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 미셀 푸코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지식은 역사적으로 늘 권력을 수반해왔다. 고대 사회의 제사장은 자신만이 신에게로 이르는 통로를 독점함으로써 그 사회 속에서 배타적인 권력을 누려왔다. 중세의 수도원은 일반인들에겐 다가갈수 없는 지식들을, 언어를 통해서, 혹은 종교적 금지를 통해 차단하고 독점함으로써 그 지식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권력에 참여해왔다. 특정한 지식이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힘으로 전화해 실질적이자 물질적 권력으로 전화한 경우를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프랑스 혁명의 사상가들에게서 나아가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에서 경험한다. 지식은 그에대한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되고, 그를통해 실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지식이 권력과 물질적 힘으로 전환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엄청난 규모로 단축되었다. 한권의 책이 혹은 사상과 이념이 출판되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읽히게되는 시간을 인터넷은 제거해버렸다. 이제 누군가의 생각과 이념과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에, 그것도 출판된 책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된다. 이를통해 인터넷은 지식과 권력 사이에 놓여있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한계를 제거해버렸다. 누군가의 생각과 이념은 이제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에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적 범위로까지 확장되어 그를 권력화시킨다.

권력화되는 지식은 사람들의 인정을 필요로한다. 인터넷은 그 어느 매체보다 저 권력을 지향하는 지식들이 얼마나 타인의 인정에 의존되어 있었던 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돈벌이가 아니라, 자신의 정보, 지식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와 사진들을 모아 공개한다. 단 한번의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추천혹은 댓글이라는 형태로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을 가시화시킨다. 인터넷을 통해 인정받은 지식은, 그를 인정한 사람들을 통해 또다시 전파되고, 확산되고, 그를통해 그 지식과 그 지식의 제공자는 인터넷 속에서의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얻어진 권력은 그 지식의 제공자에게 공짜 영화표를 혹은 공짜 책이나 연극표를 제공하게도 하며, 책을 출판하거나,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게도 하며,  나아가 실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위나 데모의 형태로 물질화되기도 한다. 인터넷이 이전 시대의 독점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분산시켜, 보다 민주주의적인 권력과 소통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는 초기 인터넷 예찬자들의 유토피아에 내재되어 있던 아나키즘의 이상은 여기에서 좌절되게 된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인터넷은 지식을 탈권력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과 권력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를 현격히 단축시킴으로써 지식의 권력화에 더 기여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속에서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분산되어 편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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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5-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지금 지그프리트 J. 슈미트의 [구성주의 문학체계이론]을 읽고 있는데, 님의 글과 관련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물론 이전에도 님의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앞에 제가 언급한 책을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정리가 되면, 다시 코멘트 하겠습니다. ^^; 근데, 이거 추천해야 말아야 되나 망설여지네요. ㅋㅋ 그래도~
허걱, 아래 페이퍼에 루만이 나오네요! 이, 이게 대체 뭔 일이래요? @,.@ 시상에나~

김남시 2005-05-03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슈미트를 읽고 계시군요. 루만의 시스템 이론은 사회학보다 오히려 문학이론이나 미디어 이론에 더 생산적으로 적용 된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는 그런 점에서 시스템 이론의 적용에 아주 큰 역할을 한 인물이지요. 구성주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분이 생겨서 기쁘군요.

'추천' 고맙습니다 ^^
 

대학시절 세미나 교재 중 하나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서문엔 이 책을 저자의 지명도와 제목만 보고 구입했을 독자들을 위한 경고 - 내게 그건 '조롱'으로 느껴졌었는데 - 가 쓰여있었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따위의 실용적 지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다루고 있음을 마치 변명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이 바로 그 '제목'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 중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 책 역시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저명한, 세계적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저자와 Passion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선정적 제목'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도 추상적인 시스템 이론의 주창자 루만의 이 책이 몇판을 거듭할 수 있게 했다.  

루만에 의하면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의 비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낸 소통의 코드다. 그리고 이는 특히 서구에서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열정과 낭만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의미론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엽 소통이 개인화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관찰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세계연관의 준거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용하고, 가치있는 사실들에 준거하는 대신, 그러한 사실들 혹은 사태들이 개인에게 갖는 개인적, 사적 의미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소통이 개인화됨에 따라 서로 관찰할 수 있는 전달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그 한계에 봉착하고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루만에 의하면 새로운 ‚상징적으로 생겨난 소통매체’인 ‚사랑’을 등장시키게 된 원인이었다. 사랑이라는 소통의 코드는 이제 사람들에게 관찰될 수 없는 타인의 ‚체험’의 차원을 관찰이 아닌 추측과 소망 등을 통해 추구하게끔 만든다.  

열정이자 열병, 광기, 기적, 설명되지 않는 그리고 이유없는, 불가항력의, 한마디로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법칙과 사회적 통제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이런 사랑의 코드가 사회 속에서 용인되고 특별한 지위와 위치로써 미화되고 찬양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루만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러한 특별한 소통적 코드인 사랑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통적 매체라는데에서 찾는다. 사랑은 그를통해 정체된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하는 소통적 코드라는 것이다.

만일 사랑을 다만 성적욕구와 성적 본능의 충족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로부터 그것의 광기적, 열정적, 비이성적, 충동적, 설명되지 않는 불가항력적 감정이라는 의미론을 제거해버린다면, 사랑은 애초에 사회의 소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소통적 매체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사랑이 이처럼 비이성적, 광기적, 충동적 의미론을 통해 기능하기를 원한다!

사랑이 일상적인 관찰과 소통의 차원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상대, 즉 타자의 체험의 차원에의 동참을 요구하는 코드라고 한다면,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이러한 코드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유기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관찰되지 않는 상대의 개인적, 사적인 체험에의 참여는 서로에게 함께 있고, 함께 나누고, 함께 모든 사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공유하게끔 요구한다.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의 이러한 요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나만의 체험이 곧 동시에 내 파트너의 체험이 된다’고 하는 섹스에서의 경험은 바로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섹스, 육체적 접촉은 이를통해 곧 개인의 내적인 체험의 차원을 공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 매체로서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매우 힘든 커뮤니케이션의 상황들을 발생시킨다. 루만에 의하면 그건 크게 두가지 사정때문이다.

첫째,  친밀한 소통관계의 조건으로써 이 사랑이라는 소통에의 참여자는 자신이 파트너와 그 파트너와의 관계로 인해 이전의 오랜 습관과 이해와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그 사랑이라는 관계로 인해 자신이 '변화' 했음을 파트너에게 읽히고 보일 수 있도록 해야하는 행위자다. 그는 사랑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를 '행동'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점에서 행위하는 자로써의 나는 나의 파트너로부터 관찰당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편차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하는 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들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킨다고 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오늘날 사랑의 의미론을 이루는 개별적, 친밀한 관계라는 소통의 코드가 위 두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복잡하고도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지 보여준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면 차에 함께 타 그를 관찰하고 있는 파트너는 그의 운전방식에 불만을 갖고 그것이 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파트너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귀결된 것이라고 여긴다. 행위자를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는, 사랑의 코드의 의미론이 요구하듯이,  그 행위자의 행동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비난하는 것이다.  

행위와 관찰 사이의 간극과 편차,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랑관계의 갈등은, 관찰자로써의 파트너가 나의 행위를 특별한 사랑의 징표로 간주하는 한, 그러나 한편으로 행위자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상황의 요구들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받게 될수록 더욱 벌어지고 심해진다.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인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러한 사랑의 의미론 속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사랑을 늘 행위를 통해, 그것도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아니라 늘 새로운 행위를 통해 관찰자인 파트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 그만의 내적 체험, 그만의 독특하고 구별되는 내적 세계의 특수성,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함을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예를들어 유부남 혹은 유부녀는 파트너로부터 남편 혹은 아내로부터의 이혼을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표로써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코드는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속에서 커다란 딜레마를 낳는다. 관찰자의 주관적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관찰될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자의 고유한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사랑받는 자의 그것으로 대체하기를 요구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관계가 형성되게 되었던 사적인 개인들의 개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남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받고 소통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게된 행위자는 이제 그를통해 오히려 자신의 개별성을 포기하거나 타협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는 것이다.

루만은 이런 딜레마의 해결책으로, 사랑이라는 소통의 참여자들이 이러한 '행위자'와 '관찰자'의 역할을 균등하고 적절하게 서로 공유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저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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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 많은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르스트. 그의, 4미터가 지나서야 마침표가 등장하는 긴 문장들로 채워진 그의 10권의 소설. 그리고 그와 그 소설들을 둘러싼, 베르그송, 들뢰즈, 발터 벤야민 등의 쟁쟁한 이름들이 연루된 의심스러운 논의들. 이 모든 것들 앞에서 한번쯤 주눅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을 읽고 자신감을 얻을수 있으리라.

« 지침서 » Eine Anleitung 이란 부제에 걸맞게 그는 프르스트의 삶과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에서 우리의 삶을 보다 민감하고 살만하며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수 있는 유쾌하고도 쾌적한 교훈들을 찾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의 각 장의 제목에서부터 확인된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제대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어떻게 고뇌를 이겨내야 하는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친구들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세상을 보는 방법을 어떻게 익힐 것인지, 사랑하면서도 어떻게 행복해질수 있는지, 그리고 끝으로 어떻게 책을 손에서 내려놓는지.’

그러나, 어떻게 인간관계에 성공하며 재산을 모으고 약삭빠르게 살 수있을지에 대해 충고하는 저 수많은 실용적 지침서들과는 달리,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생활의 조직화, 계획들에 대한 무수한 권고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릴 좌절하게 하는 대신, 소설을 읽듯 편안하게 삶과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볼수 있게 유도한다.

프르스트가 그의 소설 속에서 시도했듯 저자는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일상의 디테일들과 사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예민한 감수성을 권고하고, 푸르스트의 전혀 모범적이지 못한 삶과 생활태도들로부터 우리의 삶에 적용될만한 삶의 지침들을 뽑아내 알려주고,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으로부터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속물적 삶의 태도를 환기시킨다.

우린 보통의 책을 읽으며 작가 프르스트의 생애와 삶에 대해, 저 감히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 나아가 그것의 문체와 그에대한 많은 사람들의 비평과 반응들에 대해 배우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에 대해 깊이있게 사색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

편안하고도 쉬운 글을 쓰면서도 오랜 여운을 남기는 사유의 단초들을 깔끔하게 던져주는 보통의 문체는 그의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빛을 발한다. 저 지리하고도 긴 푸르스트의 소설의 문제들을 산뜻하고도 말끔하게 전달해주면서 동시에 푸르스트를 직접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그의 글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 가장 훌륭한 책들이라도 방구석에 던져질만 하다 »는 문장을 통해 푸르스트의 책 자체를 왜곡된 숭배와 맹목적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착오를 경계하는 마지막 문장을 읽을때 까지 시종일관 이 책은 그로부터 얻는 풍부한 정보와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 우리에게 던져지는 설레이는 사유의 단초들을 통해 우릴 즐겁게한다.

 Alain de Botton, Wie Proust Ihr Leben veraendern kann ; eine Anleitung, Fischer Taschenb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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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예류살렘의 다이히만 읽다. 특정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단지 범죄를 통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만 상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그러한 범죄 규정하고 규제하고 있는 사회적 질서 자체를 손상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에대한 처벌이 단지 피해자의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공동사회의 질서를 손상시킨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는 생각. 이것이 근대 법치의 핵심개념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 학살계획을 수립했던 다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첫째로, 재판을 수행했던 주체가 단지 이스라엘의 법률에 의거해 판결할 밖에 없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로서 최소한 국제적 법정이 되었어야 했다는 그녀의 주장도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것도 논란이 분분한 납치라는 방법을 통해 다이히만을 자신의 국가에서 자신의 법률로 사형시켰던 전범은, 사건 자체를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피해자가 다이히만에 대한 가해자에 대한 개인적 피해를 사적으로 복수시켰다는 인상을 낳게한다. 그리고, 실지로 나찌와 홀로코스트의 문제를 바라보는 오늘날 많은 시각들엔 바로 그것이 단지 유대인과 나찌 사이의 문제로, 나찌의 비인간적 행위와 잔인함이 문제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을 지구 상에서 절멸시키려고 했던, 게노시드, 나찌의 시도는 단지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일 뿐만 아니라, 그를통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들의 공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 행위였으며, 이는 따라서, 인류적 질서의 이름으로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처리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법적, 공법적 범죄행위를 개인적 복수 보복의 논리로 바라보는데 익숙해있는 한국 사회에선 그리하여 근대적 법치의 기본을 이루어야 이러한 일반적 질서 대한 범죄라는 생각이 결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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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 <공공의 > 보다. 그의 나이브한 아나키즘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영화들.  그가 그려내는 세계 속에선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조직들은 조직의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는 행위주체들과 대립하고 있다. 실미도의 훈련책임자와 훈련 하사관, 그리고 훈련병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정치조직과 대립하며, 강력계 형사가 속해있는 검찰조직들은 또한 그들과 대립한다. 진실은 조직에 있지않고 조직의 최말단에서 묵묵히, 조금은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으로라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약한 사람들에게 있다. 그들의 벌거벗은, 솔직한 진리 그들이 속해있는외면적이며 위압적인, 권위적 조직 속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그에 항거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에겐 따라서 비진리와 고통의 원천인 조직이 정해놓은 규율, 법칙, 명령들은 다만 그들의 피땀흘리며 살아가는 질곡하고, 가로막으며, 진실을 부인하거나 은폐하는데만 기여한다. 진실은 오히려 그러한 비진리를 조롱하고, 파괴하며, 엿멋이는데서 생겨난다. 강우석이 꿈꾸는 유토피아에선 그리하여, 말단의 개인들이, 처음엔 적대적으로 여겨졌던 훈련병과 기간병들이, 형사와 마약상인, 칼잡이들이 서로 우애를 쌓고 협조하며, 어떤 위의 조직의 간섭과 방해와 음모로부터 해방된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세계일 것이다.    

강우석이 그려내는 이러한 세계의 나이브함은 우리가 잠시만 과연 진실과 비진실 범위가 어디까지인가하는 질문만 던져본다면 금새 폭로되고만다. , 실미도의 훈련대장은 조직의 일부가 아닌가, 강력계 반장은? , 진실과 비진실의 범위는 주인공들에게 유리하게만 설정되는가. 만일 실미도의 훈련대장과 강력계 반장 역시 비진실의 조직의 구성원이었다면, 주인공들은 과연 자신들의 세계를 그나마라도 펼쳐 보일 있었을까. 아니면, 강우석은 진실의 필연적인 파급효과 같은 생각했던 것일까. 진실은, 진리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감화시켜, 스스로 승리할 것이라고? 마치 처음엔 적대적이었던 강력계 반장과 훈련 하사관이 나중에 우리편이 되듯이? 

이 점에서 강우석의 아나키즘은 나이브한 휴머니즘의 옷을 입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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