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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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내게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고 조금 아는 것 같다가 금새 헤매게 되는 분야다. 어려운 문장을 붙잡고 있을 때면 '대체 내가 왜 이 책을……'하며 끙끙댄다. 책에 담긴 내용을 소화하지 못해 머리를 쥐어 뜯다가 해제 또는 옮긴이의 해설을 볼 때서야 '아, 내가 읽은 내용이 이런 거였어'하며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철학을 다룬 책에 끌리곤 한다. 무슨 조화 속인지.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는 조금 만만해 보였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인 아렌트, 뢰비스, 요나스, 마르쿠제와 하이데거의 사제관계에 집중한 책처럼 보였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동조한 일에 대해 또 제자 아렌트와의 관계에 대해, 그 전후 사정이 알고 싶기도 했다. 뢰비스와 요나스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지만 나머지 두 명의 이름은 들어 봤으니 어려운 철학을 다루더라도 읽을(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순진한 생각이었다. 책은 하이데거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의 '관계'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를 통해 하이데거 사상의 방향성을 명료히 하는 것이 책의 목표였다. 


저자 리처드 월린은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우발적이거나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독일적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독일에서 번성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계승자'이며 반유대적, 반근대적 사상가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 사상의 근원을 배제한 채 그의 텍스트를 독해한 북미권에서는 그를 "'인간'과 '이성'에 대한 비판자"로 여기고 그 안에 담긴 '정치적 함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전에 하이데거에 대해 읽었던 글들은 저자의 우려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나치에 부역했지만 주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기간이 매우 짧았고 나치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자 곧 관계를 단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국내 하이데거 연구가 '내재적 접근을 선호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북미의 연구 전통을 따른 독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월린의 책은 하이데거 연구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월린은 하이데거 수용사를 논할 때에도 이러한 외적 평가 척도를 중요하게 제시한다. 월린은 영미권 내에서 하이데거의 수용이 (…) 여전히 내재적 접근을 선호해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내 하이데거 연구에 대해서도 아주 다른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나 제자들의 사상에 대한 텍스트 외재적인 분석과 비평은 기존에 내재적 접근 방식이 주를 이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는 미덕을 분명히 갖는다.

pp.435-436


책은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에서 시작한다. 스승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의 사상적 대표가 된 상황에서 유대인 제자들은 어떤 혼란과 반응을 드러냈는지를 서술한다. 저자가 선택한 대표적인 네 명의 제자는 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한스 요나스, 허버트 마르쿠제다. 저자는 이들을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들의 유대 정체성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나치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우면 독일 사람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유대인들을 보는 독일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탄압이 시작됐다. 하이데거의 제자들도 갑작스런 스승의 변화에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제자들 중 사상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스승의 영향에 많이 휘둘린 사람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는 제자인 동시에 연인이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게 돌아섰을 때 아렌트는 스승을 비난했지만 종전후 그와 화해하고 스승의 대변자가 됐다. 월린은 하이데거 사상의 영향을 아렌트의 저작에서 찾아내 그녀의 사상 변천이 하이데거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두 사람이 화해한 이후, 그녀의 어조는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화해 이후 그녀는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의 무게와 크기를 체계적으로 축소했다. (…) 이전의 비판적 묘사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pp.142-143


근대 역사의식 연구로 독일에서 잘 알려진 카를 뢰비트,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한 생철학자 한스 요나스의 경우도 근대 정신을 비판하고 전제주의에 경도돼 있다는 점에서 스승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요나스)는 플라톤의 '철학자 왕' 교리가 담고 있는 반민주주의 편견에 명백하게 빚을 지고 있다. 이는 1930년대 초 하이데거 역시 미혹되었던 편견이기도 하다. 요나스는 전제정치의 미덕을 공공연하게 찬양한다.

p.263


허버트 마르쿠제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감을 받아 스승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승의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제자의 방향을 탐탁잖아 했고 나치를 선택하면서 결별에 이르렀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젊은 추종자가 좌파의 정치 신념을 가졌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하이데거는 마르쿠제의 철학적 세계관의 핵심을 형성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종합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단호한 반공산주의적 관점에 비추어볼 때, 이를 호의적으로 보았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pp.317-318


아렌트는 스승과 화해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인지 아렌트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에 비해 신랄해보인다.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제자들의 사상적 흐름을 소개하고 스승 하이데거와의 관계 서술한 후 그들의 사상에서 보이는 스승과의 연계성을 풀어낸다. 반면 아렌트의 경우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일대기적으로 소개하면서 그 변화에 따른 아렌트 철학의 향방을 서술한다. 한나 아렌트의 모든 사상은 하이데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지막까지 짝사랑이 계속된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때 그녀가 가진 정치철학자로서의 위대함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난감해졌다. 아렌트는 책에 소개된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인데 말이다.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을 어떤 맥락으로 바라봐야 할 지 생각하게 했다.

교육자로서 하이데거는 대단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데는 이런 부분이 일정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하는 말마다 '가치있는 어떤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스승이라면 그가 말하는 사상의 결점도 눈에 들어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한때 스승을 믿고 따랐고 그의 배신에 경악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배어든 스승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던 듯하다.


요나스는, 상당한 정도로, 그 철학자의 매료시키는 능력이 '이해할 수 없는' 담론의 성격에서 기인했다고 언급했다. 말하자면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말에는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271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자로서의 면모는 2014년 『검은 노트』가 출판되면서 확연히 드러났다. 사적인 기록물인 『검은 노트』에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에 끔찍하게도 가담한 사실"을 적었다. 하이데거를 '수동적 반유대주의자'로 보려는 지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본심'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월린의 주장이 더 합리적 결론이라 생각한다. 하이데거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가'로 보기는 어려운 일이며 그의 철학은 '문제의 일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악행을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하이데거의 불온한 노력,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시켜 주려는 노력은 그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고백과 결합되어 그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사'로서 볼 수 없게 만든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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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된 아이 사계절 아동문고 99
남유하 지음, 황수빈 그림 / 사계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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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속에 들어선 아이가 날 돌아다 본다. 초목의 색은 싱그럽지만 아이의 등 뒤는 어둑하기만 하다. 어두운 숲을 향하고 선 아이는 뒤를 돌아본다. 이제부터 숲으로 들어갈 거라고.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숲 속으로 들어갈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이의 눈 빛에서 '초대'라는 의미를 읽어야 했을까. 곧 나는 그 아이의 등을 따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발을 디딜 것만 같다. 남유하 작가가 글로 그린 검은 숲 속으로.


「푸른 머리카락」에 이어 남유하 작가와는 구면이다.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에서도 느껴졌지만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인 듯하다. 남과 다른 누군가가 겪는 마음의 고난에 대한 묘사가 특별하다. 다름을 바라보고 납득하는 누군가의 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사계절 아동문고 99번 『나무가 된 아이』에는다름을 겪는 또는 져켜보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온정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비판도 아닌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책에는 6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각 단편의 첫 장에는 그 소설을 대표할 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이 들어있다. 짧게는 한 줄, 길게는 네 줄로 된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단편 전체를 상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힌트같은 그 짧은 문장에서 각각의 단편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첫 문장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남유하 작가의 첫 문장을 읽고 나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하는 회기심에 책 장을 넘기게 된다.

 

「온쪽이」

눈 두 개, 귀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어쩌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게 됐을까?

 

반쪽이들이 사는 나라에 돌연변이 온쪽이가 산다. 왼쪽 또는 오른쪽 몸만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인간 기준으로) 온전한 몸을 가진 온쪽이는 반푼이 취급을 받는다. 학교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 온쪽이를 감싸는 건 엄마뿐이다. 엄마는 온쪽이가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온쪽이는 자신때문에 부모님이 불화하게 되자 수술을 결심한다. 문제없는 몸의 반을 잘라내고 반쪽이가 되는 수술이다. 자신의 다름을 단점으로만 보게 만드는 사회에 순응해야 할까. 남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을 상처내는 일을 감수해야 할까. 온쪽이는 단점인 줄만 알았던 두 다리로 자신을 얽맨 속박에서 탈출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이 누군가에겐 '슬픔'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상'이 되기를 강요하면 그 누군가는 평생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느껴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정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남들에게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내가 내게는 정상이었다. 수술을 통해 남들에게 저상으로 보이는 내가 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왼쪽도 오른쪽도 잘라 내고 싶지 않다.

pp.22-23

 

「나무가 된 아이」

필순이가 나무가 됐다.

2반 현오는 무당벌레가 되어 날아갔고,

3반 수아는 청설모가 됐다던데,

우리 반 필순이는 나무가 된 것이다.

 

표제작 「나무가 된 아이」는 카프카를 변주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이 어느 날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 무당벌레, 청설모가 되기도 하고 나무로 바뀌기도 한다. 갑충으로 변신한 카프카의 주인공은 주변에서 존재감을 잃지는 않았다. 모습이 변했어도 가족들은 갑충이 '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변신한 아이들은 그 존재감마저 사라진다. 그 아이들이 변화한 모습을 어른들은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져버린다.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변신한 아이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변화한 상태에서도 미움을 받는다. 지워진 존재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괴롭힘은 복수로 귀결된다. 피해자가 겪은 일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본 누군가가 마음을 건넬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뇌 엄마」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길쭉한 원통 모양의 유리관 속에

둥둥 떠 있는

연분홍색 뇌가 떠올라.

 

신체가 없는 가족과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 될까.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인간, 정신과 소리로만 존재하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그래도) 존재의 소멸보다 나은 선택인 걸까.

 

아이의 엄마는 사고로 몸을 잃고 뇌만 살아 있다. 합성된 목소리로 대화하고 감정을 느껴도 안아주거나 쓰다듬지는 못한다. 아이는 몸이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지만 뇌엄마가 사라지길 원치는 않는다. 연극배우였던 엄마는 신체의 존재성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움직임을 구현할 신체를 잃고 뇌로만 존재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람이었다. 아이는 춤을 추면서 엄마를 이해한다. 몸이 없는 엄마의 고통을 조금씩 헤아린다. 그리고 언젠가의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문득 유리관 속의 엄마를 바라보았어. 노래할 수 있지만 춤출 수 없는 엄마를. 눈물을 닦어 줄 수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엄마를. 그리고 나는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었어.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p.61

 

「착한 마녀의 딸」

바이올렛은 착한 마녀의 딸입니다.

 

마을에 새로 이사 온 바이올렛을 아이들과 달랐다. 바닷가에 살던 아이는 친구들과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마녀의 딸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었고 마법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렛은 마법의 도구가 됐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들어주는 수단으로 바이올렛을 대한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라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마법에 따르는 책임을 바이올렛에게 미뤘다. '마녀'라는 신분은 바이올렛 모녀가 정당함을 요구할 수 없게 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한계를 모르고 극악해지고 그들 자신의 파국까지 초래한다.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편견은 사람을 어디까지 사악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아이들이 가진 편견은 어른들의 용인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지.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상처주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쉬운 일인지. 아이들이 태워올린 불꽃은 마녀의 눈에서만 눈물이 흐르게 놔두지는 않을 것 같다.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구멍 난 아빠」

처음에는 검지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아빠의 가슴에 난 구멍 말이다.

 

아빠 명치에 정말로 구멍이 뚫렸다. 반대편 벽이 보이는 구멍, 배에서 등까지 통과하는 텅 빈 공간. 대체 이 구멍은 왜 생긴 걸까. 서로 소원한 엄마, 아빠. 아빠의 사업이 잘 안되고부터 지훈이네 가족은 함께 찜질방 가는 일을 그만뒀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아빠, 엄마의 꿈을 빼앗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진 작가"라는 아빠의 꿈과 어쩌면 "화가"였을 엄마의 꿈. 꿈이 빠져나간 자리엔 텅빈 공허만 남는다. 미래를 그려볼 수 없다는 건 사람의 몸마저 지워가는 일인 모양이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바람에 시린 구멍을 얻는 것일까. 혹은 그런 구멍이 있음에도 꿋꿋이 사는 것이 어른인 걸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이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웃는 가면」

지금은 그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미소만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사로잡았던 아이.

 

무리에서 홀로 떨어지는 게 어쩐지 두려운 아이,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미소 한 번으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친구 수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미유처럼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는 드물다. 아이들의 주목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아이들의 웃음을 빼앗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특별함의 가치만을 평가하는 세계에서 평범한 다수는 자신들이 누리는 가치를 잊기 쉽다. 그러나 평범할 수 있음도 능력이다. 평범함의 가치를 알았던 미유는 특별함의 권유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의 절망을 먹이 삼아 얻는 사랑보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평범함이 더 가치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과 "특별한 괴물", 작가는 선택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남유하 작가는 스스로를 "이상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스스로 이방인인 시절을 보내봤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특별한 아이"라고 불러줬던 엄마처럼 작가는 이제 "이상한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쓴다. 작가가 쓴 "이상한" 이야기들은 "이상한 아이"들 뿐 아니라 그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공유하는 "어른"에게도 유용하다. 그 어른들도 한때는 "이상한 아이"였을테지만 그들은 그 시절을 이미 잊었을테니.

 

저는 늘 이상한 아이, 다른 아이였고 그런 저에게 아무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

저는 동화를 쓰면서 열두 살의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목소리가 나와 비슷한 아이들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처럼 '이방인'이라는 말의 뜻도 모른 채 이방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곤소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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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눌러 새로고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3
이선주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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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비칠까. 성인 세대가 보는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 같은 땅을 딛고 같은 공기로 호흡하면서도 문득문득 서로의 세상이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에 난감해진다. 누구나 유년시절을 통과함에도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시기가 낯설어진다. 성인이 되고 나면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이 거쳐온 과정을 잊는 모양이다. 아니 잊는다기 보다는 변화한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린 감각은 어른의 감각으로 생생한 기억은 희미한 망각으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어른의 상태에 이른 사람은 어린 존재의 느낌, 감정, 기억을 되돌리기 힘들어진다. 내 곁의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책에 도움을 구한다. 십대의 모습을 담은 책들.

자음과모음 청소년 문학 시리즈 『마구 눌러 새로고침』은 십대의 공간을 주제로 한 소설집이다. "현실에서 가상까지, 십대의 일상이 깃든 공간들"을 "다섯 작가의 상상력으로 바라" 본 글들이다. SNS, 학교, 나만의 방, 게임, 주방을 주요 모티브 삼아 십대 청소년의 이야기를 풀었다.



작품 수록 작가 중 조우리 작가가 눈에 띈다. 장편소설 『오, 사랑』으로 제18회 사계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청소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새로 고침_이선주 눈에 띄는 형식이었다. '빵야'라는 이름으로 SNS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 이방울의 목소리로 이뤄진 소설이다. 처음에는 누구와 누가 어떤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방울의 말들이 쌓이면서 SNS 속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면서 성형중독에 빠진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방울은 현실의 내가 아니라 SNS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원하는대로 보정하고 편집할 수 있는 삶의 모습말이다. 보여지는 모습과 남들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즘 세태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서글프다. 아, 그게……그게 있잖아요.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의 제가 너무 싫어요. 근데 인스타그램 속의 저는 좋거든요. 그럼 저는 저를 싫어하는 건가요, 좋아하는 건가요? p.28 껍데기는 하나도 없다_조우리 몸이 자라면 몸에 맞는 껍데기를 찾아야하는 소라게를 자기 자리 찾는 과정에 있는 청소년에 비유한 이야기다. 소년 K는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인기 있는 친구 재현의 기분을 맞추려 한다. 재현은 우성을 따돌리기 위해 모함을 하고 K를 거기에 끌어들인다. 작가는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를 따돌려야 하는 심리적 고난을 묘사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서 지킨 자리는 지속가능할까. 따돌림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외줄타기를 보는 듯했다. 그 순간 K는 깨닫는다. 의자 뺏기 게임처럼 어차피 껍데기의 수는 개체의 수보다 필연적으로 적다. 나도, 재현도, 우성도 누구도 그 주인은 아니다. 사실 제대로 된 껍데기란 하나도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존재감이 없으면 뭐로? 근성, 눈치, 독기? 어서 아무 거나 뒤집어쓰란 말이야. p.59 주술사의 시간_유영민 나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폐허를 그린 소설이다. 괴롭힘으로 학교를 그만 둔 동훈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초우인(저주 인형) 만들기에 몰두한다. 자신을 괴롭힌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상대방을 저주한다. 동훈이 만든 저주 인형은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고 저주의 주문은 망을 통해 퍼져나간다. 방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시간이 길어질 수록 동훈 자신의 모습도 변해간다. 저주는 저주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주하는 사람에게 재앙을 몰고오는 법칙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상대를 저주하다보면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나 자책도 자연스레 생겨나기 마련이죠.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나도 참 바보 같았구나' 그런 식으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수위가 높아지다 보면, 어느 새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바뀌는 거예요." pp.100-101 뜬구름 사이에서 우리는_문이소

작가는 "기성세대가 비용과 책임을 피하며 갈팡질팡하는 동안 청소년 들은 사라져 가는 지구 생명체와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내가 신이 되어 문명을 구축해가는 게임이 있다면, 그 세계 속에서 하나의 종족이 다른 모든 생명을 위협하며 행성을 망치고 있다면 그 세계를 만든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주인공 청소년은 그 '하나의 종족'을 말살할 것을 선택한다. 게임이니까. 그러나 그 게임의 질문은 지구 환경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인공지능의 물음이었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인공지능은 청소년들이 내놓은 답을 현실화해나간다. 청소년들이 내놓은 것처럼 출구가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구원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게 되었다.

싱귤: 그런가요. 역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입장 바꿔 보면 사피엔스가 행성의 재앙이잖아요, 제가 헤리치 생태계 구원을 위해 사피엔스를 칠게요. p.134 식사를 합시다_문부일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예상보다 훨씬 커서 인생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용서'는 가능한 걸까. 한다승과 서노민은 초등5학년때 서로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사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되고 '용서'를 향해 한 발짝을 내딛는다. 서로를 용서할 용기는 자신들의 문제를 헤쳐나갈 용기로 발전한다. 내 인생을 바꾸게한 친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 어려운 일을 이들은 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바꾼다. 둘의 용기가 너무 소중했다.

세상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있고, 그것에 맞추느라 힘이 들 때가 많았다. 부모가 함께 살아야 자녀의 인성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했다.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빠도 나를 잘 챙기려고 더 부지런하게 살았을 것이다. p.165


다섯 가지 색깔의 이야기들은 공통의 배경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청소년이라는 이미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이는 시기여서일까. 어른이 된 나는 이제 그 시기의 혼란을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조우리 작가가 '진지한 궁서체'로 쓴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장담할 수 있다.


불행한 청소년이 불행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건 지금 불행한 청소년인 너에게, 한때 불행한 청소년이었던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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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우리가 간다! - 뉴노멀을 살아갈 청소년을 위한 열린 강좌 자음과모음 청소년인문 17
전승민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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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미래와 맞닥뜨린 느낌이다. 환경오염이 원인이 된 기후 재앙, 원인모를 전염병의 창궐, 격리된 삶, 옆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회, 멀게 느껴졌던 이 모든 일이 하루 아침에 현실이 됐다. 무딘 느낌에는 긴 시간 밖에 나가지 못하는 정도일지도 모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묘사하는 모든 모습들이 코로나19 상황에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자꾸자꾸 부풀면 '영화에서나 보던', '결코 현실에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미래를 만나게 되려나.



'뉴노멀'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세계경제의 질서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경제 분야에서 "저성장, 규제 강화, 소비 위축, 미국 시장의 영향력 감소" 현상이 나타남을 의미했다. 현재는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점에 등장하는 새로운 표준"으로 정의된다. 변화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일상에서 필요한 새로운 기준이 바로 뉴 노멀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질병의 공포로 꽁꽁 묶었다. 근 1년 사이 자유로운 외출, 장거리 여행은 꿈같은 일이 됐고 얼굴 반만 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인들과의 거리는 배 이상 멀어졌다. 쉽게 끝이 예측되지 않는 이 고립의 시간이 끝난 후 우리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전문가 다수의 예측처럼 이전의 일상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우리는 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를 말할 때 뉴노멀을 고려해야하는 이유다. 『미래가 온다?우리가 간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십대'를 위한 청소년 인문 시리즈다. '6인의 전문가와 함께하는 미래 수업'이라는 의도하에 미래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또는 다뤄져야 할 여섯 가지 주제들을 담고 있다. 주제들을 일별해보면 'AI와 미래기술', '기후환경', '에너지 전환', '생산과 소비', '전염병과 보건', '혐오와 인권' 등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통찰과 쉽게 읽히는 입말체 문장이 책의 가독성을 높이고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주제를 친근하게 만들었다. ​ '1장 AI와 미래기술'에서는 '콘택트와 언택트가 어우러지는 세상이 온다'는 소제목 아래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하는 '언택트' 생활이 유발할 변화를 살펴본다. 근미래에는 차세대 통신 기능과 인공지능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안전한 대면 문화를 위한 기술도 필요해진다. 예를 들면 다중 회의에서 감염의 위험을 줄이는 '공기순환 시스템' 같은 것. ​ '2장 기후환경'의 부제는 '위태로운 지구, 물러설 곳 없는 인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문제가 기후환경에 관한 것이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지적된지 오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한 세계 협약도 마련됐다. 그러나 여전히 지구의 기후환경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기후 변화는 생태계 변화를 야기한다. 남극 펭귄은 이상 기후로 인한 폭풍에 휩쓸려가고 북극곰은 더 이상 살 땅이 없다. 환경 보호를 위한 친환경 기술의 현재를 훑어보면서 '에너지 절약', '저탄소 식사', '친환경, 고효율 제품 사용'과 같이 우리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 '3장 에너지 전환'에는 '기후 악당, 착한 에너지를 찾아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한 '기후 악당'은 누굴 부르는 걸까. 기후변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을 말하는 거겠지 싶겠지만 아니다. '기후 악당'은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 수준은 세계 12위 정도입니다. 이는 독일의 40% 수준인데, 에너지는 독일과 비슷한 양을 쓰는 것입니다. 살림에 비해 에너지 다소비 국가이니, 온실가스 배출량도 많아서 '기후악당'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p.95 원전에서 발생하는 전기의 비용에는 시설 건설·유지비, 핵폐기물 처리비, 사고처리비 등의 공공비용이 포함돼 있지않아 싼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고 우리나라의 에너지 효율이 이토록 낮은 사실도 (부끄럽지만) 처음 알았다. 재생에너지와 친환경에너지 사용에서 나아가 에너지 효율화가 시급하다. '4장 생산과 소비'는 '끝없는 생산과 소비에 브레이크를 걸어라'라는 부제와 짝꿍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부양하는 과다 생산, 과다 소비는 환경문제와 직결돼 있다. 책은 '패스트 패션'이 전지구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준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소모품으로서의 패션은 환경오염과 더불어 노동착취 문제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새로 사기'에서 '물려 쓰기'로 전환을 위한 모색이 필요하다. ​ '5장 전염병과 보건'은 부제처럼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로 읽혔다. 이 모든 급격한 변화의 시작이 코로나19다. 백신도 치료약도 없는 전염병은 인류 전체를 감염의 공포로 몰아 넣었다. 코로나는 인간의 대처보다 빨리 진화하고 상황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번 사태는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의료불평등이 문제로 대두됐다. 'K-방역'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빠른 초기대처를 했던 우리나라는 2021년 2월 현재 4차 대유행을 예측하는 상황이다.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우리'의 문제이다 보니 '공동체의 삶'에 대한 숙고가 절실하다. ​ '6장 혐오와 인권'의 부제는 '우리에게 스며든 혐오, 공감으로 넘어서기'다. 코로나19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우리는 근 1년을 각자의 장소에 고립됐다. 고립은 몰이해를 낳고 편견과 배제를 초래한다. 코로나19는 혐오를 `양산했다. 혐오는 가짜 뉴스를 타고 확산됐고 타자에 대한 증오가 일상의 일이 됐다. 코로나는 우리 안에 숨겨졌던 편견을 전시하는 기회였다. 인종주의적 시선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류는 집단 생활을 하는 종이다. 배척하기를 일삼아서는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연대와 협력", "관계"는 절대 가치다. ​ 책은 각 주제를 다루면서 당면한 현실을 제시하기 전에 해당 주제의 역사적 맥락을 훑어준다. 이를테면 '기후환경'을 다룰 때는 기원전 5600년 전 지중해 해수면 상승으로 흑해 주변이 모두 물에 잠기는 고대의 사건부터 다룬다. 역사적 흐름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대할 수 있는 구성이다. ​ 코로나19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그 시대에서 이어질 미래를 관망해보기 좋은 책이다. 다만 책에서 제시된 기술의 이면이 있다는 걸 짧게라도 알려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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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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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과학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앎과 그 앎을 찾아내고 주장한 사람들을 다룬 책이다. 과학 지식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풀어쓰는 작업을 많이 해온 저자가 이번에는 과학을 넘어 인간 지식 전체를 소재로 삼았다. 인간은 새로운 지식을 접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더군다나 그 지식이 '상식'이라 불리는 기존의 지식에 도전하는 경우에는. 인류 초기부터 현재까지 새로움의 발견은 바로 수용되기 보다는 상당한 유예기간을 거쳐 지식의 지위를 얻었다. 사소한 다름도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생각해보면 인류 역사를 바꾼 지식들이 겪은 우여곡절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많은 은폐와 금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지식은 굳건히 스스로를 드러냈으며 그것을 주장했던 이들은 복권됐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더라도. 저자는 발견되고 억압받고 투쟁을 거쳐 수용되는 지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지식은 힘이며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바로 이런 이유와, 그 밖의 다른 이유들 때문에 인간은 역사 이래로 다른 사람이 기존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새로운 것을 학습하려고 할 때마다 이를 방해할 방법들을 끊임없이 고안해왔다. 이 책은 지식을 금지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수많은 부질없는 시도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p.8, 머리말 中


책은 7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대체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따른 지식 억압사를 보여준다. '1장 낙원에서 금지된 것'에서는 성에 대한 금기가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서술한다. '2장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에는 다윈과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 시대에 어떤 파란을 일으켰으며 그것에 반하려던 움직임을 소개한다. '3장 비밀을 다루는 법'은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자기 모순에 대해 또 비밀정보기관과 그들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는 과학이 금지된 지식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장이다. '5장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에서는 유전자 연구에서의 금기와 함께 "진실을 누가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어떤 지식이 맞고 무엇이 진정한 지식이라는 이름에 합당했는지"에 대한 역사를 보여준다. '6장 과감하게 봉인을 떼다'는 지식의 오용 사례에 대해 서술한다. 마지막 '7장 지식사회의 사생활과 비밀'은 "자유의 도구로 여겨졌던 인터넷이 실제로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기능을 하고 인간은 그 데이터에 사로잡"힌 현실을 보여준다.



지동설을 두고 일어났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사건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에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반발했는지 다윈의 진화론에 대응했던 반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읽다보면 하나의 지식이 진리로 여겨지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지식은 그것이 밝혀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설명이 연구 대상의 비밀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그 비밀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는 말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했다.


계몽을 말하는 과학과 그 전문가들은 결코 세계의 탈주술화를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그들의 제안과 사유는 그 반대인 주술화를 장려한다.

p.121


2021년 현재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금기로 저자는 거대 테크기업들의 비밀에 대해 서술한다. 원자화된 인간들의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는 그들 기업의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은 '사생활'을 잃고 '사고의 자유'조차 잃는 길을 따르고 있다. 사람들은 '중독'이라는 수렁에 빠져 테크기업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뿐 그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은 알지 못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모르게 하는 일을 금지"해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아마도 이 세대는 다음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더는 어떤 방에도 혼자 앉아 있지 않고 그 방에서 환상을 펼치지도 못한다. 대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새장에 갇혀 있다. 그 새장은 자유의지를 더는 허락하지 않으며 우리를 감시하고 조작한다. 이 현실을 모르게 하는 일이 금지되어야 한다.

p.356


과학사가가 펼치는 금지된 지식의 세계는 다채로웠다. 성서의 시대부터 페이스북의 시대까지 인류 역사 전체를 종횡무진 오가며 풀어놓는 서술을 때로는 따라가고 때로는 놓쳤다. 내게는 "인간 지성의 본질을 꿰뚫는"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지식이 너무 거대하고 통찰은 지나치게 눈부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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