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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국가에서
V. S. 나이폴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얼핏 제목만 보고 정치적 서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엔 표지가 너무 발랄하다 싶었다. 쨍한 레몬색과 연녹색 세로 줄무늬가 선명했다. 색의 조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작품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에 대한 궁금함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본문을 읽기에 앞서 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눈이 갔다. 작가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V. S. 나이폴)은 인도계로 영국령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태어났다. 트리니다드토바고는 카리브해 남쪽 남미대륙과 가까이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누군가가 제국의 또다른 식민지 그것도 작디 작은 섬나라로 가게 된 사연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아마도 파란만장했을 여정 끝에 지구 반대편에 다다랐을 누군가, 그 누군가의 자손이 써낸 서사에 대한 호기심이 낯선 작가에 대한 부담감을 이겼다.
『자유 국가에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이름지어진 짧은 단편 사이에 2개의 단편과 중편 1개가 끼어있는 구조다. 사실 '자유' 혹은 '국가'라는 단어가 제목에 등장한 소설을 선뜻 읽고 싶어지진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읽는 쪽을 선택한 이유는 프롤로그의 제목 때문이다. 「피레우스의 방랑자」에 매료됐다. 게다가 에필로그에는 「룩소르의 서커스단」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중간의 이야기들이야 어떻든 이 책은 그리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시작해서 이집트 왕국 중심지 룩소르에서 끝난다는 말이 아닌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문명과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서는 두 단어가 등장한 소설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작가 나이폴은 학업을 위해 조국을 떠난 후 평생 다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머물며 작품을 썼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의 작품에 영국이 소재나 배경으로 거의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고향인 트리니다드나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유럽 식민지"를 문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유 국가에서』의 단편들에서도 어딘가를 떠돌거나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들은 뿌리를 잃고 부유하며 자신이 디딘 현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결말은 독자의 고민을 요구했다. 지금 읽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프롤로그 「피레우스의 방랑자」는 아테네 피레우스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이틀 간의 뱃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저분한 증기선"에는 "난민선처럼 승객이 꽉 들어차 있었"고 그 가운데 영국인으로 보이는 "방랑자"가 섞여있다. 누구와도 섞이길 원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눈길을 바랐던 방랑자는 다른 여행객들의 따돌림 속에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소설 전반에 걸친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의 이미지는 프롤로그에서 시작됐다.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는 인도 뭄바이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간 하인 산토시의 이야기다. 주인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만족했"던 산토시에게 워싱턴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유'의 현신이었다. 워싱턴에서는 하늘같은 주인도 없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산토시는 진정한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달랐다. 내가 주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주인과 나를 남남으로 보게 되었다.
p.61
나도 한때는 큰 무리의 일부였다. 그때는 나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는 내게 이런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가진 건 오로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어떻게 해서든 그 몸뚱이를 입히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p.96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는 모호한 이야기다. 동생 결혼식에 가고 있는 나와 친구 프랭크가 있다. 둘이 어떤 관계인지 나는 어떤 상황에서 동생에게 가고 있는 건지 설명하지 않는다. 동생을 아꼈던 '나'는 "항공 공학을 배우고 싶다는 동생을 따라 영국으로 가 뒷바라지하지만 동생은 형의 기대를 져버리고 노동자의 길을 택했다. 벌어놓은 돈을 모두 탕진하고 동생이 떠나려는 순간 '나'는 공허함과 분노를 느낀다.
그 사람들 중 나의 적은 누구인가? 누가 적인지 알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 대체 누가 내 돈을 강탈하고 내 인생을 망쳤는가? 나는 이들 중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가?(…)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대체 나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pp.172-173
수록작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표제작 「자유 국가에서」는 내전 중인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다. 대통령이 왕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한다. 주인공 바비와 지인 린다는 혼란한 이때에 (영국인) 관할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조국에 대한 태도도 다른 두 사람은 여행 중 맟닥뜨리는 여러 상황에서 때론 같은 모습을 보이기고 하고 싸우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표변하는 둘의 마음과 행동에는 아프리카 땅에 대한 경외와 아프리카인에 대한 폄하가 드러나고 동시에 과거 지배자로서의 자존심과 피지배자였던 아프리카인이 현재 행하는 무력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그 와중에 동성애자로서의 바비의 정체성과 린다에게 따라붙어 있는 문란하다는 소문이 두 사람의 심리상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아프리카인에게 호의적인 듯 보이는 바비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스스로 '편견'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 안에 잠재된 생각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걸 드러냈다. 바비는 자신이 "그 어떤…… '편견'도 갖고 있지 않"다며 "이곳(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인들에 대해 편견 같은 걸 갖고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유럽인들 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할 구역 내의 안전한 집으로 돌아간 후 자칫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하우스보이 "루크를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 먹는다. 루크가 대통령에 맞선 왕과 같은 부족이기 때문이다. 바비는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편견을 '스스로' 생산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룩소르의 서커스단」에서는 밀라노를 거쳐 이집트 룩소르로 여행을 떠난 '나'가 주인공이다. '나'는 사막에서 만난 일단의 유럽 여행객이 구걸하는 이집트 아이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유럽인들을 저지한 '나'의 눈에 점잖은 태도의 중국인들이 들어온다. '나'는 "차분하고 단정한" 중국인들에게서 이집트를 향해 다가오는 "또 하나의 머나먼 제국"을 발견한다.
작가 나이폴은 『자유 국가에서』로 맨 부커 상을 수상(1971)했고 200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나이폴은 평가가 갈리는 작가다. 작품 해설을 참고해 보자면 탈식민주의 문학의 주요 작가로 평가되는 한편 "서양인의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제삼 세계를 바라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자유 국가에서』에서 느낀 바로는 그 어느 한쪽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 주민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제국주의 국가 국민들을 보고 있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사람들을 무지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그리"는 동시에 영국인들을 위선적이고 호감가지 않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에 대한 역자의 해설은 적확하다.
결국 종주국인 영국이든 트리니다드를 비롯한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식민지든 나이폴은 사뭇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서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와 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그 해결책이 아니다. 이 책 『자유 국가에서』처럼 그의 시선이 머무는 것은 그 같은 문제투성이 국가나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채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 즉 식민 지배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세계를 떠도는 유랑자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pp.439-440
이해를 위해 작품 해설에 많이 기댄 소설이었다. 해설없이 읽었다면 종종 그런 것처럼 "그래서 결론이 뭐야?" 늪에 빠졌을 것이다. 어떤 소설은 명확한 결론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또 어떤 경우에는 서사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단편 읽기에서 배운다. 노벨상처럼 굵직한 상을 받은 작품임에도 읽은 후 "수상작은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해설을 꼼꼼히 챙겨볼 일이다. 미쳐 알지 못한 작품의 이면이나 해석의 가능성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의 작품 해석이 가능하다면 굳이 그럴 필요없겠지만 시간들여 읽은 작품을 모호하게 남겨두는 것은 아쉬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