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수한 실재/ 독특한 실재 :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속성을 표현하는 것 = 양태

* 그러니까 양태는, 속성을 표현하는 것. 속성이 갖고 있는 역량을 양태가 나눠 갖는다. 양태는 어떤 속성에 속한다. 각각의 인간정신은 생각이라는 속성, 사유속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을 속성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 정신이 사유속성에 속하는 한 양태로서 굉장히 많은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 1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고, 2, 3종의 인식에 속할 수도 있다. 1종은 부적합한 인식, 2, 3종은 적합한 인식.

*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한다 -> 긍정

관념이 외부대상과 합치하지 않는다 -> 부정

- 데카르트는 이때 작용하는 것이 의지라고 봤다. 우리 정신이 거짓된 생각을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을 잘못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것.

- 그러나 스피노자는 지성과 의지가 별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파쿨타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이 관념을 형성할 때 이미 참인지 거짓인지가 동시에 수행되는.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의지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날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아 저게 뒷산에 걸려 넘어가는 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우리가 시각기관이 그렇게 만들어져있고, 우리의 신체적 조건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의 실제거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을 그런 식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이야기.

-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릇된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우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밖에 우리 신체나 정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외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말한다. 2부 정리18의 주석에 나오는 표현이다. 우리가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외부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나 정신을 인식할 때도 우리는 처음에는 다 이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신이라고 해서 우리 자신이 특별히 더 잘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정신이나 신체도 우리가 외부 사물을 인식할 때처럼 똑같이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매개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조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으로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한 1차적인 조건.

 

- 이것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신을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태양의 거리를 알면서도 태양을 바라볼 때마다 아, 몇 백 광년 떨어져있구나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의 시각기관이 그렇게 지각하도록 생겼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가령 과거에 동양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던 시절에 서산에 지는 해를 보면서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해가 200걸음 떨어져있다고는 인지하겠지만, 그걸 보면서 똑같이 신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으로 태양을 보는 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한테서 상상이라는 것은 패컬티, 직능이 아니라 생활세계라고 말한다. 생활세계. 또는 줄여서 세계. 아주 중요한 말이다. 스피노자의 상상은 패컬티가 아니라 생활세계다.

- 이 생활세계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의 스승뻘 되는 에드문드 후설이 만들어낸 개념인데,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유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조건을 말한다. 이론적 인식, 과학적 인식(근대 갈릴레이 이래 발전된), 철학적 인식, 사유활동 등이 기반을 두고 있는, 하지만 근대과학적인 사유가 침식하고 약화시키는 위험에 처해있는 인식의 조건을 생활세계라고 부르고 있다("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 일체의 논리학적 수행에 선행하여 미리 직접 주어져 있는 세계"[EU 38] 또는 "우리의 생활 전체가 실제로 거기서 영위되는 바의, 현실에서 직관되고 현실에서 경험되며 또한 경험될 수 있는 이 세계"[Krisis 51] 그러나 이러한 생활세계는 근대 과학의 방법적 조작을 통해 이중으로 <이념화>됨으로써 점차로 은폐되고 망각되어가게 된다. -생활세계 [生活世界, Lebenswelt, life-world] (현상학사전)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정의4

나는 적합한(adaequatua) 관념을,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재적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내재적이라고 말한 이유에서 적합한합치가 대비되는 걸 알 수 있는데,

- 아다이콰치오. 중세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서 진리에 대한 대표적 정의로 알려져 있는 명제, ”adaequatio intellectus et rei :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에 대한 개조를 함축. 여기서 아다이콰치오는 일치내지 합치” “상응을 뜻하는 말이다. 중세철학에서 아다이콰치오의 표준적인 의미.

-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의4에서 적합한 관념을 정의하면서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라는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진리를 진리로 만드는 내적 기준에서 일치내지 합치라는 의미를 배제한다.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에 대한 해명을 붙이면서 외재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의 합치를 배제하는 것이 정의4의 기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리 또는 참된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는> 관념이면서 또한 <적합한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합치>는 어떤 관념이 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이기는 해도 그것을 참된 관념으로 만드는 내적 근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저 사물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합치는 당연히 본질과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다수의 실재를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는 것이 적합한 인식이 형성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다수의 실재들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이해하도록 외적으로규정될 때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

 

- 이 따름정리나 주석을 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는 별로 좋은 게 아니다. 나쁜 것이지. 일부 주석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자연의 공통 질서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1차적으로 경험하는 질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 4부에 가게 되면 common oder of nature 공통의 질서라는 말이 또 자연의 어떤 법칙과 연결된 부분이 나온다. 그러니까 어떤 대목을 보면 이 어구가 자연의 객관적이고 법칙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대목을 보면 이게 상상적인 인식을 갖는 어떤 가상적인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쓰는 용법으로만 보면 이 어구가 어떤 의미라고 딱 단정지어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편지로 좀 질문을 해줬아야 하는데ㅋㅋㅋ

 

- 그렇다고 명석판명한 개념과 배치된다고 말하기도 좀 어렵다. 왜냐면 스피노자가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말도 여러 번 쓰는데, 어떤 경우에는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것을 적합한 관념이라는 말과 등가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판명하다는 말이 사물의 본질과 특성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니까 적합한 대신 명석판명을 쓰는 경우도 있다.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참된 관념이라고 썼을 때는 대상과 관념이 일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말하자면 x7이냐 아니냐. 7이면 참되고 아니면 참이 아니고. 7이라는 관념이 어떤 근거에 입각해서 나오는 건지, 근거와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나온 건지, 참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다.

 

- 알튀세르의 이론 중 아주 유명한 이론 중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는 개념이 있다. 그는 기 개념을 맑스의 청년기 사상과 성숙기 사상이 다르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썼다. 같은 맑스가 갖고 있는 생각이라고 해서 똑같은 생각이 아니다라는. 알튀세르는 1845년이 바로 맑스 사상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라고 말한다.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1845년에 맑스는 엥겔스와 같이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는데,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이 책이 맑스 사상의 단절을 표시하는 지점이다. 이 책에 성숙기 맑스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이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산양식이라든가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같은 내념들이 이전의 책에는 나오지 않다가 여기서부터 등장을 하고, 이게 맑스의 역사유물론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들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이 지점이 바로 단절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 이전의 맑스사상은 진짜 맑스가 아니라 여전히 헤겔주의자고, 아직 자기의 진짜 사상을 갖지 못했던 맑스, 그러니까 청년 맑스라고 부르는 맑스는 진짜 맑스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에 진짜 맑스 사상이 이 시기에서부터 시작된다를 표현하기 위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표현을 썼다.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고 연속적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지만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을 주장한다고 해서, 절단 이후의 맑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맑스 사상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맑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맑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맑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 첫 번째 일반성은 인식의 소재가 되는 각종 정반합적인 표상, 이데올로기. 아직 과학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이라든가, 생각들, 관념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물리학을 쓰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반성1에 속한다.

- 일반성2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을 뜻한다. 물리학에서라면 중력 개념이라든지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맑스에서라면 생산양식이나 잉여가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학의 핵심을 이루는. 어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어주고, 이전의 비과학적인 상식과 구별해서 과학적 인식으로 만들어주는 개념을 일반성2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성3은 일반성2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과학적 인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성2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기반이면서 생산수단인 것이고, 일반성2은 이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학적 인식인 것이다.

- 그러니까 알튀세르는 일반성1과 일반성2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목표는 일반성2 개념에 입각해서 일반성1에 속하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과학적 인식으로, 상식을 계속 개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일반성1,2,3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세 가지 인식분류를 개조한 것이다, 맑스를 설명하기 위해.

 

- 스피노자에게서도 1종이 부적합한 인식, 2,3종은 적합한 인식이었고, 이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분류법과 스피노자의 분류법이 아주 비슷하지만(1) 인식에는 세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2) 12/3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 3) 인식은 백지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존에 존재하는 상상적인 관념을 개조하는 작업이라는 것), 차이점이 있다. 스피노자는 3종의 인식이 일반적 인식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정리40의 주석2를 보면 보편적 통념을 만들어내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universal notion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은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2종의 인식은 universal notioncommon notion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나 2종의 인식이나 다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종의 인식은 직관적인 인식이라고 하지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것을 일반성3이라고 한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알튀세르의 3가지 일반성의 중요한 차이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 우리가 이런 단절의 인식론을 받아들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는 단절관계가 성립한다. 우리가 2, 3종의 적합한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1종의 인식과 단절해야 한다. 상상적 인식, 부적합한 인식,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인식에서 1종과 2종 사이는 단절적인, 하지만 2종과 3종 사이에는 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연속성이 있는.

-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상상은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를 낳은 인식이지만, ”생활세계라는 점이다.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이라는 것은 오류, 거짓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common notion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 그렇게 보면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 완전한단절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또 어려운 부분이 있다.

- 2종의 인식 없이 3종의 인식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럼 신비주의로 가야겠죠ㅋㅋㅋㅋ 2종의 인식이 있어야 우리는 3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떻게 common notion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2부 정리3839가 스피노자가 common notion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부다. 그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들뢰즈.

 

- 알튀세르가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과 자신의 세 가지 일반성이 사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건 잘못 생각했다기보다 알튀세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내가 스피노자 3종의 인식에 대해 예잔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그에 관해서 더 좋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피노자는 그에 관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볼 때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3종의 인식의 아주 풍부한 사례들이 나오는 책, 3종의 인식으로 가득 찬 책이 있다. 바로 <신학정치론>. 내가 볼 때 3종의 인식은 singular thing에 대한, 독특한 실재에 대한 인식이고, 2종의 인식은 보편적 인식인데, 내가 볼 때 <신학정치론>이야말로 이 singular thing에 관한 인식으로 가득 차있는 책이다ㅡ 라고 말한다.

- 현대 사회가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옛날 사람들보다 자명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게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고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그밖의 여러 기술이 발전했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알고 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윈도우를 쓰지만 가면 갈수록 이 윈도우의 원리가 뭔지 전혀 몰라도 잘 쓸 수 있게 만들어서 내어놓지 않는가. 우리의 인식이 더 증대했다, 더 적합해졌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스피노자의 직관과 베르그송의 직관은 다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지성하고 상당히 대비되는 개념이다. 지성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뭔가 분리된 인식을 가리키는 데에 반하는 직관.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경우 직관과 지성이 너무 대립적 대조적인데, 스피노자는 2종의 인식이 지성과 3종의 인식인 직관적 지식 사이의 단절과 대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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