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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된 아이 ㅣ 사계절 아동문고 99
남유하 지음, 황수빈 그림 / 사계절 / 2021년 2월
평점 :
어두운 숲 속에 들어선 아이가 날 돌아다 본다. 초목의 색은 싱그럽지만 아이의 등 뒤는 어둑하기만 하다. 어두운 숲을 향하고 선 아이는 뒤를 돌아본다. 이제부터 숲으로 들어갈 거라고.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숲 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의 눈 빛에서 '초대'라는 의미를 읽어야 했을까. 곧 나는 그 아이의 등을 따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발을 디딜 것만 같다. 남유하 작가가 글로 그린 검은 숲 속으로.
「푸른 머리카락」에 이어 남유하 작가와는 구면이다.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에서도 느껴졌지만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 듯하다. 남과 다른 누군가가 겪는 마음의 고난에 대한 묘사가 특별하다. 다름을 바라보고 납득하는 누군가의 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사계절 아동문고 99번 『나무가 된 아이』에는다름을 겪는 또는 져켜보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온정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비판도 아닌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책에는 6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각 단편의 첫 장에는 그 소설을 대표할 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이 들어있다. 짧게는 한 줄, 길게는 네 줄로 된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단편 전체를 상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힌트같은 그 짧은 문장에서 각각의 단편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남유하 작가의 첫 문장을 읽고 나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하는 회기심에 책 장을 넘기게 된다.
「온쪽이」
눈 두 개, 귀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어쩌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게 됐을까?
반쪽이들이 사는 나라에 돌연변이 온쪽이가 산다. 왼쪽 또는 오른쪽 몸만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인간 기준으로) 온전한 몸을 가진 온쪽이는 반푼이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온쪽이를 감싸는 건 엄마뿐이다. 엄마는 온쪽이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온쪽이는 자신때문에 부모님이 불화하게 되자 수술을 결심한다. 문제없는 몸의 반을 잘라내고 반쪽이가 되는 수술이다. 자신의 다름을 단점으로만 보게 만드는 사회에 순응해야 할까. 남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을 상처내는 일을 감수해야 할까. 온쪽이는 단점인 줄만 알았던 두 다리로 자신을 얽맨 속박에서 탈출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이 누군가에겐 '슬픔'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상'이 되기를 강요하면 그 누군가는 평생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느껴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남들에게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내가 내게는 정상이었다. 수술을 통해 남들에게 저상으로 보이는 내가 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왼쪽도 오른쪽도 잘라 내고 싶지 않다.
pp.22-23
「나무가 된 아이」
필순이가 나무가 됐다.
2반 현오는 무당벌레가 되어 날아갔고,
3반 수아는 청설모가 됐다던데,
우리 반 필순이는 나무가 된 것이다.
표제작 「나무가 된 아이」는 카프카를 변주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이 어느 날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 무당벌레, 청설모가 되기도 하고 나무로 바뀌기도 한다. 갑충으로 변신한 카프카의 주인공은 주변에서 존재감을 잃지는 않았다. 모습이 변했어도 가족들은 갑충이 '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신한 아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사라진다. 그 아이들이 변화한 모습을 어른들은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져버린다.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변신한 아이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변화한 상태에서도 미움을 받는다. 지워진 존재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괴롭힘은 복수로 귀결된다. 피해자가 겪은 일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본 누군가가 마음을 건넬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뇌 엄마」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길쭉한 원통 모양의 유리관 속에
둥둥 떠 있는
연분홍색 뇌가 떠올라.
신체가 없는 가족과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 될까.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인간, 정신과 소리로만 존재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그래도) 존재의 소멸보다 나은 선택인 걸까.
아이의 엄마는 사고로 몸을 잃고 뇌만 살아 있다. 합성된 목소리로 대화하고 감정을 느껴도 안아주거나 쓰다듬지는 못한다. 아이는 몸이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뇌엄마가 사라지길 원치는 않는다. 연극배우였던 엄마는 신체의 존재성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움직임을 구현할 신체를 잃고 뇌로만 존재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람이었다. 아이는 춤을 추면서 엄마를 이해한다. 몸이 없는 엄마의 고통을 조금씩 헤아린다. 그리고 언젠가의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문득 유리관 속의 엄마를 바라보았어. 노래할 수 있지만 춤출 수 없는 엄마를. 눈물을 닦어 줄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엄마를. 그리고 나는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었어.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p.61
「착한 마녀의 딸」
바이올렛은 착한 마녀의 딸입니다.
마을에 새로 이사 온 바이올렛을 아이들과 달랐다. 바닷가에 살던 아이는 친구들과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마녀의 딸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었고 마법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렛은 마법의 도구가 됐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들어주는 수단으로 바이올렛을 대한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라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마법에 따르는 책임을 바이올렛에게 미뤘다. '마녀'라는 신분은 바이올렛 모녀가 정당함을 요구할 수 없게 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한계를 모르고 극악해지고 그들 자신의 파국까지 초래한다.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편견은 사람을 어디까지 사악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아이들이 가진 편견은 어른들의 용인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지.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상처주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쉬운 일인지. 아이들이 태워올린 불꽃은 마녀의 눈에서만 눈물이 흐르게 놔두지는 않을 것 같다.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구멍 난 아빠」
처음에는 검지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아빠의 가슴에 난 구멍 말이다.
아빠 명치에 정말로 구멍이 뚫렸다. 반대편 벽이 보이는 구멍, 배에서 등까지 통과하는 텅 빈 공간. 대체 이 구멍은 왜 생긴 걸까. 서로 소원한 엄마, 아빠. 아빠의 사업이 잘 안되고부터 지훈이네 가족은 함께 찜질방 가는 일을 그만뒀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아빠, 엄마의 꿈을 빼앗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진 작가"라는 아빠의 꿈과 어쩌면 "화가"였을 엄마의 꿈. 꿈이 빠져나간 자리엔 텅빈 공허만 남는다. 미래를 그려볼 수 없다는 건 사람의 몸마저 지워가는 일인 모양이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바람에 시린 구멍을 얻는 것일까. 혹은 그런 구멍이 있음에도 꿋꿋이 사는 것이 어른인 걸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웃는 가면」
지금은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미소만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사로잡았던 아이.
무리에서 홀로 떨어지는 게 어쩐지 두려운 아이,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미소 한 번으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친구 수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미유처럼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아이들의 주목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특별함의 가치만을 평가하는 세계에서 평범한 다수는 자신들이 누리는 가치를 잊기 쉽다. 그러나 평범할 수 있음도 능력이다. 평범함의 가치를 알았던 미유는 특별함의 권유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의 절망을 먹이 삼아 얻는 사랑보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평범함이 더 가치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과 "특별한 괴물", 작가는 선택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남유하 작가는 스스로를 "이상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스스로 이방인인 시절을 보내봤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특별한 아이"라고 불러줬던 엄마처럼 작가는 이제 "이상한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쓴다. 작가가 쓴 "이상한" 이야기들은 "이상한 아이"들 뿐 아니라 그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공유하는 "어른"에게도 유용하다. 그 어른들도 한때는 "이상한 아이"였을테지만 그들은 그 시절을 이미 잊었을테니.
저는 늘 이상한 아이, 다른 아이였고 그런 저에게 아무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
저는 동화를 쓰면서 열두 살의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목소리가 나와 비슷한 아이들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처럼 '이방인'이라는 말의 뜻도 모른 채 이방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곤소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