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와 <공공의 적>을 보다. 그의 나이브한 아나키즘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영화들. 그가 그려내는 세계 속에선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조직들은 그 조직의 최말단에 위치하고 있는 행위주체들과 대립하고 있다. 실미도의 훈련책임자와 훈련 하사관, 그리고 훈련병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정치조직과 대립하며, 강력계 형사가 속해있는 검찰조직들은 또한 늘 그들과 대립한다. 진실은 저 조직에 있지않고 그 조직의 최말단에서 묵묵히, 조금은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으로라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저 약한 사람들에게 있다. 그들의 ‚벌거벗은, 솔직한 진리’는 그들이 속해있는‚외면적이며 위압적인, 권위적 조직’들 속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그에 항거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에겐 따라서 저 비진리와 고통의 원천인 조직이 정해놓은 규율, 법칙, 명령들은 다만 그들의 ‚피땀흘리며 살아가는 삶’을 질곡하고, 가로막으며, 진실을 부인하거나 은폐하는데만 기여한다. 진실은 오히려 그러한 비진리를 조롱하고, 파괴하며, 엿멋이는데서 생겨난다. 강우석이 꿈꾸는 유토피아에선 그리하여, 저 말단의 개인들이, 처음엔 적대적으로 여겨졌던 훈련병과 기간병들이, 형사와 마약상인, 칼잡이들이 서로 우애를 쌓고 협조하며, 그 어떤 저 위의 조직의 간섭과 방해와 음모로부터 해방된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세계일 것이다.
강우석이 그려내는 이러한 세계의 나이브함은 우리가 잠시만 과연 저 ‚진실과 비진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하는 질문만 던져본다면 금새 폭로되고만다. 왜, 실미도의 훈련대장은 저 조직의 일부가 아닌가, 강력계 반장은? 왜, 저 진실과 비진실의 범위는 주인공들에게 유리하게만 설정되는가. 만일 실미도의 훈련대장과 강력계 반장 역시 저 비진실의 조직의 구성원이었다면, 저 주인공들은 과연 자신들의 세계를 그나마라도 펼쳐 보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강우석은 저 진실의 필연적인 파급효과 같은 걸 생각했던 것일까. 진실은, 진리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감화시켜, 스스로 승리할 것이라고? 마치 처음엔 적대적이었던 강력계 반장과 훈련 하사관이 나중에 우리편이 되듯이?
이 점에서 강우석의 아나키즘은 나이브한 휴머니즘의 옷을 입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