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축복’이라고 번역되는 „Seligkeit“는 슈레버에겐 하늘 나라 신의 곁에 존재하면서 정화된 영혼이 도달하게 되는 일종의 세계 혹은 공간이기도 하고,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윤리적으로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쌓게되는 ansammeln – 마치 카드 사용 실적에 따라 늘어나는 ‚포인트 점수’ 처럼! – 무형의 재산이기도 하며, 그를통해 누군가가 저 공간에 받아들여질 만큼 충분히 selig 하다고 판정받게 되는 등급이자, 그 등급을 받게 된 선한, 정화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어떤 상태Zustand이기도 하다.

슈레버에 따르면 이 축복을 받게 된 영혼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영원히’ 아무 노동도 할 필요없이 다만 „끊임없는 향유의 상태“에 자신을 내 맡기고 있다. – 여기서 슈레버가 말하는 영혼이 감지하는 ‚향유’의 성격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향유하는 것일까! 육체없는 향유. 육체가 없기에, 육체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에 그만큼 더 무한히 지속되고, 한계없이 강렬한 향유…

축복 상태에 있는 영혼이 처해있다는 이러한 향유에 덧붙여 영혼에게는 또 다른 적지않은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다. 그건 „지속되는 향유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회상“ 하는데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축복 상태의 영혼은 자신이 인간이었던 과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그를 회상하면서 살아간다. 아무 일도 하지않는 무위의 편안함 속에서,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영혼은 이를통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 을 누린다는 것이다.

과거, 특히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설레임, 작은 성공, 즐거웠던 삶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은, 그럴 조건과 환경만 마련된다면, 인간에게도 작은 행복감을 준다. 즐거웠던 과거 뿐만 아니라, 예를들어 고통스럽던 체험도 그에대한 기억, 회상 속에선 그것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래서 우린 예를들어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렸던 끔찍한 체험을, 그때의 (육체적) 고통을 다시 느끼지 않으면서도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회상하고 기억하고 싶지않은 그런 과거들도 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니 내 바램과는 달리 그것이 떠올려지는 것 만으로도 소리를 지르고 싶을만큼 괴롭고, 고통스럽고, 창피스러운 과거가.

하지만 영혼들에겐 이런 과거조차 그만큼 고통스럽지 않게 회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건 영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창피한 과거가 우릴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원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움켜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그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 잘못된 판단과 결정들은 그의 앞 날을 가로막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억압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고, 숨기고, 억압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로부터 방면된 영혼들은, 이미 그 자체로 과거가 현재의 삶 (영혼으로서의 삶!)에 드리우고 있는 깊은 그림자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의 삶에 의존되어 있지 않는, 불쑥 불쑥 예기치않게 회귀해오는 과거로부터 공격받을 현재의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혼들은 그래서, 인간시절 자신의 과거를, 우리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듯,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릴 숨막히게 하는 행복한 회상과 영원한 향유 속에서 살아가는 축복상태의 영혼에게 슈레버는 또 하나의, 사실상 이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결정적 능력을 부여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건 망각이다. 슈레버에 의하면 영혼들은 신의 광선 – 슈레버에게 이는 인간 신경과 동일한 성격과 구조를 갖는 신의 신경이다 – 을 매개로 아직 지구에 살고있는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다. (때로 영혼들은 자신의 지인들이 죽고 나서 자기가 있는 축복계로 끌어 올려지도록 „힘을 쓸 수도“ 있다. – 말하자면 천상 세계에서도 ‚연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당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아직 지상에서 살고있는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가 불행한 처치에 놓이게 된다면 그를 보고있는 영혼들도 그에따라 불행해지지 않을까? 지상에 살고있는 지인들의 불행이 끊임없는 향유 속에서, 과거에 대해 회상하며 살아가는 천상에서의 영혼들의 행복을 훼손시키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 슈레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구에 살고있는 가족들이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걸 알게되면 영혼의 행복감이 흐려질 것이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과거 인간시절의 기억은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영혼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새로운 인상들은 그만큼 오래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연적 망각 natürliche Vergesslichkeit 을 통해 영혼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니체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망각을, 모든 걸 파악하고be-greifen, 장악해 er-greifen해 개념 Begriff 으로써 자신 속에 보전하고 있어야 할 정신의 능력이 허약해지고, 결핍됨으로써 생겨나는,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이 읽은 것을, 자신이 이해하고 깨달은 것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는 어떤 무능력 vis inertiae 으로 이해했던 데 반해, 처음으로 이 망각을, 아무 것도 잊어버릴 수 없어 벌벌떠는 정신의 불안함과 한 번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수백번, 수천번 아니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소심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능동적 힘이라고, 그래서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쾌활함도, 희망도, 자랑스러움도,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inwiefern es kein Glück, keine Heiterkeit, keine Hoffnung, keinen Stolz, keine Gegenwart geben könnte ohne Vergeßlichkeit“ ( Zur Genealogie der Moral) 고 이야기했던 니체를.

슈레버가 니체를 읽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책 <주목할만한 한 신경병 환자의 기록 Denkwürdigkeiten eines Nervenkranken>(1903)에도 칸트의 이름은 한 번 등장하지만 니체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부르조아 계급이 갖추어야 할 모든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있던,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이태리어, 불어, 희랍어를 읽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퍼부어 그의 정신을 장악하려던 내부 목소리들에 대항해 괴테와 쉴러의 발라드, 바그너의 오페라를 암송할 수 있던 슈레버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니체가 사망한 1900년 슈레버는 두번째 발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니체의 책을 한번쯤은 손에 들었을 것이라는 건, 그를통해 그것이 슈레버의 광대한 우주론적 망상체제를 수립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라는건 개연적이다.

어쨋든 슈레버가 말하는 축복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인상들은 자연적 망각을 통해 잊어 버리고, 달콤한 기억과 회상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과거 인간 시절의 기억들만 보존하는 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절묘한 조화 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기록>을 집필하고 있던 슈레버는 스스로 이러한 ‚축복’ 속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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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의 역사 열화당 미술책방 7
앙드레 리샤르 지음, 백기수 외 옮김 / 열화당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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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1958년에 출간된 책이다. 잠깐 언급되는 피카소와 칸딘스키를 제외하면 죄다 근대 이전 미술에 대한 책이다. 현대미술 비평에 대해서는 얻을게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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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림보 연극 일지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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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카페림보 연극일지>를 보다. 김한민은 이 책 앞에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보기를 권한다. --> (전시-->연극) --> 일지 --> 영상. 그리고 나는, 작가가 권하고 있는 바로 그 순서대로 <카페림보>를 보았던, 그리 많지 않을 독자 중 하나다. 그렇게 보고 나니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연극을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 그것은 여러 조건 때문에 생겨났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떤 소품, 예를들어 박새 같은 경우는 너무 작아, 현장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 연극일 지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일지, <카페림보> 연극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이면서도, 동시에 <카페림보> 연극 자체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그 연극의 발생적 상황들에 대한 극적 기록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이 그야말로 건조한 일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독립적으로도 하나의 작품’ - 저자 김한민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다. 그건 무엇보다 이 일지 속에서 작가 김한민이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위치로 부터 나온다. 이 일지는, ‘카페림보의 원작자이자, 연극 카페림보의 기획자이자 그 연극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1차적 관찰자이자 연루자인 김한민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그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김한민은 다른 인물들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연출자, 미술 담당자 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일지를 쓰는(그리는) 김한민은, 그자신 제작자이자 각색자로 참여한 연극을 준비하는 김한민을,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 그리고 있다. 그를 통해 김한민은 복수화된다. 그로부터 자기 지시적인, autopoetic 한 구조가 생겨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막힌 미적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미적 전략은 이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미술담당 검기의 요청에 의해 삭제된 페이지연극일지 도난사건이다. 이 일지를 읽는 독자는 이 일지가 다층적인 실재의 층위에 동시에 속해있음을 깨닫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김한민이 그리던 일지와 그가 도난당했다고 믿었던 일지, 그리고 다시 찾은 일지, 나아가 워크룸프레스에 의해 출판되어 우리 손에 도달한 일지는, 실재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로 겹쳐진다. 이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개념어를 써가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이 책을 읽는데 혹은 보는데 엄청난 미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은 천상, 예술가다. 이 괴물같은 예술가는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 현실로부터 마술적인 거리를 취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이 갖는, 기묘한 매력이, 독자를 현실의 여러 층위를 이동하게 한다. 이 일지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진행을 맡은 김한민이 바퀴벌레로 분장하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고릴락상상스튜디오가 제작한 전시연극 카페림보의 첫 장면과 이어져 있다. 이 일지를 보고, 인터넷에 올려있는 카페림보 전시연극 영상을 보면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번, 김한민이 의도한, 하지만 김한민 만이 의도하지 않은, “카페림보 연극일지전시연극 카페림보사이의 어떤 이행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전시연극 카페림보를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서로 얽힌다. 김한민이, 괴물같은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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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카페림보 연극일지>를 보다. 김한민은 이 책 앞에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보기를 권한다. --> (전시-->연극) --> 일지 --> 영상. 그리고 나는, 작가가 권하고 있는 바로 그 순서대로 <카페림보>를 보았던, 그리 많지 않을 독자 중 하나다. 그렇게 보고 나니 테이크 아웃 드로잉에서 연극을 볼 때는 잘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 그것은 여러 조건 때문에 생겨났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떤 소품, 예를들어 박새 같은 경우는 너무 작아, 현장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 연극일 지를 보면서 확실해졌다. 그래서 이 일지, <카페림보> 연극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게 하는 지침서이면서도, 동시에 <카페림보> 연극 자체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그 연극의 발생적 상황들에 대한 극적 기록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책이 그야말로 건조한 일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독립적으로도 하나의 작품’ - 저자 김한민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다. 그건 무엇보다 이 일지 속에서 작가 김한민이 차지하고 있는 기묘한 위치로 부터 나온다. 이 일지는, ‘카페림보의 원작자이자, 연극 카페림보의 기획자이자 그 연극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1차적 관찰자이자 연루자인 김한민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그려)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김한민은 다른 인물들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연출자, 미술 담당자 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다. 이 일지를 쓰는(그리는) 김한민은, 그자신 제작자이자 각색자로 참여한 연극을 준비하는 김한민을,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 그리고 있다. 그를 통해 김한민은 복수화된다. 그로부터 자기 지시적인, autopoetic 한 구조가 생겨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기막힌 미적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미적 전략은 이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미술담당 검기의 요청에 의해 삭제된 페이지연극일지 도난사건이다. 이 일지를 읽는 독자는 이 일지가 다층적인 실재의 층위에 동시에 속해있음을 깨닫는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김한민이 그리던 일지와 그가 도난당했다고 믿었던 일지, 그리고 다시 찾은 일지, 나아가 워크룸프레스에 의해 출판되어 우리 손에 도달한 일지는, 실재론적으로 보자면 서로 다른 층위에 있지만, 그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로 겹쳐진다. 이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는 어떤 종류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개념어를 써가며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이 책을 읽는데 혹은 보는데 엄청난 미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은 천상, 예술가다. 이 괴물같은 예술가는 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 현실로부터 마술적인 거리를 취한다. 그로부터 그의 작품이 갖는, 기묘한 매력이, 독자를 현실의 여러 층위를 이동하게 한다. 이 일지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진행을 맡은 김한민이 바퀴벌레로 분장하고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고릴락상상스튜디오가 제작한 전시연극 카페림보의 첫 장면과 이어져 있다. 이 일지를 보고, 인터넷에 올려있는 카페림보 전시연극 영상을 보면 그 순간 우리는 또 한번, 김한민이 의도한, 하지만 김한민 만이 의도하지 않은, “카페림보 연극일지전시연극 카페림보사이의 어떤 이행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전시연극 카페림보를 더 잘,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카페림보>에 대한 다섯 개의 창작물 (그림소설), 전시, 연극, 일지, 영상 ,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고 서로 얽힌다. 김한민이, 괴물같은 예술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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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철학의 정원 12
심혜련 지음 / 그린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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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매체에 대한 사유에 있어 중요할 수 있는 몇몇 이론적 쟁점들에 대해서는 오해나 오독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일단 눈에 뜨인 두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저자는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적 수용을 '시각적 촉각성'으로 제한시킨다. 

 

엄격히 말해서 벤야민이 말하는 촉각성이란, 시각적 촉각성을 의미한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지각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마치 촉각성과 유사한 지각의 체험을 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67면)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집합체의 신체의 신경감응 수단으로서 제2기술의 잠재성을, 벤야민이 사진, 영화와 같은 기술 매체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혁명적 잠재성'을 '시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벤야민은 촉각적 수용을 분명히 '시각'과 대비시키고 있다.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의 지각기관에 부과되는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지도에 따라,

익숙해짐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발터 벤야민 선집 2, 91면. 번역 일부수정) 

 

 

 

 

 

이러한 방식의 오독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키틀러에게서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뇌가 기억하던 것들을 대신 기억하는 매체로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록이 기억을 대신하고, 또 기록을 위해 매체가 사용되는 한, 매체와 기억은 긴밀한 관계를 맺게된다. 기록(기록매체)와 기억, 그리고 의식적 기록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기록(무의식)의 상관관계,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특히 주목하는 매체철학적 주제다...그가 주로 분석하는 매체는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타자기다. 이 세 개의 아날로그 매체들은 각기 기록하는 내용과 지각방식이 다르다. 축음기는 청각적 지각내용을, 영화는 시각적 지각내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자기는 사유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는 이 세 개의 기록매체들이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153-154면)

 

키틀러의 매체이론이, 축음기, 영화, 타자기가 "인간의 두되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라면, 사실 그의 매체론은 그 이전 다른 매체이론과 크게 다를바 없게된다. 키틀러 매체이론의 특징은, 기억 혹은 기록해야 할 '내용'이 선재하고, 그것을 어떤 매체 - 인간 두뇌? 축음기? 타자기 등 - 가 기록/기억하는가라는, 매체 이론의 패러다임 자체를 넘어서 있다. Claude Shannon 의 정보이론에서 출발하는 키틀러에게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은 감각적 데이터 흐름이며, 그것은 특정한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각각의 채널은 감각 데이터흐름을 서로 다르게 필터링하며, 그를 통해 의미있는 정보와  노이지를 구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전달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두뇌 대신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식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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