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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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소설의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어떤 소설집에 들어있는 것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지인 말대로 나는 현재만을 사는 사람인 것 같다. 읽은 책의 기억이 정말 오래 가질 않는다.) 인공 수정으로 완벽한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해커가 정작 자기 아이의 장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였다. 저자가 누구였더라... 외국 작가의 단편이었던 것같은데...

 

Episode 2

'김초엽X김원영 공저'. 저자 이름을 보고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소설가가 변호사와 공저로 책을 쓴다는 것이 언뜻 납득되지 않아 '김초엽'이라는 이름의 다른 작가가 있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닮았다. 혹시 싶어 작자 소개를 찾아 봤더니 소설가 김초엽이 맞았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에서 받은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에세이라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작가의 문장은 어떤 주제를 다뤄도 읽기에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주제가 '사이보그'였다.

 


Episode 1 그리고...

한 밤중에 책을 뒤졌다. 대체 그 이야기가 어느 책에 들어있었던가. 놀랍게도 국내 작가 김초엽의 책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러고 보니 김초엽 작가의 소설에는 딱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 "뭔가 다름"의 느낌이 있었다. 해외 작가의 SF를 읽을 때면 간혹 느껴지는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랄까. 그것의 느낌은 기분 나쁨이 아니라 경이감에 가까웠다. 갑자기 사각지대가 눈에 들어온 듯한 낯선 새로움이었다.

 

Episode 2 그리고...

김초엽 작자 소개에는 내가 못봤던 '사각지대'가 하나 더 있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아!'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세상을 지각하는 방법이 달랐던 사람이구나, 그래서 작가가 그린 세상이 우리가 느끼는 세상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생각이 차별을 담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책을 어서 읽어야 했다. 좀더 알아봐야 했다.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변호사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장애와 세상을 바라본 이야기다. '사이보그(cyborg)'는 보통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를 일컫는 용어"로 쓰이는 동시에 "현대의 첨단 기술문명이 낳은 새로운 존재의 상징"을 지칭한다. 책에서는 불편한 부분을 보완하는 기계 장치와 동반하는 사람들을 '사이보그'로 정의한다. 김원영 변호사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김초엽 작가는 보청기로 청력을 보조한다. 두 사람은 '장애'라는 차원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한편 성별, 나이, 직업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김원영 변호사는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장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보다는 장애학이 사회적으로 회자된 이후의 시기를 살아온 두 사람이 이 책에서 주목한 문제의 지점은 아래와 같다.

 

장애가 있다고 규정된 우리의 몸을 쉽게 부정하고 치료하고 구원하겠다는 주장을, 그것이 설사 과학적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더라도, 우리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과학 지식을 신뢰하고 기술의 효용에 기대를 걸지만, 첨단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인간의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지는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지금 이곳의 삶을 소외시키거나 나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우려한다.

pp.10-11

 

책은 기계 기술과 함께 공존해야 하는 장애인의 정체성 문제를 시작으로 장애와 그것을 보완하는 기계 사이의 보완과 불화의 모습들을 거쳐 완전한 사이보그가 실현된 미래에도 필요한 '함께'의 모습까지를 10개의 장에 걸쳐 다룬다. 한 가지 주제를 두 저자가 번갈아가며 서술한다. 애초 김원영 변호사의 의도대로 두 사람의 시각은 닮음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차이는 두 사람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성별이나 나이, 직업에서 기인한다기 보다는 장애 정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장애를 가진 경우와 굳이 말하지 않으면 쉬이 알아채기 힘든 경우.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는 내내 장애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지나치게 비장애인적인 것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장애'라는 조건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에 장애인의 삶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웠었다. 이번 책 『사이보그가 되다』 는 그런 상상력의 빈곳을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장애인이 기계와 결합해 사이보그가 되는 경험의 일부를 나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시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안경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미약하나마 사이보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없을 경우 몹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이런 경험을 몇 십배 또는 몇 백배 증폭시키면 장애의 경험에 살짝 닿지 않을까. 빈곤한 상상력으로 장애 경험에 공감해보려는 시도는 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읽을 수 있게 했다.

 

기술과 장애의 관계에 대한 장을 마무리하는 김초엽 작가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현실은 과학기술과 그렇게 마주치지 않는다. 첨단의 기술과 일상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개발돼도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되지 못할 수도 있고 그 기술을 인체에 적용하는데 장애를 견디는 만큼의 고통을 감수해야할 수도 있다. 심지어 최고의 기술이 어떤 개인에게는 무용지물일 수도 있다. 김초엽 작가는 "기적의 과학기술"보다는 실제 장애인의 "구체적인 경험"에 귀를 열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에 거는 기대는 너무나 쉽게 현실과 어긋나고 또 미끄러진다. 어떤 기술도 완전무결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기술 낙관론자들이 약속하는 기술 유토피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이곳에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완전한 기술과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지금 이 세계를 바꾸어나가야 한다. 언젠가 나타날 기적의 과학기술에 미리 찬사를 보내는 대신, 이미 현실에서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기는 사이보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pp.87-88

 

책 후반에서는 돌봄의 문제를 다룬다. 홀로 일상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의 경우 누군가의 돌봄이 필수적이다. 돌봄의 역할이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 가족 특히 여성에게 의무지워진다. 이런 책임과 의무의 역할이 무겁고 힘들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생각은 편견이었다. 김원영 변호사는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이 언제나 비극은 아니며, 누군가를 돌보는 삶도 그저 동정의 대상이나 숭고한 예찬의 조건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결여하고 누군가를 돕기 위한 기술에 열광한다면, 자칫 서로에 대한 착취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

p.291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기기 위한 기술"에 대한 두 저자의 대화는 날카롭지만 따뜻했다. 장애의 다양한 사례를 알 수 있었고 미래의 찬란한 기술보다 일상의 삶을 돕는 기술이 얼마나 더 절실한 것인지 살필 수 있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의 형태가 크거나 작고 잘 보이거나 숨겨져 있을 뿐이다. 일부의 불완전함만이 보편적인 일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불완전함의 크기가 클 수록 일상에의 절실함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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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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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소년, 우주를 삼키다. 케이틀린 스파이스.

이 말들이 답이다.

의문들에 대한 답.

p.32


트렌트 돌턴의 소설 『소년, 우주를 삼키다』는 세 가지 키워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너무 일찍 "어른의 마음"을 갖게 된 아이의 '기적에 가까운 성장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와 다르게 이 소설은 내게 스릴러의 외피를 갖춘 심리소설이었다.


주인공 엘리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엄마와 마약 중계상인 라일 아저씨 집에서 형 오거스트와 함께 산다. 엄마와 라일 아저씨의 의심스런 외출 시간동안 옆집의 슬림 할아버지가 형제를 돌본다. 엘리의 형 오거스트는 어린 시절 어느 날 말을 잊었지만 동생에겐 세상의 전부다. 슬림 할아버지와 형의 보호가 있지만 엘리의 학교 생활은 녹록치 않다. 게다가 중계상의 위치에서 단독거래를 하려던 라일 아저씨가 마약 거물에게 잡혀가고 엄마가 구속되는 일이 일어난다. 아이들은 낯선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하는 고달픈 상황에 처한다. 오랫동안 못봤던 아빠는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며 책만 보고 술로 밤을 지새는 사람이다. 엘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감옥에 수감된 엄마를 보러 가고 라일 아저씨 실종의 미스터리도 풀려고 한다. 범죄 보도 기자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는 길도 차근차근 밟아간다.


『소년, 우주를 삼키다』를 읽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다시 읽었다. 제제의 성장에서 한 발 더 나간 성장기라는 책의 홍보 문구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제의 성장에도 이런 혹독함이 있었던가 싶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여섯 살이고픈) 다섯 살 아이의 시야로 본 세상이라면 『소년, 우주를 삼키다』는 확실히 십대의 세상이다. 제제를 언급하는 홍보문구에 아이를 대상으로 하거나 아이가 그려지는 소설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처절한 교도소 생활과 잔혹한 마약상들이 등장하고 그 속에 고통인줄도 휩쓸리는 아이들이 있다.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 눈에 띄었다. 호주는 국가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다. 청정 자연으로 기억했던 나라의 도시 변두리 슬럼가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기분이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실제 경험의 경계인지 궁금하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사건도 예사로운 건 없었다. 그중 무엇 하나라도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을 게다.


소설 속에 현자 또는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슬림 할아버지는 '택시 운전사 살인사건'으로 복역하며 수 차례 탈옥해 유명세를 떨친 실제 인물 '보고 로드의 후디니'다. 호주에선 탈옥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로 관련 책도 나와 있었다. 이런 인물의 출소 이후의 삶을 소설에 대입한 시도는 호주 독자들에게는 더 흥미롭게 느껴졌을 것 같다. 작가가 슬림 할아버지를 그린 시각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


"난 좋은 사람이야." 슬림 할아버지가 말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다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

p.223


엘리는 범죄 사건 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어쩌다 범죄자가 됐는지"가 궁금해서다. 엘리는 범죄자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그 순간"을 찾고 싶어 한다. 슬림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되는 일이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누구나 "선택의 여지"가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고. 슬림 할아버지는 엘리의 모든 선택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모든 선택에 도움을 준다. 엘리가 할아버지 자신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책의 서두에서 던져진 키워드는 책장이 줄어들면서 하나씩 하나씩 풀려간다. "너의 마지막"과 "죽은 솔새"가 어떤 관계인지, "케이틀린 스파이스"가 누구인지, "소년"이 "우주를 삼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러나 이 중요한 말을 엘리의 형 오거스트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다시 돌아왔기"때문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이 소설에 판타지의 요소가 가미되는 대목이다. 엘리는 자기에게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내가 작가에게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냥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안 돼요? 띄엄띄엄 듣는 건 이제 넌더리가 나요. 어른들은 맨날 단편적인 얘기만 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꼭꼭 숨겨두죠. 더 크면 말해줄 거라더이 이제 나도 컸는데 엄마는 오히려 더 애매한 얘기만 하잖아요. 앞뒤가 안 맞아요. (…)"

pp.490-491


모든 걸 명확하게 제시하고 시작하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 또 그런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어딘지 모를 캄캄한 숲 속을 질주하는 차안에서 형에게 매달려 있던 다섯 살 엘리는 자신의 주변에 얽힌 모든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열 일곱 살이 됐다. 희망을 걸어볼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년 엘리는 꿈을 꾸었고 거짓말 같이 그를 돕는 손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기 앞의 우주를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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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불법의 경야
김종건 지음 / 어문학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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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말잇기를 하듯 알게 된 책이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읽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알게 됐다. 모더니즘 3대 소설 중 하나라고 하니 호기심이 들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댈러웨이 부인』을 (이해는 둘째치고) 읽을 수는 있었으니 이 작가의 책도 읽을 수는 있으니라 기대했다. 그의 작품 목록에서 발견한 『피네간의 경야』. 그런데 이 작품이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유명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 충분히 흥미롭고 숙고할 만한 것인데 불구하고 왜 읽을 수 없다는 걸까. 실물부터 확인했다. 책은 1천쪽 가까운 부피였고 첫 장부터 무슨 소린지 전혀 알 수 없는 한글로 된 외계어 문장들이 가득했다. 혹시 싶어 함께 찾아본 해설판은 더 어마어마한 1천 4백여쪽이었다. 대략 훑어볼 요량도 접어야했다. 작품에 대한 호기심은 간직한채로.

『피네간의 경야』는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 켄 리우의 소설 「모든 맛을 한 그릇에-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에서 아버지가 잠 안오는 딸에게 불러주는 노래로 등장했다. 독서가 조 퀴넌은 파란만장한 일생 독서기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에서 인생 마지막까지 읽을 거리로 남겨 둘 책으로 소개됐다. 왜 이책에 그리들 집착하는 걸까.


『제임스 조이스 불법의 경야』는 "『피네간의 경야』 입문자에게 권하는 책"으로 소개된다. 본문보다 긴 해설서를 읽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책으로 출판된 것 같았다. 원본도 해설서도 읽을 깜냥이 못된다면 입문자용 책이라도 읽어봐야겠다 싶어졌다. 그런데 부제가 불길했다. "불법이라 할Illicitable, 몽계획夢計劃dream-scheme인 <경야>의 언어유희 해설"이다. 음, 이게 어느 나라 말이란 건가. 책의 내용을 함축해 한 줄로 소개하는 부제가 이렇다면 그 다음은.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경야>: 각 장의 개요"는 말 그대로 『피네간의 경야』 를 각 장 별로 요약하고 있다. 장 별 내용에 대한 이해는 별개로 하겠다. 2장은 "글라신의 센서스: 신화, 전설, 우화의 소재를 바탕으로 한, <경야> 이야기의 대강"이다. 아일랜드의 『피네간의 경야』 전문 학가 애덜라인 글라신(Adaline Glasheen)의 해설이다. 저자 김종건 교수는 글라신의 개요가 "조이스의 멋진 무의미와 무한한 다양성을 생략한다"면서도 "백과사전적"이기 때문에 "초심자들에게 주는 이득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 이 연구서가 초심자들에게 주는 이득이 있다. 글라신의 제3 센서스는 백과사전적이다. 세세하게 텍스트를 이해하도록 독자들을 돕기에 여기 싣는다. 그녀의 연구서는 조이스의 말들을 쪼개고 뒤섞어 잡탕을 만들어 수천 수만 풍부한 맛과 향을 내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힘들지라도) 말타주(몽타주)이다. p.53 "3장 불법의 경야"에서는 『피네간의 경야』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소개한다. "4장 <경야>와 현대 신양자물리학"에서는 소설가의 현대 신양자물리학에 대한 지식을 서술한다. 저자는 『피네간의 경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양자물리학, 양자역학, 빛의 입자설 등을 서술한다. 물리학은 내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는 지점이므로 물질 구성 입자를 일컫는 '쿼크(quark)'라는 단어의 유래를 안 것으로 충분하다. <경야>의 I부 4장의 초두에는 바다 새들이 트리스탄과 이솔테가 연대하는 장면을 조롱하는 "퀴크!"라는 가사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새 물리학의 구성요소인 입자를 상징한다. 이는 1939년 원본에서 "Three quarks for Muster Marks"의 시행으로 노래된 가사의 일부로, 1960년대 미국의 물리학자 겔만드(Murry Gellmannd)에 의해 최초로 발명된 신물리학(New Physics)의 입자 용어이다. p.189 "5장 미국의 조이스 남동부 대장정"은 저자 김종건 교수가 석·박사학위를 받은 털사대학교에 가게되는 여정을 담은 여행기다. 저자는 털사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은 후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를 떠나 오클라호마로 향한다. 미국 남동부를 횡단하는 자신의 여행을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대장정에 견주어 기술한다. 또한 연구에 도움을 받았던 연구자들에 대한 소개도 세세하다. 『제임스 조이스 불법의 경야』를 『피네간의 경야』 입문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하다. 첫 두 장은 책에 대한 해설이니 책을 처음 접하는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3장의 비평 부분도 도움이 된다 치자. 그러나 4장 양자물리학 부분과 5장 기행문은 그렇지 않다. 전자는 초심자를 질리게 할 것이고 후자는 사족이다. 5장은 회고록에 적당한 내용으로 보인다. 책은 무척 어려웠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문장 자체가 난해했다. 난해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저자의 문장은 한글로 된 외계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술호응은 가볍게 무시되고 단어의 어순도 자유로웠다. 대체 문장을 이렇게 쓴 이유가 뭘까. 이런 문장을 그대로 책으로 만든 걸 보면 편집자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피네간의 경야』의 경우는 워낙 저자 조이스의 언어유희가 복잡하여 번역문 역시 난해하리라 예상한다. 이렇듯 <경야>는 영어가 30%, 조이스가 만들어낸 신조어, 합성와 함축어 그리고 65개국의 외래어들이 중첩되고 혼성된 "언어유희"(linguistic punning)로서, 주된 기법은 "동음어의"(同音語義)(homonym)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국어 번역을 위해 우리의 한글을 한자와 혼용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이었다. p.8 그러나 이 책 『제임스 조이스 불법의 경야』는 입문자를 대상으로 풀어쓴 책이 아닌가. 그런데 마치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조이스가 쓴 문장을 대하는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호기심 많았던 초심자들은 이쯤에서 본서 읽기를 멈추고 싶어질 것 같다. 저자는 한국 제임스 조이스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다. 조이스에 대한 방대한 저술활동을 인정받아 번역상도 수상했다. 평생의 노력은 인정해드리고 싶지만 책으로 확인한 바 그 노력의 결실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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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를 찾아서 - 제6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 사계절 아동문고 98
이지은 외 지음, 유경화 그림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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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 작품집이다. 수상작 「고조를 찾아서」 와 우수 응모작 「아아마」, 「구름 사이로 비치는」, 「우주의 우편배달부 지모도」, 「시험은 어려워」가 담겨 있다. 타임슬립, 미모 증강 마스크, 외계 생물, 우주 우편배달부, 타임루프와 가상현실 등의 SF 기술이 소재로 등장한다. 어린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우주 끝까지 날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상작 「고조를 찾아서」 를 찾아서와 우수 응모작 「아아마」를 이지은 작가의 것이다. '시간 통로'를 이용해 과거를 방문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학교 수업에 적용했다. 고조할아버지가 친일파였다는 걸 알게된 윤서가 일제 시대로 가는 수학여행에서 과거를 바꿔보려 시도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시간 통로'를 이탈할 경우 급작스런 노화라는 무서운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것. 윤서는 어떻게 부작용의 위험을 피하면서 고조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시간 통로'를 통해 역사적 현장을 직접 방문하면서 학습한다는 설정은 한편으론 올바른 교육의 장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진실을 대했을때 당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런 기술이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되기 전에 미리 역사를 올바로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겠지만 진실을 두려워하는 누군가에겐 등골 서늘한 설정이다 싶었다.


같은 작가의 소설 제목 「아아마」는 '아름다운 아이돌 마스크'의 줄임말이다. 외모지상주의가 더할 바없는 가운데 '슈렉 부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따돌림 받는 여린이가 '아아마'를 구매한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미모는 여린이를 학교 내 스타로 올려세운다. 그러나 '아아마' 대여 종료일은 다가오고 여린이는 추가 구매할 돈이 없다. 여린이는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여린이가 겪는 상승은 그야말로 황홀하다. 왕따로 지내던 과거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백번 공감이 갔기 때문에 결말이 무척 궁금했다. 마스크 사용기간이 극적으로 연장되거나 아이들이 여린이의 본 모습을 인정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 속에서 지내는 짧은 기간동안 여린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미모와 관계없는 기술적 재능. 가짜 미모는 사라졌지만 여린이만의 재능이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걷다가 조금씩, 고개를 들" 것이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의 이필원 작가는 작년 「고등어」에 이어 올해도 우수 응모작으로 선정되었다. 사라진 외계 행성의 희귀 동물 붉은날개사슴이 연구소를 탈출해 윤재네 마구간으로 숨어든다. 윤재는 붉은날개사슴에게 꾸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보게 된다. 승마 사고로 애마를 잃고 말타기를 무서워 하게 됐지만 왠지 꾸꾸에겐 마음이 갔던 거다. 연구소의 추적이 시작되고 새끼까지 낳은 꾸꾸는 잡혀갈 위기에 처한다. 유니콘을 생각나게 하는 붉은날개사슴과 윤재의 우정을 그린 아름다운 동화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물과 소녀의 교감이 잘 드러나고 아이의 행동을 말없이 지지해주는 윤재 부모님에 대한 묘사도 따뜻했다. 외계 생명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의 생명들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단편이었다.


「우주의 우편배달부 지모도」는 개인적으로 이번 수상집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이다. 봉사활동으로 '명왕성 대기권 청소'를 지원한 토성 소년은 우주공간에서 분실된 일기장과 우편 가방을 줍게 된다. 물건들은 지모도라는 이름의 은퇴를 앞둔 우편배달부의 것이었다. 지모도는 가난한 소녀의 크리스마스 소원을 들어주는 착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소년은 지모도의 물건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30년전에 분실된 것들이었다. 지모도에 대한 소년의 마음이 기특했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감쌀 줄 아는 사람을 알아보는 마음이었다. 지모도가 모르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처럼 소년은 지모도의 일기장에서 읽은 바램을 이뤄주려 한다. 소년의 마음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나를 대신해 죽을 영혼을 바치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은정 작가의 「시험은 어려워」는 질문은 철학적이다. 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만약 선택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주노는 웹툰을 보던 중 '열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쓰인 사이트를 장난 삼아 접속한다. 그리고 지옥문이 열린다. 학원 가는 길에 끝없는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경험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고통에 시달리던 끝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시기하던 친구를 죽음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친구가 죽는 순간, 가상 현실이 종료되고 주노는 시뮬레이션 도덕 시험에서 낙제하고 만다. 학교 시험을 가상현실 체험으로 치르던 중이었다. 상상만해도 소름끼치는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작가가 초반에 던진 철학적 질문보다 시험 종료 후의 상황이 더 아찔하다. 죽음의 대타로 지목했던 친구가 "왜 하필 나냐"며 웃고 있었던 거다. 위급한 상황에서 나를 죽음에 몰아넣겠다고 마음 먹은 친구에게 농담을 건넬 정도의 멘탈이 미래의 것이라면 나는 미래 시민이 되기는 힘들 모양이다.


미래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이런 미래가 언제 올까 싶다가도 불과 몇 십년전에 상상했던 미래 보다 지금의 모습이 몇 발작은 더 앞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조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낙관적인 미래를 전제하고 있다.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를 얼마쯤 경험하는 세대가 될 듯 싶다. 그들의 실제 경험이 이야기들처럼 긍정적인 것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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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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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까지, 심사가 무겁다. 밤새 누군가 사라지고 시체가 되어 돌아오던 때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드는 마음이다. 그때를 지나 지금이 되었는데 그때란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졌고 죽어 돌아왔고 무너진 가슴으로 숨어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삼악산 밑 삼벌레 고개 우물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온다. 이사온 날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한자로 작성한 새댁은 큰 딸 영, 작은 딸 원, 남편 덕규와 행복한 살림을 꾸린다. 집주인 순분은 먹물깨나 든 새댁을 잘난 척 한다며 못마땅해하며 계원들에게 흉문을 퍼트린다. 큰 아들 금철의 실수로 작은 아들 은철이 사고를 당하고 새댁네에 암운이 닥치면서 순분은 영과 원 자매를 돌보기 시작한다.


소설은 말 특히 악담의 힘을 그려낸다. 마을이 계주인 순분은 동네 여자들 입소문을 좌우하고 할 얘기 안 할 얘기를 여기저기로 흘렸다. 은철의 사고는 순분네가 동네의 먹이감이 되는 계기가 된다. 안좋은 소문을 달고 있던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악덕을 덮고자 순분네 이야기에 더 열을 올렸다. 때마침 순분네 세를 살던 새댁네 남편이 체포되자 악의적인 소문은 날개를 단다. 말은 사람들 죽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칼이 된다.


(…) 입 달린 여인들은 새파란 악의와 공포로 가득 찬 말들을 쏟아놓으면서 때로는 서로의 결백을 증명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도 하면서 연일 옥신각신한다는 것이었다.

p.266


우연히 닥친 불운을 겪는 가운데 순분은 그 동안 했던 말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새댁네를 흉보고 그 집의 내밀한 사정을 퍼뜨렸던 일을 말이다.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으려고……."

(…)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순분은 잊고 있었던 시렁 위의 유리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

"내가 그 죄를 …… 어떻게 다……!"

pp.212-213


말의 무서움을 깨닫는 건 어른 만이 아니다. 엄마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은철 또한 그 말이 가져온 결과에 입을 다문다. 은철은 아이답지 않게 자신의 말이 누구를 슬프게 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몰라도 그걸 엄마 앞에서 누설해선 안 되기 때문에, 그러면 또 새댁이 못 놀러 오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은 안 하고 손가락으로만 가리켰다.

p.205


영민한 아이 원 또한 "내 저주때문에 어머니가 변했다"며 말을 버리고 인형과 닮아간다.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질문이 끊이지 않았던 아이,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아내고 언니 책을 보고 어른들의 노래를 금방 따라 부르던 아이. 아이의 마음은 자신의 가족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든 견뎌보려하지만 정신을 놓은 엄마가 떠나버리자 혼자만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인형이 된다.


원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도 증발되었다. 원은 생기 없는 얼굴로 느리고 뻣뻣한 동작을 했는데, 그것은 동생 희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p.324


새댁과의 동맹으로 동네 소문의 테두리 밖에 섰던 순분은 새댁에 떠나고나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게 된 작은 아이를 생각해 악착같이 돈도 벌고 다시 계원을 모을 생각도 한다. "빨갱이로 사형당한 식구들이 사는 집"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간 후에 말이다. 새댁이 정신을 놓음으로써 "뭐든 다 빼앗아 가는 세상"을 등졌다면 순분은 어디 떨어질지 모르는 "철퇴"를 피해 살고 싶었다. 이렇게 생겼든 저렇게 생겼든 그놈이 그놈인 세상이니 자기 살길을 악착같이 챙기려는 마음이다. 얼마간의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만하면 할 도리를 다 했다 싶은 것이다. 우리 시대 다수의 마음이 순분과 같지 않을까. 단, 우리는 누군가를 도왔던 한 때가 없었을 뿐.


새댁이 병원 들것에 실려 나갈 때 순분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새댁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것이 어디에 도착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순분은 덕수를 만난 김에 집 문제를 아퀴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p.318


먹을 것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작가의 솜씨가 이 소설에도 들어있다. 원이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먹는 달걀 볶음밥이다. 특별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서술, 그리고 거기에 담은 의미가 소설 전체를 묶는 큰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 부러 눌린 달걀 누룽지와 보들하니 익은 부분이 골고루 섞여야 제대로 된 달걀 볶음밥이 된다는 문장에 작가는 전하고 싶었던 의미가 꼭꼭 눌려 담겨있는 것 같았다.


순분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그만 되었다 싶고 한시름이 놓였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는 거라는 원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박가나 통장이나 남편이나 자기나,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

(…)

슬렁슬렁 재미를 보면서 살든 따박따박 도리를 지키며 살든 철퇴가 떨어지면 맞아 죽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철퇴를 맞지 않는 게 장땡이었다.

p.320


곧게 살려했던 남편이 잡혀간 후 새댁은 토우처럼 삭아들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진흙 덩어리처럼 뭉개"져 간다고 느꼈다. "성한 데 없"는 몸으로 죽은 남편도 토우처럼 뭉개지긴 마찬가지였을테다. 영이, 원이 자매가 삼벌레 고개를 떠나던 날 마을 사람 누구도 배웅하지 않는 가운데 가게방 앞에서 모든 일을 지켜 본 '괴상한 씨'가 노래를 부른다. 사람은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는 사람집에 들어가 산다, 토우는 사람처럼 사람집에서 살고 싶지만 그 집은 '캄캄한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고. 괴상한 씨는 토우가 된 사람은 끝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p.329


권여선 작가의 장편은 처음이다.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정말 좋은 작가를 알게 돼 기뻤었다. 작가의 장편을 읽으려던 참에 『토우의 집』을 읽게 됐다. 진득하게 의미를 실어내는 작가의 문장들이 역시 좋았다. 단편, 장편을 읽어봤으니 이제 에세이를 읽을 차례. 『오늘 뭐 먹지?』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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