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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읽지 않은 책- 근대 과학혁명을 불러온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책을 추적하다
오언 깅거리치 지음, 장석봉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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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강의 - 개념 이해로 시작하기 좋은
김진중 지음 / 리코멘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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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외국 서적들을 짜집기로 번역해 모아놓은 책. 전혀 도움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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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장피에르 뒤피 지음, 배문정 옮김 / 지식공작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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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의 역사와 흐름, 쟁점을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역자의 해설만으로도 놀라운 책.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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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이미지 -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와 유령의 시간 NOUVELLE VAGUE 8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김병선 옮김 / 새물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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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겨놓은 유고 원고도 채 정리되어 출간되지 않은 바르부르크에 대해 이 정도 깊이의 연구서가 없었던 시절, 위베르만의 이 책은, 바르부르크에 대한 거의 유일한 학문적 접근 통로였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 이제라도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그 자체로는 기뻐할 일일까? 문제는 그만큼 중요한 책일수록, 그것이 번역되어 소개되기가 힘든 책일수록 충실하고 성실한 번역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데에 있다. 중요한 책들의 번역이, 그 책의 중요성을 인지하거나 그 책에 기반한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발판이 되지 못할 수준이라면, 우리는 중요한 학문적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해외 이론서 번역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바르부르크가 그 대열에 편입되게 되었다.

 

옮긴이의 말을 따르면 이 책의 번역은 프랑스어판과 영어판을 번갈아 참조했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 번역은 거의 대부분 영어판에 의거해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어판의 번역이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데에 있다. 그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이 책에 수도 없이 인용되는 바르부르크의 독일어 텍스트의 번역이다. 영어 번역자가, 나아가 그에 근거해 이를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가 과연 독일어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번역이 속출한다. 한국어 역자는 후속 연구를 위해 원전의 제목과 개념의 원어 표기 등도 가능한 남겨두고, 인용문도 원전을 찾아서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 번역 결과물은 과연 독일어 인용문 원전을 확인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여럿 속출한다. 이는 특히 독일어 인용문 번역에서 출몰하는 어색한 문장들에서 확인된다.

 

28쪽 빙켈만의 <고대미술사>의 인용문을 역자는 이렇게 옮겼다.

 

“..어떻게 보면 이 연인처럼 우리에게도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희미한 윤곽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상실은 우리의 열망을 더 크게 불러 일으키며, 따라서 원형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원형보다 더 주의깊게 복제를 연구한다.” (28)

 

---> “하지만 그럴수록 그 윤곽은 상실된 것에 대한 더 큰 갈망을 불러내는데, 그래서 우리는 원형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을 때 했었을 것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원형의 복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29쪽 빙켈만 인용문

 

합리적인 미술사의 목적은 미술의 기원 Ursprung 으로 돌아가, 완전해질때까지 진보와 변화를 따라가며 사라질때까지 쇠퇴와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술사는 미술의 기원, 성장, 변화와 몰락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어 번역자는 번역시에 위베르만의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켜, 간접인용을 직접인용인 듯 표기해 놓았다. 빙켈만의 미술사에 대해 헤르더는 과연 이것이 역사의 목적인지, 우리가 미술사를 그렇게 이해해야하는 것인지, ‘빙켈만의 작업 외에 다른 것이 가능하거나 좋은 것은 아닌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를 국역본은 그것이 역사의 목적인가? 미술사의 목적인가? 다른 가능한 형태의 역사는 없는가?“(32)라고 번역했다. (32)

 

52아감벤은 이 말을 활용해 그런 저술의 영향을 받은 과학아직 확립되지 않은정도를 보여주었다.“

--> ”아감벤은 이 말을 활용해 바르부르크 저술에서 시도된 학문이 얼마나 확립된 것이 아닌가를 보여주었다.“

 

61, ”비록 궤적의 구조가 구체적이더라도 움직임은 우리가 이미지를 에너지이거나 동적 순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 ”특정한 구조를 갖고 있더라도 움직임은 우리가 이미지를 에너지이거나 동적 순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63사물을 치환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간을 들여 미루는 것이다. 피렌체에서 그는 이미 미술사를 미루었다. 자부심으로 가득찬 역사들이라는 바사리적 시간이나 역사의 보편적 의미라는 헤겔적 시간 대신 다른 시간으로 미루었던 것이다.“

--> ”사물을 치환시키는 한가지 방법은 시간을 가지고 나누는 것이다. 피렌체에서 그는 역사와 미술을 나누었다. 미술에 자부심으로 가득찬 역사들이라는 바사리적 시간이나 역사의 보편적 의미라는 헤겔적 시간 대신 다른 시간을 부여했던 것이다.“

63피렌체의 한 부르주아의 마지막 소원은 그가 보기에..“

--> ”피렌체의 한 부르주아의 유언장은 그가 보기에...“

 

68그가 모든 문화 현상에서 나타나는 극성의 근원을 의심할 여지없이 찾으려고 한 사실

은 달 라고 Alessandro Dal Lago 의 표현대로 이상함의 가시적 결합속에서였다.“

 

--> ”그가 모든 문화 현상에서 나타나는 극성의 근원을 의심할 여지없이 찾으려고 한 사실

은 달 라고 Alessandro Dal Lago 의 표현대로 낯선 것의 가시적인 체현속에서 였다.“

 

역자의 번역적 성실성, 나아가 편집자의 꼼꼼함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건 바르부르크가 <뱀의식>에서 자신이 인디언 지역 여행을 하게된 동기를 밝히는 대목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장이다. 바르부르크는 나는 심미적으로만 평가를 내리는 미술사에 커다른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심미적으로만 평가를 내리는 미술사 ästhetisierende Kunstgeschichte”를 번역자는 55쪽에서는 미학적 미술사라고 번역하더니 동일한 바르부르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67쪽에서는 형식미에 사로잡힌 미술사라고 번역했다.

 

 

69인류학적 질문 영역에서 이미지와 미술작품에 닻을 내리는 것은 미술사를 치환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 “이미지와 미술작품을 인류학적 질문영역에 정초하는 것은 미술사를 치환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

 

72또한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파토스형성을 다룬 저술에서 그가 사회적 모방, 안무, 패션, 축제에서의 행동, 사람들의 인사 방식을 지배하는 코드 등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데서 어떤 학문분야간의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이유다.”

 

-->“또한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파토스형성을 다룬 저술에서 그가 사회적 모방, 안무, 패션, 축제에서의 행동, 사람들의 인사 방식을 지배하는 코드 등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 분야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이유다.”

 

73쪽 바르부르크 인용문

 

왜냐하면 완전히 해결되었다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양식과 문명의 역사의 중심적인 질문 중 하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에 미친 고대의 전체적 영향이 그것이다.”

--> “왜나하면 양식을 연구하는 문화학 Kulturwissenschaft 의 중심적인 질문 중 하나가 그렇게 해야만 그 완전한 범위에서 포착되고 대답될 수 있기 때문이다.”

 

86그의 관심분야를 타일러의 잔존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그가 왜 타일러의 잔존 개념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91

진화하지 않은 알려진 사회는 없다.” -->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사회는 다 진화를 거쳤다.”

 

91기록물 보관소 없이는 분석하기가 여전히 어렵다고 해도 이 역사는 이질적 시간성의 유희(또는 매듭)로 구성된다.”

 

--> “기록된 원천이 없어 분석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이 역사는 이질적 시간성의 유희(또는 매듭)로 구성된다.”

 

106쪽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바르부르크의 인용문

 

그의 위대함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르길 주저해서는 안된다.”

--> “우리가 그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그가 제시한 길을 따라 더 나아가는걸 주저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107

 

뵐플린 또한 체계가 결코 정의된 적 없는, 다시말해 종결, 도식화, 단순화된 적 없는 체계적 역사를 창조할 수 있던 스승으로서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했다.”

 

--> “뵐플린 또한 체계를 정의하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종결하고, 도식화하고, 단순화하지 않는 종합적 문화사 synthetische Kunstgeschichte’를 창조할 수 있던 스승으로서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했다.”

 

111

 

그는 개인의 발전이 점증하는 해방일뿐 아니라 개인적 괴팍함의 발전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그는 개인의 발전이 점증하는 해방이 아니라 개인적 괴팍함의 발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14쪽 부르크하르트인용문

 

사회구성원을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들어 상충하는 세계관이 당파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사회는 가차없이 와해된다.”

 

--> “개개의 사회 구성원을 일면적인 열정으로 채우는 세계관이 삶과 죽음의 투쟁을 자극하면, 가차없는 사회적 와해의 원인이 된다.”

 

 

129-130

 

“1970년에 곰브리치는 바르부르크의 저술을 원근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전기를 끝맺으려고 했다.”

 

---> “곰브리치는 1970년에 출간된 [바르부르크] 전기를 미술사에서 바르부르크의 위치잡기라는 장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작업은 단지 슈프링어로 되돌아가 잔존과 부흥 간의 시대구분을 다시 설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대 구분을 매우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즉 매우 단순하게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대 구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133

 

여러 세대에 걸친 미술사학자들에게 잔존의 이론적 퇴마의식, 잔존의 무효화를 통해 바르부르크의 저술을 원근법으로 바라보게된 것은 주로 파노프스키와 함께 였음을, 곰브리치 자신도 마지못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바르부르크의 저술을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게된 것은 파노프스키와 함께였음을...”

 

이 논문은 파노프스키의 망명(나치 독일로부터의 탈출)을 제국(대학 미술사에 대한 확실한 지배)으로 맞바꾸게 될 새로운 지적, 제도적 맥락에서의 입국비자였다.”

 

--> “...제국(아카데미 미술사 내에서 그 확실한 지배력)으로 맞바꾸게 될...”

 

137

 

그것이 고대라는 중세적 개념이 매우 구체적인 동시에 불완전하며 왜곡된 이유이다.”

--> “그것이 고대에 대한 중세의 개념이...”

 

142

 

게바르는 1887년에 르네상스의 비밀을 이탈리아인의 영혼에게 묻는다고 썼다.”

 

---> “게바르는 1887년에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의 비밀을 이탈리아인의 영혼에서 찾는다고 썼다.”

 

146

 

무엇보다도 지속적, 점진적 상호작용, 특히 움직이는 문화가 고정된 두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을 취급할 필요가 있었다.”

 

---> “무엇보다도 국가, 종교, 문화라는 세 거대한 잠재력을 분석하고, 그들 사이의 지속적, 점진적 상호작용을, 특히 움직이는 문화가 고정된 두 잠재력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룰 필요가 있었다.”

 

151

 

부르크하르트에게 위기라는 용어는 시간이 불의의 사고나 징후를 통해 자체의 힘을 생성하는 특히 효과적인 방법을 가리킨다.”

 

---> “부르크하르트에게 위기라는 용어는 불의의 사고나 징후를 통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시간의 특별히 효과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는 부르크하르트에게 역사의 실천이란 여러 시간에 걸쳐 서로 이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잠재성과 재앙을 무릅쓰고 시간의 무의식 등을 분석하는 일임을 이해하게 된다.”

 

--> “우리는 부르크하르트에게 역사의 실천이란 여러 시간에 걸쳐 서로 이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의 무의식, 곧 시간의 잠재성과 재앙을 분석하는 일임을 이해하게 된다.”

 

153쪽 부르크하르트 인용문

 

국가, 종교 그리고 문화의 지속적, 점진적 상호작용을 먼저 다루고, 특히 움직이는 것인 문화가 고정된 두 잠재력인 국가와 종교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다. 이어 역사 과정 전체를 갑작스럽게 빨라지게 하는 움직임으로 넘어간다.”

 

---> “역사가는 국가, 종교, 문화의 모든 개별적 힘을 분석하고, 그리고는 우선 이들 사이의 지속적, 점진적 상호작용을 다루고, 특히 움직이는 것인 문화가 고정된 두 잠재력인 국가와 종교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어야 하며, 이어 세계과정 전체의 가속화된 움직임에로 넘어가야 한다.”

 

154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는 모든 시간,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문명의 전통에 스며들어 있는무한한 운동인 서양문화를 이야기한다.”

 

--> “그래서 부르크하르트는 서양문화를 모든 시간,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문명의 전통에 스며들어 있는무한한 운동으로서 이야기한다.”

 

 

2: 파토스로서의 이미지

 

지진계라는 바르부르크의 유명한 메타포에 대한 중요한 논의 부분을 완전히 다시 번역해보자.

 

이 기술적 비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먼저 지진계 Seismograph 란 땅 밑의 보이지 않고 심지어 감지할 수도 없는 움직임을 기록하는 장치로, 그 움직임이 내적으로 진행되면 우리가 지진이라 칭하는 가공할만한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 19세기말 그래픽 기록 기술의 향상으로 지진계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 기록기술은 사실상 모든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탐지가능하거나 탐지불가능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psychisch 현상들 및 심층-현상 Infraphänomen’ 영역 전체를 기록된 흔적으로 망라하려는 시도였다. 이 기록의 에피스테메가 무엇을 하려했고 그것이 어떤 귀결을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에티엔--마레가 1878년 출간된 책 <그래픽적 방법>에서 만큼 잘 요약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마레의 이름은 크로노포토그래피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67년에 윌리웜 헤크셔 William Heckscher 는 시간과 운동에 대한 [마레의] 사진적 접근과 이미지의 동적 생명 bewegten Lebens’에 대한 바르부르크 개념 간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보다 최근에 필립 알랭 미쇼는 이 유비를 형상적 탈구축이라는 역설에 이르도록 전개시킨바 있다. ”여기서 형상은 더 이상 변양 Modifikation 이나 상태가 아니라 신체에서 활성화되는 에너지의 표명 Manifestation 으로 이해된다....(마레의 실험에서) 은색단추를 부착한 남자의 신체는 사진판에서는 사라진다. 마치 [바르부르크에게서] 님프의 신체가 조사된 종이 위에서 사라지고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는 형상에 자리를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체의 묘사 Darstellung 로부터 떨어져 나온 움직임의 이 공식 Formel은 크로노포토그래피적 방법의 미학적 귀결일 뿐 아니라 말 그대로 그래픽적 방법의 에피스테메적 조건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마레는 자신의 그래픽적 방법을 사진에 의거하기 이전에 일반적 형태로 발전시킨 바 있었다. 방법론적 견지에서 볼때 크로노포토그래피는 사진을 움직임이라는 방향으로 확장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통상 영화의 선사로 간주하는), 오히려 광학적으로 매개된 크로노그래피 마레가 첫번째 작업이후 그 도구를 찾고 있었던 저 문자 혹은 시간의 기입’ - 의 특별한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물생리학에 대한 그의 실험에서 마레는 1886년에 근육경련의 실제 형태일 수 있는 걸 정의하려 시도하였다. 그는 그 형태를 인간 신체의 지진계와도 유사할 기록장치의 도움으로 그래픽으로 묘사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 살아있는 유기체의 미묘한 움직임, ‘시간의 기입, 그래프 Graph를 재생할 수 있는 도구 말이다.

마레는 그래픽적 방법현상 묘사의 최적의 방식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가 자주 언급한 이런 쓰기의 방식이 역설로 귀결한다는 걸 알게된다. 곧 그를 통해 묘사될 수 있는 것 Darstellbaren 이라는 개념이 최종적으로는 갈라져 두개의 상보적 측면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크로노그램은 하나의 공식 Formel 이다. 추상적인 위치전환 Transposition 으로서의 크로노그램은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그래픽적인 것 Graphischen 에서 출발해 둘 혹은 다수의 변양들 사이의 순수한 관계의 흔적인데, 이는 다수의 특징적인 점들을 서로 연결한 선으로 묘사된다. 공식으로서의 크로노그램은 따라서 메타-재현적이고 간접적이며 순전히 상징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마레는 자신의 그래픽적 방법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 방법이 현상의 직접적 표현의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분절적이며 비연속적인 특징적인 점들이 운동의 시간적 연속성 Kontinuum에 가까워져야 한다. ‘매 순간마다 변하는 신체의 상태를 기록하고그를 통해 연속적인 그래프를 생성하는데 성공한다면 단순한 공식의 지위는 바뀌게 되는데, 그를 위해서는 연속적 표식을 갖는 기록장치의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 요구된다. 이 목표를 실현시킨 것이 다름 아닌 크로노그래피의 발명에 해당된다. , ‘움직임을 그 지속 속에서 기록하는 쓰기팔 [Stylus]로 전송 Übertragung’, 기록장치의 드럼 위에(19세기에 사람들은 종이를 그을음을 묻혀 검게 만들어 사용했다) 기록하는. 여기서 결정적인 건 이 전송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메타-재현적 형성물인 공식으로부터, 심층-재현적인 지표, 곧 물리적 연장, 직접적이고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움직임의 전송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 질문에서 결정적인 지점이다. 본래는 추상적인 공식이, 그 공식이 재현하지 않고 아니라 수반하는, 다시 말해 그 공식을 촉각적으로 전송하고, 기록하고 동시에 표현하는현상에 대한 직접적 포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암시되듯, 이와 동일한 양극성이 파토스공식다이나모그램이라는 바르부르크의 두 개념과의 관계에도 발견된다. 이 양극성은 흔적에 대한 에너지적-역동적 이해와 동시에 기관 움직임의 반사적 연장을 전제한다. 물론 기관움직임이 쓰기팔 혹은 Stilus에 의해 매개되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이 Stilus 는 미학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양극성은 나아가 그래픽적 기록의 영역을 상당할 정도로 확장시킬 것을 전제한다. 바르부르크가 말하는 지진계는 움직임 기록을 위한 장치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 마레는 매우 주의깊게 이 장치의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Pantographen, Harmiographen, Akzelerographen, Odographen, Myographen, Pneumograhen, Kardiographen, Rheographen, Hämodromographen, Limnographen, Kymographen, Thermographen, Sphygomographen, 그리고 다른 Polygraphen. 마레에 의해 묘사된 이 모든 장치들은 액체 속에서 파동의 확산부터 진동, 삼키기 또는 소리 발음에 이르는 매우 관찰되기 힘든 현상들의 시간적 성격을 재생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바르부르크의 비교가 19세기에 널리 확산된 기술적 장치의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그의 비교는 최고로 특정한 것으로 드러난다. 위대한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나 니체 는 모든 임의의 ‘Polygraphen’ 이나 ‘Chronographen’ 과 비교될 수 없다. 바르부르크가 지진계 Seismograph 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에게 시간이 더 이상 마레에게서의 시간과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에게 시간은 임의적인 양, 모든 현상들의 필연적이고 지속적인 변수가 아니라, 훨씬 비밀스럽고, 포착하기 어려우며, 동시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르부르크가 Dynamographen 라는 비유를 끌어들일때 그건 이미지의 역사에서 분석해야하는 움직임의 복합적 성격을 분명히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지들은 단 한 측면에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힘, 따라서 역동적 형태 dynamische Formen를 작동시킨다. 그것이 미술사에서, “생명잔존의 모델에서 출발해,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모델을 훨씬 넘어 숙고되어야 한다. 바르부르크가 1927년 진행한 세미나에서 지진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역사적 삶의 위협적인 성격을 가리키고자 한 것이다.“

 

'지진계 Seismograph '라는 바르부르크의 유명한 비유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위베르만은 이 비유를 19세기말 그래픽 기록 기술, 그 중에서도 쥴 마레의 "그래픽적 방법"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움직이는 인간의 신체에 은색 점을 붙여 그 점들의 궤적을 통해 신체가 없는 신체의 움직임만을 가시화시키려던 마레의 실험이 그 중심에 있다. 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번역자는 해당 문단을 이렇게 옯겼다.

 

"그러나 어떤 신체의 재현과도 관련이 없는 이런 움직임의 형성은 크로노포토그래피 방법의 미학적 결과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가 사진술에 의지하기 전에 일반적인 '그래픽방법'으로 정교화시킨 인식론적 조건으로 되돌아간다. 방법론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크로노포토그래피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사진의 연장으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영화의 전사를 본다). 이보다는 그가 초기 작업을 시작할때 적합한 도구로 찾아냈던 크로노그래피라는 특정한 광학적 매개 사례가 사진의 연장에 더 가깝다. 1866년에 동물 생리학 실험의 일환으로 그는 자신이 말한 근육경련의 '진정한 형태'를 정의하려고 했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지진계에 해당하는 기록장치를 통해 '그래프로 결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장치는 생명체의 가장 미묘한 운동 및 '시간'의 기록 및 그래프를 제공할 수 있는 도구였다."(163)


위 문단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신체의 묘사에서 떨어져 나온 움직임의 이 공식 Formel은 크로노포토그래피적 방법의 미학적 귀결일 뿐 아니라 말 그대로 그래픽적 방법의 에피스테메적 조건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마레는 자신의 그래픽적 방법을 사진에 의거하기 이전에 일반적 형태로 발전시킨 바 있었다. 방법론적 견지에서 볼때 크로노포토그래피는 사진을 움직임이라는 방향으로 확장한 것(사람들이 통상 영화의 선사로 간주하는)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광학적으로 매개된 크로노그래피 마레가 첫번째 작업이후 그 도구를 찾고 있었던 저 문자 혹은 시간의 기입’ - 의 특별한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물생리학에 대한 실험에서 마레는 1886년에 근육경련의 실제 형태 real form’를 정의하려 시도하였다. 그는 이를 인간 신체의 지진계라고 할만한 기록장치의 도움으로 그래픽으로 묘사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 살아있는 유기체의 미묘한 움직임, ‘시간의 기입, 그래프 Graph를 재생할 수 있는 도구 말이다."

 

위베르만은 마레의 '그래피적 방법'이 갖는 양극적 성격을 지적한다. 한편으로 움직임의 광학적 흔적에서 생겨난 '특징적인 점들'을 연결한 선일 뿐이기에 이는 간접적이고, 순전히 상징적인 공식 Formel 에 가깝다. 위베르만은 이를 메타-재현 meta-representation 적이라 말한다. 하지만 마레는 이 방법을 현상의 '직접적 표현'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를 위해 분절적이며 비연속적인 '특징적인 점들'을 운동의 시간적 연속체와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를 위해 개발한 것이 움직임을 그것이 지속되는 중에 Stylus '전송'해 기록하는 크로노그래프다. 이를 통해 '메타재현적'인 공식이 심층-재현 infra-representation 적인 지표 Index 가 된다.

 

meta-representation '재현-이상'으로 infra-represenation '재현-이하'로 번역한 역자는 이 중요한 개념의 함의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위베르만은 이 양극성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 공식''다아나모그램'의 양극성과 관련시켜 논의하는 대목을 역자는 이렇게 옮겼다.

 

"문제의 본질은 이렇다. 그 자체로 추상적 형성은 정확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반되는 현상과 직접 접촉한다는 것, 즉 모든 것을 한꺼번에 촉각적으로 '전송', '기입',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동일한 양극성은 파토스형성과 역량기록 dynamogramm 이라는 바르부르크의 개념에서도 발견될 것이다. 그것은 흔적이라는 현실태적이고 잠재태적인 파악방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흔적은 (비록 기술적 의미와 미학적 의미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단어인 바늘[양식]으로 매개되긴 하지만) 유기체 운동의 반사적 연장으로 간주된다." (165-166)

 

이 혼란스런 문단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 질문에서 결정적인 지점이다. 본래는 추상적인 공식이, 그 공식이 재현하지 않고 수반하는, 그 공식을 촉각적으로 전송하고, 기록하고 동시에 표현하는현상에 대한 직접적 포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암시되듯, 이와 동일한 양극성이 파토스공식다이나모그램이라는 바르부르크의 두 개념과의 관계에도 발견된다. 이 양극성은 흔적을 에너지적-역동적으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기체 운동의 반사적인 연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물론 유기체의 움직임이 기록바늘 혹은 Stilus에 의해 매개되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이 Stilus 는 미학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각한 오역은 긍정과 부정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이 비싼 책에서도 그런 오역이 심심치않게 등장해 우릴 분노하게 한다. 현재 검토 중인 곳에서는 이 문장이다.

 

"그가 묘사하는 이 모든 장치는 액체파동의 전파부터 진동, 삼키기 또는 음소의 발음현상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쉽게 관측할 수 있는 현상의 일시적 표식(특징)을 기록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167)

 

마레의 그래픽 기록이 '쉽게 관측할 수 있는 현상'을 기록하는 것이었다고? 절대 아니다.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 "마레에 의해 묘사된 이 모든 장치들은 액체 속에서 파동의 확산부터 진동, 삼키기 또는 소리 발음에 이르는 매우 관찰되기 힘든 현상들의 시간적 성격을 재생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또 다른 이런 단순-심각한 오역의 사례

 

"그것이 미술사에서, '생명''잔존'에 관한 모델에서 출발해 생물학적, 심리학적 모델에 대해 계속해서 사유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167)

 

---> "그것이 미술사에서, “생명잔존의 모델에서 출발해,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모델을 훨씬 넘어 사유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02 타임라인 : 역사학자는 심연 앞에서 변신한다.

 

역사학자는 심연의 가장자리를 걷는다.” --> “역사학자는 심연 앞에서 변신한다.”

 

부르크하르트와 니체라는 두 인물, 바르부르크에게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을 서로 다른 두 지진계로 탁월하게 설명하는 장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심연으로부터 받은 충격을 겪으면서도 그를 충실히 기록하면서 그로부터 거리를 취했다면, 니체는 그 심연을 받아들여 그 충격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빌란트 백작이자, 알베르토, 안토넬리라는, 자신이 역사 속의 모든 이름이라는 부르크하르트에게 보낸 니체의 편지 구절을 인용하며 위베르만은, 이러한 니체의 계보학적 체현 Verkörperung , 바르부르크의 유령적 체현과 나란히 놓는다. 이에 대한 중요한 구절을 역자는 이렇게 오역했다.

 

바르부르크의 시간 모델에 니체의 저술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전에 부르크하르트 그리고 역사적 방법론에 관한 이 세미나의 결론에서 제시된 위기 이야기의 결정적인, 심지어 구조적 쟁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착란에 빠진 니체의 계보학적 통합이 역사에 대한 비판을 계보학이나 영원회귀 개념을 통한 시간의 끈질긴 정교화와 분리시킬 수 없듯이, 소위 바르부르크의 유령적 통합 또는 악마적’, ‘애니미즘적통합 역시 미술에 대한 비판을 잔존이나 르네상스 개념을 통한 시간의 끈질긴 정교화와 분리시킬 수 없다.” (178)

 

번역문의 비문구조만 봐도 오역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를 교정해보자.

 

바르부르크의 시간모델에 니체 독서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바르부르크가 자신의 세미나 결론에서 부르크하르트와 위기에 대한 역사적 방법에 대해 전했던 이야기의 비판적인, 다시말해 구조적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정신착란적인 니체의 계보학의 체현이, 그의 역사비판으로부터, 그리고 계보학이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개념들을 도움으로 행한 시간에 대한 그의 끈질긴 정교화와 분리될 수 없듯, 바르부르크에게서의 유령적 혹은 악마적’, ‘애니미즘적’ - 체현 역시 그의 미술사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리고 잔존이나 르네상스 같은 개념들의 도움으로 행한 시간에 대한 그의 끈질긴 정교화와 분리될 수 없다.”

 

역시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의 차이점에 대한 다음 문장도 오역이다.

 

한 사람(부르크하르트)은 거리두기를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니체)은 영향받기를 선택했다. 한 사람은 아무 대가 없이지식을 가르침으로 바꾸었다고 바르부르크는 말한다. 겸손하고 신중한 입장이다. 다른 한 사람은 지식의 많은 부분을 요구하면서 지식을 변형시키며, 가진 모든 것을 그 일에 바치려고 했다. 야심차고 필사적인 입장이다. 한 사람은 역사를 위한 정식 을 형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간의 파토스를 전달한다.” (179)

 

앞에서는 형성이라고 번역한 ‘Formel’을 여기서는 슬쩍 정식으로 바꾼 점은 차지하고라도 위 문장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 “한 사람(부르크하르트)은 거리 두기를 선택했고, 다른 사람(니체)는 영향받기를 선택했다. 한 사람은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변신시킨다. 바르부르크는 요구하지 않으면서라고 말한다. 겸손하면서도 동시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다른 사람은 모든 힘을 통해 지식을 요구함으로써 지식을 전도시키길 원한다. 야심차면서도 필사적인 입장이다. 한사람은 역사를 위한 공식 Formeln 을 제공하고, 다른 이는 시간의 파토스가 다시 울리게 한다.”

 

이런 번역문은 어떤가?

 

시간과 운동의 관계에서 니체는 시간 차원을 마레가 제안한 운동의 명백한 (물리적) 법칙으로 축소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반대로 그는 공간과 시간 간의 역설에 기초한 운동 문제를 제기한다.”(186)

 

위 문장은 마치 니체가 마레보다 후대인이거나 적어도 동시대인 인 듯한 오해를 불러낸다. 수정해보자.

 

--> “시간과 운동의 관계라는 질문에 있어서 니체는, 시간차원을 마레가 제안할법한 운동의 물리적 법칙으로 환원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와 반대로 니체는 운동의 질문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 사이의 모순에서 출발한다.”

 

가장 결정적인 오역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역자가 문맥의 전후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문장을 기계적으로 번역함으로써 이런 번역문이 나온다.

 

운동을 시간적 관계로 번역한다? 시간적 관계를 작동하는 힘으로 제시한다? 이 모든 것이 반복 속의 차이 또는 덜 들뢰즈 식으로 시간 속의 불연속임을 알려면 이런 요구사항을 작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 이미 유령의 운동과 징후의 운동이 지배하는 시간 개념 전체를 제시하려면 (‘간격 속에서의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불연속을 도입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188)

 

---> “운동을 시간적 관계로 번역한다? 시간적 관계를 작동하는 힘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이런 요구를 내세우자마자, 반복 속의 차이 혹은 덜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불연속성이 등장한다. 우리가 이 불연속성 - ‘원격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을 도입한다면, 유령과 징후의 운동에 의해 지배되는 시간에 대한 이해가 전개되어 나간다.”

위 문단의 핵심어는 번역자가 간격 속에서의 작용이라 오역한 원격작용 Fernwirkung’이다. 니체가 이를 라틴어로 actio in distans 쓴 인용문에 번역자는 독일어를 병기하였는데, 이 인용문 다음에 이어지는 위베르만의 논의가 그와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는 걸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Die Zeit ist aber kein Continuum, sondern es gibt nur total verschiedene Zeitpunkte, keine Linie. Actio in distans.” 그런데 정작 역자의 번역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아마도 실재라는 개념을 공간의 점으로 표현한 일련의 짧고 신경질적인 얇은 선들로 이 일직선-아님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진계는 이 모든 시간 중에서 (순환하지 않고) 변화무쌍한 회귀의 시간을 기록한다. 작고 거대한 회귀, 긴 기간과 빽빽한 기간, 가속과 감속...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시간의 뒤엉킴, 즉 차이, 회귀, 시대착오의 게임을 기록하는 그래프적 형상이 될 것이다.” (189)

 

위 미친 번역을 수정해보자.

 

--> “이 비직선 Nicht-Linie 에는 신경질적인 일련의 선들로 빗금이 그어져있는데, 이는 아마도 공간지점으로서의 실재라는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 지진계는 무엇보다 순환적이지 않은 아치형의 회귀의 시간을 기록한다. 사소하고 큰 시간, 넓고 좁은 시간, 가속되거나 지연된 시간...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시간들의 얽힘인데 여기서는 차이, 회귀, 시대착오의 게임들 전체로 기록되는 그래프적 공식이다.”

 

문화의 비극 : 니체와 바르부르크

 

바르부르크에게서 니체적 흐름과 맥락을 제거하려는 곰브리치, 카시러의 시도에 맞서 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니체적 요소를 강조한다. 그것은 빙켈만의 동요없는 고요함의 미학 대신 동요하는 미학, 생명으로 끓어오르는 미학이며, 모든 문화의 근원에 비극과 비극적인 것을 놓는 태도다.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볼때 인간은 그저 철없는 존재일 뿐이다”(195)라는 기이한 문장이 등장한다. 이는 인간은 다시 아이가 될 수 없고, 기껏해야 유치해질 뿐이다의 기상천외한 오역이다. 의지와 고통의 관계에 대해 말한 니체의 인용문을 번역자는 의지는 고통 받을 뿐만 아니라 태어난다. 그것은 매 순간 가장 짧은 순간에도 가상을 출산한다”(195)라고 옯겼는데, 이 첫문장은 의지는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출산한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번역자는 원문의 시제와 태를 엉뚱하게 번역한다. 텍스트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번역의 전형적인 오류다. 예를들어 니체와 바르부르크의 상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바르부르크]는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 인식한 모든 측면을 이미지로의 접근에서 자연스레 강조했을 것이다.”(199)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그는 이미지들에서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분류한 모든 측면을 완전히 즉각적으로 높이 평가한다.”이다.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니 문장의 구조가 엉뚱하게 뒤집혀 번역된다. 예를들어 니체는 마침내 모든 감각이 결합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대비되는 시각의 아폴론적인 것에 반대하려고 했다”(200)라는 문장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는 니체는 모든 감각의 디오니소스적 통일과 대비되는 아폴론적인 시각지각 사이의 대립을 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라는 문장이라는 걸 알면 번역자는 이 맥락에서 니체의 논의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역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원문의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 번역문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예를들어 다음 문장을 보자.

 

문화에 잔존하는 것은 해당 문화에서 가장 억압된 것, 가장 모호한 것, 가장 멀리 떨어지고 가장 끈질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많이 죽은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장 깊이 파묻힌 가장 유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움직이고 가장 가까우며, 가장 충동적이고 본능적이기 때문이다.”(206)

 

원문에는 있는 주어를 생략하는 번역자의 나쁜 습성이 드러나는 사례이기도 한데, 위 문장을 재번역해보면 아래와 같다.

 

문화에서는 항상, 가장 강하게 억압된, 가장 모호하고, 가장 멀리있고, 가장 끈질긴 요소들이 살아남는다. 이는 가장 완전하게 죽은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가장 깊이 파묻히고, 가장 유령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요소들은 동시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인데, 그것이 가장 강하게 움직이고, 가장 가까우며, 가장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아직 절반도 검토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다.. 편집자가 번역 검토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봐야 겠다. 이 책은 회수해 다시 출간해야 한다. 

 

 

      3

 

이 책의 핵심인 3부에서 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의 후학들인 곰브리치와 파노프스키, 카시러가 바르부르크로부터 제거하고, 소독하고, 쫓아내려 했던 것을 다시 바르부르크의 핵심으로 되찾아오려 한다. 그것은 3부의 제목에 등장하는 Symptom 이다. 번역자는 이를 징후라고 옮겼다. 조금만 찾아보아도 징후 Sign와 증상 Symptom을 구분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징후란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외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표식들이다. 예를들어 누군가가 호흡하고, 맥박이 뛰고, 체온이 남아있다면 그가 살아있다는 징후. 이를 ‘vital sign’이라고 부른다. 증상 Symptom, 특히 여기서 위베르만이 받아들이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증상은 이와 다르다. 프로이트에게서 히스테리, 불안과 신경증과 같은 증상은 두 대립되는 힘, 성적욕망과 그에 대한 억압이 찾아낸 일정한 타협점으로 이해된다. 억압되는 리비도는 증상을 통해 일정한 타협점을 찾는다. 그것이 증상이다. 이미지가 징후라면 그것은 그 이미지가 다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기호라는 의미가 된다. 이미지가 증상이라는 건 이미지 자체가 두 양극적 힘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이 후자가 바르부르크가 보는 이미지의 중요한 특징이다.

 

1장은 바로 이런 증상의 개념을 설명하는 장이다. 그를 위해 위베르만은 프로이트에 대한 바르부르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356라오콘의 멍든 살처럼 거의 만져지지 않는” --> 대리석 조각인 라오콘의 살이 멍들었다걸 대체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이는 라오콘의 고통받는 육체처럼이다. 그리고 거의 만져지지 않는유사 촉각적인을 뒤집어 번역한 것이다.

 

문장에서 괄호는 그것이 부연하는 바가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되었을 때 제대로 번역된다. 그를 파악하지 못한 역자의 번역문에서 괄호의 위치는 많은 경우 엉뚱한 곳에 붙어있다. 예를들어

 

파토스 형성이 역사에서 (이미지에 의해 재현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반효과화의 몸짓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365)

 

--> 위 괄호는 역사를 부연하는 내용이므로 당연히 역사 뒤에 붙어야 한다.

 

02 괴물의 변증법 또는 모델로서의 뒤틀림

 

여기서 위베르만은 프로이트의 스승인 샤르코의 히스테리 연구를 가지고 와서 프로이트의 증상 개념이 가진 착종, 뒤틀림을 더 심화시킨다.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의 기이한 몸짓, 사전에 범주화된 일정한 형식의 도판으로 환원시키려 했다면, 프로이트는 거기서 대립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 벗기려는 남성과 그에 저항하는 여성의 몸짓.

 

그의 이미지의 역사는 르네상스의 형태적 발명이라는 쾌락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타나는 기억에 보존된 죄의식까지도 분석하려고 한다.” (369)

 

--> ‘르네상스의 형태적 발명이라는 쾌락’??? 이런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나오면 십중팔구는 오역이다. 이는 르네상스가 형태적인 발명들을 즐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적인 발명을 즐기던 르네상스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때로 역자는 원문을 병기하고서도 그를 엉뚱하게 번역한다. 예를들어 움직이는 이미지로 설명된 것, 그가 아틀라스로 만드려고 한 것, 사실상 서양 문화의 계보를 담은 앨범은 바로 징후적 운동 mouvements-symptomes 이다.”(373) --> “운동적 증상

 

샤르코와 리쉐가 쓴 <미술 속의 악마들>...” (375) ---> “미술 속의 귀신들린자들

 

샤르코와 바르부르크의 방법의 차이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가장 기본적인 오역이 등장한다.

 

다른 한편에는 (샤르코의 도표에서처럼) 가로세로 좌표를 고치는데 애를 먹는 불규칙한 뒤얽힘, 움직이는 뱀 무더기가 존재한다.”(378) --> “샤르코의 도표에서와는 다르게

 

환자의 병리적 명칭을 일반적인 용어로 옮겼다.

 

“‘반쯤의 민감성반쯤의 마비가 풍부한 샤르코의 치료소는 분명 그렇게 보도록 프로이트를 준비시켰을 것이다.”(387)

 

“Hemiparesthesia”라는 의학용어는 반감각이상증’, ‘편측감각이상증이라고 번역된다. 위 문장은 그래서, “‘편측감각이상증환자가 많았던 샤르코의 치료소가 프로이트로 하여금 그런 시선을 갖도록 준비시켰을 것이다.”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의 몸짓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했다면, 프로이트는 그를 대립적인 것의 공존으로서 양극성의 축 남성적 판타지와 여성적 판타지 으로 설명한다. 위베르만에 의하면, 이러한 시각이 바르부르크에게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에서 작동한다. 기를란다요의 플스코화에서는 바닥 아래에서 성당위로 올라오는 메디치 가문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역자는 프로이트의 전위 Verschiebung치환이라고 옮겼다. 이를 통해 전위가 함축하는 이동과 이주, 변신의 함축이 단지 자리를 바꾸는 것 정도로 축소되어 이해된다.

 

프로이트의 짧은 논문 상징과 증상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다음 문장은 전후관계를 전도시켰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드는 사례는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렇게 인사하는지 안하는지를 관찰하고 그에 따라 그와의 관계를 끊기도 하는 일종의 신경증환자다.

 

가령 주변의 모든 것을 감염시키는 (치환은 일종의 전염병이다) 의미의 네트워크 전체를 배치하고 강박관념이 무한한 인사라는 궤변을 발전시키는 순간부터 징후가 된다.”(392)

 

---> “가령 누군가가 강박적으로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일]의 끝없는 궤변을 발전시켜, 그를 통해 주변의 모든 것을 감염시키는 의미 네트워크를 전개시키면 (전위는 일종의 전염병이다) 상징은 증상 Symptom 이 된다.”

 

모두가 공유하며 그에 따라 사회적 의미작용이 이루어지던 상징이 이런 과정을 거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면 그로부터 증상이 생겨난다. 이 구절을 역자는 이렇게 옮겼다.

 

상징은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마찬가지로 징후는 철저한 기호체계’, ‘종합’, ‘판독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337)

 

---> 이해할 수 없게된 상징으로서 증상은 그 자체로 끈질긴 기호화‘, 종합 혹은 판독으로는 접근할 수 없게 된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하게, 그래서 이해되지 않게 된 번역문 중 하나의 사례다.

 

퇴행과 감각적 이미지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기입과 기억의 흔적이라는 (메타심리학적) 문제제기를 막지 못했다.” (394)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기입‘???

 

---> “퇴행과 감각적 이미지도 프로이트로 하여금 무의식적 기입과 기억흔적이라는 메타심리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걸 막지 못했다.”

 

03 이미지도 기억 Reminiszene을 겪는다.

 

역자는 Reminiscence무의지적 기억이라 옮겼다. 정당한가?

 

역자는 제몬의 Engramm기억의 흔적으로, Dynamogramm역량기록으로, Pathosformeln파토스 형성으로 옮겼다.

 

첫 문단에서부터 오역이 출현한다.

 

그가 제몬으로부터 기억의 흔적과 기억이미지라는 용어를 차용했든 또는 헤링으로부터 기억이 조직화된 물질의 일반적 기능이라는 가설을 빌려왔든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은 그가 스스로를 일원론자monist‘라고 평가한 관점에 따라 정신적 차원이 어느 정도나 상상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것도 또 정반대로 이미지적 실체를 정신적 힘과 분리시키는 것도 아니었다.”(397)

 

여기서도 번역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오역이라는 원리가 들어맞는다. “정신적 차원이 어느 정도나 상상되어야 하는지를”???? 이 기이한 문장에서 하나하나 따져가 보면 이 문단 전체가 오역임을 알 수 있다. 바르부르크가 스스로를 일원론자라고 평가했다고? 수정해보자.

 

--> “그가 제몬으로부터 엔그램 혹은 상기이미지 Erinnerungsbild 라는 용어를 빌어오거나 헤링으로부터 기억이 조직화된 물질의 일반적 기능이라는 가설을 빌려왔다는 것, 이 모두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르부르크의 눈에 영혼적 차원 psychische 은 그 자신이 일원론적이라 지칭한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영혼 Psyche를 그 살로부터, 혹은 역으로, 이미지실체를 그 영혼적 힘과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 문단은 므네모시네 아틀라스서문과 관련된 논의다. 역자는 이렇게 번역했다.

 

바르부르크는 <므네모시네 아틀라스>근본개념모음집에서 이미지의 본질미리 각인된 것 Vorprägungen“의 토대를 양식으로 형성‘(우리는 전환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함으로써 구성된다고 주장했다.”(397)

 

“’미리 각인된 것의 토대를 양식으로 형성한다고? 당연 오역이다. 특정한 양식을 규정짓는 선 각인의 배후를 형성하는 것이 이미지라는 뜻이다.

 

--> “바르부르크는 <므네모시네>를 위한 근본개념들텍스트 모음에서 그것[’영혼적 힘 psychische Kräfte]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특징지운다. , 한 양식 속에서 선 각인들 Vorprägungen“의 배후를 형성하는 우리를 이를 재형성 umbilden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데에 이미지의 본질 Bilderwesen’이 있다고

 

히스테리 발작은 왜 일어나는가? 그건 환자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환자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는 억압된 이미지에 의해 환자의 신체가 영향받기 때문이다. 과거의 억압된 욕망이 사라지지 않은 채 환자의 신체를 발작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이미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몸짓은 파토스적 pathetisch 이다. 이와 관련된 문장을 역자는 이렇게 옮겼다.

 

그러한 고통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환자의 움직이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400)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육체다. , “~ 표현하는 것이 이미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환자의 육체다가 맞다.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독일어 인용문은 거의 다 오역이라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이 절 프로이트 인용문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증상과 기억이미지를 비교하는 대목이다. 먼저 역자의 번역을 보자.

 

요컨대 이 모든 히스테리 징후는 기억 이미지와 결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유일한 차이점은, 히스테리 징후는 겉보기에는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반면, 우리가 매우 잘 기억하듯, 우리 자신이 장면과 생각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로 히스테리 징후로까지 확장되는 감정적 경험과 정신적 행동이 남겨놓은 변하지 않는 기억의 잔재의 끊임없는 연속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억의 상징이다.” (401)

 

프로이트의 인용문 전체를 재번역해보자.

 

--> “엄밀히 말해 히스테리 증상은 기억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작동하지 않는다....차이라면 히스테리 증상이 겉보기에 자발적으로 spontanen 출현하는 반면, 기억에서는 우리가 장면과 생각들을 스스로 생산해냈다는 걸 잘 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사실상 정동에 가득찬 체험의 변하지 않는 기억 자연물들의 끊임없는 계열과 생각하는 행위가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그 기억의 상징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바르부르크를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위베르만은 이로부터 잔존 개념의 두 근본특성을 도출해낸다. 이 중요한 부분도 오역되었다.

첫번째로 무의식적 기억은 진짜든 환상이든 잃어버린 원천의 사후 死後 작용으로 발생하는 징후적 순간에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무의식적 기억은 여러 이질적 시간성과 쓰기 체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시대착오의 매듭으로 징후 속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402)

 

--> “[그 첫 번째 근본특성은] 무의식적 기억은 상실된, 실재적이거나 상상된 근원의 사후 死後 작용들처럼 등장하는 증상의 계기들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두 번째는 증상들 속에서 무의식적 기억은 다수의 시간과 다수의 이질적인 기록의 체계가 서로 뒤얽히는 시대착오의 매듭으로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

 

역시 역자의 프로이트 인용문 번역이다.

 

환자는 무엇이 망각되고 억압되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그는 그것을 몸짓으로 표현한다. 망각된 사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기억의 형태가 아니라 행동의 형태 속에서이다.” (404)

 

--> “피분석자는 망각된 것과 억압된 것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그를 행한다 agiere. 그는 그것을 상기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서 재생산한다. 그는 자신이 그를 반복한다는 걸 당연히 알지 못한 채로 그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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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imer 2023-05-1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저와는 전혀 다른 하위의 것을 만든셈. 번역가의 양식의 문제네요...

ㅈㅂㅇ 2023-08-05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이 틀렸다고 하는 번역은 다수가 틀린게 아니라 걍 다르게 번역한거네요.
알라딘에서 번역 틀렸다고 앵앵대는 얼치기들이 어떤 수준인지 님이 보여주고 있음.

ㅁㄴㅇㄹ 2023-12-19 14:22   좋아요 2 | 수정 | 삭제 | URL
김남시면 유려한 번역가이자 평론가로 유명한 사람이잖음? ㅋㅋㅋㅋ 시각예술 분야로는 그래도 권위 있는 사람인데 ‘앵앵대는 얼치기‘ 는 아닌데 ㅋㅋㅋㅋ
 
잔존하는 이미지 -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와 유령의 시간 NOUVELLE VAGUE 8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김병선 옮김 / 새물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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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참 좋지않다. 비싼 책 값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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