바로 배출해버림
- 프로이트의 정신장치 중에서 2번 같은 원시적인 장치에는 ’기억‘이 없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을 기억으로 축적하지 않고 바로 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같은 고도로 발전한 존재의 정신장치는 자극을 받으면 다 배출하는 게 아니라 1)처럼 기억을 통해 정신장치 안에 자극을 새겨 넣고 축적한다. 그리고 이런 기억장치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제일 어렸을 때의 인상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그 이후의 인상들... 이런 식으로 기억장치가 굉장히 많다.
- 그리고 이게 무의식이다. 이런 기억장치들을 통해 무의식이 구성된다. 그러면 이렇게 구성된 무의식이 바로 M으로 연결되는가? 아니다. 저 약식 그림에서처럼 ’전의식‘이라는 장벽이 저렇게 서있다. 전의식의 검열을 통과해야 무의식이 우리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하고, 전의식이 무의식의 소원을 배출하는 밸브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전의식의 검열을 거쳐야 무의식이 비로소 우리의 꿈 같은 것을 통해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전의식-의식 이런 3원 구도.
- 그러나 후기 저작에 가면, 특히 <자아와 이드(1823)>라는 작은 소책자에 가면 그는 더 이상 저 3원 구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을 이야기한다.
- 이런 식의 방식을 프로이트는 독어로 topik이라고 하는데,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topos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면 ’장소론‘. 어떤 개념을 공간적인 비유로 푸는 것을 말한다. topos라는 말을 가지고 와서 프로이트는 topik이라고 말했고, 초기저작의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다. <자아와 이드>를 보면 프로이트가 아예 사람의 머리 모양을 그려놓고 여기서 이드 초자아 자아를 구별한다. 공간적인 비유를 가지고 인간의 정신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 맑스에게도 topik이 있다. ”토대와 상부구조“ 이것을 가지고 사회를 공간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철학사에 보면 topik을 쓰는 철학자들이 근대에 꽤 있는데, 어떤 사람은 topography로 해서 ”지형학“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장소론이 맞다
- 다시 프로이트 후기 저작 이야기로 돌아와서, 후기 저작의 이 topik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이드는 당연히 무의식이고, 여기서 전의식에 해당하는 초자아를 무의식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토픽에서는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했는데 두 번째 토픽에 가면 초자아 자체도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첫 번째 <꿈의 해석>에 나오는 무의식은 아주 병리적이고 아주 파괴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후기의 두 번째 토픽에 가면 무의식은 더 이상 그런 게 아니라, 초자아, 여기서는 도덕적인 의식이라든가 인간에 내재해있는 도덕률도 인간의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역할이 훨씬 강조된 것이 후기이다.
- 다시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돌아가보면, 프로이트는 코기타치오의 주체, 사유의 주체를 이드라고 말할 것이다. 이드는 원래 라틴어이고, 불어로는 sa, 영어로는 it, “그것”.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데카르트는 에고를 이야기했지만 프로이트의 tipik에서 에고, 자아라는 것은 아주 표층적인 층위만 갖고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답은 에고일 수가 없다. 이드. 그것.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생각한다. 우리 안의 ’그것‘이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뭔지는 모른다. 본능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도덕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들어서 생겨난 생각일 수도 있고.
- 예전에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60대 이상만 되면 생각이 다 똑같아진다고 말했었는데, 이들의 생각의 주어는 누구일까? ....국정원?ㅋㅋㅋㅋㅠㅠ 노모의 핸드폰에 카톡 오던 그 메시지들이 국정원 전직원들이었다는 게 밝혀졌는데, 정말 국정원들이 만들어서 수백만 명에게 뿌린 메시지들이 들어가고 돌고 그러다보면 생각의 주어가 누구인지, 국정원인 건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에고가 아니다. 이드이다. 그것. 그것이 생각한다.
- 그러니까 호모 코기타트, 인간은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스피노자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누구인지, 이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아까 독특한 실재라는 게 굉장히 가변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생각의 주체인 호모라는 것도 그렇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에고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 혹시 미래에 우리가 뇌에 칩 같은 것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면 생각의 주체가 누군인지에 관한 문제가 정말로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칩을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공리3
사랑이나 욕망 또는 마음의 정서(affectus animi)라는 이름 아래 지칭되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 양태들은, 동일한 개인 안에 사랑 받는 대상, 욕망 받는 대상 등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은 다른 어떤 사유 양태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 내가 ”사랑해“라고 하면 대상이 있을 것이다. 대상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니까. 나는 ”욕망해“라고 하면 욕망의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정서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고 그 관념이 존재한다. 즉. 관념이 아펙투스보다 선행한다. 그러니 아펙투스가 없이도 관념은 존재 가능.
공리4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 affectio
-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어떤 신체“라는 표현이다. ”우리의“ 신체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이라고. 스피노자는 지금 소유격을 쓰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나의- 우리의- 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도 그렇고 스피노자도 그렇고 ”이게 나의 신체다“라고 말하기 굉장히 어렵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라서 그렇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정신과 신체는 엄밀하게 분리가 되고, 정신이야말로(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유와 분리가 되어있는 이 신체라는 것이 정신과 어떻게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신과 신체가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데,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어떻게 하나는 사유속성에 속하고 하나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정신과 신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이 신체가 ’나의 신체‘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여기서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표현. 어떤 신체가 변용되고 있다, 추워서 입김이 나온다거나 살갗에 오돌도돌 몸서리가 쳐지는데 이게 지금 ”나의 신체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신체가 그러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이 신체가 나의 신체다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앞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공리에서는 어쨌든 나의 신체라고 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어떤 신체가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공리5
우리는 신체와 사유 양태들 이외의 다른 어떤 독특한 실재도 느끼거나 지각하지 못한다
- 신체 body 연장속성의 양태 / 정신 관념. 사유속성의 양태
- 1부 정의6에 보면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었고 신 자체는 무한하지만 우리는 그 무한한 와중에서 신체와 정신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속성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속성의 양태 이외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