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카인드 리와인드- 미셀 공드리와  잭 블랙.. 맞춤식 비디오가게 영화 제작이라.. 너무 귀여운 상상이거나 아주 짜증나는 구질구질함이거나, 전자에 걸고 보러가겠어.

비발디 - 프리뷰에서는 천재 음악가의 일생을 너무나 밋밋하게 그렸다고 악평이지만, 그래도 비발디잖아. Nulla in Mundo Pax Sincera
 

워낭소리- 기대되는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의 고영재 프로듀서란다. 
 

버터플라이- 예고 편에서 본 할아버지와 꼬마의 모습을 보며 내가 몹시도 좋아했던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소녀의 유쾌한 다툼이 기대된다.  

체인질링-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드는 인간의 이야기.  

도쿄마블초콜릿- 어쩌면.. 이제는 이런 거 봐도 괜찮을지 모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남미 과테말라 내전에 관한 소름끼치도록 잔혹한 이야기.     

'나무소녀'라 불리는 가브리엘라는 숲에서 생명력을 얻고 나무와 함께 성장하는 마야 소녀이다. 하지만 반군과 정부군의 내전이 시작되고  이들의 원시적 공동체적인 삶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파괴된다. 우연히 몸을 피한 나무 위에서 소녀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하는 만행을 목격하게 된다. 겨우 멕시코 난민 수용소에 도착하지만 소녀에게는 하루를 생존하기 위한 동물적 본능만 남아 있을 뿐 어떠한 꿈도 희망도 없다. 하지만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된다.

생명력과 인간성을 대변하는 '나무소녀'에 비해 정부군은 역겨울정도로 잔혹한 폭력과 파괴본능을 대변한다. 소설 시작 부분에서 등장하는 원주민 마을의 행복한 공동체의 모습에 비해 결말의 난민 수용소 모습은 객관적인 상황으로만 보자면 비극이다. 철저히 유린당한 삶과 파괴된 자연의 모습이 처참하다. 36년간이나 계속된 과테말라 내전을 책 한 권으로 해피엔딩으로 결말짓는 것은 말이 안될 터이다. 다만 다시 나무에 올라 내면의 상흔을 치유할 용기를 얻는 가브리엘라의 모습에서, 폭력으로는 결코 지배할 수 없는 인간의 원형적 삶, 희망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을 찾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용은 다양하다. 특히 최근들어 쏟아지고 있는 청소년 소설이 지나치게 '지금', '여기'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어 다루는 소재들이 다들 비슷하고 좁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감안할 때, 이 소설은 세계 곳곳에 가해지고 있는 폭력과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고민하게 한다.   

또한 청소년 소설 답게 간결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쉽게 읽힌다. 사건의 전개 역시 늘어지지 않고 빠르게 전개 되어 지루하지 않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은 과테말라 내전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과테말라 원주민 마을에 가해진 학살과 유린의 현장이 한국 전쟁 중의 양민 학살, 4.3 제주도민 학살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까지 미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해온 방식이고 또 여전히 팔레스타인 가자에 가해지고 있는 파괴와 폭력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화두로 전세계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폭력과 야만성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을 듯.  

내가 가브리엘라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생님이 살해당할 때, 정부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만행을 저지를 때, 수용소에서 남을 밀어내야 구호품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수용서에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과테말라 내전이 일어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알아 보기 (근대 이후 남미를 미국 자본이 어떻게 지배하고 대륙을 착취해왔는지, 남미 국가 곳곳에서 일어난 내전의 배후 세력인 미국이 어떻게 정부군을 지원했는지..)

과테말라 내전에 대하여 

 과테말라 내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내전으로, 유엔 발표에 따르면 내전 과정에서 20만 명 이사이 숨지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지원하는 과테말라의 반민주적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반군의 투쟁으로 시작되었으며, 1996년 반군 세력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과 과테말라 정부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피로 물든 36년간의 내전이 끝이 났다.  

  내전 기간에 450개 이상의 인디오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고 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먼저 남자들이, 그 다음 여자들이, 그리고 아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만행을 목격했고 일부는 탈출해서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했다. 미국인 대부분이 이 사건을 그저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치부하고 말지만 미국인들도 책임이 크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 마을을 습격한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의회청문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학살을 옹호했지만,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무장시켰다는 것도 거짓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겨우 마체테나 작대기만을 든 채로 쓰러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라는 게 근본적으로 원한이 있어야 돼. 영혼의 상처. 후벼 파서 팔아먹을
상처가 있어야 되는데, 난 너무 평탄하게 살았어.”

  언젠가 주말의 명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는데 문성근이 술을 마시다가 말했다. 이불 감고 뒹굴면서 보다가 멈칫했다. 영화 속에서 문학잡지 편집장인 그가 문학과 작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데 그 중 가장 가슴에 꽂히는 말이다. 지난 번 모임 생각이 났다. 시 창작 교실 작품들을 보면서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말들.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건 삶의 절실한 체험 때문일까, 천재적인 상상력과 구성능력 때문일까.

 나는 굴곡 없이 안정된 삶을 살아 온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만 때론 그런 평범한 삶이 ‘국어교사로서 체험이 결핍된 삶’이라는 콤플렉스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에겐 영혼의 상처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어교사는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데 문성근이 던진 말 한마디에 나는 ‘백날 써 봐야 귀여니 수준 밖에 안 될지 몰라.’라며 그날 밤을 설쳤다.

 그동안 '맨발'시집은 두세 번을 읽었는데 선뜻 감상문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가방에 넣어 다니며 전철이나 버스에서 읽고 또 읽고 하느라 시집이 너덜너덜해 졌다. 감상문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가슴에는 와 닿지만 내게 이런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아, 어쩜 이 순간을 이렇게 관찰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참 평온한 시로구나.’ 생각은 하면서도 그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내게 작가와 같은 시골의 체험이 없어서 라고만 생각했다.

 다음날 지하철에서 ‘영혼의 상처’를 되새기며 문태준의 『맨발』중에서 마음에 와 닿아 표시해 둔 시들을 다시 펴 보았다. 시인에게 영혼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어물전에 놓인 개조개에서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떠올렸으리라. 천천히 발을 거두는 모습만큼 천천히 살아온 그의 삶은 결코 명민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삶이다. 움막 같은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야망도 꿈도 없이 흘러온, 무능하고 초라한 그의 삶이지만 화자는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갖고 있다. 맨발로 길에 나서 발이 부르트지만 움막 같은 집에서 위안을 얻는 그의 삶에서 삶의 진정성과 고귀함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화자는 죽은 부처의 발을 조문하듯 건드린다. 

   1학기에 수업을 한 「가정」이 떠올랐다. 진도에 쫓겨 참 재미없는 수업을 했었는데 읽기 전에 아이들과 자신의 가정을 떠올리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집은 강변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여닫을 때마다 금속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과 아침 일찍 일을 나가시던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 가게 구석에 놓인 쥐약, 가게 구석에 딸린 어두운 부엌에서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의 한숨이 떠오른다. 생일이 같은 동네 아이의 유치원 생일 파티에 다녀와 투정을 부리던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서글픔이 이 시의 개조개의 삶과 닮아있다. 내 이야기를 끝냈을 때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내게도 상처가 있다면 있었다. 다만 그것을 확인하기까지가 참 오래 걸렸다. 사람들은 힘든 기억을 빨리 잊고 싶어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영혼의 상처가 있다고 다 시가 써 지면 얼마나 좋을까. 


맷돌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기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맷돌 하나로 이렇게 진실한 삶의 모습들을 표현해 낼 수 있음이 놀랍다. 투박함, 고단함, 낡음, 설움, 비루함, 생명력, 상처들을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다 겪어 이제 더 아플 것도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더 서러운 외할머니가 만져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서 모성에 대한 애착을 많이 보이는 작가에게 외할머니는 보다 더 각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내게도 외할머니는 어려서는 약손으로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존재였고 지금은 지난날의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동여매고 살아가는 약하고 초라하지만 여전히 그 그늘이 그리운 존재이다. 화자는 수십년 돌려온 맷돌처럼 낡은 외할머니의 손길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싶어 한다. 또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겪어 이제는 너무 작고 약해 진 외할머니를 화자 자신이 안아드리고 싶을 것이다.

「맨발」이나 「맷돌」에서 보이듯 그의 시에는 아픔만 있는 게 아니라 아픔을 보듬어 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어서 좋다.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이를 ‘아’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절묘하게 비유를 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연민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표현한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그는 낡고 초라한 것들에 대한 상처를 끄집어 내고 있다. 하지만 문태준의 시를 읽으면 그 상처라는 것이 꼭 반드시 가슴이 저리고 설움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어도 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정서로 보면 그런 감정보다는 그저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아주 가끔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슬픔이 더 호소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상처라는 것은 낡고 쓰러져가는 시골의 모습이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다. 또한 그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낸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영혼의 상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상처를 후벼 팔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 하지만 꽃, 나무, 돌 들을 보면서 그런 상처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바로 시인의 감성인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01-2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늘 읽고 평을 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저도 맨발을 한 일년전쯤 읽고 아팠다 라는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저도 작가의 나이가 되면 저리 담담히 아파할 수 있을지요.

푸른날개 2009-01-22 13:08   좋아요 0 | URL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기에 담담해 질 수 있겠지요. 휘모리님도 세상 낮은 곳에 대한 애정이 많아 보입니다.
 

 

1월 20일 8시 단성사 시사회
 

  적벽을 손에 넣기 위해 주둔한 조조의 진영에는 역병이 만연하고, 용하다는 화타의 의료 시술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이 산을 이룬다. 이 와중에도 조조는 군대에서 사람 단순하게 만들기에 유용하다는 '군대 축구'를 시키는데.. 사람은 죽어 나가는데 군대 축구나 시키고 참으로 MB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병사들 중에 유독 호나우두의 돌파력과 베컴의 골결정력을 동시에 지닌 숙재라는 사람이 있어 군대 축구에서 우승했다고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얻게 된다.  21세기는 정보가 곧 권력임을 공명은 이 시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기상청의 정확한 예보와 손권의 여동생 상향이 무선 인터넷으로 보내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이 와중에 공명과 주유는 서로 목을 따네 마네 하며 화살 획득과 조조의 수군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주유의 아내 소교는 한심함 남정네들의 놀이에 한숨 쉬며 반쯤 눈을 내리깔고 매일 차나 들이킨다.

  이해못할 캐릭터인 숙재의 도움으로 무사히 동오로 돌아온 상향은 스트립쇼 한 방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칼을 차고 전장에 함께 출동할 자격을 얻게 된다. 주유도 조조도 불장난을 좋아해 누가 먼저 불을 지르냐가 관건인데 풍향이 조조에게 유리한 북동풍이라 조조는 바로 치려하고,주유는 시간을 끌어야 하고... 이를 알게 된 소교가 스스로 차 외판원을 자청하며 조조의 적진으로 나홀로 찾아가고.. '한 잔 하고 가세요.'라는 노골적인 언니 말 한마디에 조조는 업소를 지나치지 못하고 주저 앉으니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뀌어 버린게다.

  주유의 수군의 공격으로 사슬로 연결한 조조의 수군은 불타오르고 불구경이 제일 신난다더니 조조는 멍 때리며 불구경이나 하고 있다. 이에 떠나는 척 하며 주유와 짜고 대기하고 있던 유비의 군사도 밀어 닥치는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니 조자룡이 실은 '이신바예바'였다는 것.. 그 와중에 대체 왜 나왔는지 모를 캐릭터인 축구신동 숙재는 창검술은 안 익히고 군대축구에만 열을 올린 탓에 화살 맞아 죽고.. 어쨌든 조조의 진영을 몽땅 불싸지르고 닥치는대로 찔러 대던 얘들이 정신차리고 소교를 찾으니 이미 인질로 잡힌 뒤다. 병사들 다 죽고 다 불탔는데 그 와중에 무릎꿇는 게 뭐가 중요한지 소교 하나 인질로 잡았다고 무릎을 꿇으란다. 활을 잡은 손권은 누구를 겨눠야 할지 진땀 뺀다. 이에 조자룡이 소교를 인질로 잡은 장군을 치고, 영화 내내 큰소리 한 번 못내던 소교는 여전히 큰소리 한 번 못내고 묘한 콧소리를 내며 2층에서 떨어지고, 손권이 조조를 향해 쏜 화살은 조조의 상투를 뚫고, 조조가 몹시 전지현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며 긴생머리를 나풀거리고, 주유가 참으로 먼 거리를 날아 소교를 받아내니 바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몹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싶었던 주유는 "니네 집에 가."라고 조조를 돌려보내고 긴머리 나풀거리며 조조는 노숙자 포스를 내뿜으며 터덜터덜 집으로... 공명은 청학동으로..

  대체 뭐람. 영화 내내 이 남성주의영화가 불편하면서 시사회가 끝나니 웃음이 났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전쟁 영화를 싫어하지만 진주에서 일을 끝내고 바로 올라오는 빠듯한 일정에도 시사회를 보려고 한 건 '삼국지'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10번 읽어야 한다는 '삼국지'의 팬은 결코 아니다. 같이 본 친구와 후배가 그렇듯 남자들은 '삼국지'에 열광하지만 나는 '삼국지'에 시큰둥하다. 사실 '삼국지'는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남자들의 권력 쟁취를 위한 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내용도 그렇고 그것을 너무나 긍정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남자들이 삼국지를 보며 '조자룡'이 세니, '관우'가 세니 , 전투에서 몇 번 이겼네, 하며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 문득 아이들이 게임 캐릭터에서 어떤 파이터가 제일 높은지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때문에 적벽대전을 봐야겠다고 벼른 이유는 첫째, 원작이 삼국지이니 만큼 스토리의 구멍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 둘째, 삼국지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전투인 '적벽대전'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겼을까하는 호기심. 셋째, 1편에서 낚였으니 2편에서는 뭐가 대단한 게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단 둘째 조건은 만족했다고 해야 겠다. 함선이 불에 타는 장면은 실로 '스펙타클'이다. 삼국지를 읽으며 머리 속에 떠올렸던 주유의 화공법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렬하게 스크린에 불을 지른다. 이 장면 만큼은 앉아서 보는 내가 더울 정도였으니까.

 1편에서 "적벽대전은 언제 시작해?"라며 계속 묻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뭐야, 끝이야!"를 외쳤던 경험에 비춰볼 때 2편에서는 확실히 보여줬으니 셋째 조건 역시 만족했다. 
  

그러나 뭔가 불편한 첫째 조건이 계속 걸린단 말이야. 우선 소설 삼국지의 내용과 달리 오우삼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 물론 적벽대전 자체의 긴장감과 지략과 전술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 공명이 10만 화살을 구하는 것, 채모와 장윤을 제거하는 것 등의 팽팽한 심리전은 소설 못지 않다. 하지만 남자들의 의리와 객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오우삼 감독 특유의 취향 때문일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는 생각이다. 
 

곳곳에 오우삼 영화의 장면들이 겹쳐진다. 주유(양조위)가 홀로 검술을 연마하는 장면의 슬로우 모션, 조조를 추적하는 막사안에서 흩날리는 천막, 주유와 조조와 조조의 장수가 소교를 인질로 두고 서로 칼을 겨누고 대치하는 장면의 긴장감, (사실 나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연출하는 긴장감), 상향과 숙재의 천진난만한 우정. 오우삼의 색채 때문일까, 전쟁신은 여느 사극의 그것과 달리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지나치게 남자들의 의리의 세계를 그리고자 한 시도 때문에 계략과 암투의 세계는 의리와 정의의 세계로 미화되어 더 불편해졌다. (삼국지의 남성주의세계도 불편하지만 그걸 미화하려고 덧칠한 건 더 불편하고 싫단 말야.) 주유는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군사들에 대한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완벽한 남자로 그려진 것으로도 모자라 피터지게 전쟁을 벌인 조조까지 너그럽게 놓아준다. 삼국지에 주유가 그런 인물로 그려졌었던가 갸우뚱해야 했다. (아무리 양조위라지만 이건 아니야.) 게다가 적벽대전의 유명한 지략 중의 하나인 황개의 고육지책이 빠진 것도 아쉽다. 나름 탄탄한 스토리라면 이 고육지책이 당연히 나오겠지했는데 이것 말고 너무 담을 것이 많았나보다.

그리고 정말 이해 안 될 캐릭터. 상향이 첩자로 조조의 진영에 침투했을 때 그녀를 '돼지'라고 부르며 친구로 대하던 '숙재'라는 사람. 결국은 전투에서 만난 상향을 반가워하다 활에 맞아 오우삼 영화 특유의 '으으~'를 외치며 상향의 '부르짖음'과 함께 죽게 되는데... 서사 구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상한 설정이다. 우정과 인류애를 담고 싶었던 걸까.

계략과 암투가 판을 치는 전투도 담고 싶고, 블록버스터만의 스펙타클도 담고 싶고, 남자들의 의리와 우정도 담고 싶고, 로맨스도 담고 싶고, 인물의 개성도 하나하나 담고 싶고, 너무 담고 싶은 게 많아 결국은 재료의 맛이 다 죽어버린 음식을 먹은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잖아도 남성주의 세계에 오우삼 특유의 남성중심 연출력이 더해져 더 불편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history라 남성중심적 사관으로 기록되었다지만 서양이든 동양이든 하나같이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며 그나마 하는 역할이라고는 '미인계'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때론 화가 나게 한다. 그나마 쓰는 '미인계' 역시 여성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식이다. 물론 그 희생 역시 여성이 선택하는 것으로 미화되는 것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인가. 그리고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남자의 도움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또 어떻고.

그나마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상향은 정작 전투에서는 칼만 들고 돌아다닐 뿐 하는 것이 없다.  조조 진영의 군사인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다 화살 맞아 죽은 친구를 부여잡고 우는 것 뿐.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자 방향을 잡았다면 차라리 노골적으로 그렇게 가는 편이 나았다. 어설프게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가 너무 어색하다. 여성 관객으로서는 참으로 웃기는 노릇으로 보일 수 밖에.

남자들이 오우삼 영화에 열광했던 것도 남성들이 꿈꾸는 일종의 판타지를 영화에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이 영화가 남성들의 취향은 충분히 만족시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영화를 본 남자 관객들도 헛헛한 웃음을 지은 걸로 봐서는 오우삼식 남자 영화는 이제 남자들에게도 지난 취향일 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 역병에 걸린 환자들의 막사를 조조가 돌아보며 환자에게 다정하게 '말해봐라. 어디가 아프냐?'라고 다독이자 환자가 눈물 그렁한 채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겹쳐지는 장면: MB가 할머니를 껴 안고 다독였던 바로 그... 젠장.

- 영화에서 조조의 지략은 거세되고 여자에 눈이 멀고 생각이 짧은 찌질함만 남은 인물로 그려졌던 점도 아쉬움. 인물의 캐릭터가 전혀 살지 못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거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하련다  

 

염소떼처럼 풀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는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는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가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독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심(無心)과 무욕(無慾)에 대한 동경과 찬사. 아름답다. 구름과 같은 삶. 나도 요즘 이런 상태를 꿈꾼다. 불편한 것을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과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버리는 것. 다가오는 것, 떠나가는 것 붙잡지 않고 가두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과 무욕. 냉정함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을 갖고 싶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 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격정과 혼란의 가라앉음, 갈무리를 발견하는 문학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시큰둥하고 별 볼일없는 여름을 보냈더니 뜨거움과 혼돈의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 미움과 연민, 자괴감과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는 느낌이다. 아, 그래서 나도 소원이다. 이 시처럼 이렇게 가을처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 사실 1월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가을의 적막함이 참 슬펐던 것 같다. 시집 귀퉁이에 ‘가을의 이미지가 이리도 슬프다니...’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랬나보다.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에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그때는 더 이상 그리워할 것도, 애틋함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는 추억도 희망도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를 읽으며 ‘제발 좀 이랬으면..’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참 변덕스럽긴 하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적막함’, ‘게으름’, ‘이유 없는 방황’, ‘혼자 울기’, ‘더이상 열정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임을... 하지만 ‘잠자리처럼 임종’은 사양하고 싶은 걸 보니 그래도 아직 버텨낼 힘은 남아 있는 것이겠지.

  지난 가을은 육체적 정신적 공황상태였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무언가를 손에 잡은 채로 움직이고 있지만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누가 나의 상태를 물어보면 ‘모르겠어. 모르겠어.’만 연발했다. 그런 즈음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읽으며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나를 몹시도 괴롭히던 일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 읽었기 때문에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로 시나 소설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왔던 나의 특성으로 볼 때 안도현의 시집 역시 그런 효과가 있다고 봐야겠다.

  마치 한 편의 한시처럼 정갈한 이미지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고 할까. 하찮고 소박한 것에서 고귀함을 발견하는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에 감탄을 하다가도 (「공양」), 그 고귀함을 능청스럽고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시인의 재치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독거」) 2부의 음식을 제목으로 한 시들은 푸짐하고 넉넉한 외할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한다. 읽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당기는데 그 욕망이 천박하지 않고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시 곳곳에 버무려 놓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때문일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01-2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읽으면서 왠지 아 안도현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른날개 2009-01-22 13:08   좋아요 0 | URL
더 편안해지고 고요해진 느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