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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이 울린 수화기를 받아들면서 우린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마치 상대를 향해있는 것 같은 이 모호한 언어행위는, 그러나 사실 아직 상대와의 어떤 관계도 맺고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발화다. 이 말은 다만 수화기를 들은 내가 지금, 여기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시그널이다. ‘여보세요라는 을 통해 나는 나의 현존을 지시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나에게만 속하는 그 말은, 내게 전화를 건 모든 가능한 존재자들에게 다만 나의 현존만을 알리는 순수한 주관적 언어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관적 성격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내게, 전화기 저쪽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의 현존과 나의 « 말할수 있음 »을 알리는, 그러나  아직 나의 여보세요에 응답하지 않는 저 전화기 바깥의 상대는, ‘지금,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을 수도,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동 기계일지도, 외계인 혹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설사, 나처럼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의 여보세요에 아직 반응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육체적 지표를 통해서도 신원확인 되지않는 익명의 대상이다. 그는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현존만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릴수도, 침묵해 버릴수도,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대의 반응을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의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다. 나는 여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무력하게 그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 반응하기 전의 저 상대는 내게 절대적 타자. 그와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상대가 나의 여보세요에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의 여보세요는 구체적인 수취인을 얻는다. 처음엔 전적으로 나의 현존과 말할 수 있음만을 지시하던 주관적 시그널은, 그를통해, 말하는 두 주체 사이의 대화를 선도했던 최초의 호출행위가 된다. 그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나는, 상대가 나와같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화기 저 편에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지인인지 낯선이인지, 내게 호의적인지 공격적인지 등, 그와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진입하기 위한 나의 모드를 결정한다.     

 

전화는 이처럼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무규정적 공백의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상대와의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고 따라서, 그의 육체적 지표 성별, 나이, 인종, 친소 여부 등 를 통해 알려지는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선 규정성을 제공해주었다면, 전화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선이해의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그로인해 전화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채 불쑥 맞이해야 하는 낯선 침입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우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채 걸려오는 전화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받아야만한다. 장난 및 음란전화, 전화를 통한 무차별 광고 등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놓은 저 공백의 순간을 악용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걸려오는 상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핸드폰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전화 등은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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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게 보내 이메일에 추신 달려있다. „추신혹은 덧붙임 통해 쓰여진 것은, 이미 완결된 본문 속에는 통합되지 못한, 잊혀졌던 , 탈락되거나 결핍된 것들이다. 이렇게 잊혀지고, 탈락된 것들은, 그들 때문에 이미 완결적으로 쓰여진 본문을 다시 쓰거나 재구성해야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다만 부록처럼, 물건을 사면 끼워주는 사은품처럼 그렇게 부착되어 있다.

 

-          누군가와 대화를 , 우리는 이미 우리가 내뱉은 속에서 말해지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빠진 것들을 나중에 추가시킨다. 그렇게 밖에 없는 이유는 말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뱉은 말에게로 돌아가 가운데를 비집어, 잊혀지거나, 빠진 말을 공간적으로 첨가시킬 없다. 그리하여 대화에 있어서의 추신은 구술적 대화가 갖는 시간성의 어쩔수 없는 결과다.  , 그런데 말이지...

 

-          아직 상대방에게 보내지지 않은 글에선 말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의 제약은, 글쓰기의 매체가 지닌 공간적 조건들로 대체된다. 내가 이미 썼던 문장 속에 빠진 단어나, 내가 이미 써버렸던 편지 속에 들어가야 했으나 빠진 내용은, 이미 쓰여진 문장의 공간 속에선 이상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속에서 빠지거나, 탈락되거나, 잊혀진 것들을 이미 쓰여진 속으로 통합하기 위해선,  이미 만들어진 문자의 공간적 질서가 재배치되어야 한다.

 

-          글과 문자의 공간적 질서를 재배치하는 일의 난이도는, 글을 썼던 매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내가 연필로 글을 쓰고 있었다면, 지우개로 이미 쓰여진 글의 공간을 비우고, 빠졌던 것들을 메꾸어 넣을 있다.  내가 만년필이나 볼펜, 아니면 타자기로 쓰고 있었다면, 글자들이 이미 차지해 버린 공간을 비우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글자들은 화이트로 생매장되거나, 그것이 박혀있는 지면으로 부터 뽑혀(긁어)져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이미 쓰여진 종이를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써야만 한다.      

 

-          추신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텍스트적 질서의 변용을 통해 문자적 공간의 재배치를 이루려는 시도다. 이미 쓰여진 문자들은 내버려 ,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야 글자들을 이미 쓰여진 텍스트로 부터 형식상 독립시킨다. 이미 쓰여진 글자들과, 속에 들어갔어야 , 그러나 잊혀지거나 탈락된, 빠진 것들은 지면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배치되고, 이를통해 이미 쓰여진 글과 쓰여졌어야 하는, 그러나 탈락된 것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진다. 

 

-          글쓰기의 새로운 매체 컴퓨터는 이미 쓰여진 글이 갖는 불가역성의 무게를 탈물질화시켰다. 컴퓨터를 통해 우린 언제든지, 쓰여진 글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려움 없이, 제거해 버릴 있다. 쓰여진 ( 입력된!) 글자들 속에 잊혀지거나 탈락된 것들은, 다만 동일한 손가락 운동만을 통해 화면에 어떤 흉터도 남기지 않은채, 수도없이 통합될 있다. 이를통해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에선 사실상 추신이라는 독립된 글자들의 형식은 불필요해졌다.  

 

-          이메일의 끄트머리에 쓰여진 추신, 그래서,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 남아있는 이전 시대 글쓰기의 흔적이다. 흔적은 마치 컴퓨터로 쓰여진 글이, 만년필이나 타자기로 쓰여지던 글처럼 공간적 불가역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다시말해 자판으로 입력된 글자들이 언제든지 똑같은 모습으로 생겨나고 지워질 있는 픽셀들이 아니라, 마치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지면 위에 박힌 물질인 듯한 인상을 준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추신 다는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으로 글자의 육체적 일회성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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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말의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면서 부터 가장 뚜렷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음성을 통해 울려나오는 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말하는 자의 육체성이 문자에서는 지워져버리게 되었다는 거다. (음성의 육체성과 문자와의 관계에 대해선 본 컬럼의 „플라톤에서 HTML까지“ 참조)

말하는 자 스스로의 육체를 울려서 발화할 수 밖에 없는 말이 당연하게도 그 말의 발신자를 동시에 드러낼 수 밖에 없는데 반해, 문자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자는, 그리고 그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는 말/음성과 필연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던 말화는 자의 육체성(그의 성별, 나이, 나아가 그의 육체와 목소리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화자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그의 말로부터 걸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였고, 이를통해 이제 말은 그 육체성을 상실한 채, 보관되고, 전달되고, 이동되며, 나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있는 ‚정보’로 변환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정보사회의 인프라 디지털 코드는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 사용한 기초적 문자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까지에는 아직 거쳐야 할 중간과정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자 인쇄술이 보편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인류는 문자를 직접 손으로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개개인에 의해 손으로 쓰여진 문자는, 말이 지니고 있던 화자의 육체성 만큼 개방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문자를 쓴 사람의 육체적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의 필체 혹은 필적이 그것이다. 누군가가 손을 움직여 써내려간 문자는, 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글쓴이의 개별성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필적 감정을 통해 글쓴이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그의 성격과 성장환경, 그가 그 글을 쓸 때의 심리상태 등까지도 간파해내는 범죄수사 기술은 글씨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육체성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직접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닌 육체성이 범인검거 등의 부정적 차원에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타자기나 컴퓨터로 쓰여진 편지보다는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가 더 인간적이고 친밀감을 준다고 느낀다.

이메일이 보편적인 문자적 통신수단으로 등장한 오늘날에도 우린 연말연시가 되면, 카드에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짤막한 글(씨)들을 주고받는다. 그 길지않은 글씨들이 나의 육체성(진실성?)을 상대방에게 전달해주길 기대하면서. 컴퓨터나 타자기로 작성된 공적인 편지들에도 그 끝머리에 여전히 직접 손으로 휘갈겨 쓴 개인의 싸인이 첨부된다. 이를통해 그 편지는, 비록 비서에 의해 작성되었을지라도, 친필 싸인을 한 그 편지 발신인 ‚개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 모든 관행들은 컴퓨터를 통한 익명적 글쓰기에 익숙해진 오늘날에도 저 오래된 ‚글씨의 육체성’이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 필체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마저 규격화된 활자를 통해 말끔히 제거해버린 책이 보편적 매체로 등장하면서, 이제 애초에 말과 음성이, 이후엔 개인의 글씨가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활자화된 말“은 그야말로 ‚말하는 사람’과 ‚그의 말’을 최종적으로 분리시켰다. 활자화된 말은 그를통해 하나의 ‚사상’ 이나 ‚생각’, 아니면 ‚감정’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누구의 생각, 감정, 사상인가 하는 것은 다만, 활자로 찍혀진 그 책 저자의 이름을 통해서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책 저자의 이름과 그의 간단한 약력 등을 확인하기 전에는 활자로 찍혀진 그 책의 내용은 사실상 우리에겐 익명적인 것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내용이 이 저자가 아닌 다른 저자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감추어버리는 말하는 자의 육체성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사람들은 책방이나 출판사 등에서 주최하는 ‚저자 싸인회’에 몰려가 그 저자가 직접 쓴, - 그리하여 그의 육체성의 최소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 글씨(기껏해야 그의 이름)를 책표지에 받아두고 싶어한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잠재적 익명성은 또한 다른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한 국가의 왕이나 임금이 자신이 다스리는 어떤 지역에 대해 특정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결정을 문자를 통해 작성하여 그것을 그 지역의 담당관리에게 나아가 그 지역 백성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그를 따를 것을 강제해야 한다. 그런데, 서한을 받아본 관리나 백성들은 그것이 정말 왕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신하는가? 왕이 그 지역에 직접 행차해서 관리와 백성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포고한다면 전혀 발생하지 않을 문제가 여기에 등장한다. 바로 문자의 익명성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임금들은 ‚옥쇄’를, 유럽의 왕들은 ‚봉인 혹은 인증’(Siegel)을 사용했다. 이제 왕은 자신의 정치적 결정이 쓰여져 있는 편지에 도장을 찍거나, 문장을 통해 봉인함으로써 그 편지가 다름 아닌 최고 통치자에 의해 발신된 것임을 보증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왕의 옥쇄나 문장은 왕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만일 동일한 도장이나 문장을 다른 누군가가 도용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발신인의 신분확인을 위해 사용되었던 이러한 방법은 실효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나 유럽에서나 임금의 옥쇄나 문장은 그 어떤 왕가의 물품보다도 엄중히 관리되었던 거다. 어쨋든, 옥쇄나 봉인은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정한 징표를 통해, 문자가 갖는 익명성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다. 곧, 이전 시대의 말이나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을, 왕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옥쇄나 봉인을 통해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임금의 옥쇄를 임금의 몸, 옥체처럼 취급했던 것은 이처럼, 저 옥쇄나 봉인이 말하는 이의 육체성과 그와 결합되어 있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을 보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의 친숙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어버린 이메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메일은 기본적으로 컴퓨터 자판을 통해 입력되는 문자로 쓰여진다. 누구의 손이 자판을 치건, 그가 분당 500타의 고수이건,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 소유자건 상관없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문자는 모두 동일하다. 말하자면, 글쓰는 이, 곧 발신자의 육체성은 그렇게 입력된 문자 속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친구와 혹은 동료들과 일상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데는 사실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떨 때 우리는 심지어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입력된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컴퓨터의 간단한 복제 테크닉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입력해놓은 문자들을 복사해서 내 이름으로 보내지는 편지에 갖다 붙이기도 한다.

컴퓨터를 통한 사업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그러나 이메일 문자가 가지고 있는 저 극단화된 익명성은 이제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이메일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의 문제가 그것이다. 얼마든지 ‚이름(아이디)’를 바꾸어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고, (난 하루에도 수십통씩의 스팸메일을 받는다!), 원한다면 발신인의 신분을 얼마든지 가장할 수도 있으며, 그도 여의치않으면 그저 인터넷 상에서 잠적해버릴 수도 있는 이메일의 ‚무육체성’은 인터넷을 통한 금전거래의 가장 큰 허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여러가지 방식이 위에서 말한 임금의 옥쇄나 문장의 기능방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컴퓨터에 단 한번만 발행함으로써 그 컴퓨터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위 ‚디지털 인증서’ 는 독점적 소유를 통해 그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려던 옥쇄의 기능방식과 같다. 개개인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민등록번호는 한국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내 번호는 나만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가 억압해버린 말하는 이의 육체성은 이렇게 다른 모습을 띠고 귀환한다. 다만 그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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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사실일 수 있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화는 뉴스나 제보와는 다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언어적 기록이지 않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 언급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주장은 이 생각의 연장선 속에 있다. 그가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를 실제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은 오늘날의 현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여전히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들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없는 황당무계하고 불합리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언어를 가지고 옛 언어를 해석해서 옛 일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대에 묘사되어 있는 신화를 그 일이 발생했었을 과거의 언어를 통해 바라본다면 그 신화들은 특정한 사실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닌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시사회의 부족장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사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는 자신이 난생 처음 접한 그 경험을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통해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들어 그는 그 비행기를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거대한 독수리“라고 말할 것이다. 나와 그 부족장은 모두 하늘 위로 스쳐 지나간 비행기를 함께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비행기“라고 말하는데 반해, 그 부족장은 „독수리“라고 말한다. 나와 그가 눈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사태 곧, 하나의 동일한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는 그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통해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된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읽고 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언어적 표현이 서로 다른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나는 ‚비행기’에 대해 말하는데 반해, 저 부족장은 ‚독수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테레비젼을 처음 본 우리의 선조들은 아마도 그를 ‚조그만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상자’라고 말했을 것이며, 전기불을 처음 켜 본 사람들은 그를 ‚도깨비 불’이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대상 곧, 테레비젼과 전기불을 보고 다만 다르게 말했을 뿐이다.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고, 아이는 „빠방이 코자자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죽은 듯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코잔다(잠자다)“ 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세계 – 그것은 곧 아이가 습득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다름 아니다. – 내에선 세계 내의 사태나 대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였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신호대기 중인 버스를, „버스가 힘들어서 쉬는“ 것으로, 주유하고 있는 차들을 „차들이 밥먹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것은 아이의 세계 속에서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이다. 나아가 아이는 자신이 이해한 세계 내의 사태에 걸맞게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아이는 주차되어 있는 차들 옆을 지날 때에는 ‚차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목소리를 낯추며, 신호등 앞에서 ‚쉬고있는 버스’를 독촉하지도 않는다. 차들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차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아이의 저런 행동을 나이브한 것이라 여긴다.

이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애초에 제기한 신화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해보자. 신화는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선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 이해와는 달리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라다니기도 하고, 구름과 다른 동물들로 변신하기도 하며, 마늘을 먹고 곰이 인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우린 그 속에서 표현된 사태들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비추어 볼때 ‚비현실적’이며 ‚비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들은 결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실재나 세계 내의 사태일 수 없으며 다만 판타지나 꿈 속에서 일어난 것을 나이브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화에 사용된 언어적 표현들이 다만 우리가 마주하는 것과 동일한 실재나 세계의 사태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신화를 만들어낸 고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을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언어적 표현들을 통해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실재나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그저 ‚판타지나 상상’을 묘사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그들의 언어적 표현을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신화의 언어적 표현들을 사실상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실재와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린 그 언어적 표현들로부터 실재와 세계의 특정한 사태에 대한 진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기도 한다. 인류종말의 예언이 빗나가긴 했지만 저 위대한 예언자 노스트라 다무스의 예언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예언을 그 이후에 실지로 일어난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그가 자신의 예언에 사용한 언어적 표현들을 오늘날 우리의 언어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언어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얼마전 일어난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을 다음과 같이 예연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요크(York)의 도시에 거대한 붕괴가 있어 쌍둥이 형제가 혼란에 의해 갈라진다. 요새는 아픔을 겪고 위대한 지도자는 굴복할 것이며, 큰 도시가 불탈 때 세번째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위의 언어적 표현을 우리가 경험한 객관적 사태에 비추어 얼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뉴욕 도시에 거대한 폭발로 인해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미 대통령(?)은 굴복할 것이며, 보복 폭격으로 다른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제 이러한 해석방식을 우리가 알고있는 다른 신화들에도 적용해보자. 누가 아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놀라운 발견을 우리가 하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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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언어는 때로는 그저 중립적인 소통의 매체이지만은 않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계 속에서 등장했을때 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문화적 '작용'을 갖는다.

2차 대전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은 지금도 독일어만 들으면 온 몸이 떨릴 정도의 아득한 섬뜩함을 체험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독일어는 단지 무엇인가를 소통시키는 중립적 소통매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욕구를 위협하는 가해자와 그가 수반하는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 그리하여 증오와 혐오감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성 복합체이다. 일제시대 한국어를 버리고 일본어만을 사용하기를 강요당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는 그저 한국어와는 다른 음성적 가치를 가진 다른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다가왔었을 위협과 강요, 나아가 그에대한 증오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울림이었을 것이다.

독일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2차대전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어'의 울림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등장, 위협, 불안과 공포, 긴장과 긴박감을 일으키는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효과적인 효과음에 다름 아니다. 우린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 독일군 병사의 '말 음성'을 통해 가해자로서의 독일의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얻게되는 것이다. 반면 그 독일어의 '울림'을 위협과 긴장, 협박과 생존의 갈림길로 받아들이는 피해자들의 언어는 그 말을 우리가 이해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도와 발각되지 않았던 어떤 소속감, 공동의 위협 앞에서 존재하게 되는 피해자들 사이의 연대와 자기 희생 등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lifeisb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가 갖는 이러한 대립적인 음성적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장면을 우리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에서 본다. 어린 아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온 아버지는 포로 수용소의 비인간적이고 엄격한 생활 규칙을 설명해 주는 독일군 병사의 말을 아들을 공포에 빠뜨리지 않기위해 이탈리아어로 하나의 게임 규칙인 것처럼 번역(?)한다. 가차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비인간적인 수용소의 가혹한 생활규칙을 설명하는 독일군 병사의 말은 그를통해 우승하는 자에게 전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하나의 흥미진진한 집단게임의 규칙으로 번역된다. 이를통해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군 병사의 폭력과 위협적인 음성 이미지 피해자의 언어인 이탈리아어의 인간적이며 유희적인 음성적 이미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독일병사의 독일어나 로베르토의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 두 언어의 음성적 이미지의 대립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다.

모든 외화를 자막 대신 더빙으로 처리하는 독일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나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서로 다른 음성적 울림이 낳는 이 장면의 효과를 체험할 수 없었다. 가해자 독일군 병사와는 다른 울림을 가졌어야 할 알베르토 역시 같은 독일어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명장면은 저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의 대립의 효과를 잃고 다만 독일 병사의 제스쳐를 응용, 이를 다른 의미의 말로 변화시켜 내는 알베르토의 재치만이 부각되는 평범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독일군과 연합군이 모두 함께 독일어로 이야기하고(„라이언 일병구하기“),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유대인 포로와 독일군 병사가 전부 독일어로 말하는(„쉰들러 리스트“), 심지어 전쟁 중인 일본군과 미군이 모두 독일어로 이야기하는(„펄 하버“) 영화를 떠올려보라. 모든 대사를 독일어로 더빙함으로써 이 영화들은 독일인들에게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서로 다른 언어의 음성적 울림이 주는 극적인 효과를 상실하는, 서투르게 번역된 번안시처럼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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