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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미안한 마음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까지, 심사가 무겁다. 밤새 누군가 사라지고 시체가 되어 돌아오던 때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드는 마음이다. 그때를 지나 지금이 되었는데 그때란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졌고 죽어 돌아왔고 무너진 가슴으로 숨어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삼악산 밑 삼벌레 고개 우물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온다. 이사온 날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한자로 작성한 새댁은 큰 딸 영, 작은 딸 원, 남편 덕규와 행복한 살림을 꾸린다. 집주인 순분은 먹물깨나 든 새댁을 잘난 척 한다며 못마땅해하며 계원들에게 흉문을 퍼트린다. 큰 아들 금철의 실수로 작은 아들 은철이 사고를 당하고 새댁네에 암운이 닥치면서 순분은 영과 원 자매를 돌보기 시작한다.
소설은 말 특히 악담의 힘을 그려낸다. 마을이 계주인 순분은 동네 여자들 입소문을 좌우하고 할 얘기 안 할 얘기를 여기저기로 흘렸다. 은철의 사고는 순분네가 동네의 먹이감이 되는 계기가 된다. 안좋은 소문을 달고 있던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악덕을 덮고자 순분네 이야기에 더 열을 올렸다. 때마침 순분네 세를 살던 새댁네 남편이 체포되자 악의적인 소문은 날개를 단다. 말은 사람들 죽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칼이 된다.
(…) 입 달린 여인들은 새파란 악의와 공포로 가득 찬 말들을 쏟아놓으면서 때로는 서로의 결백을 증명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도 하면서 연일 옥신각신한다는 것이었다.
p.266
우연히 닥친 불운을 겪는 가운데 순분은 그 동안 했던 말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새댁네를 흉보고 그 집의 내밀한 사정을 퍼뜨렸던 일을 말이다.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
(…)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
"내가 그 죄를 …… 어떻게 다……!"
pp.212-213
말의 무서움을 깨닫는 건 어른 만이 아니다. 엄마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은철 또한 그 말이 가져온 결과에 입을 다문다. 은철은 아이답지 않게 자신의 말이 누구를 슬프게 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몰라도 그걸 엄마 앞에서 누설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러면 또 새댁이 못 놀러 오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은 안 하고 손가락으로만 가리켰다.
p.205
영민한 아이 원 또한 "내 저주때문에 어머니가 변했다"며 말을 버리고 인형과 닮아간다.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질문이 끊이지 않았던 아이,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아내고 언니 책을 보고 어른들의 노래를 금방 따라 부르던 아이. 아이의 마음은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든 견뎌보려하지만 정신을 놓은 엄마가 떠나버리자 혼자만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인형이 된다.
원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도 증발되었다. 원은 생기 없는 얼굴로 느리고 뻣뻣한 동작을 했는데, 그것은 동생 희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p.324
새댁과의 동맹으로 동네 소문의 테두리 밖에 섰던 순분은 새댁에 떠나고나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게 된 작은 아이를 생각해 악착같이 돈도 벌고 다시 계원을 모을 생각도 한다. "빨갱이로 사형당한 식구들이 사는 집"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간 후에 말이다. 새댁이 정신을 놓음으로써 "뭐든 다 빼앗아 가는 세상"을 등졌다면 순분은 어디 떨어질지 모르는 "철퇴"를 피해 살고 싶었다. 이렇게 생겼든 저렇게 생겼든 그놈이 그놈인 세상이니 자기 살길을 악착같이 챙기려는 마음이다. 얼마간의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만하면 할 도리를 다 했다 싶은 것이다. 우리 시대 다수의 마음이 순분과 같지 않을까. 단, 우리는 누군가를 도왔던 한 때가 없었을 뿐.
새댁이 병원 들것에 실려 나갈 때 순분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새댁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것이 어디에 도착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순분은 덕수를 만난 김에 집 문제를 아퀴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p.318
먹을 것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작가의 솜씨가 이 소설에도 들어있다. 원이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먹는 달걀 볶음밥이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서술, 그리고 거기에 담은 의미가 소설 전체를 묶는 큰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부러 눌린 달걀 누룽지와 보들하니 익은 부분이 골고루 섞여야 제대로 된 달걀 볶음밥이 된다는 문장에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의미가 꼭꼭 눌려 담겨있는 것 같았다.
순분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그만 되었다 싶고 한시름이 놓였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는 거라는 원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박가나 통장이나 남편이나 자기나,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
슬렁슬렁 재미를 보면서 살든 따박따박 도리를 지키며 살든 철퇴가 떨어지면 맞아 죽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철퇴를 맞지 않는 게 장땡이었다.
p.320
곧게 살려했던 남편이 잡혀간 후 새댁은 토우처럼 삭아들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진흙 덩어리처럼 뭉개"져 간다고 느꼈다. "성한 데 없"는 몸으로 죽은 남편도 토우처럼 뭉개지긴 마찬가지였을테다. 영이, 원이 자매가 삼벌레 고개를 떠나던 날 마을 사람 누구도 배웅하지 않는 가운데 가게방 앞에서 모든 일을 지켜 본 '괴상한 씨'가 노래를 부른다. 사람은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는 사람집에 들어가 산다, 토우는 사람처럼 사람집에서 살고 싶지만 그 집은 '캄캄한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괴상한 씨는 토우가 된 사람은 끝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329
권여선 작가의 장편은 처음이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정말 좋은 작가를 알게 돼 기뻤었다. 작가의 장편을 읽으려던 참에 『토우의 집』을 읽게 됐다. 진득하게 의미를 실어내는 작가의 문장들이 역시 좋았다. 단편, 장편을 읽어봤으니 이제 에세이를 읽을 차례. 『오늘 뭐 먹지?』가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