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부 서문을 읽으면서 어쩐지 스피노자에게 격려 받는 느낌이라 뭉클했다. 격려를 받아서라기보다 처음으로 스피노자가 매우 가깝게 느껴져서. 추상적 거리감이 아니라 1차원적인- 굳이 분류하자면 사유보다는 연장속성에 가까운ㅋㅋ- 거리감에서. 반 년 동안 걸어온 1부의 터널 속은 때로는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었고 때로는 아득할 만큼 모호했다. 모호한 길을 따라 한참을 더듬더듬 걸을 때는 물론이고 중간중간에 가닿는 매혹적인 공간에서 황홀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앉아있을 때에도 기력의 일부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초 단위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을 정도로 에티카를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늘 바짝 긴장해있었던 것 같다. 잠깐 숨을 돌리고 이제 다시 비슷한 듯 낯설 2부의 터널로 다시 넘어왔는데 그 길목에서 스피노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동안 수고했다고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된다고 직접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힘났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서 지복이라는, 스피노자가 우리를 최종적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그곳이 전혀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사실 이미 가는 길이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할 때마다 뭔가 삶에 희망 같은 게 차오르는 느낌으로 이미 행복하니까(물론 심도 높은 희망은 아니고, 그냥 세상에는 참 파고들면 재미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에 대한 희망이지만), 그곳에 닿는 것에 실패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엄마가 맨날 무슨 이야기 말끝마다 아유,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해~ 다 지 복이지 뭐!“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잘 가면 지복이고 못 가면 지 복이지 뭐~

 

- 그러나 양태 전부가 아니라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루겠다. <- 자기 논의의 범위 한정. 신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정신이 갖고 있는 정서, 관념,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정신이 지복, 지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 나의 목표는 윤리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스피노자의 책이 왜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 본질에 대한 정의들 재미있었다. 양태로서의 물, 실체로서의 물로서 설명되었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1부 공부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자세히 쓰기 뭐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좀 위안과 동시에 위안을 느끼는 것에 반성도 좀 했었는데), 코나투스와 이어지는 2부 정의2의 본질론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들뢰즈의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 가끔 나는 들뢰즈의 어떤 독특함이 그가 갖고 있는 어떤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짐말과 경주마 이야기도 어떤 면에서 나에게는 개체의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는 서양식 사고가 아닌 개체 간의 관계, 일종의 감응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했다.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거리가 짐 끄는 말과 경주마 사이의 거리보다 가깝다는 것, 되게 명료하면서도 와닿는 비유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계급 차이에 대해 떠올렸던 건 내가 촌스러워서? 겠지만, 대한민국 1프로 안에 드는 상류층과 짐 끄는 노동자의 거리 보다도 짐 끄는 노동자와 짐 끄는 말, 짐 끄는 외계인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도. 종적 형상의 차이 너머의 연대의 실낱 같은 가능성도 이런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A무엇이다가 아닌, A무엇을 한다의 문제로. 나와 봉이는 가끔 결국 중요한 건 배치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같은 A라는 말, 행동, 인물, 사건이라도 그게 어떤 순간에 어떤 자리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정체성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렇다.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모욕이 되거나 농담이 되는 것은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특질이라도 그것이 장점이 되거나 단점이 되는 것도 결국 배치의 문제고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폐가 되거나 득이 되는 것도 배치의 문제고. 맥락상의 배치.

 

- 그러나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짐 끄는 말하고 경주용 말 사이의 차이가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차이보다 더 크다그러니까 들뢰즈는 form의 차이보다 무슨 일을 하느냐-들뢰즈는 이것을 affect의 차이라고 하는데-의 차이가 종적인 형상의 차이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 말과 소라는 form의 차이보다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affect를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생각과 가깝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다. 스피노자는 그렇게까지는 확실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3. 이날의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부 때 이미 여러 번 들었던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 끝에 선생님이 덧붙인 말이었다. 데카르트의 생각이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데카르트의 저런 의문, 멋지지 않느냐고. 유한한 내가 이렇게 유한한데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을까! 반문하는 것.

 

솔직히 고백하면 1부에서나 <에티카> 관련해서 읽은 다른 책에서나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을 겨냥해서 비판하고 논박하고 신랄하게 조롱하는 것들을 접하다보니 데카르트의 어떤 주장들은 좀 터무니없게 느껴졌고(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신이 완전하다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 그들은 동시에 신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보다 더 부조리한 것 또는 신의 전능함과 더 양립불가능한 것을 꾸며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류의), 자연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고 기하학적 공간으로 만들어놓고 신과 만물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이 나에게 매력적이지도 않았고, 스피노자를 압박하는 데카르트주의자들로 인해 그런 점이 더 부각되어 다가왔으므로 그가 당시에 굉장했고 중요한 영향을 끼친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나에게는 빛바랜 사람처럼 느껴진 게 사실이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감동 받았던 순간이 있었다. ‘왜 무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데카르트에 대해, 지금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적 시각들의 근원에 녹아들어있을 과거의 사람들이 치열하게 했던 고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사실 그동안에도 후대의 사람이 후대의 잣대로 과거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나름 고민했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과거의 작품들을 판단하는 문제 같은 것. 필립 로스나 부코스키 같은 현존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볼 때도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인데,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와 영혼으로 가장 가깝게 이어져있다며 극찬했던 찰스램 수필선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안에는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사회적 구조가 전제로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여혐의 흔적들을 대할 때나 마그리스의 <다뉴브>에 녹아있는 여성에 대한 시선들을 보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단지 이 인간들 빻았다로 판단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보부아르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내가 그들보다 어떤 점에서 PC하게 사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현대에 태어나서 현대의 문화자본을 흡수했기 때문일 뿐인데.

 

이런 고민들을 나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데카르트에 있어서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선생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스피노자를 포함, 현대의 철학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만 접하다보니 그들이 지적하는 오류들이나 결핍된 부분들 위주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일 텐데, 나와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질 만큼 지성의 완전성 면에서 저 높은 곳에 올라있는 사람이 데카르트에 대해 경이로운 존중을 표했을 때 고백하면 얼굴이 약간 뜨거워질 만큼 나의 성마르고 얕은 생각들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그러게, 현대의 사고로 봤을 때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라 신은 뭐 그냥 허깨비야 하고 쉽게 결론내리고 넘어갔을 문제에 그 당시 저런 반문을 던졌던 데카르트의 질문이 훨씬 멋지다. 유한한 내가 완전한 신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라는 그의 경이감에 찬 질문의 무게가 이제야 조금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믿는 것, 그러니까 신, 그 신의 전지전능한 완전성, 인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성스러운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혹은 감히 그것에 의문을 표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중심에 놓기 위해 그가 만들어냈던 형이상학의 세계가 대단한 것임을 느꼈다. 솔직히 그동안은 아주 거칠게 트위터식으로 표현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상상의 폭이 넓은 공간을 이용해서 여러 무리수들로 결국 신 깔대기ㅋㅋ 인간의 정신 깔대기ㅋㅋ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비판하며 신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다시 자연 안으로 끌어내린스피노자가 좋았고, 그래서 <에티카> 공부를 선택한 것도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 칸트 이후의 상실도 나에게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 번도 그것을 상실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칸트의 불가지론은 제한이 아니라 제동이었다. 아마 현대 개신교에까지 이어져오는 중세신학적 신앙관에 내가 워낙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현상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서 사변적 독단을 끼워넣을 틈을 막아버려서, 또한 내가 신이나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권리를 부여받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그 인간 이성에 인식론적 회의를 끼얹어서 그래서 나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저래도 신학자들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날뛸 것이며 인간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 양 이성을 뽐내겠지만, 누군가 그렇게 선을 딱 그었던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이 칸트 이후의 상실, 인간의 지성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이 영역 저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상상할 수 있었던 범위를 확 좁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을 때 (따져보면 내가 칸트를 좋아했던 이유와 같은 이유인데) 처음으로 칸트가 박탈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이걸 철학에서 문학의 장으로 옮겨놓으면 요즘 한국에서는 장르문학이라고 불리는 sifi나 추리소설, 판타지 소설에 리얼리즘 소설이 일침을 가하는 느낌일 텐데(재밌게도 나는 장르문학 매니아인데ㅋㅋ) 칸트 이후 인식의 범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당하게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제한이 되어 그 너머의 많은 세계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 나는 현실에서 믿을 건 서류뿐이다라는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식 방법을 고수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왜냐면 서류로 대표되는 객관적 자료, 객관적 현상의 너머에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인식으로 이성으로 추론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것들이 매력적이고 때로는 직관적으로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제동이 아니라 제한하는 세계도 있는 것 아닌가. 아마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만큼이나 별점, 사주 같은 것들도 매우 말 같지 않을 텐데 점성학이나 명리학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거기대로만의 (물론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ㅋㅋㅋ) 세계가 펼쳐져있고, 그것이 뭔가 애매모호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을 세상을 유형화해서 받아들이려는 집요한 이성의 집약이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름이 붙은 것을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덜 두려워한다. 왜냐면 이름이 붙어있으면 어쨌든 나의 인식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고, 내가 인식할 수 있다면 컨트롤 할 힘도 생길 것 같으니까. 그래서 결국 절대로 이름 붙일 수 없고 재단할 수 없는 운명, 인생, 미래, 시간, 인간의 성격, 성향에 끊임없이 이름으로서의 유형화를 시도해서 자기 인식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그런 틀 하나를 갖고 있으면 그러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가 이성적으로 이미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이게 내가 비이성에 기대어, 지성과는 매우 멀어지는 방식으로 별점이나 사주나 맹목적 신앙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인데(그런 틀을 갖고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잖아), 이런 상상의 영역은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선생님 말대로 칸트가 제한하기 이전의 이런 자유로운 형이상학적 사고의 세계는 재미있잖아. 거기에 치밀한 논리를 더해서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한 세계를 이론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에서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잖아. 선생님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한 말, 나를 매우 반성하고 돌아보게 한 말인데, ‘무시하기 보다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살려보는 것의 영역을 어디까지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 또한 하게 만든 말이다.

 

2. 형상적 실재성 대 표상적 실재성

- 형상적 실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관념은 동등하지만,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완전성에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생각.

-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상하다, 나는 유한한데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 완전하고 지고하고 무한하신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있을까. 정말 놀랍다라고 반문했다. 관념이라는 것을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반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같으면 신 뭐 그거 그냥 허깨비야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데카르트는 우리가 저 신, 완전한 분의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이게 더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다. 너무 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 보다는 거기에 담겨있는 다른 측면들을 더 살려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4.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존재한다.“ , 나 이 말도 너무 좋았네. 그리고 데카르트가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원리> 146항에서 고통과 연결시켜 한 말도 좋았다. 누군가가 강한 고통을 느낄 때 그가 이 고통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지각은 실로 아주 명석한 것이지만, 늘 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 지각을 그들이 고통스러운 지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고통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강한 것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판명하다고 착각하기 쉬운데(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했으니까) 사실 그렇지 않지. 고통처럼 선명한 경험이 나의 어떤 감각을 일깨운다면 그 경험에 대해 판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또 공부해야 한다. 내 아집에 갖혀서 편한 생각들 속에서 뱅뱅 오가는 그런 고민 말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들 속에서. 그래서 이 말이 매우 좋았다. ”그들이 고통의 감각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내리는 모호한 판단“.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기질에 따라가 연상되는 말인데 그러니까. 사람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자기 기질에 따라“ ”닮았다고 가정하는 것의 본성과 관련하여판단을 내리기 쉽고, 그 판단이 내 안에서 나왔으므로, 보통 나의 몇십 년의 역사와 경험이 응축되어 내린 판단일 것이므로 명석판명할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의 이성과 인식을 너무 과신한다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또 칸트의 불가지론을 좋아할 수밖에 없네ㅋㅋㅋ 정신이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현존한다고 상상하는 것의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2부를 더 공부하다보면 더 생각할 수 있겠지. 아무튼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지각들이 있다는 것은 내 가슴에 꼭 새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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