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억을 추억하며 사는 나이
- 박완서, 『호미』를 읽고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참으로 고마운 계절이다. 나는 요즘 오후 한 시가 되면 어김없이 안방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동안 햇살이 환하게 비쳐드는 때에 맞춰 책을 읽는다, 햇살을 읽는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도 이 기운 아래서 라면 한 풀 기세를 꺾는 듯하다. 자연이 주는 선물, 햇살이 주는 평온한 오후를 나는 사랑한다. 딱 좋을 만큼 자연의 기를 받고, 딱 좋을 만큼 사람의 기를 받는 시간. 오늘 나를 다독여준 이는 박완서 작가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작가가 건져 올린 일상의 단편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산문집 『호미』. 언젠가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몇 장을 읽고 나서 바로 사들고 온 책이다. 매서운 겨울을 살아내게 하는 한 줄기 빛처럼 허전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준다.
‘거의 다 70이 넘어 쓴 글' 이라며 수줍게 첫 머리를 여는 박완서 작가. 살아온 삶 자체가 역사이고 기록일진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작가 역시 나이로 인해 위축되고 적잖이 부담도 되는 모양이다. 혹여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꺼내놓는 이야기는 작가의 기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작가의 연륜을 담은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마당을 일구어 자연을 들여놓았다. 작고 미미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질서정연한 삶 속에서 소스라치게 전율한다. 느리고 끈기 있게 두루 살핀 결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자연은 찬탄해 마지않을 존재임을 몸소 체험한다. 자연이 건네는 위로는 그 어떤 울림보다 깊고 평온한 것임을 작가는 느린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봄이 오면 꽃 출석부를 부르고 다시 호미를 움켜쥐겠지. 한층 부드러워진 흙길을 담담히 걸어가겠지.
개탄할 만한 정치를 향해서는 쓴 소리를 잊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겪은 전쟁의 상처를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정 음식에 대한 예찬도 빼놓지 않는데, 작가에게 음식은 단순히 식욕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다. 음식은 가족과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가 칠십 평생을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 시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물론 지인들과의 인연 또한 소중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칠십이 넘어서 쓴 글이라고 수줍게 고백하고 있지만, 결국 작가를 칠십 평생 살아올 수 있게 만든 삶의 버팀목 같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 그득하다.
책이 출간된 지 이미 여러 해가 흘렀으니 이제 작가는 나이 앞에 7이 아닌 8을 더했을 터. 내 나이 일흔 혹은 여든이 되면 무엇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까. 살아오면서 얻은 것들, 잃은 것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무엇일까. 어느 날, 작가처럼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p.31)’ 일지라도 그 추억들이 있기에 살아낼 힘을 얻지 않을까. 그렇다면 추억을 추억할 수 있는 인생에 감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을 충분히 살아야겠지.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