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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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어가는 소설가의 눈이 되어 준 소년은 후에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소설가가 한 세계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라면. 책만 읽지는 않았을게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테고 책 너머에 대한 대화도 나눴을게다. 책을 좋아하는 소년에게 그 시간은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열여섯 소년 알베르토 망겔은 라틴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우연히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다.

 

소년 망겔은 자라서 글쓰는 사람이 됐다. "문학, 영화, 예술을 아우르는 비평들"과 소설, 논픽션까지, 경계없는 글쓰기에 매진했다. 개인적으론 『독서의 역사』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익숙한 저자다. 다방면의 박학다식한 지식을 종횡무진 엮어내는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언제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또 쓰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런이 이번에 그의 또 한 가지 재능을 알게 됐다. 그림이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끝내주는 괴물들』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있다. "알베르토 망겔 쓰고 그리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는 말이다. 저자가 펼쳐놓는 괴물이야기도 관심이 갔지만 직접 그렸다는그림이 더 궁금했다. 책에는 한 두개의 삽화가 아니라 각 챕터의 주인공들이 저자 망겔의 머리 속에 든 이미지대로 형상화돼 있다. 각 캐릭터들은 귀엽기도 하고 유머러스한 와중에 자신의 성격을 잘 드러낸 모습니다.

 

'괴물들'이라는 호칭에 갸웃하게 되기도 한다. 보바리씨와 빨간 모자, 앨리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괴물로 칭하자니 처음엔 어색하다. 하지만 글을 읽다보니 저자가 말하는 그들의 '괴물다움'에 동의하게 된다. 저자의 괴물들은 다름 아닌 "문학 친구들"이다. 각 챕터에는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또는 인간 비슷한 존재들) 중 일반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대상들이 주인공이 되거나 잘 알려진 주인공들의 남다른 면모가 소개된다. 망겔은 괴물의 라틴어 어원(monere)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천재, 괴짜, 특이한 것, 예기치 못한 것, 거의 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를 뜻한다"고 했다. 책에 소개된 존재들은저자의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이런 이야기 속 괴물들의 주요한 매력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들의 다중적이고 다변적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마다 고유의 내력을 가진 허구의 인물들은 자기들이 등장하는 책이 아무리 길든 짧든 간에 그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p.16

 

책에는 서른일곱의 '괴물들'이 등장한다. 첫 장을 연 주인공은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에 등장하는 샤를 보봐리씨다. 저자는 "야망도 없고 의외의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매력없는 이 인물을 '운명'을 받아들인 "용감한 자"라고 평한다. "아무리 뻔한 클리셰라 해도" "인생의 궁극적인 책임은 운명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용감한 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불변하는 문학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저 불쌍한 남편정도로 여겨지는 샤를 보봐리에 대한 남다른 해설이다.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는 일은 어떻게 보면 서른일곱 편의 서평을 읽는 것과 같다. 인물을 위주로 본 서평이랄까.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인지 추측하기 어려운 장도 있다. 여섯 번째 인물인 거트루드같은 경우는 왕관을 쓰고 새침한 표정을 한 채인 그림을 봐도 무슨 책의 등장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햄릿의 어머니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선 대사 몇마디 없는 왕비에 대해 저자는 솔직히 그녀의 존재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 안에 넘쳐났을 욕망들을 상상하면서 햄릿의 성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유령"이 거트루드라고 말한다.

 

『돈키호테』를 다루는 장은 등장인물이 아닌 다른 대상을 다룬다. 『돈키호테』의 원저자라고 세르반테스가 내세운 시데 아메테다. 그가 진짜 『돈키호테』의 작가인지 혹은 세르반테스가 작품에 심어놓은 문학적 장치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자는 그의 '배제'에 방점을 찍었다. "소설이란 오히려 애매모호함, 날것이거나 설익은 견해 그리고 암시, 직관, 감정을 토대로 꽃피는 법"이라면서 말이다. 세르반테스가 내세운 원자자의 실재가 모호하다해도, 후대의 독자들이 세데 아메테라는 작가의 존재를 무시하려했다해도 그의 존재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돈키호테』의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배제된 문화는 결코 쉽사리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 역사 속에서 부재는 현존만큼이나 견고하다는 것, 그리고 때로 문학이란 세상 그 어떤 지혜로운 문학가보다도 더 지혜롭다는 사실을 시데 아메테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p.186

 

『구운몽』의 주인공인 파계승 성진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저자의 독서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해봤다. 다종다양한 책에서 읽어낸 어디로 튈지 모를 사유를 통해 길어낸 문장들은 책 그 너머의 세계를 건너다 보게 했다.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생각의 한계없음에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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