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세미나 교재 중 하나였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서문엔 이 책을 저자의 지명도와 제목만 보고 구입했을 독자들을 위한 경고 - 내게 그건 '조롱'으로 느껴졌었는데 - 가 쓰여있었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따위의 실용적 지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다루고 있음을 마치 변명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이 바로 그 '제목'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 중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 책 역시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저명한, 세계적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저자와 Passion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선정적 제목'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도 추상적인 시스템 이론의 주창자 루만의 이 책이 몇판을 거듭할 수 있게 했다.
루만에 의하면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의 비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낸 소통의 코드다. 그리고 이는 특히 서구에서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열정과 낭만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의미론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엽 소통이 개인화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 관찰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세계연관의 준거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용하고, 가치있는 사실들에 준거하는 대신, 그러한 사실들 혹은 사태들이 개인에게 갖는 개인적, 사적 의미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이처럼 소통이 개인화됨에 따라 서로 관찰할 수 있는 전달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그 한계에 봉착하고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루만에 의하면 새로운 ‚상징적으로 생겨난 소통매체’인 ‚사랑’을 등장시키게 된 원인이었다. 사랑이라는 소통의 코드는 이제 사람들에게 관찰될 수 없는 타인의 ‚체험’의 차원을 관찰이 아닌 추측과 소망 등을 통해 추구하게끔 만든다.
열정이자 열병, 광기, 기적, 설명되지 않는 그리고 이유없는, 불가항력의, 한마디로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법칙과 사회적 통제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이런 사랑의 코드가 사회 속에서 용인되고 특별한 지위와 위치로써 미화되고 찬양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루만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러한 특별한 소통적 코드인 사랑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소통적 매체라는데에서 찾는다. 사랑은 그를통해 정체된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하는 소통적 코드라는 것이다.
만일 사랑을 다만 성적욕구와 성적 본능의 충족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로부터 그것의 광기적, 열정적, 비이성적, 충동적, 설명되지 않는 불가항력적 감정이라는 의미론을 제거해버린다면, 사랑은 애초에 사회의 소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소통적 매체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사랑이 이처럼 비이성적, 광기적, 충동적 의미론을 통해 기능하기를 원한다!
사랑이 일상적인 관찰과 소통의 차원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상대, 즉 타자의 체험의 차원에의 동참을 요구하는 코드라고 한다면,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이러한 코드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유기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관찰되지 않는 상대의 개인적, 사적인 체험에의 참여는 서로에게 함께 있고, 함께 나누고, 함께 모든 사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공유하게끔 요구한다. 섹스와 육체적 접촉은 사랑이라는 소통 코드의 이러한 요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나만의 체험이 곧 동시에 내 파트너의 체험이 된다’고 하는 섹스에서의 경험은 바로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섹스, 육체적 접촉은 이를통해 곧 개인의 내적인 체험의 차원을 공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 매체로서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매우 힘든 커뮤니케이션의 상황들을 발생시킨다. 루만에 의하면 그건 크게 두가지 사정때문이다.
첫째, 친밀한 소통관계의 조건으로써 이 사랑이라는 소통에의 참여자는 자신이 파트너와 그 파트너와의 관계로 인해 이전의 오랜 습관과 이해와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그 사랑이라는 관계로 인해 자신이 '변화' 했음을 파트너에게 읽히고 보일 수 있도록 해야하는 행위자다. 그는 사랑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를 '행동'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점에서 행위하는 자로써의 나는 나의 파트너로부터 관찰당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편차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하는 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들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킨다고 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오늘날 사랑의 의미론을 이루는 개별적, 친밀한 관계라는 소통의 코드가 위 두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복잡하고도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지 보여준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면 차에 함께 타 그를 관찰하고 있는 파트너는 그의 운전방식에 불만을 갖고 그것이 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파트너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귀결된 것이라고 여긴다. 행위자를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는, 사랑의 코드의 의미론이 요구하듯이, 그 행위자의 행동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를 비난하는 것이다.
행위와 관찰 사이의 간극과 편차,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랑관계의 갈등은, 관찰자로써의 파트너가 나의 행위를 특별한 사랑의 징표로 간주하는 한, 그러나 한편으로 행위자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상황의 요구들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받게 될수록 더욱 벌어지고 심해진다.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인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는다.
이러한 사랑의 의미론 속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사랑을 늘 행위를 통해, 그것도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아니라 늘 새로운 행위를 통해 관찰자인 파트너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 그만의 내적 체험, 그만의 독특하고 구별되는 내적 세계의 특수성,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함을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예를들어 유부남 혹은 유부녀는 파트너로부터 남편 혹은 아내로부터의 이혼을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표로써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코드는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속에서 커다란 딜레마를 낳는다. 관찰자의 주관적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행위를 통해 관찰될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하는 행위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자의 고유한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사랑받는 자의 그것으로 대체하기를 요구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관계가 형성되게 되었던 사적인 개인들의 개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남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받고 소통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게된 행위자는 이제 그를통해 오히려 자신의 개별성을 포기하거나 타협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하는 것이다.
루만은 이런 딜레마의 해결책으로, 사랑이라는 소통의 참여자들이 이러한 '행위자'와 '관찰자'의 역할을 균등하고 적절하게 서로 공유하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저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다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