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클레르 카스티용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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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끊임없이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큰일이나 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그 관계로 인해 성가신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딱히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어 ‘감정 소모’에 진이 빠지게 되면 사랑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자기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면? 잠시 혼자 있을 수는 있지만 묘하게도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타적인가? 사랑은 관대한가? 사랑은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성질의 것인가? 사랑의 모습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지지만 어쩌면 사랑이란 애초에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에 반대로 그렇게 꾸며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처럼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도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자식이 이렇게 해주길 바라고, 자신의 기대에 차길 바라고, 노후의 보험처럼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도 많다. 나는, 내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참 순진하군요.’ 말해주고 싶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순수한 사랑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짝사랑도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 짝사랑은 이미 대상을 욕망하면서 발생한다. 욕망은 이기적이다. ‘그저 바라만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순간,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에게로 와서 내 것이 되어주길 고대한다. 내 사랑의 부름에, 내 마음의 욕망에 그 또는 그녀가 화답해 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고백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렇다. 그 사람의 작은 친절에 감동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보통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걸 발견하는 순간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에는 파문이 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진 만큼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화가 난다. 단지 그걸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런데도 짝사랑은 이타적이며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인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제는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의 크기와 똑같지 않아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 내 마음은 작은데 상대방의 마음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거나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데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거나, 애당초 크기가 작았는데 마지못해 관계를 시작했다거나 등등. 사람은 내가 준 것만큼 내가 준 크기만큼 받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은 너도 나를 꼭 사랑해야 해.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약속들.

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라 사랑이 그렇게 변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마음이 매혹에 이끌려 움직이는 상태라고 본다면 결국 사랑이란 사람 마음속에 존재할 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랑을 사람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이 23편의 단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단편 속에 드러나는 사랑은 뻔뻔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이다 못해 사악하고 비열하다.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려고 안달일까? 싶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를 속이고 펼쳐지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 아들과 섹스 하는 엄마 등 근친상간은 아무 일도 아니며 행복한 부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람난 남편, 바람난 부인, 남편을 갖다 버리고 싶어서 안달 난 여자, 부인에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형제의 치부와 상처를 이용하는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계의 삐걱거림이 ‘이제 그만!’하고 외치고 싶어질 정도로 펼쳐진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를 실물로 보면 알 수 있듯 책의 두께는 무척 얇다. 200페이지 남짓한 크기. 그런데 담겨 있는 이야기는 23편이다. 그만큼 짧고 간결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걱서걱하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사랑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노통브의 작품을 읽으면 느껴지는 기분처럼 클레르 카스티용 또한 인간에 대한 모든 ‘선한’ 기대는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작가들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이런 작품을 쓰는 걸까 사생활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궁금해서 찾아봤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외모와는 달리 가치 전복적이며 도발적인 작품을 쓰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악마의 글을 쓰는 작가’라는 호칭이 있다고 하니, 노통브와는 달리 외모가 좀 특출(?)난 듯하다. 1975년 프랑스 불로뉴 비앙쿠르 생. 열여덟 살 때 광장공포증에 걸려 길고 지난한 정신과치료를 받던 중, 스물다섯에 첫 소설 <다락방>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음. 그 후 거의 매해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노통브처럼 소설은 엄청나게 써대고 있는가 보다. ‘광장공포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 받았다는 사실에 살짝 호감 증가. 그러나 사진을 찾아보니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는 좀 무리인 듯 싶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쯤에서 접었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극악무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서도 책의 제목이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라니 이럴 수가 있나? 뭔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려니 하고 낚이는 사람들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사랑을 하면 발생하는 감정소모를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왜? 외로우니까.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이기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클레르 카스티용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백치처럼 구는 날이면 나는 그에게 묻는다. 아무 문제없냐고, 정말 괜찮으냐고. 그러면 그는 ‘괜춘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비타민을 먹여보려고도 했다. 그의 사고 체계가 약간이나마 활성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는 인상을 쓰며 완강하게 도리질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대신 먹고 있다. 나는 내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요구르트를 별로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스물네 개짜리 묶음보다 두 개짜리 묶음을 구입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흥분해 날뛰는 남자와 같이 살면서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뭔가에, 가령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음악은 그에게 수면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서정적인 것들은 괜히 사람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며 그는 투덜댄다. (‘한없는 관용’ p.47~48)


위 구절을 읽는데 정말 너무 너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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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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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판본 복간 붐에 이어, 리커버 붐인가 보다. 어제 교보문고에서 온 메일을 확인해보니, 문학동네에서도 세계문학 전집 가운데 몇 권을 리커버로 출판하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롤리타>가 있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롤리타>는 번역이 괜찮다는 평이 많아서 이 판으로 다시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이 리커버판 출판 소식은 살짝 구미가 당긴다. 알라딘에도 올라왔는지 검색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과 관련한 소식은 교보 링크로 대신한다. (요기를 클릭)


나는 이제는 절판된 민음사 버전 <롤리타>로 예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문학동네 판을 구매해서 다시 읽어볼까 싶다. 그런 참에 예전에 써두었던 <롤리타> 리뷰를 옮겨본다.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 신드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통은 아는 사실이리라. 아동 포르노 관련 기사나 아동 성범죄 관련 기사 이런 것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동을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어떤 면을 보고 성적으로 끌릴 수가 있을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는 님펫(Nymphet)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정확히 9살에서 14살까지의 사춘기 증후가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녀들을 의미한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그런 님펫에 미쳐있는 중년의 남자다. 자신의 이런 욕망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그저 그런 님펫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어린소녀를 훔쳐보며 자기만의 도취된 세계  안에 갇혀 산다.

그러다가 험버트는 그의 영원한 ‘롤리타’- 열두 살 난 완벽한 님펫 ‘돌로레스 헤이즈’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갖기 위해,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돌리, 돌로레스, 로, 롤라, 롤리타! 그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계속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어느 날 사고로 돌로레스의 엄마가 죽자 험버트와 돌로레스 둘만 남게 된다. 험버트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천국이 따로 없다. 그 완벽한 천국에서 험버트는 그의 완벽한 님펫인 롤리타의 육체까지도 소유하게 된다.

역겨운가? 나는 좀 처음에 솔직히 역겨웠다. 소녀들이 뛰어노는 공원 근처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며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가자니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할까, 이런 고민까지 들었다. 그의 읊조림은 아동을 대상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변태 중년남의 변명, 자기합리화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픈지. 읽을수록 쓸쓸하고, 애달픈 감정이 드는 것인지. 내가 왜 이 변태(!)에게 동조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집착이, 광적인 열정이, 헌신적인 애정이 왜 그렇게도 안타깝던지. 슬프고 씁쓸했다. 돌로레스의 육체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마음은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남자. 어쩌면 돌로레스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 없었던 사랑. 님펫은 영원하지 않다. 성장하고, 결국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잡았다 해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은 세계. 그 모든 것이 무척 슬프고 서글펐다.

사회에서 이른바 ‘비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랑, 변태라고 부르는 사랑, 그 사랑의 감정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애끓는 사랑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영화 롤리타(Lolita)에서 험버트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한없이 쓸쓸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이 불쌍한 남자에게 더 동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는 세계, 이미 잃어버린 세계, 영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동경…. 이런 것들이 한편의 시(詩)처럼 펼쳐진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 혐오스러운 사랑, 금기의 사랑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엄청난 문학적 재능 때문일 것이다. <롤리타>를 읽고 나면 이 세상에 과연 변태의 사랑, 금기의 사랑,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한 도덕적 잣대에 따른  구분은 사라지고 그저 오로지 ‘사랑’ 그 자체만이 남는 기분이 든다.  


자, 이제 문학동네 버전으로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를 만나볼까......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 (<롤리타>, 민음사,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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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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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쾨펠의 <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을 읽었다. 이 책은 바나나의 모든 것(?)을 망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 따 먹은 열매가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주장부터 시작해 바나나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며 우리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지, 그런 과정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특히 중남미 국가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졌는지 등등 바나나의, 바나나에 의한 세계 역사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바나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난 바나나는 다 ‘노란색’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빨간 바나나도 존재한다! 바나나의 종류가 기껏 몇 종류겠지 했는데 수백 가지도 넘는다! 그 중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가장 맛없는 종류인 ‘캐번디시’라는 것, 인도에 가면 정말 맛있는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등등), 바나나를 둘러싼 돌이나 치키타 같은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그로 인한 중남미 국가의 고된 역사 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산으로 올라간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인 댄 쾨펠을 비롯하여 바나나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는 바나나 연구 학자들은 바나나가 이대로 가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그 대안으로 유전공학을 통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강한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나나는 씨가 없기에 혼자 번식하지 못한다. 때문에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만 번식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한 복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유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소리는 곧 바나나가 병에 무척 취약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싱카토카병 및 파나마병으로 하루아침에 멸종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우리가 현재 먹는 캐번디시 전에는 그로미셸이라는 품종이 인기였다. 이 바나나는 캐번디시보다 훨씬 맛있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 파나마병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고, 그 뒤 파나마병에 더욱 강하게 개량되어 나온 품종이 현재 주로 소비되고 있는 캐번디시다). 그러나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바나나는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고 영양도 풍부한 좋은 과일이다. 때문에 중남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런 식품이 파나마병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저자는 때문에 이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GM 바나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나나 연구학자들의 논리도 바로 이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전자조작 농작물들이 처음에는 이런 선의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결국 다국적기업들의 배만 불리고 중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라카의 땅은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바나나를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알겠다. 바나나가 가난한 나라의 주요 식량공급원이라는 것도 알겠다. 병에 약한 것도 알겠다.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유전자조작 바나나를 만들어야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순진하지 않나?  아프리카와 중남미, 동남아시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 보다는 치키타나 돌 같은 바나나 기업들이 GM 바나나를 유럽이나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그들의 배만 더 부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물론 영국 국민의 82%는 GM 바나나가 나올 경우 결코 사먹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유전자조작 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 긴 세월을 버텨온 이 노란 과일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바나나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GM 바나나만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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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골라야 할지 ㅠㅠ 눈물눈물....





지난번 에코백은 그래도 꾹 참았는데.....

헐.... 비틀즈 에코백이라니... 꽈당 o.O


게다가 그랜드부다페스트 아코디언 북램프까지.......



이쯤하면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사은품을 타려고 책을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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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7-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이갓 아코디언 북램프요??? 😩😫😭 아 저 지금 너무 웃픈 상황이에요 ㅠㅠㅠㅠ 본투리드 백 한개만 할 걸 그랬나봐요. 이런게 증정품으로 나올줄이야 ㅠ 이번 달은 돈 더 못쓰니 그냥 눈물을 머금고 맙니다.

잠자냥 2016-07-14 12:50   좋아요 1 | URL
네 ㅠㅠ 아 정말 웃프네요... 아니 슬퍼요. ㅠㅠ 미운 알라(딘)신 ㅠㅠ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주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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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던가. 마르탱 파주의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를 읽고 있으면 내내 정희진의 저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주인공 앙투안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도저히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없어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을 선택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그려나간 작품이다.

앙투안은 스물다섯의 대학 시간 강사로 많은 책을 읽고, 예술 작품에도 조예가 깊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은 이른바 '지성인'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세상에 쉽게 융화되지 못한다. 늘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성찰하는 버릇이 습관처럼 몸에 배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지성은 곧 질병'이며 구약성서에 나온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는 고통도 쌓여간다'는 말이 곧 진리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맥도날드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소굴이며, 기름기와 설탕 공급자이며 생활패턴의 획일화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가난한 앙투안이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곳이었으며 '고급 백화점은 사회 상류층 냄새인 사향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부르주아 사육장'이기 때문에 고급 백화점도 갈 수 없고, 옷을 사더라도 혹시 '이 옷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옷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기를 주저하고, '헬스클럽은 찌르는 듯하고 최면을 거는 듯한 음악에 맞춰 근육질의 갤리선 노예들이 노를 젓는 곳'이기 때문에 또 가서는 안되는 곳이다. 때문에 그는 가난한데도 자기의 수입이 허락하는 한 유기농 식품을 사먹고, 옷은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며 현대인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자동차는 절대로 소유하지 않으며(때문에 운전면허증도 없다), 헬스클럽 같은 곳에서 운동을 해서 자신의 몸을 과시하느니 체력 약하고 빼빼마른 몸으로 그저 산책을 하는 일 등이 전부인 삶을 살아 간다. 그러다보니 계속 평범한 사람들과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에 애를 먹게 되고 결국 '너무 많이 알아서 괴롭고 불행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한다.

사회에 융화되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보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로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는 대뇌피질 제거 수술을 받으려다 실패하고, 정신과 의사로부터 '에로작'이라는 약을 받아 먹으면서 서서히 바보가 되어간다. 따지고 질문하기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책과 음반 예술품 등등을 다 내다버리고, TV를 사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몸을 가꾸고, 회사를 들어가 떼돈을 벌면서 그 돈으로 고급 백화점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소용도 없는, 사용도 하지 않는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르셰 승용차도 장만하며...

그런데 이렇게 점차 그냥 평범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앙투안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이 그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폭탄을 배달하는데, 폭탄은 바로 앙투안이 '바보'가 되기 이전에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 플로베르의 서한집이었다. 플로페르의 서한집을 받아든 앙투안은 정말, 마치 폭탄을 맞은 사람처럼 원래의 그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정말 문학과 음악 그림 같은 예술 창작품들이 사람을 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좀 더 해보게 된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의 비즐러가 그러했듯이.

예전에 본 <잔잔한 호수 위의 파문 : The Rage In Placid Lake> 도 좀 비슷한 내용이다. 물론 주인공 플라시드는 앙투안처럼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개방적이고 좀 남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사회적 규범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 자라나는데, 그러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스스로 가장 사회적인 인물이 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험회사에 일부러 취직을 하고, 가장 전형적인 회사원이 되어가면서... (플라시드 부모는 아들이 보험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니까 막 운다; 애를 버렸다고. ㅋㅋㅋ)

암튼 이런 류의 책이나 영화들을 보면 사회라는 곳, 사회의 규범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이 조금 남다르게 사는 것은 참 힘들고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대단한 진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이 아는 사람들이 그다지 상처받고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더 뻔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생각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냐, 또는 많이 알면서 불행(?)하게 살 것이냐 조금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 책. 나는 생각 없이 살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융화하는) 삶이 딱히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많이 알고 상처 받더라도 고독한 지성의 숲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인간들은 묘하게도 자기 자동차를 닮았다. 어떤 이들은 옵션이 전혀 없는, 그저 굴러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러니까 속력을 낼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아예 멈춰버려서 종종 수리가 필요한 그런 인생을 산다. 그것은 싸구려 인생으로, 견고하지 못해서 사고가 났을 경우 탑승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인생은 가능한 모든 옵션을 다 갖추고 있다. 돈, 사랑, 미모, 건강, 우정, 성공까지. 마치 에어백, ABS, 가죽 커버, 보조방향조정장치, 16기통과 에어컨을 갖춘 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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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7-13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도 좋고 책은 읽어보고 싶네요 ㅎ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면 이기는 병신이 되어라는 이 병림픽 시대와 걸맞는 책인 듯 싶어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ㅎ

잠자냥 2016-07-14 10:51   좋아요 0 | URL
네, 분량도 그리 많지 않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물론 그에 비해 던지는 질문은 쉽지 않지만 ^^)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랍니다!

루쉰P 2016-07-15 00:16   좋아요 0 | URL
흠 질문이 쉽지 않다라...구미가 당기는 군요 훗 전 모험가 체질이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