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프리카에 탐닉한다 작은 탐닉 시리즈 5
정환정 지음 / 갤리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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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새로운 만남에 탐닉하다
- 정환정, [나는 아프리카에 탐닉한다]

: <탐닉> 어떤 일을 몹시 즐겨서 거기에 빠짐.

 ‘탐닉’, 이 얼마나 탐닉스러운 단어인가? 여기서 ‘탐닉스럽다’란 습관, 집착, 몰래보기 혹은 몰래하기 등과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흥분과 설렘을 동반하는 상당히 흡입력 있는 느낌의 단어. 어떤 계기로 인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특정분야에 관심을 표출하게 되는 다분히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시대엔 탐닉할 수 있는 대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별화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 바로 ‘탐닉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인기 있는 블로거들의 글을 ‘탐닉’이라는 주제로 엮어 내고 있는 갤리온의 ‘탐닉 시리즈’ 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어느 것부터 골라 읽어 볼까’ 하는 즐거운 고민 끝에 [나는 아프리카에 탐닉한다]를 제일 먼저 집어 들었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

 여행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지. 세상엔 참 배부른(?) 부류의 사람들이 많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물론 눈치백단 직장생활로 살뜰히 모아온 돈을 여행을 위해 투자하고, 돌아오면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며 기꺼이 눈치보기를 다시 시작하는 소시민형 여행 마니아들껜 미안한 발언이지만- 오랜 기다림과 준비 끝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깨달았다. 곧, 반드시, 다시 떠나고야 말리라고!

  여행은 ‘훌쩍, 다녀온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지, 그 지역의 위험요소나 흥밋거리가 무엇인지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여행지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새로운 공동운명체를 형성하게 된다. 말보다 느낌이 먼저 통하고,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게 되며, 국적과 성별을 초월하게 되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아프리카에도 천혜의 대자연과 다큐멘터리에서 봐오던 진귀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래도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있다.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벗어던지고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버는 원주민을 보며 상술에 길들여졌다고 씁쓸해하는 건 어쩌면 오만한 편견은 아닐까.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대가로 이 생의 삶을 부지런히 이어가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사진을 찍으라는 듯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게 된다는데, 응당 대가를 치뤄야 한단다. ‘당했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영혼을 판(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 나간다고 오래전부터 믿고 있음) 대가이니 그냥 한 번 호탕하게 웃어넘기며 값을 치르는 것도 손해 보는 일만은 아닐 듯 싶다.

 그렇게 값나가는(?) 사진을 카메라에 담으며,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만 봐오던 평면 영상을 바로 눈앞에서 입체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것, 여행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생생한 감동이다.

 당신에게 아프리카란?

 요즘 나는 태어나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아프리카에 흠뻑 빠져있다. 왜, 라고 묻는다면 선뜻 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수학문제처럼 정해진 해답이 없기에, 내 안에 무수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에 ‘아프리카’는 동경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다. 기나긴 비행시간, 타는 듯한 무더위와 목마름, 조악한 생필품과 청결하지 못한 숙소,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맹수들… 아프리카로 떠나지 못할 이유를 대라면 숨 쉴 틈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로 떠나고픈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저자가 보여준 바다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뜨거운 아프리카에 한 줄기 단비를 내려주는 듯했다. 태양만큼이나 정열적인 그들만의 절대색감과 절로 흥을 돋우는 리듬감각에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아프리카에 형형색색의 칼라를 부여해준 저자의 순간 포착 능력에 감사하며, 미지의 땅에 대한 목마름을 잠시나마 잊어본다.

 여행에세이를 따라가다 보면 가끔 실망도 하게 된다. 하지만, 기억하시라! 이 에세이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개성, 문체, 감정 등을 싣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을. 고로, 나에게 맞고 안 맞고는 논할 문제가 아니다. 가만히 저자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면서 ‘이건 맞다, 이건 아니다’ 라고 평가하지 않듯 이 책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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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썸 토탈 아이 퍼펙터] 체험단 당첨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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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알라딘 화장품팀입니다.

베리썸 토탈 아이 퍼펙터 체험단에 응모해주신 고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첨되신 고객님들께서는 2월 19일까지 다음 항목을..
본 당첨자 발표란 하단에 "비밀댓글" 로 설정하여 코멘트 남겨주세요~
2월 22일 이내 제품 받아보실 수 있도록 발송해드리겠습니다.

댓글에 적어주실 항목 : 알라딘 이메일 계정 / 수취인 이름 / 주소 / 연락처

당첨되신 고객님들 축하드립니다. ^^
그리고 주의해 주실 점!

1. 체험단 상품 수령하신 후에는 꼭 사용해보시고 수령 2주 이내에 마이리뷰를 올려주세요!

추후 이벤트 당첨자 선정시 제외되실 수 있습니다~

2. 꼭 정해진 날짜를 지켜 수령지 정보를 남겨주세요~

기간이 지나면 체험단 상품을 보내드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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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황홀한 여행
박종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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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는 나라, 이탈리아
-박종호,[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만 살아갈 것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들!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피사, 밀라노 등 이름만 들어도 도시 자체가 나라로 기억될 만큼 유명한 곳이 많은 이탈리아. 그 곳 현지인들은 꿈같은 이 도시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황홀한 여행』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이 좀 밋밋하다 생각했다. ‘황홀’이라, 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단어던가? 허풍과 과장이 살짝 가미된 듯 멋없는 이 단어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온돌처럼 나를 달뜨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과장도 포장도 없다. 이 책에는 오로지 이탈리아에 대한 감격스러운 마음과 진심어린 사랑이 있을 뿐이다.

 15년 동안 20여 차례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박종호.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어떤 이유로 이탈리아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직업은 정신과 의사. 이력을 살펴보니 음악평론가 겸 오페라 평론가로 음악과 관련한 책을 이미 여섯 권이나 출판한 작가이기도 했다. 불쑥 선입견이 고개를 든다. 서점에 즐비한 여러 여행서적처럼 『황홀한 여행』역시 지나친 감상과 들뜬 마음만 가득한 그저 그런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우려를 보기 좋게 무너뜨린 건 이탈리아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사랑이었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죽은 후 묻히고 싶은 나라, 아니 그렇게 될 나라다.

 나는 내가 죽거든 유골을 베네치아 앞 바다,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에 뿌려달라고, 그때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두곤 한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유언이며 지금 내가 바라는 마지막 사치이다. 지상에 왔던 흔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다만 내 영혼이 아드리아 해에 누워서 그 핑크색 가로등의 고독을 계속 음미하고 싶을 뿐이다. (p.67)

 기존에 출판된 여행서적 중에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에 반해『황홀한 여행』은 예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통해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어느 곳을 펼쳐 읽더라도 예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가득하다. 단 몇 번의 방문으로 느낄 수 있는 감탄을 넘어 도시 곳곳의 매력과 고대의 예술혼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까지 더해져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런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탈리아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같은 곳을 15년 동안 무려 20여 차례나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를 이처럼 자주 찾게 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 저자가 접했던 음악, 미술, 영화, 책 등 예술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를 여행사의 상품으로 처음 접하고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는 박종호 작가. 그때부터 그는 가이드 없는 혼자만의 여행을 철저히 준비해왔고, 이탈리아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섭렵했다고 한다. 이 말은 허언이 아니다. 저자는 차근히 쌓아올린 내공을 책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덕분에 독자는 앉은 자리에서 이탈리아 도시 곳곳의 역사와 오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산마르코 광장의 300년도 더 된 카페에 앉아 그 옛날 바그너가 바라보던 풍경을 똑같이 볼 수 있다면, 카사노바가 투옥 중에도 간절히 맛보고 싶어 하던 플로리안 카페의 아라비카 커피를 직접 혀끝으로 느낄 수 있다면……. 이런 짜릿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이탈리아는 고대 예술가들의 걸음걸음을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는 감격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련되지도 않고 부유해 보이지도 않으며 키가 크지도 않고 많이 배운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주눅들게 하는가? 그들의 배경이다. 그들은 남루하고, 때로 버릇없고 종종 시끄럽지만, 조상들이 만든 이 도시는 그들로 하여금 가슴을 펴고 걷게 만든다.(p.181)

  우연히 발걸음을 옮겼다가 나머지 일정은 모두 취소한 채 며칠씩 한 마을에 머물러 버린다. 작곡가 푸치니를 만나기 위해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마을을 찾아 무작정 달려가 본다. 현지인조차 운전하기를 꺼려하는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의 아찔한 도로를 직접 운전하다 뒤늦게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쌓이는 동안 이탈리아는 저자의 가슴 속으로 알알이 박혀 들어와 그를 살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 버렸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세밀한 부분까지 눈 귀 머리 가슴은 모두 기억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탈리아를 떠올리는 저자의 마음이 얼마나 황홀한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황홀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황홀’이란 단어가 얼마나 생생한 황홀경을 담고 있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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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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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스카, 네 열정을 응원해!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한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기묘하고도 기막힌 이야기.
 자신의 생활 영역 어느 구석에 외계의 공간 하나 떡 하니 마련해 놓고 혼자만 알 수 있는 비밀의 문을 통해 이곳(현실)과 저곳(외계)을 자유롭게 오갈 것 같은 오스카 와오. 요정어와 외계어를 툭툭 내뱉는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일단 돌진하고 본다. 소설쓰기와 책읽기에 빠져들면 지구가 두 쪽이 난다해도 꿈쩍하지 않을 녀석. 오스카 와오는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지금껏 체계화시켜왔던 일반적인 혹은 복잡다단한 소설 속 주인공의 계보를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쪽,에 이 녀석의 자리를 배치해야 한담? 참 난감해진다.

 오스카를 만나는 즉시 당신은 정신을 ‘완전무장’하거나 혹은 ‘무장해제’ 해야 할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여기저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 사건이 축제날 폭죽처럼 마구 잡이로 펑펑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제 마지막 한 방이 당신 코앞에서 갑작스레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짝 경계를 하거나, 아예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어떤 놀라움이 당신을 소스라치게 만들지라도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어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몰려도 살아날 궁리를 하지 않는 오스카 와오. 대신 끝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가장 멋들어진 오기를 선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후회 없이 죽기 위해서였을까? 결론이 궁금하다고? 그렇게 급할 건 없지 않은가. 이미 제목에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고 밝혔으니 결론은 짐작한 바와 일치한다. 다만 이 녀석이 살아온 과정이 얼마나 놀랍기에 ‘놀라운 삶’이라고 단정 짓는지 그 과정부터 음미해 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아벨라르(할아버지)-벨리시아(엄마)-오스카 와오(나)와 롤라(누나)로 이어지는 데 레온 가문의 3대에 걸친 저주(이하 푸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푸쿠의 발로인 트루히요 정권과 그로 대변되는 어긋난 남성성이 맞물리면서 ‘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부각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독재로 다스렸던 트루히요 정권 하에서라면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가정이 하나도 없다. 여자라면 누구나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트루히요의 여자일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부인과 딸을 지켜내기 위한 아벨라르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여기서부터 데 레온 가족에게 뻗치는 푸쿠의 역사가 시작된다. 마지막에 태어난 벨리시아 역시 가문의 우성 유전인자를 부여받아 푸쿠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철저하게 버림받는 벨리시아. 그 중 단연 으뜸은 갱스터에게서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이 그 악명 높은 트루히요의 여동생 남편이라니. 사탕수수밭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푸쿠의 정체는 앞으로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함구해 두겠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가문의 유전적 혜택과는 동떨어진 14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비호감 외모의 청년으로 자라난다. SF에 심취한 꼴통(p.32)에 장르소설 절대 마니아(p34)다. 종말론적 공상(p.41)을 즐기고, 롤플레잉게임과 만화책, 판타지 소설(p.311)에 빠져 산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 키스 한 번 못해본 숙맥,을 가장한 여자 밝힘증 환자다. 아무 여자한테나 성급하게 들이댄다. 그것도 여자가 아연실색할만한 ‘독수리 오형제’에 나오는 대사를 읊어가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오스카는 그런 녀석이다. 자신의 상황과 상대방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단 부딪쳐 본다. 열이면 열 아니 백이면 백, 그를 아는 모든 여자들은 그를 싫어한다. 죽는 날까지 한 번도 여자를 품어보지 못할 거라는 공포를 늘 안고 살지만, 표면적으로 오스카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 놈의 무모한 용기는 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여자들 앞으로 불쑥불쑥 존재를 드러낸다.

 책을 읽노라면 오스카의 이런 외형적 악조건에서 시작된 애정 불운의 운명(p.30) 역시 푸쿠의 서막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트루히요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가 휘두른 푸쿠 또한 사라졌다 할지라도 푸쿠는 세대를 걸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이본 피멘텔과 같은 운명의 여인 같은 모습으로.
 이본은 푸타(창녀)계의 퇴물에 해당하는 서른여섯 살의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마치 트루히요를 연상케 하는 카피탄이라는 경찰관 남편이 있다(물론 처음엔 그저 그렇게 주위를 맴도는 남자친구들 중 한 명이었지만). 늘 사랑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오스카가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이본을 놓칠 리 없다. 이번만큼은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느릿하게 접근을 시도한다. 경찰관이 몇 번이나 경고(사실은 협박과 폭력)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오스카 앞에 화려하게 등장한 사랑의 실체는 그의 눈과 귀를 모두 멀게 한 것인가. 라 잉카(할머니)의 말도 벨리와 롤라의 말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어도 좋아’라는 일념으로 앞으로만 돌격하는 오스카의 사랑은 극(단)적이다. 사탕수수밭에서 처절하게 외쳐댄 사랑고백을 듣고서야 오스카가 바라던 진정한 사랑이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가 꿈꾼 사랑은 트루히요처럼 욕정을 채우는 사랑이 아니었다. 연인들만이 알 수 있는 친밀한 조우(p.389), 누군가의 절대 권력으로 어쩔 수 없이 결박당하는 사랑이 아닌 꿈결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열망하던 ‘더 강력하고 따뜻한 세상(p.385)'을 죽음 직전에야 깨닫게 된 오스카 와오. 진작 그 황홀경을 경험했더라면 오스카는 과연 끝까지 저돌적인 정면 승부를 펼쳤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됐다.
 오스카라는 캐릭터가 독특하다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알았지만 이렇게 ‘똘’기로 똘똘 뭉친 녀석일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남은 자의 가슴에 선명한 아픔을 새기고 떠난 오스카 와오. 전 생애를 걸쳐 사랑을 향해 고군분투한 그의 열정에 나름 고귀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쯤에서 롤라의 과거 연인이자, 한때 오스카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이 책의 화자 유니오르를 소개해야겠다. 그의 눈을 통해 속속들이 드러나는 데 레온 가문의 3대에 걸친 저주는 분명 공포스럽고 극악무도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저주 앞에서 벌벌 떨기보다 오히려 흥미롭게 빠져들게 된다. 바로 유니오르의 유쾌한 화법 덕분이다.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담꾼처럼 때론 거칠고 때론 진솔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스카의 삶 전반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은 아픔을 승화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가 배어있다. 급박하게 소용돌이치는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벨리시아를 악인으로부터 구출하면서 데 레온 가족의 사파(안전하게 지켜주는 주문)역할을 자청한 라 잉카의 조용한 행보 역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와 주술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도 중심에는 아벨라르, 벨리시아, 롤라, 오스카, 유니오르의 연애사가 있음을 잊지 말자. 사랑 앞에서라면 무턱대고 용기를 발휘하는 기묘한 녀석, 그럼에도 지지리 연애운이 없는 녀석. 그의 삶에 이렇게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이 꿈꾸는 사랑에도 반전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정말이지, 목숨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마음속에 그득 들어찬 사랑에 대한 열망을 당신은 어떻게 감당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오스카 와오를 만나 그 길을 찾아 나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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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숲
고은 지음 / 신원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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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 권의 책에 기뻐하라
 - 고은, [개념의 숲]을 읽고

  ‘오늘도 나는 가르치는 자이기보다 배우는 자의 축복 속에 있다(p.209).'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 책 [개념의 숲]. 여기에는 세상 개념에 대한 단상을 모아 놓은 ‘개념의 숲’과 철학적 에세이를 담은 ‘지평선’이 수록되어 있다.

 고 시인 이전에도 여러 작가들이 개념을 재해석해 정리한 책을 집필한 바 있다. 몇 권의 책을 읽어 봤지만, 솔직히 이번처럼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전을 뒤적이게 만드는 책. 한 줄 이해하고 나면 다른 한 줄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잠시 쉬었다 가기를 청한다,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할라치면 다시 첫 줄로 돌아가게 만든다. 시인의 메시지는 개인과 한 국가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주와 맞닿아 있다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의 경험과 사유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자유의 날개를 달고 경계 없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 이 거대한 메시지는 마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고귀한 성역과도 같다.
 한 마디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된다. 바로 시인이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한 듯 우주와 영적인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시인의 체험과 깨달음이 알알이 박혀있는 글들이기에 쉽게 손에서 눈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 단번에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내 경험과 사유의 세계가 깊어지는 어느 날, 이 에세이가 삶에서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편의 그림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다. 글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한 사람의 영혼을 온전히 투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가벼이 보고 넘길 수 없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은 없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생각을 붙들어 두게 만드는 그림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표지에 등장한 ‘인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에세이에 나오는 ‘라이보리’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제멋대로 해석해 본다. 사방 30cm, 깊이 50cm의 모래 상자 안에서 라이보리가 살아남기 위해 3개월 동안 뻗어 내린 뿌리의 길이는 무려 1만1,200km라고 한다. ‘그 네모진 상자 안에서 영양분을 필사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그 기나긴 뿌리의 헌신적인 역할이야말로 한 생명의 숨은 바탕이었다(p206)고 시인은 말한다. 땅위로 보이는 굵은 가지와 탐스런 열매, 무성한 잎들을 피워내기 위해 땅 밑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고와 열정이 필요한 지 ‘인내’라는 작품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반성을 하게 된다. 존재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지 않고 그저 무언가의 배경이 되어 내면을 다스려본 적이 있었던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애국지사를 위해 최소한의 예우라도 갖춰본 적이 있었던가. 보는 이 하나 없어도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기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깨닫지 못하고,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지나친 일들이 많기만 하다.

 고전속의 금언들이 이처럼 이토록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고전을 넘어서는 힘이다(p.220)라고 시인은 말한다. [개념의 숲]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온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고 시인의 세계를 살펴본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려 했다. 그랬더니 받아들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읽고 또 읽을수록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에세이를 수록한 ‘지평선’에서는 느낀 바가 실로 크다. 오랜 연륜이 묻어있지 않다면, 그 세월보다 더 깊은 억 만 겹의 사유가 있지 않았다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이치들. 빈곤한 내 영혼이 고 시인을 통해 융숭하게 대접받은 기분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읽은 것보다 읽을 것이 얼마나 더 많은지.
 읽을 것이 없는 것.
 더 이상 읽어 행복할 필요가 없는 것.
 읽어 오늘의 영혼이 어제의 영혼이 아닌 경지로 나아가는 축복이 제거된 것.
 그것들이 내 지옥이리라. 한 권의 책 기뻐라.(p.245)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개념의 숲] 한 권에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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