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예전에 썼던 글과 2부 정리35의 주석의 내용이 너무나 비슷해서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역시 아주 가끔씩 보면 사람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하다. 근대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성적인 철학자든 불구스든. 줄여서 태양 200걸음 이론으로 나 혼자 부르고 있는 정리35의 주석과 비슷하다는 나의 예전 글.

 

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 후설의 생활세계. 스피노자의 상상생활세계인 것은 확실히 전환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면서도, 그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라는 것. 어떻게 보면 상상은 인식의 부모 같은 것이잖아? 조건이자 전제로서의 출발점이지만 결국에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것. 넘어서야하는 것. 사유의 인식의 근간이 되는 첫 생활세계를 부모가 만들어놓는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이런 비유는 매우 좋지 않다. 부모가 존재하는 가족의 형태를 기본이고 일반적으로 전제 삼고 만들어내는 비유. 이것 역시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우리의 사유 활동의 조건, 전제가 되고 결국은 멀어져야 하는 것. 세상의 많은 클리셰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고 또 멀어져야 할 의무도 있고.

 

그런 점에서 감정인식의 관계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일 때 감정이란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감정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감정이 없으면 인식도 있을 수가 없다. 평소에 감정이 일상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감정의 존재를 모르고 살지만 나나 타인의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서야 감정이 거추장스럽고 거대하게 다가와서 그렇지. 감정은 인식과 기억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통찰을 보여줄지 3부가 기대된다.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3.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4.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관념을 신의 관점에서 다 참된 관념이라고 규정해놓고 그 참된 관념의 덩어리에서 잘려나온조각조각을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식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거대한 참된 관념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부딪힌 접촉면을 보고 그것의 아주 작은 일부를 지각한다고 생각하니 참된 관념이 매우 내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라 정겨우면서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져서 아득하다. 내 좁은 시야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참된 관념으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으면 눈에 담길까. 전에 트위터에 스타벅스 이론을 적어서 많은 공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한토막, 누가 들어도 이건 A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지만 사실은 B였다는 작은 반전이 있는 글이었다. 그 글 아래 붙은 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들 그런 일을 경험했고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어 보이는 찰나의 대화로 찰나의 순간으로 무엇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추리게임입니다라고 누군가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또한 힘들다. 그래서 뭔가를 쉽게 유형화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침대는 프로크루스테스에게서 사지 말고 차라리 이케아에서.....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기보다 불행한 소식이다. 어떤 사진을 놓고 이 사진이 합성이거나 조작된 사진이라는 것은 기술적인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알아볼 수 있고,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명료하게 밝혀낼 수 있다. 거짓은 거짓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하지만 누군가 크롭해서 크기만 맞춘 사진을 보면서 이게 사실은 어떤 사진의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어렵다. 부분은 진실이 맞으니까 이것도 진실이라고 합리화하기도 쉽고, ’부분이 진실이면 그러면 됐지라고 나태해지기도 쉽다. 그릇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보는 이것이 부분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그 부분에 진실이 섞여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별해내는 데에 있어 더욱 정교하고 능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거짓의 문제가 아닌 참-부분의 참의 문제는 더 복잡하니까.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5. 이번 강의에서는 다른 철학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복습하면서 알튀세르의 생활세계, 일반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후설의 현상학을 조금 찾아본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슐라르에 한나절 넘게 빠져있었다. 인용으로서 바슐라르를 읽은 적은 있지만 바슐라르 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내가 한때 매우 좋아했던 미셸 투르니에가 매우 좋아했던, 그의 대학시절 교수였다는 것이 내가 바슐라르에 대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정도다. 언젠가 바슐라르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왜 무인가라는 느낌의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나는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5. 이날 들은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저 유형에 해당하는 많은 사례들을 나와 타인으로부터 갖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사람은(또는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는 경우에는) 정말 1종의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유형화를 좋아하고 그 유형화를 합리화시키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을 쉽게 내리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도, 내 안의 그런 부분도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특히나 더 하고 있어서 저 말이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한때는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 행복해보였다. 뭔가에 사로잡혀있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옳다고 믿고 그런 것들을 강화해주는 사람들만 주변에 컬렉팅해서 둘러놓고 살면, 그러니까 단순한 세계 안에 갇혀 살면 갈등도 없고 균열도 없고 평화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너에게 달콤한 말만 던져주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불편하고 신랄한 말을 던져줄 줄 아는 사람과도 가까이 살아야 한다 같은 말들이 버거웠다. 나 그냥 1종의 세계 속에서 고민 없이 편하게 살다가 1종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면 안 될까? 타인 따위. 세상 따위. 유치하고 부조리하게 살면 어때.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유치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면 되는데. 이런 생각들. 내 주변만 봐도 2, 3종의 인식에 가닿은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피곤하고 힘들게 살던데.

 

하지만 1종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나가는 일부 친구들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걸 보면서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여전히 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 편안하고 단순하고 내가 그들(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도 현명하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냥 저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마구 울려댔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생각해도 1종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내가 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여전히 1종의 늪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합리화시키며 단단히 만들어나가기까지 하면 정말 어느 순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23종의 세계에 가닿아 있는, 더욱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은 1종의 세계 속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게 산다. 보이는 만큼 아프고 보이는 만큼 분노하고 보이는 만큼 싸우고 보이는 만큼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를 보면서 산다. 피곤할 것 같은데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삶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깊숙하게 즐긴다. 그들의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한 즐거움과 자족감이 얼마나 강건하고 깊은지 옆에서 볼 때 마다 느낀다.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릴 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엉망진창인 와중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꿋꿋이 버틸 줄 안다. ’마음에 안 드는 주변을 쳐내는 게 아니라 주변을 품어 안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로 감화시킬 줄 아는 힘을 갖고 있다. 주변에 그런 존경할만한 친구들이 있어서, 1종의 세계에 눌러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일으켜 세워 등을 떠미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세계로 넘어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지만 차근차근 그 곁으로 가고 싶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6. 스피노자의 관념과 정신에 대한 개념이 좋다.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라는 점.

 

7. 스피노자의 2부 정의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정의7이 나도 정말 흥미롭고 좋았다. singularis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했다가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 있다는 독특한 실재. 그리고 이게 1부에서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의 진공이 없다-> 원자가 없다와도 이어졌을 때 무릎을 쳤다. 이미 원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세계에는 복합체가 아닌 단독 개체가 있을 수 없었던 거였어.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8. 우연히 하나가 되어 획득한 유일성과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의 유일성의 구분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9. <방법서설>(라틴어 버전으로는 그 이후의 <철학원리>) cogito ergo sum<성찰>ego sum ego existo의 차이를 몰랐다. <성찰>ego sum 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므로 고로같은 연역 따위 필요 없다는, 텍스트 문장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런 현장성이 반영된 명제였다니, ego sumego existo 사이의 콤마는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것이 압축된, 가장 단호하고 시적인 문장부호 아닐까.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10. 이 글을 읽고나서 한나절 동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들을 면밀히 듣고 텍스트 메시지를 면밀히 읽었는데 정말로 대부분이 performative로 수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굉장히 피곤해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constative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욕망 바람 기대 공격 방어 자기어필 등이 꽉꽉 눌려 담겨있는, 수많은 performative. 이것의 정점은 아마 수동공격일테고. 조금만 과장 보태서 말하면 constative 형식으로 구성된 performative야말로 코나투스들이 드글드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름 topikㅋㅋㅋ)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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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에게는 정신 자체도 관념이다. 그에 따르면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다

- 정의4에서 말하는 적합성은 합치와는 다르다. 합치는 외적인 일치까지 이루는 것인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적합성은 어떤 이유로 합치하는 지를 파악하는 내적 근거까지를 말하는 것. 부적합한 인식이 늘 오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찍어서 때려 맞출 수도 있다. 이런 외적 합치는 적합성이 아니다.

- 자연의 공통질서에 입각한 지각 방식 부적합한 인식 잘려나가고 혼란스러운 인식

 

정의5

지속은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이다

해명

나는 무한정한 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실존하는 실재의 본성 자체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고 또한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지 제거하지 않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1부 정의8에서 영원을 다뤘고 2부 정의5에서는 지속을 다루고 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한정한이라는 표현. indefinitus 인데피니투스. 1부에서는 주로 무한한유한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영어로 하면 infinite finite. 무한정한은 영어로 하면 indefinite.

- ‘무한정은 사물과는 관계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무한정이라는 범주는 굉장히 유동적이다.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고 끝날지도 모르는.

 

- 여기서 스피노자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이라고 한 것은 갈릴레이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나오는 관성개념을 함축한 것이다. 갈릴레이의 17세기 사고실험. 끝도 없는 평면을 가정해놓고 거기서 어떤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그 운동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관성개념. 어떤 물체가 일단 작용하게 되면 그 물체의 작용은 관성원리에 따르면 계속 되고, 다른 물체가 그 물체의 작용에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지해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계속 정지. 여기서 말한 계속을 스피노자가 무한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스피노자가 말한 지속개념의 뜻이다(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해 멈추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서는 모든 물체는 자기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원운동. 관성개념은 운동이란 건 무한정인 직선운동. 다른 물체가 다른 물체를 멈출 때에서야 끝나는.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경계가 있는 우주지만 갈릴레이 관성개념은 끝이 없는 우주다. 그러나 이 무한정함은 사물의 본질과는 관계없다.

 

- 사물의 본성하고도 관련이 없고, 또 실재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정립하는 작용인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것을 스피노자는 무한정한 실존의 연속으로서 지속이라고 규정한다. 지속 duratio 듀라치오.

- 지속 개념은 3부의 코나투스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부 정의2와 연관 지어 보면 실존하는 사물이 있어야 코나투스가 존재하고 실존하는 사물이 없으면 코나투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할 때만 함께 존재하는 현행적 본질이다. 3부 정리8을 보면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하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함축한다라고 하는데, 코나투스의 시간은 무한정하다= 그 사물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 그럼 코나투스의 시간은 지속이다= 하지만 영원은 아니다

- 그러니까 지속이라는 것은 정의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게 그냥 쭉 계속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무한하지는 않고, 또 영원하지도 않은. 그래서 무한한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정한이라고 한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수 있지만 무한하다, 영원하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을 스피노자는 지속이라고 한다.

-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을 수밖에 없는 게 무한에서는 무한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중요한 1부 정리 21-23의 명제는 무한한 것에서는 무한한 것만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직접적 무한양태 매개적 무한양태. , 또는 신의 본질을 이루는 속성에서 유한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거기선 무한한 것이 나온다.

 

정의6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 실재성과 완전성 개념은 1부에 이미 몇 차례 등장했다

- 1부 정리11의 주석 어떤 외부원인에 의해서도 생산되지 않는 실체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외부 원인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은 그것들이 많은 부분을 포함하든 적은 부분을 포함하든 간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완전성 또는 실재성을 외부원인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의 실존은 오직 외부원인의 완전성에서 비롯할 뿐이며, 그것들 자신의 완전성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실체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은 어떤 것이든지 어떠한 외부원인에 의지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체의 실존 역시 실체의 본성으로부터만 따라 나와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실체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실재의 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정립한다. 반대로 불완전성은 실존을 제거하며,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실재의 실존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무한한 또는 완전한 존재자, 곧 신에 대해서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은 모든 불완전성을 배제하고 절대적 완전성을 함축하므로, 그에 따라 그의 실존에 대해 의심할 모든 이유를 제거하며 그의 실존에 대해 가장 큰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 1부 부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학설은 지고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극히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정리 21,22,23에 의해 확립되었듯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되는 것이 가장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것이 생산되기 위해 매개적인 원인들이 더 필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 완전성/불완전성에는 degree가 있다. 직접적 무한양태는 양태 중 가장 완전한 것이고 유한양태는 덜 완전한 것이다.

 

* 실재성

- 1부 정리9 각각의 실재가 더 많은 실재성 또는 존재를 지닐수록 그 실재에는 더 많은 속성들이 귀속된다

- 1부 정리 11의 주석 왜냐하면 실존할 수 있음은 역량이므로, 어떤 실재의 본성에 더 많은 실재성이 속할수록, 그 실재는 실존하기 위한 힘을 스스로 더 많이 지니게 된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스스로 지니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절대적으로 실존한다.“

- 1부 정리16의 증명 실재의 정의가 더 많은 실재성을 표현할수록, 곧 실재의 본질이 더 많은 실재성을 함축할수록 더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 여기에서도 실재성이 degree를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실재는 실재성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어떤 실재는 덜 갖고 있고.

- 1부에서 명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는 완전성=실재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완전성과 실재성은 같은 것이고 정의6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의6에서 한 가지 빠져있는 것은 1부 정리11의 주석에도 나오는 역량이다. 사실상 실재성=완전성=역량

- 4부 서문의 초반부는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다. 철학적/추상적 개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따져보는 니체의 계보학적 인식과 비슷한데, 여기에 따르면 완전성도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독특한 실재에 대한 정의. 2부 정의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면서 흥미로운 정의다.

- 첫 번째 문장은 1부 정리28에서 접했던 규정이다. 핵심은 그 뒷부분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res singularis / singular thing이라는 것은 단순히 개체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이나 개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행위하느냐 여부가 어떤 것을 독특한 실재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데모를 해서 정권이 퇴진한다면 또는 탄핵이 된다면, 그것도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독특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공통의 작용에 같이 협력을 한 것이니까. 따라서 어떤 하나의 공통의 작용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냈다면 그게 숫자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스피노자 관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singular thing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이런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정의다.

 

- , 다수의 개체들이 어떤 같은 작용을 수행해서 공동의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면 스피노자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의 독특한 실재다. 다수가 분리되어 있는 개체들이라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에게 수백만의 개체도 singular thing이 될 수 있다. , 스피노자에게 singular thing의 범위는 매우 가변적이다. ‘개체와 오해해서는 안 된다.

- 스피노자가 독특한 실재를 이렇게 정의한 것은 아마 복합물체를 주로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신체를 포함한 복합물체는 다수의 물체가 합쳐져서 형성된 것. 물리적인 의미에서 개체의 본질은 운동과 정지의 관계(2부 자연학 소론에 나오는 개체에 대한 정의 참조). 그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체들이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것은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깨지면 다른 개체들로 또는 독특한 실재들로 분할되는 것.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사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인데, singularis라고 하면, ”하나의, 단독의~“ 라는 의미이며 원래 쓰이는 단어의 용법도 하나, 단수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이 단어의 원래 용법을 내용상으로 뒤집은.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 그런데 singularis는 그런 의미의 유일성과는 다른,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된 다음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도 있다.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다. 300년전 철학이지만 매우 현대적인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점이다.

 

2부에는 5개의 공리가 있다 (1부는 7개였다). 주로 인간의 사유, 실존과 관련된 공리들이다.

 

공리1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곧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 실존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 우리는 1부 논의를 통해 실체는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인 데 반해, 후자는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만큼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근거 내지 원인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다른 것은 바로 실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간은 양태이며 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실존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실존하느냐 실존하지 않느냐는 자연의 질서 ordo naturae에 달려있다.

 

공리2

인간은 사유한다 Homo cogitat

 

-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철학은 코기토cogito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유명한 명제가 코키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1637)>에서 프랑스어로 이 명제를 처음 사용했으며(“je pense, donc je suis.”) <철학원리(1644)> 17항에서 라틴어로 이 명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 cogitare: 생각한다. cogito라는 동사변형 자체(1인칭 현재형)에 이미 나는 생각한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스피노자는 ego cogito하지 않고 3인칭을 써서 “homo cogitat”로 흥미로운 대비를 보여준다.

 

- 코기토의 철학은 주관성의 철학, 주체성의 철학. 나라는 사유하는 주체를 기반으로 둔 근대의 주관성의 철학. 이것을 강조한 사람이 하이데거고, 저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든 말들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데카르트의 이 말을 ich denke, 독일어로 번역한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예전에는 초월적 통각이라고 번역했었는데 요즘은 수반 의식,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 우리가 외부 사물을 표상하거나 생각할 때 항상 수반되어있는 생각, 모든 표상들에 수반해야 하는 의식이 바로 ich denke. 태양에 관한 생각이든, 다른 사물에 대한 생각이든 거기에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항상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수반되어 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번역하면서 자기 철학을 transzendental philosophy 초월론 철학, 초월 철학으로. 그리고 근대철학에 근거한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시작을 데카르트가 했다고 말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코기토의 철학, 코기토의 형이상학, 이 말들도 다 하이데거가 만들었다. 하이데거가 쓴 <니체> 24부를 보면 서양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하이데거가 재구성한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코기토 이야기가 한참 나온다. 하이데거가 볼 때 데카르트에서부터 니체에 이르는 400년 가까운 시간이 근대철학의 시작인 것이다.

 

- <방법서설> Discours dela methode. 뭔가 방법에 대한 담론이라고 번역해야할 것 같은데 방법서설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17세기에는 discours라는 말이 서설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저 방법서설이라는 제목은 데카르트가 과학자였던 시절 1637년에 과학논문 세 편을 발표할 때, 그 앞에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런 논문을 쓰게 됐는지 철학적 서론을 붙인 것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가 이 과학적인 논문을 쓰게 된 방법론적인 서론이라는 뜻인데, 이게 워낙 유명해지면서 과학논문은 다들 잊어버리고ㅋㅋ 저 서론만 논의하게 됐다. 과학논문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논문인데. 이 방법서설은 근대철학서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다. 책이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바로 이 방법서설에서 이 유명한 명제가 불어로 처음 쓰이게 되고, 1644년에 <철학원리>에서 1부에 불어로 썼던 것을 라틴어로 표현한 cogito ergo sum이 등장한다. sum도 역시 1인칭 현재동사로 영어로 하면 be동사의 1인칭. I think therefore I am.

- 데카르트의 제일 유명한 책은 <성찰>인데 이게 제일 유명한 책인데다가 코기토 명제가 제일 유명한 명제다 보니 cogito ergo sum<성찰>에 등장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ㅋㅋ <성찰>에는 조금 다른 명제가 나온다. ego sum, ego existo

 

- <철학원리>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게다가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쉽게, 신도 하늘도 신체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손도 발도 마지막으로 신체도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생각하는 것인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과 같은 식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이 그것이 생각하는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러한 인식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차적이며 가장 확실한 인식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 현대언어철학에서 저것을 performative, 수행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찰>에 나오는 저 명제가 현대언어철학의 통찰에 훨씬 가까운 명제다.

- 수행문, 서술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존 오스틴 John Langshaw Austin이라는 언어철학자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 <화행론> <말과 행위>가 있다. 서술문/진술문 constative는 우리가 말을 하거나 어떤 문장을 쓸 때 어떤 사실에 관해 서술하고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날이 덥다” “9시다같은 것들. 수행문 performative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산출하는 문장을 말한다. “물 좀 가져와라같은 것.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짐 싸세요ㅋㅋㅋ 지금부터 청문회를 싲가하겠습니다같은 것.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존 오스틴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오스틴이 직접 책으로 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제자가 강연을 묶어서 낸 것.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공리2에서 스피노자가 cogitohomo cogotat로 바꾼 것은 ego -> homo의 간단한 변화 같지만, 사실 매우 복잡한 결과를 낳는 변화다. 사실 인간은 사유한다는 명제는 무척 간단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관적으로 분명치는 않다. 몇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고려해보자.

1) 이 명제는 가령 인간(만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곧 무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식물, 더 나아가 동물도 생각하지 못하는 반면, 인간은 생각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2부 정리13의 주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와 충돌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 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되어 있다(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sunt)- 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 안에는 모든 실재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정신화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도 어떤 방법으로든(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사유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의미다.

2) 그렇다면 이 명제는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조금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보다 더 많이, 또는 더 높은 정도로) 생각한다.”로 바꿔서 표현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왜, 어떤 근거로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몇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다. <- 알파고 때문에 이 해석도 달라질 것 같긴 하다. 알파고는 인간보다 더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3) 우선 (생각은 인간의 유일한 본질이므로) 인간은 생각한다고 바꿔 표현할 수 있다.

4) 또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들 중 하나이므로) 간은 생각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5) 아니면 “(생각이 인간의 본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생각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적 성질, 아키댄스가 될 것이다.

 

- 이 가능성들 중에서 5)는 뒤에 나오는 논의와 어긋난다. 2부 정리11의 증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 인간의 본질은 (정리10의 따름정리에 의해) 신의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된다 2. (2부 공리2에 의해) 사유 양태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3. 이 사유양태 전체 중에서 본성상 앞서는 것은 (2부 공리3에 의해) 관념이며, 같은 개체 안에 다른 양태들(관념이 그것들에 대해 선행하는)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존재해야 한다. 4. 따라서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관념이다.

- 34는 뒤에 나오는 공리3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하고 12를 통해 우리는 공리2에 나오는 인간은 사유한다/생각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명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3)을 의미하는지 4)를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은 정리13의 따름정리인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3부 정리7과 정리9까지 가야 조금 더 정확히 답변될 수 있다.

- (그러니까 인간이 3) ”생각한다는 것을 유일한 본질로 갖고 있는지, 4) ”생각한다이외에 인간에게 또 다른 본질이 있는지 이것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아직 결정이 안 된 문제다. 이것은 뒤에 가봐야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2부 공리2에서는 인간은 생각한다고 하고 있고, 뒤에 나오는 논의를 고려해봤을 때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정도로 알 수 있다)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한다고 했을 때, ”인간은 누구인가?

6) 인간은 개별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집합적인 또는 유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인가?

7)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데카르트의 cogito가 함축하는 의미에서 라고 하는 ego I같은 독자적인 주체또는 적어도 독립적인 개체인가? ( 1) 독자적인 주체, 개별적인 주체인지, 아니면 2) 이런 개별적인 주체와는 다른 어떤 것인지 이것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 가령 프로이트에게 생각의 주체, 코기타치오의 주체는 누구일까?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프로이트의 초기저작 <꿈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할 수 있는 7장에 가보면 그는 인간의 정신장치를 망원경에 비교해서 그린다. 사이킥 아파라투스. 정신장치. 정신모델

W 지각(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 수용하는 기관) -> ll Er 기억 ll 기억‘ ll 기억’‘ 무의식 llll (<- 전의식의 장벽을 통과) -> M 운동

2. W 지각 -> M 운동 : 제일 원시적인 정치장치. 지각하고 바로 배출해버림

 

- 프로이트의 정신장치 중에서 2번 같은 원시적인 장치에는 기억이 없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을 기억으로 축적하지 않고 바로 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같은 고도로 발전한 존재의 정신장치는 자극을 받으면 다 배출하는 게 아니라 1)처럼 기억을 통해 정신장치 안에 자극을 새겨 넣고 축적한다. 그리고 이런 기억장치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이 제일 어렸을 때의 인상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그 이후의 인상들... 이런 식으로 기억장치가 굉장히 많다.

- 그리고 이게 무의식이다. 이런 기억장치들을 통해 무의식이 구성된다. 그러면 이렇게 구성된 무의식이 바로 M으로 연결되는가? 아니다. 저 약식 그림에서처럼 전의식이라는 장벽이 저렇게 서있다. 전의식의 검열을 통과해야 무의식이 우리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하고, 전의식이 무의식의 소원을 배출하는 밸브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전의식의 검열을 거쳐야 무의식이 비로소 우리의 꿈 같은 것을 통해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전의식-의식 이런 3원 구도.

- 그러나 후기 저작에 가면, 특히 <자아와 이드(1823)>라는 작은 소책자에 가면 그는 더 이상 저 3원 구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을 이야기한다.

 

- 이런 식의 방식을 프로이트는 독어로 topik이라고 하는데,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topos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면 장소론‘. 어떤 개념을 공간적인 비유로 푸는 것을 말한다. topos라는 말을 가지고 와서 프로이트는 topik이라고 말했고, 초기저작의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고 이드-초자아-자아의 도식도 topik이다. <자아와 이드>를 보면 프로이트가 아예 사람의 머리 모양을 그려놓고 여기서 이드 초자아 자아를 구별한다. 공간적인 비유를 가지고 인간의 정신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 맑스에게도 topik이 있다. ”토대와 상부구조이것을 가지고 사회를 공간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사실 서양철학사에 보면 topik을 쓰는 철학자들이 근대에 꽤 있는데, 어떤 사람은 topography로 해서 지형학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장소론이 맞다

 

- 다시 프로이트 후기 저작 이야기로 돌아와서, 후기 저작의 이 topik의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 이드는 당연히 무의식이고, 여기서 전의식에 해당하는 초자아를 무의식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토픽에서는 전의식이 무의식을 검열했는데 두 번째 토픽에 가면 초자아 자체도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첫 번째 <꿈의 해석>에 나오는 무의식은 아주 병리적이고 아주 파괴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후기의 두 번째 토픽에 가면 무의식은 더 이상 그런 게 아니라, 초자아, 여기서는 도덕적인 의식이라든가 인간에 내재해있는 도덕률도 인간의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역할이 훨씬 강조된 것이 후기이다.

- 다시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돌아가보면, 프로이트는 코기타치오의 주체, 사유의 주체를 이드라고 말할 것이다. 이드는 원래 라틴어이고, 불어로는 sa, 영어로는 it, “그것”. 코기타치오의 주체로 데카르트는 에고를 이야기했지만 프로이트의 tipik에서 에고, 자아라는 것은 아주 표층적인 층위만 갖고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답은 에고일 수가 없다. 이드. 그것. 하지만 그것이 뭔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이 생각한다. 우리 안의 그것이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뭔지는 모른다. 본능일 수도 있고, 도덕적인 도덕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들어서 생겨난 생각일 수도 있고.

- 예전에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60대 이상만 되면 생각이 다 똑같아진다고 말했었는데, 이들의 생각의 주어는 누구일까? ....국정원?ㅋㅋㅋㅋㅠㅠ 노모의 핸드폰에 카톡 오던 그 메시지들이 국정원 전직원들이었다는 게 밝혀졌는데, 정말 국정원들이 만들어서 수백만 명에게 뿌린 메시지들이 들어가고 돌고 그러다보면 생각의 주어가 누구인지, 국정원인 건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에고가 아니다. 이드이다. 그것. 그것이 생각한다.

- 그러니까 호모 코기타트, 인간은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스피노자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누구인지, 이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아까 독특한 실재라는 게 굉장히 가변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생각의 주체인 호모라는 것도 그렇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코 에고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 혹시 미래에 우리가 뇌에 칩 같은 것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면 생각의 주체가 누군인지에 관한 문제가 정말로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칩을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공리3

사랑이나 욕망 또는 마음의 정서(affectus animi)라는 이름 아래 지칭되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 양태들은, 동일한 개인 안에 사랑 받는 대상, 욕망 받는 대상 등에 대한 관념이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하지만 관념은 다른 어떤 사유 양태들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할 수 있다.

 

- 내가 사랑해라고 하면 대상이 있을 것이다. 대상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으니까. 나는 욕망해라고 하면 욕망의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정서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고 그 관념이 존재한다. . 관념이 아펙투스보다 선행한다. 그러니 아펙투스가 없이도 관념은 존재 가능.

 

공리4

우리는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 affectio

 

-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어떤 신체라는 표현이다. ”우리의신체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이라고. 스피노자는 지금 소유격을 쓰는 것에 매우 조심스럽다. 나의- 우리의- 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도 그렇고 스피노자도 그렇고 이게 나의 신체다라고 말하기 굉장히 어렵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라서 그렇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정신과 신체는 엄밀하게 분리가 되고, 정신이야말로(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유와 분리가 되어있는 이 신체라는 것이 정신과 어떻게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신과 신체가 유니온을 이루고 있는데,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어떻게 하나는 사유속성에 속하고 하나는 연장속성에 속하는 정신과 신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이 신체가 나의 신체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 스피노자는 여기서 어떤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표현. 어떤 신체가 변용되고 있다, 추워서 입김이 나온다거나 살갗에 오돌도돌 몸서리가 쳐지는데 이게 지금 나의 신체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신체가 그러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이 신체가 나의 신체다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앞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공리에서는 어쨌든 나의 신체라고 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어떤 신체가 변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공리5

우리는 신체와 사유 양태들 이외의 다른 어떤 독특한 실재도 느끼거나 지각하지 못한다

 

- 신체 body 연장속성의 양태 / 정신 관념. 사유속성의 양태

- 1부 정의6에 보면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었고 신 자체는 무한하지만 우리는 그 무한한 와중에서 신체와 정신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속성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속성의 양태 이외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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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한 실재/ 독특한 실재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속성을 표현하는 것 = 양태

* 그러니까 양태는, 속성을 표현하는 것. 속성이 갖고 있는 역량을 양태가 나눠 갖는다. 양태는 어떤 속성에 속한다. 각각의 인간정신은 생각이라는 속성, 사유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을 속성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 정신이 사유속성에 속하는 한 양태로서 굉장히 많은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 1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고, 2, 3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다. 1종은 부적합한 인식, 2, 3종은 적합한 인식.

*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한다 -> 긍정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하지 않는다 -> 부정

- 데카르트는 이때 작용하는 것이 의지라고 봤다. 우리 정신이 거짓된 생각을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을 잘못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것.

- 그러나 스피노자는 지성과 의지가 별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파쿨타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이 관념을 형성할 때 이미 참인지 거짓인지가 동시에 수행되는.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의지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날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아 저게 뒷산에 걸려 넘어가는 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우리가 시각기관이 그렇게 만들어져있고, 우리의 신체적 조건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의 실제거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을 그런 식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이야기.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릇된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우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밖에 우리 신체나 정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외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말한다. 2부 정리18의 주석에 나오는 표현이다.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외부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나 정신을 인식할 때도 우리는 처음에는 다 이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신이라고 해서 우리 자신이 특별히 더 잘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정신이나 신체도 우리가 외부 사물을 인식할 때처럼 똑같이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매개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조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으로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한 1차적인 조건.

 

- 이것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신을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태양의 거리를 알면서도 태양을 바라볼 때마다 아, 몇 백 광년 떨어져있구나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의 시각기관이 그렇게 지각하도록 생겼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가령 과거에 동양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던 시절에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면서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해가 200걸음 떨어져있다고는 인지하겠지만, 그걸 보면서 똑같이 신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으로 태양을 보는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한테서 상상이라는 것은 패컬티, 직능이 아니라 생활세계라고 말한다. 생활세계. 또는 줄여서 세계. 아주 중요한 말이다. 스피노자의 상상은 패컬티가 아니라 생활세계다.

- 이 생활세계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스승뻘 되는 에드문드 후설이 만들어낸 개념인데,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유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조건을 말한다. 이론적 인식, 과학적 인식(근대 갈릴레이 이래 발전된), 철학적 인식, 사유활동 등이 기반을 두고 있는, 하지만 근대과학적인 사유가 침식하고 약화시키는 위험에 처해있는 인식의 조건을 생활세계라고 부르고 있다("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 일체의 논리학적 수행에 선행하여 미리 직접 주어져 있는 세계"[EU 38] 또는 "우리의 생활 전체가 실제로 거기서 영위되는 바의, 현실에서 직관되고 현실에서 경험되며 또한 경험될 수 있는 이 세계"[Krisis 51] 그러나 이러한 생활세계는 근대 과학의 방법적 조작을 통해 이중으로 <이념화>됨으로써 점차로 은폐되고 망각되어가게 된다. -생활세계 [生活世界, Lebenswelt, life-world] (현상학사전)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정의4

나는 적합한(adaequatua)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재적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내재적이라고 말한 이유에서 적합한합치가 대비되는 걸 알 수 있는데,

- 아다이콰치오. 중세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진리에 대한 대표적 정의로 알려져 있는 명제, ”adaequatio intellectus et rei :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에 대한 개조를 함축. 여기서 아다이콰치오는 일치내지 합치” “상응을 뜻하는 말이다. 중세철학에서 아다이콰치오의 표준적인 의미.

-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의4에서 적합한 관념을 정의하면서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라는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진리를 진리로 만드는 내적 기준에서 일치내지 합치라는 의미를 배제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에 대한 해명을 붙이면서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는 것이 정의4의 기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리 또는 참된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는> 관념이면서 또한 <적합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합치>는 어떤 관념이 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이기는 해도 그것을 참된 관념으로 만드는 내적 근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저 사물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합치는 당연히 본질과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다수의 실재를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는 것이 적합한 인식이 형성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다수의 실재들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도록 외적으로규정될 때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

 

- 이 따름정리나 주석을 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는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나쁜 것이지. 일부 주석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자연의 공통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1차적으로 경험하는 질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4부에 가게 되면 common oder of nature 공통의 질서라는 말이 또 자연의 어떤 법칙과 연결된 부분이 나온다. 그러니까 어떤 대목을 보면 이 어구가 자연의 객관적이고 법칙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대목을 보면 이게 상상적인 인식을 갖는 어떤 가상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쓰는 용법으로만 보면 이 어구가 어떤 의미라고 딱 단정지어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편지로 좀 질문을 해줬아야 하는데ㅋㅋㅋ

 

- 그렇다고 명석판명한 개념과 배치된다고 말하기도 좀 어렵다. 왜냐면 스피노자가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말도 여러 번 쓰는데, 어떤 경우에는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것을 적합한 관념이라는 말과 등가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판명하다는 말이 사물의 본질과 특성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니까 적합한 대신 명석판명을 쓰는 경우도 있다.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참된 관념이라고 썼을 때는 대상과 관념이 일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말하자면 x7이냐 아니냐. 7이면 참되고 아니면 참이 아니고. 7이라는 관념이 어떤 근거에 입각해서 나오는 건지, 근거와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나온 건지, 참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다.

 

- 알튀세르의 이론 중 아주 유명한 이론 중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는 개념이 있다. 그는 기 개념을 맑스의 청년기 사상과 성숙기 사상이 다르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썼다. 같은 맑스가 갖고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똑같은 생각이 아니다라는. 알튀세르는 1845년이 바로 맑스 사상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라고 말한다.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1845년에 맑스는 엥겔스와 같이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는데,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이 책이 맑스 사상의 단절을 표시하는 지점이다. 이 책에 성숙기 맑스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이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산양식이라든가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같은 내념들이 이전의 책에는 나오지 않다가 여기서부터 등장을 하고, 이게 맑스의 역사유물론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이 지점이 바로 단절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 이전의 맑스사상은 진짜 맑스가 아니라 여전히 헤겔주의자고, 아직 자기의 진짜 사상을 갖지 못했던 맑스, 그러니까 청년 맑스라고 부르는 맑스는 진짜 맑스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에 진짜 맑스 사상이 이 시기에서부터 시작된다를 표현하기 위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표현을 썼다.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고 연속적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지만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을 주장한다고 해서, 절단 이후의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맑스 사상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맑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맑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맑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 첫 번째 일반성은 인식의 소재가 되는 각종 정반합적인 표상, 이데올로기. 아직 과학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이라든가, 생각들, 관념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물리학을 쓰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반성1에 속한다.

- 일반성2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을 뜻한다. 물리학에서라면 중력 개념이라든지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맑스에서라면 생산양식이나 잉여가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학의 핵심을 이루는. 어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어주고, 이전의 비과학적인 상식과 구별해서 과학적 인식으로 만들어주는 개념을 일반성2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성3은 일반성2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과학적 인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성2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기반이면서 생산수단인 것이고, 일반성2은 이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학적 인식인 것이다.

- 그러니까 알튀세르는 일반성1과 일반성2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목표는 일반성2 개념에 입각해서 일반성1에 속하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과학적 인식으로, 상식을 계속 개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일반성1,2,3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세 가지 인식분류를 개조한 것이다, 맑스를 설명하기 위해.

 

- 스피노자에게서도 1종이 부적합한 인식, 2,3종은 적합한 인식이었고, 이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분류법과 스피노자의 분류법이 아주 비슷하지만(1) 인식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2) 12/3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 3) 인식은 백지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존에 존재하는 상상적인 관념을 개조하는 작업이라는 것), 차이점이 있다. 스피노자는 3종의 인식이 일반적 인식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정리40의 주석2를 보면 보편적 통념을 만들어내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universal notion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은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2종의 인식은 universal notioncommon notion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나 2종의 인식이나 다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종의 인식은 직관적인 인식이라고 하지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것을 일반성3이라고 한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알튀세르의 3가지 일반성의 중요한 차이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 우리가 이런 단절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는 단절관계가 성립한다. 우리가 2, 3종의 적합한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1종의 인식과 단절해야 한다. 상상적 인식, 부적합한 인식,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인식에서 1종과 2종 사이는 단절적인, 하지만 2종과 3종 사이에는 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연속성이 있는.

-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상상은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를 낳은 인식이지만, ”생활세계라는 점이다.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이라는 것은 오류, 거짓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common notion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 그렇게 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 완전한단절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또 어려운 부분이 있다.

- 2종의 인식 없이 3종의 인식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럼 신비주의로 가야겠죠ㅋㅋㅋㅋ 2종의 인식이 있어야 우리는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떻게 common notion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2부 정리3839가 스피노자가 common notion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부다. 그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들뢰즈.

 

- 알튀세르가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자신의 세 가지 일반성이 사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건 잘못 생각했다기보다 알튀세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가 스피노자 3종의 인식에 대해 예잔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그에 관해서 더 좋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피노자는 그에 관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볼 때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3종의 인식의 아주 풍부한 사례들이 나오는 책, 3종의 인식으로 가득 찬 책이 있다. 바로 <신학정치론>. 내가 볼 때 3종의 인식은 singular thing에 대한, 독특한 실재에 대한 인식이고, 2종의 인식은 보편적 인식인데, 내가 볼 때 <신학정치론>이야말로 이 singular thing에 관한 인식으로 가득 차있는 책이다ㅡ 라고 말한다.

- 현대 사회가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옛날 사람들보다 자명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게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고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그밖의 여러 기술이 발전했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알고 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윈도우를 쓰지만 가면 갈수록 이 윈도우의 원리가 뭔지 전혀 몰라도 잘 쓸 수 있게 만들어서 내어놓지 않는가. 우리의 인식이 더 증대했다, 더 적합해졌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스피노자의 직관과 베르그송의 직관은 다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지성하고 상당히 대비되는 개념이다. 지성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뭔가 분리된 인식을 가리키는 데에 반하는 직관.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경우 직관과 지성이 너무 대립적 대조적인데, 스피노자는 2종의 인식이 지성과 3종의 인식인 직관적 지식 사이의 단절과 대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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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416분에 열리는 304낭독회의 낭독 청탁을 고민 끝에 일단 수락해놓고도 며칠 동안 원고를 시작할 엄두를 못 냈다. 세월호에 대해 갖고 있는 복잡하게 헝클어져있는 감정을 내가 과연 하나의 정돈된 글로 쓸 수 있을까. 단편적인 느낌 외에는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정리된 긴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너무 무겁고 너무 아프고 너무 조심스러우면서도 끝내는 격앙되고야 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격앙 조차도 조심스럽고 미안한 일이었기 때문에. 마감이 다가왔고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도 쓰려고 워드를 열어놓고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었다. 살면서 청탁 받아 쓴 원고 중 가장 빨리 쓴 원고가 아니었을까. 내 마음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것들이 흘러나오는 대로 쓰다보니 이 일이 시사하는 어떤 사회적 의미나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를 고민해서 덧붙일 틈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의 글이 나오고 말았지만 그래서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 송고 전까지 조금 망설였지만 아직 나로서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저 미안한. 세월호 추모 주말을 맞으며 1월 낭독회 때 쓰고 읽었던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며 이때와 또 달라진 건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20144, 몸에 피주머니를 달고 있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피주머니라는 비일상적인 단어의 연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저는 배액관이라고 부르는 피주머니를 달고 4월의 그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크다면 큰 수술과 일주일의 입원 끝에 퇴원을 했고, 병원 올 때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당부로 회사도, 여타의 사회생활도, 꾸려가던 일상도 전부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태어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가만히 있어야했던 날들에 방 한구석에 앉아 그 뉴스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굴만 봐도 저분은 누구의 어머니이고, 이름만 들어도 그 아이는 몇 학년 몇 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봄이 지나가는 내내 그 뉴스들만 보고 있었습니다.

20144, 저는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단어의 연결 때문에 이 또한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사망의 가능성이 제법 높았던 6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그 가능성에 대해 고지를 받았던 그날부터 혹시에 딸려오는 생각들을 떨치지 못해 불안에 떨어왔던 친구 중 하나가 눈물을 터뜨리며 너는 이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혹시를 떨쳐낸 지 며칠 안 지나서부터 이번에는 어떤 혹시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되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 결국 구조하겠지, 라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수습을 잘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충분한 책임을 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애도는 하겠지, 아무리 구조할 능력은 없었어도 구조할 의지는 있었겠지로 계속 변해갔고, 그 모든 아무리 그래도는 변함없이 깨어져나갔습니다.

엄청난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나가는 자리마다 미안함이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미안함과 얼마 안 되는 돈들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노란리본을 곳곳에 다는 것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살아남아서 피주머니를 매단 채 몇 주를 그것만 내내 지켜봐왔으면서도 점점 잊어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물론 이 사건과 이 사건 주변에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있는 수많은 아무리 그래도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구의 어머니였는지, 누가 몇 학년 몇 반이었는지,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청와대를 향해 밤새 걸었던 그날, 막아서는 경찰들에게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뜯은 풀과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모아 집어 던졌던, 경찰을 향해 욕하는 시민들에게 쟤들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시키는 대로 했던 애들처럼 쟤들도 그냥 말 잘 듣는 애들일 뿐이니까라고 가만가만히 말렸던 유가족들의 어떤 심정들 같은 세세한 결들에 대해 하나하나 떠올리며 아파하는 시간들은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여행길에 배를 탔다가 조타실이라는 글자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면서 조타실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들어본 게 언제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세 시간도 안 돼서 바다 한가운데서 카약을 타고 노를 저으며 한가롭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지난달 동대문을 우연히 지나다가 전태일 열사의 동상에 매어진 자주색 목도리에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겨울이라고 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노란리본을 걸어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두 시간도 안 돼서 식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슬픔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들이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봄 광장에서 열린 3주기 추모미사에서도 미안했습니다. 2주기까지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떼지 못했던 발걸음인데, 그 발걸음의 무게가 줄어들었기에 갈 수 있었다는 걸 마음 한 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월의 어느 주말, 안산병원과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다섯 분과,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그 슬픈 소망을 이루지 못한 유족분들이 눈에 밟혀 가야만 했던 기저에는 이렇게라도 다시 한 번 더 되새겨야만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다는 걸 마음 한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산병원에 붙어있는 커다란 전지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되새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것,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에는 잊어가고 있다는 저의 상태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되고,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릅니다. 제가 가진 그릇은 그다지 깊지도 견고하지도 못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로 마음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담긴 마음의 눈금이 천천히 줄어드는 그릇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기약을 믿음직하게 품을 수 있는 모양과 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제가 그나마 다짐할 수 있는 기약이 있다면,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습니다정도일 것입니다. 이 발버둥에는, 어느 날 문득 줄어든 눈금을 발견하고 내가 또 이만큼이나 잊고 있었구나를 대면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황급히 무언가를 그릇 안에 부어넣어 다시 채우며 이렇게라도 해야지만 잊지 않을 수 있다니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제 안에서 깊고 견고한 그릇으로 만들어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그제야 채워 넣어야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 한 달이 더 지나 다음번 낭독회가 열릴 때쯤은 봄이 오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봄은 바다처럼 밀려듭니다. 바다는 여름에나 떠올리는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봄에도 계속 미안해하며 계속 채워 넣으며 연대해야하는 어떤 순간순간들에 반도 안 찬 그릇을 내미는 일이 결코 없도록,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다는 것만큼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밖에 다짐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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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부 서문을 읽으면서 어쩐지 스피노자에게 격려 받는 느낌이라 뭉클했다. 격려를 받아서라기보다 처음으로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추상적 거리감이 아니라 1차원적인- 굳이 분류하자면 사유보다는 연장속성에 가까운ㅋㅋ- 거리감에서. 반 년 동안 걸어온 1부의 터널 속은 때로는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었고 때로는 아득할 만큼 모호했다. 모호한 길을 따라 한참을 더듬더듬 걸을 때는 물론이고 중간중간에 가닿는 매혹적인 공간에서 황홀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앉아있을 때에도 기력의 일부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초 단위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을 정도로 에티카를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늘 바짝 긴장해있었던 것 같다. 잠깐 숨을 돌리고 이제 다시 비슷한 듯 낯설 2부의 터널로 다시 넘어왔는데 그 길목에서 스피노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동안 수고했다고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된다고 직접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힘났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지복이라는, 스피노자가 우리를 최종적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그곳이 전혀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사실 이미 가는 길이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할 때마다 뭔가 삶에 희망 같은 게 차오르는 느낌으로 이미 행복하니까(물론 심도 높은 희망은 아니고, 그냥 세상에는 참 파고들면 재미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에 대한 희망이지만), 그곳에 닿는 것에 실패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엄마가 맨날 무슨 이야기 말끝마다 아유,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해~ 다 지 복이지 뭐!“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잘 가면 지복이고 못 가면 지 복이지 뭐~

 

-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 본질에 대한 정의들 재미있었다. 양태로서의 물, 실체로서의 물로서 설명되었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1부 공부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좀 위안과 동시에 위안을 느끼는 것에 반성도 좀 했었는데), 코나투스와 이어지는 2부 정의2의 본질론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들뢰즈의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 가끔 나는 들뢰즈의 어떤 독특함이 그가 갖고 있는 어떤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도 어떤 면에서 나에게는 개체의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는 서양식 사고가 아닌 개체 간의 관계, 일종의 감응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했다.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거리가 짐 끄는 말과 경주마 사이의 거리보다 가깝다는 것, 되게 명료하면서도 와닿는 비유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계급 차이에 대해 떠올렸던 건 내가 촌스러워서? 겠지만, 대한민국 1프로 안에 드는 상류층과 짐 끄는 노동자의 거리 보다도 짐 끄는 노동자와 짐 끄는 말, 짐 끄는 외계인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도. 종적 형상의 차이 너머의 연대의 실낱 같은 가능성도 이런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A무엇이다가 아닌, A무엇을 한다의 문제로. 나와 봉이는 가끔 결국 중요한 건 배치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같은 A라는 말, 행동, 인물, 사건이라도 그게 어떤 순간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정체성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렇다.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모욕이 되거나 농담이 되는 것은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특질이라도 그것이 장점이 되거나 단점이 되는 것도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폐가 되거나 득이 되는 것도 배치의 문제고. 맥락상의 배치.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3. 이날의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부 때 이미 여러 번 들었던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 끝에 선생님이 덧붙인 말이었다. 데카르트의 생각이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데카르트의 저런 의문, 멋지지 않느냐고. 유한한 내가 이렇게 유한한데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을까! 반문하는 것.

 

솔직히 고백하면 1부에서나 <에티카> 관련해서 읽은 다른 책에서나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을 겨냥해서 비판하고 논박하고 신랄하게 조롱하는 것들을 접하다보니 데카르트의 어떤 주장들은 좀 터무니없게 느껴졌고(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또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류의),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고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놓고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이 나에게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스피노자를 압박하는 데카르트주의자들로 인해 그런 점이 더 부각되어 다가왔으므로 그가 당시에 굉장했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나에게는 빛바랜 사람처럼 느껴진 게 사실이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감동 받았던 순간이 있었다. ‘왜 무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데카르트에 대해, 지금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적 시각들의 근원에 녹아들어있을 과거의 사람들이 치열하게 했던 고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사실 그동안에도 후대의 사람이 후대의 잣대로 과거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나름 고민했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과거의 작품들을 판단하는 문제 같은 것. 필립 로스나 부코스키 같은 현존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볼 때도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데,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와 영혼으로 가장 가깝게 이어져있다며 극찬했던 찰스램 수필선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안에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구조가 전제로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여혐의 흔적들을 대할 때나 마그리스의 <다뉴브>에 녹아있는 여성에 대한 시선들을 보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단지 이 인간들 빻았다로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보부아르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내가 그들보다 어떤 점에서 PC하게 사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현대에 태어나서 현대의 문화자본을 흡수했기 때문일 뿐인데.

 

이런 고민들을 나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데카르트에 있어서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선생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스피노자를 포함, 현대의 철학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만 접하다보니 그들이 지적하는 오류들이나 결핍된 부분들 위주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일 텐데, 나와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질 만큼 지성의 완전성 면에서 저 높은 곳에 올라있는 사람이 데카르트에 대해 경이로운 존중을 표했을 때 고백하면 얼굴이 약간 뜨거워질 만큼 나의 성마르고 얕은 생각들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러게, 현대의 사고로 봤을 때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신은 뭐 그냥 허깨비야 하고 쉽게 결론내리고 넘어갔을 문제에 그 당시 저런 반문을 던졌던 데카르트의 질문이 훨씬 멋지다. 유한한 내가 완전한 신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라는 그의 경이감에 찬 질문의 무게가 이제야 조금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믿는 것, 그러니까 신, 그 신의 전지전능한 완전성, 인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성스러운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혹은 감히 그것에 의문을 표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중심에 놓기 위해 그가 만들어냈던 형이상학의 세계가 대단한 것임을 느꼈다. 솔직히 그동안은 아주 거칠게 트위터식으로 표현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상상의 폭이 넓은 공간을 이용해서 여러 무리수들로 결국 신 깔대기ㅋㅋ 인간의 정신 깔대기ㅋㅋ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비판하며 신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다시 자연 안으로 끌어내린스피노자가 좋았고, 그래서 <에티카> 공부를 선택한 것도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 칸트 이후의 상실도 나에게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그것을 상실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칸트의 불가지론은 제한이 아니라 제동이었다. 아마 현대 개신교에까지 이어져오는 중세신학적 신앙관에 내가 워낙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현상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사변적 독단을 끼워넣을 틈을 막아버려서, 또한 내가 신이나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권리를 부여받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그 인간 이성에 인식론적 회의를 끼얹어서 그래서 나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저래도 신학자들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날뛸 것이며 인간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 양 이성을 뽐내겠지만, 누군가 그렇게 선을 딱 그었던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이 칸트 이후의 상실,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이 영역 저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상상할 수 있었던 범위를 확 좁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을 때 (따져보면 내가 칸트를 좋아했던 이유와 같은 이유인데) 처음으로 칸트가 박탈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이걸 철학에서 문학의 장으로 옮겨놓으면 요즘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이라고 불리는 sifi나 추리소설, 판타지 소설에 리얼리즘 소설이 일침을 가하는 느낌일 텐데(재밌게도 나는 장르문학 매니아인데ㅋㅋ) 칸트 이후 인식의 범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당하게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제한이 되어 그 너머의 많은 세계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나는 현실에서 믿을 건 서류뿐이다라는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식 방법을 고수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왜냐면 서류로 대표되는 객관적 자료, 객관적 현상의 너머에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인식으로 이성으로 추론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것들이 매력적이고 때로는 직관적으로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제동이 아니라 제한하는 세계도 있는 것 아닌가. 아마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만큼이나 별점, 사주 같은 것들도 매우 말 같지 않을 텐데 점성학이나 명리학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거기대로만의 (물론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ㅋㅋㅋ) 세계가 펼쳐져있고, 그것이 뭔가 애매모호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을 세상을 유형화해서 받아들이려는 집요한 이성의 집약이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름이 붙은 것을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덜 두려워한다. 왜냐면 이름이 붙어있으면 어쨌든 나의 인식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내가 인식할 수 있다면 컨트롤 할 힘도 생길 것 같으니까. 그래서 결국 절대로 이름 붙일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는 운명, 인생, 미래, 시간, 인간의 성격, 성향에 끊임없이 이름으로서의 유형화를 시도해서 자기 인식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그런 틀 하나를 갖고 있으면 그러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가 이성적으로 이미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이게 내가 비이성에 기대어, 지성과는 매우 멀어지는 방식으로 별점이나 사주나 맹목적 신앙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인데(그런 틀을 갖고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잖아), 이런 상상의 영역은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선생님 말대로 칸트가 제한하기 이전의 이런 자유로운 형이상학적 사고의 세계는 재미있잖아. 거기에 치밀한 논리를 더해서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한 세계를 이론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잖아. 선생님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한 말, 나를 매우 반성하고 돌아보게 한 말인데, ‘무시하기 보다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살려보는 것의 영역을 어디까지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 또한 하게 만든 말이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4.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존재한다.“ , 나 이 말도 너무 좋았네. 그리고 데카르트가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원리> 146항에서 고통과 연결시켜 한 말도 좋았다.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고통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강한 것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판명하다고 착각하기 쉬운데(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했으니까) 사실 그렇지 않지. 고통처럼 선명한 경험이 나의 어떤 감각을 일깨운다면 그 경험에 대해 판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또 공부해야 한다. 내 아집에 갖혀서 편한 생각들 속에서 뱅뱅 오가는 그런 고민 말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들 속에서. 그래서 이 말이 매우 좋았다.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기질에 따라가 연상되는 말인데 그러니까.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자기 기질에 따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판단을 내리기 쉽고, 그 판단이 내 안에서 나왔으므로, 보통 나의 몇십 년의 역사와 경험이 응축되어 내린 판단일 것이므로 명석판명할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의 이성과 인식을 너무 과신한다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또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할 수밖에 없네ㅋㅋㅋ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현존한다고 상상하는 것의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2부를 더 공부하다보면 더 생각할 수 있겠지. 아무튼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있다는 것은 내 가슴에 꼭 새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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