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김화영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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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사진, 캔디드(스냅) 사진, 르뽀 사진 등으로 불리는 것이 브레송의 주영역이다. 한 마디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사는 모습과 약간의 풍경을 일체의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 (그것도 몰래) 찍는 방식이다. 이거 하나로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자리에 오른 사진가가 인물사진을 찍는다면 어떨까? 정답은 '거의 비슷한 식으로 찍었다.' 몰래라는 조건만 빼고.

당대의 명사급에 들던 유명사진가인데다 한때 회화 공부도 하고 영화 연출도 했을 정도로 문화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었던 그에게 여러 매체에서 인물사진 촬영을 맡겼던 모양이다. 그는 원래 하던대로 35mm 필름카메라를 가져가서(잠깐, 그 카메라가 어느 회사 제품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른 회사 제품이었대도 결과물의 차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같은 RF 방식을 쓰기야 했겠지만), 플래쉬도 없이 실외건 실내건 자연광만으로, 아무런 포즈도 표정도 배경도 연출하거나 부탁하지 않고, 심지어 "자, 찍겠습니다" 하는 말도 없이 스냅으로 찍어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15~20분쯤 들여서.

그런데 훌륭하다. 스냅이니 하나같이 명작일 수야 없지만, 일부는 참으로 그 인물의 핵심을 포착했구나 싶다. 대체로 집이나 사무실에 그냥 편안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바스트샷 정도로 찍은 것들인데, 하나도 별다를 게 없지 싶은데, 뭔가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만 같다. 흔히들 인물사진을 찍을 때 쓰는 말, 이를테면 대상을 편안하게 해줘라, 대화를 많이 나눠라, 각도는 어떻게 하고 조명은 저떻게 하고 따위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보이는데, 그래도 훌륭하다. 대가는 대가인가보다. 

브레송을 최고의 인물사진가로 꼽을 생각은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아놀드 뉴먼이고 그 밖에 어빙 펜, 리차드 아베던, 애니 레이보비츠 등 포트레이트를 주영역 삼아 일평생 천착해온 거장들은 많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도 스티브 맥커리도 있고 그 옛날의 나다르를 제외시킬 이유도 없을 듯하다. 그래도 브레송을 빼놓기는 쉽지 않다. 초특급 대가가 일평생에 걸쳐 구축해놓은 인물사진의 한 방법론을 어찌 쉬이 간과하리오. 

그의 사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재단이 기획한 최초의 전시회를 바탕으로 출간된 원서의 국역본이며, 독일에서 인쇄와 제본을 해온 것이므로 그쪽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다. 몇몇 인물의 사진은 더 많이 알려진 것과 다른 게 실려있기도 한데(모든 인물의 사진은 각기 한 장씩만 실려있다) 결점이 되지는 않아보인다. 사진집치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대신 책 크기가 B5 정도로 작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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