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내게 보내 온 이메일에 „추신“이 달려있다. „추신“ 혹은 „덧붙임“을 통해 쓰여진 것은, 이미 완결된 본문 속에는 통합되지 못한, 잊혀졌던 것, 탈락되거나 결핍된 것들이다. 이렇게 잊혀지고, 탈락된 것들은, 그들 때문에 이미 완결적으로 쓰여진 본문을 다시 쓰거나 재구성해야 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다만 부록처럼, 물건을 사면 끼워주는 사은품처럼 그렇게 „부착“되어 있다.
-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내뱉은 말 속에서 말해지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빠진 것들을 나중에 추가시킨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말이 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난 내가 이미 내 뱉은 말에게로 돌아가 그 가운데를 비집어, 잊혀지거나, 빠진 말을 공간적으로 ‚첨가’ 시킬 수 없다. 그리하여 대화에 있어서의 추신은 구술적 대화가 갖는 시간성의 어쩔수 없는 결과다. 아 참, 그런데 말이지...
- 아직 상대방에게 보내지지 않은 글에선 저 말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의 제약은, 글쓰기의 매체가 지닌 공간적 조건들로 대체된다. 내가 이미 썼던 문장 속에 빠진 단어나, 내가 이미 써버렸던 편지 속에 들어가야 했으나 빠진 내용은, 이미 쓰여진 저 문장의 공간 속에선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글 속에서 빠지거나, 탈락되거나, 잊혀진 것들을 이미 쓰여진 글 속으로 통합하기 위해선, 이미 만들어진 문자의 공간적 질서가 재배치되어야 한다.
- 글과 문자의 공간적 질서를 재배치하는 일의 난이도는, 그 글을 썼던 매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내가 연필로 글을 쓰고 있었다면, 난 지우개로 이미 쓰여진 글의 공간을 비우고, 빠졌던 것들을 메꾸어 넣을 수 있다. 내가 만년필이나 볼펜, 아니면 타자기로 쓰고 있었다면, 난 글자들이 이미 차지해 버린 공간을 비우기 위해 좀 더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글자들은 화이트로 생매장되거나, 그것이 박혀있는 지면으로 부터 뽑혀(긁어)져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난 이미 쓰여진 종이를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써야만 한다.
- „추신“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텍스트적 질서의 변용을 통해 저 문자적 공간의 재배치를 이루려는 시도다. 난 이미 쓰여진 문자들은 내버려 둔 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야 할 글자들을 이미 쓰여진 텍스트로 부터 형식상 독립시킨다. 이미 쓰여진 글자들과, 그 속에 들어갔어야 할, 그러나 잊혀지거나 탈락된, 빠진 것들은 지면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배치되고, 이를통해 이미 쓰여진 글과 쓰여졌어야 하는, 그러나 탈락된 것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진다.
- 글쓰기의 새로운 매체 컴퓨터는 이미 쓰여진 글이 갖는 불가역성의 무게를 탈물질화시켰다. 컴퓨터를 통해 우린 언제든지, 쓰여진 글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려움 없이,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쓰여진 ( 입력된!) 글자들 속에 잊혀지거나 탈락된 것들은, 다만 동일한 손가락 운동만을 통해 화면에 어떤 흉터도 남기지 않은채, 수도없이 통합될 수 있다. 이를통해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에선 사실상 „추신“이라는 독립된 글자들의 형식은 불필요해졌다.
- 이메일의 끄트머리에 쓰여진 „추신“은, 그래서,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 남아있는 이전 시대 글쓰기의 흔적이다. 저 흔적은 마치 컴퓨터로 쓰여진 글이, 만년필이나 타자기로 쓰여지던 글처럼 공간적 불가역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다시말해 자판으로 입력된 글자들이 언제든지 똑같은 모습으로 생겨나고 지워질 수 있는 픽셀들이 아니라, 마치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지면 위에 박힌 물질인 듯한 인상을 준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추신’을 다는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손으로 쓴 글자의 육체적 일회성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