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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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온 몸으로 겪은 일상의 부조리함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왜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할까, 건강 전도사들이 말하는 비법들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무한 긍정은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시켜줄까, 저자가 답을 얻고자 했던 질문들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솟아난 의문들에 대한 답 역시 구체적이길 원했던 저자는 부조리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최저 임금으로 생활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고 유방암 투병 와중에 긍정 산업의 실체를 파헤쳤다. 무병장수와 안티에이징의 실현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해당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 『건강의 배신』 등 일련의 배신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는 저자가 언론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1980년대부터 2018년까지 각종 언론에 발표했던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들이다. 각 장에 주제별로 묶인 글들을 읽다보면 에런라이크의 생각이 흘러온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저자는 에세이를 쓰면서 문제 의식을 가다듬은 다음 현장을 체험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책을 써냈다. '1장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포함된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를 쓰기 위해 시작한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경험은 책 『노동의 배신』이 되었다. '높은 담이 정말로 당신을 보호해 줄까'를 포함한 빈곤 문제를 다룬 에세이는 『오! 당신들의 나라』의 밑거름이 됐고, '2장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중에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은 『긍정의 배신』으로 진화했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독특한 건 그 현장성 때문이다.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세포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력 때문일까. 저자는 사변적 글쓰기보다는 경험적 글쓰기 방법을 택했다. 증명을 위한 실험에 자신을 기꺼이 투입했다. 책의 첫 장에 저자의 그러한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세계로 뛰어든 저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한다. "집, 커리어, 반려자, 평판, 현금 인출 카드"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시작한 생활은 몰려든 손님의 폭주에 멘붕에 빠진 상태로 끝났다. 한달 만에 재정은 적자였고 체중이 빠졌고 피로에 찌들었다. "투잡을 뛰는 데 실패했고, 일자리 하나로는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삶이 점점 더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나에게 보내진 이메일 과 전화 메시지들은 나랑 전혀 상관없는 머나먼 곳에 살면서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 괜한 걱정을 하는 낯선 사람들이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p.58


심리적 상황은 더 나빴다. 저소득층 생활 한 달만에 용감한 에런라이크가 소심한 겁쟁이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매니저가 주방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닫은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아무리 보잘것없는 노동도 도덕적으로 희열을 주고 심리적으로 사기를 높인다"는 복지 개혁의 가정이 허구라는 것을 밝혔다.


원래의 나는 대체로 용감한 편이지만, 매우 용감한 사람들마저도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 갇히면 용기를 잃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어쩌면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 포로수용소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화기애애한 환경에서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도 모른다.

p.67


에런라이크의 글은 유머러스함이 매력적이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고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매번 고통당하고 속아넘어가는 대상이 나와 다르지 않아서다. 차라리 몰랐으면 싶은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저자의 문장은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을 덜어준다. 지방 섭취가 모든 생활 습관병의 근원인 것처럼 알려져서 저지방 식품이 선호되는 일에 대해 저자는 자신과 친구를 비교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지방 제품을 섭취해온 자신과 어려서부터 지방 제한 식단을 유지해온 친구의 현재 건강 상태는 대조적이다. 큰 키에 마른 그리고 작은 키에 비만 체형, 저자 그리고 친구의 상황이다. '저지방에 대한 신봉'은 또다시 선함과 연결되고 부유층의 구별짓기로 결론지어진다. 에런라이크는 이러한 상황을 '욕구불만'과 '(음식을 대신하는) 돈'으로 설명한다.


저지방 저단백질 식단의 장기적인 부작용이 무엇일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무시할 수 없이 계속 뭔가를 더 원하는 배고픔이다. 저지방 식단을 유지하는 수천 명에 달하는 고소득자에게 돈은 음식을 통해 섭취하지 못하는 지방의 대리물이었을 것이다.

p.180


합리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학대 행위를 예로 들어 자신이 "여성들에 대해 얼마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상이 남성에 비해 천부적으로 더 온화하고 덜 공격적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음에도 여성의 가학성에 충격받았기 때문이다. 저자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이론을 회의(懷疑)한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우리가 확실히 배운 것은 자궁이 양심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성평등이 싸울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평등은 여전히 싸워서 쟁취할 가치가 있다. 만약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그것은 남성이 해낼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성도 해내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나쁜 일들도 말이다. 그러나 성평등 하나만으로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p.268


『지지 않기 위해 쓴다』은 치열한 글쓰기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책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도덕적 분노에 불을 지피는 문제"에 관한 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그 책들에 어떤 주장들을 담았는지를 요약 정리해서 본 듯하다. "심화되는 사회 문제는 묻어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문장이 날카롭다. "정직한 저널리즘"의 희귀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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