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416분에 열리는 304낭독회의 낭독 청탁을 고민 끝에 일단 수락해놓고도 며칠 동안 원고를 시작할 엄두를 못 냈다. 세월호에 대해 갖고 있는 복잡하게 헝클어져있는 감정을 내가 과연 하나의 정돈된 글로 쓸 수 있을까. 단편적인 느낌 외에는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정리된 긴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너무 무겁고 너무 아프고 너무 조심스러우면서도 끝내는 격앙되고야 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격앙 조차도 조심스럽고 미안한 일이었기 때문에. 마감이 다가왔고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도 쓰려고 워드를 열어놓고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었다. 살면서 청탁 받아 쓴 원고 중 가장 빨리 쓴 원고가 아니었을까. 내 마음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것들이 흘러나오는 대로 쓰다보니 이 일이 시사하는 어떤 사회적 의미나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를 고민해서 덧붙일 틈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의 글이 나오고 말았지만 그래서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 송고 전까지 조금 망설였지만 아직 나로서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저 미안한. 세월호 추모 주말을 맞으며 1월 낭독회 때 쓰고 읽었던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며 이때와 또 달라진 건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20144, 몸에 피주머니를 달고 있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피주머니라는 비일상적인 단어의 연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저는 배액관이라고 부르는 피주머니를 달고 4월의 그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크다면 큰 수술과 일주일의 입원 끝에 퇴원을 했고, 병원 올 때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당부로 회사도, 여타의 사회생활도, 꾸려가던 일상도 전부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태어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가만히 있어야했던 날들에 방 한구석에 앉아 그 뉴스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굴만 봐도 저분은 누구의 어머니이고, 이름만 들어도 그 아이는 몇 학년 몇 반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봄이 지나가는 내내 그 뉴스들만 보고 있었습니다.

20144, 저는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한 날짜와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단어의 연결 때문에 이 또한 어떤 종류의 비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사망의 가능성이 제법 높았던 6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그 가능성에 대해 고지를 받았던 그날부터 혹시에 딸려오는 생각들을 떨치지 못해 불안에 떨어왔던 친구 중 하나가 눈물을 터뜨리며 너는 이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혹시를 떨쳐낸 지 며칠 안 지나서부터 이번에는 어떤 혹시들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되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 결국 구조하겠지, 라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수습을 잘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충분한 책임을 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애도는 하겠지, 아무리 구조할 능력은 없었어도 구조할 의지는 있었겠지로 계속 변해갔고, 그 모든 아무리 그래도는 변함없이 깨어져나갔습니다.

엄청난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나가는 자리마다 미안함이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아남은 자로서의 미안함과 얼마 안 되는 돈들을 보내고 서명을 하고 노란리본을 곳곳에 다는 것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살아남아서 피주머니를 매단 채 몇 주를 그것만 내내 지켜봐왔으면서도 점점 잊어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물론 이 사건과 이 사건 주변에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있는 수많은 아무리 그래도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구의 어머니였는지, 누가 몇 학년 몇 반이었는지,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청와대를 향해 밤새 걸었던 그날, 막아서는 경찰들에게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뜯은 풀과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모아 집어 던졌던, 경찰을 향해 욕하는 시민들에게 쟤들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시키는 대로 했던 애들처럼 쟤들도 그냥 말 잘 듣는 애들일 뿐이니까라고 가만가만히 말렸던 유가족들의 어떤 심정들 같은 세세한 결들에 대해 하나하나 떠올리며 아파하는 시간들은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여행길에 배를 탔다가 조타실이라는 글자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면서 조타실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들어본 게 언제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세 시간도 안 돼서 바다 한가운데서 카약을 타고 노를 저으며 한가롭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지난달 동대문을 우연히 지나다가 전태일 열사의 동상에 매어진 자주색 목도리에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겨울이라고 동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노란리본을 걸어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두 시간도 안 돼서 식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저녁을 보냈습니다. 슬픔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들이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봄 광장에서 열린 3주기 추모미사에서도 미안했습니다. 2주기까지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떼지 못했던 발걸음인데, 그 발걸음의 무게가 줄어들었기에 갈 수 있었다는 걸 마음 한 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월의 어느 주말, 안산병원과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다섯 분과,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그 슬픈 소망을 이루지 못한 유족분들이 눈에 밟혀 가야만 했던 기저에는 이렇게라도 다시 한 번 더 되새겨야만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다는 걸 마음 한쪽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산병원에 붙어있는 커다란 전지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되새겨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것,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에는 잊어가고 있다는 저의 상태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되고,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릅니다. 제가 가진 그릇은 그다지 깊지도 견고하지도 못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로 마음이 조금씩 새어나가는, 담긴 마음의 눈금이 천천히 줄어드는 그릇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기약을 믿음직하게 품을 수 있는 모양과 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제가 그나마 다짐할 수 있는 기약이 있다면,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습니다정도일 것입니다. 이 발버둥에는, 어느 날 문득 줄어든 눈금을 발견하고 내가 또 이만큼이나 잊고 있었구나를 대면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황급히 무언가를 그릇 안에 부어넣어 다시 채우며 이렇게라도 해야지만 잊지 않을 수 있다니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제 안에서 깊고 견고한 그릇으로 만들어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그제야 채워 넣어야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 한 달이 더 지나 다음번 낭독회가 열릴 때쯤은 봄이 오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봄은 바다처럼 밀려듭니다. 바다는 여름에나 떠올리는 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여름을 밀어내고 봄이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봄에도 계속 미안해하며 계속 채워 넣으며 연대해야하는 어떤 순간순간들에 반도 안 찬 그릇을 내미는 일이 결코 없도록, 잊지 않도록 발버둥 치겠다는 것만큼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밖에 다짐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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