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예전에 썼던 글과 2부 정리35의 주석의 내용이 너무나 비슷해서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역시 아주 가끔씩 보면 사람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하다. 근대의 사람이든 현대의 사람이든.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성적인 철학자든 불구스든. 줄여서 태양 200걸음 이론으로 나 혼자 부르고 있는 정리35의 주석과 비슷하다는 나의 예전 글.

 

어젯밤 달이 참 예뻤다. 적당히 크고 환하고 살짝 붉은기가 돌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달을 물끄러미 보면서 오늘 있었던 모종의 작은 사건과 관련해서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매우 먼 사이지만 꽤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몇 년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어떤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다. 우리는 달이 빛을 내지 못하고, 달이 스스로 움직이는게 아니며, 달의 모양이 실제로 변해가는 게 아니라는 과학적 진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달을 볼 때 그 진실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달을 보자마자 무심코 하는 생각은 달이 환하네, 달이 동그래졌네, 달이 이울었네, 달이 크네, 달이 떴네, 같은 것들. 과학적 진실은 미량의 능동적 에너지를 들여 '굳이' 떠올리려고 할 때서야 떠오른다. 그리고 전자가 더 낭만적이잖아. 그에 비해 진실은 건조하며 직관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감각과,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진실을 떠올리는건 '굳이' 해야하는 일이다. 달의 경우야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 근거라도 있지, 레퍼런스도 변변히 없는 진실은 낭만적 거짓에 가려 구전으로만 근근이 전해지다가 금세 흩어져 여기저기 구멍만 뚫린 채 빛도 발하지 못한다. '진짜' 달처럼. 누군가 굳이 빛을 비춰주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실은 때로 너무나 달 같고 무력하고 쓸쓸해.“

 

* 2부 정리35의 주석 마찬가지로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양이 우리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것의 오류는 단순히 이러한 상상에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상상하는 동안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상상하는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비록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이나 우리에게서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태양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그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 신체의 변용이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 후설의 생활세계. 스피노자의 상상생활세계인 것은 확실히 전환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면서도, 그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라는 것. 어떻게 보면 상상은 인식의 부모 같은 것이잖아? 조건이자 전제로서의 출발점이지만 결국에는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것. 넘어서야하는 것. 사유의 인식의 근간이 되는 첫 생활세계를 부모가 만들어놓는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이런 비유는 매우 좋지 않다. 부모가 존재하는 가족의 형태를 기본이고 일반적으로 전제 삼고 만들어내는 비유. 이것 역시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우리의 사유 활동의 조건, 전제가 되고 결국은 멀어져야 하는 것. 세상의 많은 클리셰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고 또 멀어져야 할 의무도 있고.

 

그런 점에서 감정인식의 관계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또한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일 때 감정이란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감정 없이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감정이 없으면 인식도 있을 수가 없다. 평소에 감정이 일상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감정의 존재를 모르고 살지만 나나 타인의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서야 감정이 거추장스럽고 거대하게 다가와서 그렇지. 감정은 인식과 기억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통찰을 보여줄지 3부가 기대된다.

 

-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이 후설이 말하는 생활세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는 것처럼 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그 조건 속에서 외부대상을 지각하고, 인식하고, 또 교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태양이 200걸음 떨어져있다고 보는 상상은 그릇된 인식, 부적합한 인식이기 이전에 오히려 사유활동의 조건, 전제가 된다.

- 알튀세르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화폐개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폐가 상품교환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경제적인 활동의 조건 배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 아무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개념이 그릇된 1종의 인식 이전에 생활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에게 우리의 사유활동,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내고 적합한 인식을 하고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상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의 조건이 생활세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지만, 동시에 2종의 인식이든 3종의 인식이든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생활세계로서의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상상이라는 것은 단지 1종의 인식, 부적합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삶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상상이라는 것은 초월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

 

3.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

 

* 정리43 참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재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빛이 자기 자신과 어둠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자기 자신과 거짓의 척도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참된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되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 거짓인지 참인지 다 알고 있다.

- 키에르 케고르가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거짓은 진리와 거짓을 지켰다또는 변형하자면 예외는 규칙과 예외의 척도다

- 칼 슈미트는 키에르 케고르의 이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했다.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다예외를 결정하는 사람이 주권자다.

 

4.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관념을 신의 관점에서 다 참된 관념이라고 규정해놓고 그 참된 관념의 덩어리에서 잘려나온조각조각을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인식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거대한 참된 관념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부딪힌 접촉면을 보고 그것의 아주 작은 일부를 지각한다고 생각하니 참된 관념이 매우 내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라 정겨우면서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져서 아득하다. 내 좁은 시야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참된 관념으로부터 200걸음 떨어져 있으면 눈에 담길까. 전에 트위터에 스타벅스 이론을 적어서 많은 공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한토막, 누가 들어도 이건 A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지만 사실은 B였다는 작은 반전이 있는 글이었다. 그 글 아래 붙은 많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모두들 그런 일을 경험했고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어 보이는 찰나의 대화로 찰나의 순간으로 무엇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추리게임입니다라고 누군가 선언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려나가고 혼동된 인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또한 힘들다. 그래서 뭔가를 쉽게 유형화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침대는 프로크루스테스에게서 사지 말고 차라리 이케아에서.....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기보다 불행한 소식이다. 어떤 사진을 놓고 이 사진이 합성이거나 조작된 사진이라는 것은 기술적인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알아볼 수 있고,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명료하게 밝혀낼 수 있다. 거짓은 거짓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하지만 누군가 크롭해서 크기만 맞춘 사진을 보면서 이게 사실은 어떤 사진의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어렵다. 부분은 진실이 맞으니까 이것도 진실이라고 합리화하기도 쉽고, ’부분이 진실이면 그러면 됐지라고 나태해지기도 쉽다. 그릇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내가 보는 이것이 부분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그 부분에 진실이 섞여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별해내는 데에 있어 더욱 정교하고 능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거짓의 문제가 아닌 참-부분의 참의 문제는 더 복잡하니까.

 

잘려지고 혼동된 방식” : 정리40의 주석2. 스피노자가 부적합한 인식에 대해 말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은 2부 정리29에서 유래하는데 인간 신체의 각각의 변용에 대한 관념의 관념은 인간 정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오는 따름정리가 중요하다. 이로부터 인간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사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만을 가진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이게 바로 부적합한 인식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적합한 인식과 혼란스럽고 잘려나간 인식의 대비

- 그러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주석에 설명이 나온다.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보도록 외적으로 규정되는 지각 방식으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지각할 때. 무엇이 나의 시야에 들어오고, 무엇이 나의 신체를 접촉하면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변용하는 대상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지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체계적으로 연속적으로 집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그때그때 우발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실재들에 대해 총체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스피노자가 잘려나간 인식이라고 말한다. mutilated한 인식.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 부적합한 관념이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거짓된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라는 것은 항상 참된 관념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다 참된 관념이다.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잘려나갔을 뿐이지 잘려나가지 않은 자잘한 부분은 일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의 일부, 참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5. 이번 강의에서는 다른 철학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복습하면서 알튀세르의 생활세계, 일반론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후설의 현상학을 조금 찾아본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바슐라르에 한나절 넘게 빠져있었다. 인용으로서 바슐라르를 읽은 적은 있지만 바슐라르 책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내가 한때 매우 좋아했던 미셸 투르니에가 매우 좋아했던, 그의 대학시절 교수였다는 것이 내가 바슐라르에 대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정도다. 언젠가 바슐라르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왜 무인가라는 느낌의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나는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바슐라르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슐라르나 캉길렘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식론적 단절개념은 스피노자의 이 세 가지 종류의 인식에서 유래했다. 알튀세르의 <맑스를 위하여>를 보면, 알튀세르가 일반성1 일반성2 일반성3, 이렇게 세 개의 일반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을 이 세 가지 일반성으로 이야기한다.

 

5. 이날 들은 가장 무서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저 유형에 해당하는 많은 사례들을 나와 타인으로부터 갖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사람은(또는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는 경우에는) 정말 1종의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미신을 좋아하고 유형화를 좋아하고 그 유형화를 합리화시키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을 쉽게 내리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도, 내 안의 그런 부분도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작년부터 특히나 더 하고 있어서 저 말이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한때는 1종의 인식을 갖고 1종의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 행복해보였다. 뭔가에 사로잡혀있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전부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옳다고 믿고 그런 것들을 강화해주는 사람들만 주변에 컬렉팅해서 둘러놓고 살면, 그러니까 단순한 세계 안에 갇혀 살면 갈등도 없고 균열도 없고 평화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너에게 달콤한 말만 던져주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불편하고 신랄한 말을 던져줄 줄 아는 사람과도 가까이 살아야 한다 같은 말들이 버거웠다. 나 그냥 1종의 세계 속에서 고민 없이 편하게 살다가 1종의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면 안 될까? 타인 따위. 세상 따위. 유치하고 부조리하게 살면 어때.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유치하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살면 되는데. 이런 생각들. 내 주변만 봐도 2, 3종의 인식에 가닿은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피곤하고 힘들게 살던데.

 

하지만 1종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나가는 일부 친구들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걸 보면서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여전히 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 편안하고 단순하고 내가 그들(2, 3종의 세계에 가닿은 친구들)보다도 현명하다는 생각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았어. 그냥 저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마구 울려댔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생각해도 1종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내가 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여전히 1종의 늪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합리화시키며 단단히 만들어나가기까지 하면 정말 어느 순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23종의 세계에 가닿아 있는, 더욱 가닿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은 1종의 세계 속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게 산다. 보이는 만큼 아프고 보이는 만큼 분노하고 보이는 만큼 싸우고 보이는 만큼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를 보면서 산다. 피곤할 것 같은데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삶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깊숙하게 즐긴다. 그들의 내면에 단단하게 자리한 즐거움과 자족감이 얼마나 강건하고 깊은지 옆에서 볼 때 마다 느낀다. 흔들려야 할 때 흔들릴 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엉망진창인 와중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터뜨리며 꿋꿋이 버틸 줄 안다. ’마음에 안 드는 주변을 쳐내는 게 아니라 주변을 품어 안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세계로 감화시킬 줄 아는 힘을 갖고 있다. 주변에 그런 존경할만한 친구들이 있어서, 1종의 세계에 눌러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나를 부드럽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일으켜 세워 등을 떠미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세계로 넘어가려면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지만 차근차근 그 곁으로 가고 싶다.

 

-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스피노자의 세 가지 유형의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인 삶의 유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종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삶도 1종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상상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상적인 삶, 특히 미신을 좋아하고 정념에 잘 휩싸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까 1종의 인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유형하고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 역시 윤리적인 삶의 유형,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분류법은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 상당히 과학적인 분류, 이게 과학적인 인식인지 비과학적인 인식인지를 따지는, 스피노자보다는 훨씬 더 이론적 분석에 가까운 분류법.

 

6. 스피노자의 관념과 정신에 대한 개념이 좋다. 관념은 적극적 활동이고, 우리의 정신도 그런 걸 담아놓는 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적극적 활동이라는 점.

 

7. 스피노자의 2부 정의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정의7이 나도 정말 흥미롭고 좋았다. singularis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이루고 있다가 다시 분산했다가 다른 하나의 실재를 또 이룰 수 있다는 독특한 실재. 그리고 이게 1부에서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의 진공이 없다-> 원자가 없다와도 이어졌을 때 무릎을 쳤다. 이미 원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세계에는 복합체가 아닌 단독 개체가 있을 수 없었던 거였어.

 

정의7

나는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 스피노자의 singular thingindividual (개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individuus 인디비두우스. 쪼개진다, 나뉜다라는 뜻의 dividuusin이 붙으면서 쪼개지지 않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이라는 의미가 됨. 그리스의 모나스 monas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키케로가 만든 말이다. 명사형은 individuum. 1부에서 스피노자가 진공을 부정했었다. 진공 부정은 원자 부정. 즉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자의 의미로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쪼개어질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복합체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체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개체는 singular thing 같은 것이다.

- 그러니까 어떤 실재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

 

8. 우연히 하나가 되어 획득한 유일성과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의 유일성의 구분

 

- 스피노자는 1부에서 딱 한 번 unique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유일하다는 뜻이었다. 신은 유일하다라고 말할 때. 이때 유일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유일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경험적 유일성. 예를 들어 17세기에 우표를 100장 만들었는데 세상에 딱 1장만 남게 되어 유일한 판본이 되었다고 할 때의 유일성. 2) 신은 유일하다의 유일성은 1)처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하나가 되어서, 우연히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의미에서의 유일성. unique하다, 유일하다는 그런 의미다.

 

9. <방법서설>(라틴어 버전으로는 그 이후의 <철학원리>) cogito ergo sum<성찰>ego sum ego existo의 차이를 몰랐다. <성찰>ego sum 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므로 고로같은 연역 따위 필요 없다는, 텍스트 문장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런 현장성이 반영된 명제였다니, ego sumego existo 사이의 콤마는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것이 압축된, 가장 단호하고 시적인 문장부호 아닐까.

 

- 의심하는 동안에도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주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 <철학원리>에서는 저렇게 간단하게 말하는데, <성찰>은 훨씬 세련되고 깊다. ego sum, ego existo.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 ‘생각한다는 것이 생략되어있다. ego sum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내가 지금 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되는 것. “그러므로라고 연역을 하지 않아도, ego sum이라는 것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주체가 그 자체로 입증된다는 것. 훨씬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명제다.

 

10. 이 글을 읽고나서 한나절 동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들을 면밀히 듣고 텍스트 메시지를 면밀히 읽었는데 정말로 대부분이 performative로 수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굉장히 피곤해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constative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욕망 바람 기대 공격 방어 자기어필 등이 꽉꽉 눌려 담겨있는, 수많은 performative. 이것의 정점은 아마 수동공격일테고. 조금만 과장 보태서 말하면 constative 형식으로 구성된 performative야말로 코나투스들이 드글드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름 topikㅋㅋㅋ)

 

- 그가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별한 이유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문장이 constative만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언어의 주된 기능이자 언어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볼 때 우리 언어의 굉장히 많은 것이 constative 이외에 performative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라고 <화행론> 중간 쯤에 이렇게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놓는다. 그리고 중간 이후부터는 그런데 오스틴이 생각해봤더니 이 구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constative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performative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performative의 몇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그러니까 중간 이후부터는 우리가 쓰는 문장은 다 performative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어쨌든 데카르트의 ego sum, ego existo도 그냥 진술문이 아니라, 일종의 performative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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