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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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을 넘어 소멸, 되어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 박범신, 『은교』를 읽고


은 교-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더 이상 생각이 나아가질 않는다. 읽는 순간부터 생각이 정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다 읽고 나서도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 책이 있다. 『은교』는 후자에 속한다. 그래서 은교, 은교, 은교…… 하고 수없이 되뇌어 본다. 낯설고 낯 뜨겁고 어쩌면 금기시되는 이야기인지라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 지 한참을 망설인다. 열일곱 여고생을 가슴에 품은 칠십 노인의 애절한 사랑. 이것뿐이었다면 어쩌면 이 리뷰도 쓰지 않았으리라.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p.12)


는 작가의 말에 쿵-하고 마음이 내려앉는다. 사랑은 하나의 감정이다. 살아있다면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오롯한 그리움…… 갈망! 이 감정은 누구에게든 비껴가지 않는다. 다만 발화의 시점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은교』는 이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왜 사랑을 생물학적 나이에 국한해서 생각했을까. 은연중에 각인된 고정관념에 잠시 몸서리가 쳐진다. 얼마나 많은 사랑이 이 끔찍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질타를 받아야 했을까. 사랑은 그냥 사랑인 것이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어떤 대상을 향해서든 생겨날 수 있는 인간의 감정. 나처럼 이 잔인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훌훌 털어버리고 『은교』를 읽자. 은교를 향한 이적요 시인의 사랑은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후 일 년 뒤에 공개하라는 이적요 시인의 노트는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보면 미성년인 열일곱 소녀 은교를 사랑했다는 것, 제자인 서지우 작가를 죽였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적요(寂寥)라는 필명처럼 평생 시를 향한 고집스런 외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대중의 전무후무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시인이 알고 보니 제자의 이름을 빌어 포르노그래피를 발표해 왔다는 것. 이 엄청난 비밀이 담긴 노트를 받아든 후배시인이자 변호사인 Q는 난감할 따름이다. 유서의 내용이 공개된다면 거론된 세 사람은 물론 문단과 대중에게 미칠 파장이 상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은교』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가 남긴 노트, 은교와 변호사Q의 시선이 교차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긴장감이 넘친다. 노트, 그것도 비밀스런 내용이 담긴 노트는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고 온 몸의 세포가 예민해진다. 침이 마르고 손이 떨린다.『은교』가 꼭 그렇다. 소설이 아니라 비밀 노트를 받아든 것처럼 마음이 요동을 친다.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러나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는다.


꺼져가는 불더미가 마지막 힘을 다해 피워 올리는 연기 속에서 울고 있는 은교를 본다. 울고 있는 서지우를 생각하고, 울고 있을 이적요 시인을 떠올려 본다. 어떤 방향으로든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애달파서가 아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 ‘사랑’은 무엇인가. 사람을 온전히 살게도 하고 온전히 죽게도 하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p.251)


소멸, 되어가는 것의 아름다움. 소멸 역시 살아있는 생명인 것을 간과했던 것 같다. 나도 어쩌면 서지우가 범한 ‘사악한 범죄’의 공범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연의 법칙 앞에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도 노인의 사랑을 부정하려 했다. 소멸해 가는 것에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가당찮은 생각으로. 소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안으로 더 단단해지고 충만해지는 것. 소멸은 어떤 의미에서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향해 내달리던 서지우 작가의 얼룩진 눈망울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보호해야 할 분은 은교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p.176)’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노시인을 사랑했으며 인정받기를 원했다. 끝끝내 ‘멍청한 놈’으로 인식된 채 죽어가는 서작가, 제자의 죽음이 자신의 완전범죄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생의 의지를 내려놓는 노시인. 죽음으로 치닫는 이들 사이에도 분명 ‘사랑’이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슬픔을 걷어내고 보면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연애소설이 된다. 은교가 뽀드득 하고 닦아낸 유리창처럼 깨끗하고 환한 느낌. 때로는 등롱처럼 황홀해 잠시 휘청거리게도 만드는 사랑이야기. 사랑 그 설레는 첫 느낌, 뽀송뽀송한 싱그러움이 군무를 이루며 피어오른 쇠별꽃처럼 하얗게 마음을 밝힌다.


고백하건대 나는 작가 중에 박범신 작가를 가장 좋아한다. 해서 내용도 모르고 『은교』를 받아들었다. 쉬이 첫 장을 펼칠 수가 없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를 달뜨게 만들지 몹시도 두근거렸기에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읽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 앞서 고백했듯 사회적 통념에서 기인한 고정관념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열일곱 소녀를 품으려 한 칠십대 노인의 욕정, 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화와 성장 소멸이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이 소설은 새롭게 읽혀졌다.


그의 전작 『촐라체』에서 죽음에 직면했던 영교가 크레바스 속에서 맞닥뜨린 어느 주검과 『고산자』에서 어린 김정호가 동굴 속에서 만나게 된 여인은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해가는 상황에서 한 생명을 살려낸다. 『은교』에서 노시인이 걸어 들어간 적요굴은 어쩌면 작가가 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려내는 자궁 같은 생명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전작들이 ‘굴’속에서 생명을 피워낸 것과 달리 『은교』에서는 생명이 소멸해 간다. 그러나 소멸을 상징하는 이적요 시인의 생은 소멸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나의 처녀, 나의 조국’이기에 쉽게 품을 수도 자유롭게 떠나보낼 수도 없었던 노시인의 사랑. 그것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을 새롭게 살게 하는 빛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는 순간, 은교를 상징하는 토끼 인형과 함께 적요굴에 몸을 누인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시인이 선택한 영원히 사는 길은 아니었을까.


사랑, 을 넘어 소멸, 되어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폭풍처럼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읽는 내내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 폭풍우를 잠재우고 밖을 보니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여름에 성큼 다가서 있겠지. ‘생존과 종족번식의 욕망(p.153)’이 뒤엉켜 소름끼치게 푸른 여름 숲일지라도 계절이 더 깊어지면 산에 오르고 싶다. 그 속에서 존재의 욕망과 생성 소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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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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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추억하며 사는 나이   

- 박완서, 『호미』를 읽고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참으로 고마운 계절이다. 나는 요즘 오후 한 시가 되면 어김없이 안방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동안 햇살이 환하게 비쳐드는 때에 맞춰 책을 읽는다, 햇살을 읽는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도 이 기운 아래서 라면 한 풀 기세를 꺾는 듯하다. 자연이 주는 선물, 햇살이 주는 평온한 오후를 나는 사랑한다. 딱 좋을 만큼 자연의 기를 받고, 딱 좋을 만큼 사람의 기를 받는 시간. 오늘 나를 다독여준 이는 박완서 작가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작가가 건져 올린 일상의 단편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산문집 『호미』. 언젠가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몇 장을 읽고 나서 바로 사들고 온 책이다. 매서운 겨울을 살아내게 하는 한 줄기 빛처럼 허전한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준다.

‘거의 다 70이 넘어 쓴 글' 이라며 수줍게 첫 머리를 여는 박완서 작가. 살아온 삶 자체가 역사이고 기록일진대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작가 역시 나이로 인해 위축되고 적잖이 부담도 되는 모양이다. 혹여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꺼내놓는 이야기는 작가의 기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작가의 연륜을 담은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마당을 일구어 자연을 들여놓았다. 작고 미미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질서정연한 삶 속에서 소스라치게 전율한다. 느리고 끈기 있게 두루 살핀 결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자연은 찬탄해 마지않을 존재임을 몸소 체험한다. 자연이 건네는 위로는 그 어떤 울림보다 깊고 평온한 것임을 작가는 느린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봄이 오면 꽃 출석부를 부르고 다시 호미를 움켜쥐겠지. 한층 부드러워진 흙길을 담담히 걸어가겠지.


개탄할 만한 정치를 향해서는 쓴 소리를 잊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겪은 전쟁의 상처를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특정 음식에 대한 예찬도 빼놓지 않는데, 작가에게 음식은 단순히 식욕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다. 음식은 가족과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가 칠십 평생을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 시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물론 지인들과의 인연 또한 소중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칠십이 넘어서 쓴 글이라고 수줍게 고백하고 있지만, 결국 작가를 칠십 평생 살아올 수 있게 만든 삶의 버팀목 같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 그득하다.


책이 출간된 지 이미 여러 해가 흘렀으니 이제 작가는 나이 앞에 7이 아닌 8을 더했을 터. 내 나이 일흔 혹은 여든이 되면 무엇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까. 살아오면서 얻은 것들, 잃은 것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무엇일까. 어느 날, 작가처럼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p.31)’ 일지라도 그 추억들이 있기에 살아낼 힘을 얻지 않을까. 그렇다면 추억을 추억할 수 있는 인생에 감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을 충분히 살아야겠지.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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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여행. - 마음 여행자의 트래블 노트
최반 지음 / 컬처그라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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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음 안을 걷는 일
- 최반 『서툰 여행』을 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훌쩍 떠나는 것에 적잖은 두려움을 안고 있다면, 그럴 땐 여행에 관한 책을 펼쳐들어도 좋을 것이다. 단, 여행지를 구미 당기게 소개하는 오밀조밀한 책보다는 떠나고자 했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여백이 있는 책, 말하자면 『서툰 여행』같은 책을 권하고 싶다.

5년째 쓰고 있는 ‘마스크 맨’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작가의 소개 글에서 작가의 성향을 유추해본다. 오랜 시간 꿈을 키워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치열하지만 조금은 현실에서 비껴난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남자. 그가 들려주는 인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실은 그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서툰 여행’이라는 제목과 나름대로 판단한 작가에 대한 분석이 맞아떨어졌다. 이 책은 인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행안내서라기보다는 인도로 떠난 마음 여행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여기에는 분명 ‘인도’가 있고 읽는 이의 가슴에 새겨질만한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때로는 인도와 상관없이 펼쳐지기도 한다. 여행이 가져다 준, 인도가 안겨준 선물 같은 마음의 빈자리. 일상을 사는 동안 켜켜이 쌓였던 마음의 먼지들이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바람을 타고 폴폴 마음 밖으로 탈출을 시도한 듯 보인다. 그 빈자리를 알아채고 성큼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건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다. 자신의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천금 같은 선물!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여행지에서 마주하게 되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꺄 헤(이게 뭐죠?)를 외친다는 작가. 마치 처음인양 하나하나 새겨듣고 따라하는 동안 깨닫게 되는 익숙한 것들의 새로운 의미. 여행이 주는 신선한 경험, 의미로 다가오는 고마운 깨달음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노라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의 소리 자연의 소리 사물의 소리 결국 우리들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온다. 태평스레 하늘거리는 빨래들,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는 개들, 주인을 찾게 만드는 벗어놓은 슬리퍼조차 저마다의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분주하다. 인도 사람들의 천성적인 느긋함 엉뚱한 재치에 실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상술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의심 속에 가려졌던 사람의 진심을 발견하는 순간 그와의 사이에 존재했던 벽은 사라지고, 요가 수업 내내 마음을 쿵하게 만드는 깨달음이 지속된다. 무엇보다 그가 들려주는 정말 뻔한 ‘뻔한 얘기’들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작가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무수히 마음 안을 거닌다, 뼈 속까지 그리움을 토로한다. 어느 날 문득 떠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네 번이나 인도를 여행하며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결국 우리들 마음을 한 발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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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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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고고히 빛나는 개츠비의 위대한 사랑, 그 씁쓸한 결말
- 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적잖은 설렘을 동반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여느 책과는 다른 긴장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천차만별. 결국 순간 마음이 동하는 책을 읽게 된다. 그러나 고전은 읽고 싶은 책이라기보다는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 읽고 난 후, 혹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건 순전히 개인의 무지의 소치라는 자책감마저 든다. 해서 더 꼼꼼하게 파고들게 되고, 책이 출간될 당시의 시대상황까지 고려하게 된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나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

 세계적인 고전의 대열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위대한 개츠비』를 만난 건 불과 얼마 전이다. 본격적으로 고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게 처음으로 찾아온 책. 문학동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인 이 책은 김영하 작가가 번역을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칫 번역의 난제 때문에 원작을 오독할 수 있는 고전을 이름 있는 작가가 번역했다는 것만으로도 신뢰감이 생긴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어느 정도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려던 시점. 그 당시 미국이라는 사회는 올드머니라 불리는 유서 깊은 상류층과 뉴머니라 불리는 신흥 상류층이 복잡하게 공존해나가는 상황이었다.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개츠비는 우연히 상류층 집안의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떠나갈 수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개츠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데이지에게 자신의 배경을 속이고 안심시키지만, 올드머니 계층의 톰 뷰캐넌이 나타나면서 데이지는 개츠비를 떠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이 헤어진 지 5년. 본명이 제임스 개츠인 개츠비는 이름까지 바꾸면서 신흥 상류층으로 급부상한다. 그녀의 집이 마주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온 후 매일같이 파티를 열어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들고나게 만든다. 자연스레 데이지를 만나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마침 이 책의 화자로 등장하는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옆집에 살고 있는데 데이지와는 먼 친척관계다. 옛 연인 개츠비와 데이지의 만남은 닉을 통해 자연스레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우연적인 만남은 결국 파멸의 시작이 되고 만다.
 
 뉴머니 계층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1920년대 올드머니들. 그 중 한 명이 바로 데이지다. 개츠비는 데이지와 같은 신분이 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잘못된 방법으로도) 부를 축적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안전한 올드머니의 세계다. 정부를 둔 남편일지라도 남편 옆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부와 안위를 이어가려 한다. 개츠비가 인생을 걸고 사랑한 여자 데이지는 개츠비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한 최대의 가해자이면서도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안전한 부’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빛나게 할 휘황찬란한 사치품에 길들여진 세속적인 사람,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기보다 부에 눈이 먼 불쌍한 영혼이었던 것이다.

 고작 삼십 대에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정당하지 못했던 과정은 결국 개츠비의 삶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쓸쓸한 장례식... 돈도 사랑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데이지를 향한 사랑만큼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데이지는 분명 누군가의 신실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여자다. 하지만 끝까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전하는 개츠비. 신분을 넘나드는 온갖 불륜이 난무하지만 결국 신분을 뛰어넘지 못하는 얕은 사랑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개츠비의 사랑은 홀로 고고히 아름답게 빛난다. 그것만으로도 개츠비를 ‘위대’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 매일같이 참석해 흥청망청 즐기면서도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 끊임없이 의심하던 사람들 틈에서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친구’로 거듭난다. 닉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개츠비의 실체는 흥미진진하다. 이름을 바꾸고 부를 축적하게 된 계기, 데이지에 대한 마음, 개츠비와 관련한 세간의 오해와 진실 등이 베일을 벗듯 서서히 드러난다.

  1920년대 당시 미국 사회에서 '개츠비'라는 인물은 ‘미국’과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유럽 강대국들 틈에 당당히 발을 들여놓고 세계열강의 꿈을 키워나가던 시절의 신생 강대국. 미국의 그 푸른 꿈을 개츠비가 대변하고 있기에 미국인들은 이 작품을 최고로 꼽는다고 한다. 이런 평가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거나 가치를 판단한다면 피곤한 책읽기가 될지도 모른다. 책이란 어떠한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들더라도 종국에는 어떠한 의미를 남길 것!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동안 재미있게 푹 빠져들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의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한 남자의 야망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이중적 본성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잘못 선택한 사랑이 가져온 파멸과 잘못된 방법으로 축적한 부의 결말은 허무함마저 들게 하지만, 경각심을 일깨우게 해준다. F.스콧 피츠제럴드가 닉 캐러웨이를 통해 전달하는 이 객관적인 고발은 그래서 섬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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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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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어느 순간
- 뮈리엘 바르베리,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읽고


 가끔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살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보다 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자신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오늘날 성공의 밑거름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참으로 안일하고도 비주류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방어벽을 두르고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르네와 팔로마처럼. 이들은 왜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왜 고슴도치의 가시로 자신을 중무장한 채 내면의 우아함을 애써 숨기며 살아가려 하는 것일까.

 르네. 파리 그르넬가 7번지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에서 27년째 수위로 일하고 있는 쉰 네 살의 아줌마다. 그녀는 평범한 수위로 보이기 위해 말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가려서 한다. 자칫 방심하다 수위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박식함이 탈로난다면 아파트에 입주하고 있는 부르주아들의 참견과 입방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멍한 눈빛과 프롤레타리아적 이미지를 풍긴 채 ‘수위’하면 떠오르는 모습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녀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삶의 근원이자 목적인 철학과 문학 예술 독서 등 온갖 고상하고 지적인 취향을 꼭꼭 숨겨둔 채.

 팔로마는 이 아파트 6층에 살고 있는 국회의원의 막내딸이다. 유별나게 똑똑하고 영리해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부모 덕분에 그녀 역시 잠정적인 부자라 할 수 있다. 부족함 하나 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인생이 설계되어 있다는 데 슬픔을 느낀다. 세상에 넘쳐나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보며 삶의 부조리에도 일찍이 눈뜨게 된다. 하지만 아둔한 척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열세 살이 되는 6월 16일 자살할 결심을 한다. 죽을 계획을 세웠다고 서둘러 세상을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것. 소녀는 가능한 한 깊이 사색하고 그 결과를 공책에 기록해 나간다. 세상 모든 움직임에도 집중한다. 어쩌면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므로.

 사물 혹은 현상, 이치에 대한 세밀한 고찰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을 통찰해내는 두 주인공. 이들은 다방면으로 풍부한 지식과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녔음에도 스스로 아둔한 척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소통의 거부. 이들이 각자 철옹성 같은 방어벽을 치게 된 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양분화 되는 사회적 흐름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것이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존중하지도 않으려는 그릇된 습성에 나름대로 반기를 든 셈이다.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두 주인공의 철학적 사유에 독자는 간간이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이유는 이들의 날 선 가시를 헤집고 들어가 감춰진 내면과 만나고 싶어서다. 소통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 아둔한 척 살아가는 진짜 이유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5층에 새로 이사 온 가쿠로 오즈는 이 고급 아파트에서 유독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입주한 그 누구보다 부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정작 오즈의 관심은 비슷한 신분의 이웃보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수위 아줌마 르네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팔로마에게 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볼 줄 아는 차별화된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봐주는 가쿠로를 통해 소통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르네. 마침내 마음에 칭칭 동여 맺던 붕대를 풀어낸다.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을 예감한다. 갑작스레 날아든 슬픈 소식으로 팔로마는 생에 처음으로 고통을 경험한다. 고통이 무엇인지 겪어보지 못했기에 자신의 죽음으로 가족에게 고통을 주려했던 우매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시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순간 삶의 의미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 온 세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로의 편입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서둘러 깨달음을 얻고 싶다.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 소설, 낯선 철학적 단상들이 책 읽기를 다소 힘겹게 만들기는 했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통해 삶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죽음의 순간 알게 되는 것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들. 예상치 못한 반전, 그로인한 깨달음이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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