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판본 복간 붐에 이어, 리커버 붐인가 보다. 어제 교보문고에서 온 메일을 확인해보니, 문학동네에서도 세계문학 전집 가운데 몇 권을 리커버로 출판하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롤리타>가 있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롤리타>는 번역이 괜찮다는 평이 많아서 이 판으로 다시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이 리커버판 출판 소식은 살짝 구미가 당긴다. 알라딘에도 올라왔는지 검색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과 관련한 소식은 교보 링크로 대신한다. (요기를 클릭)
나는 이제는 절판된 민음사 버전 <롤리타>로 예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문학동네 판을 구매해서 다시 읽어볼까 싶다. 그런 참에 예전에 써두었던 <롤리타> 리뷰를 옮겨본다.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 신드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통은 아는 사실이리라. 아동 포르노 관련 기사나 아동 성범죄 관련 기사
이런 것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아동을 보고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들의 어떤 면을
보고 성적으로 끌릴 수가 있을까?
나보코프의 <롤리타>에는 님펫(Nymphet)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정확히 9살에서 14살까지의 사춘기 증후가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녀들을 의미한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그런 님펫에 미쳐있는
중년의 남자다. 자신의 이런 욕망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그저 그런 님펫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어린소녀를
훔쳐보며 자기만의 도취된 세계 안에 갇혀 산다.
그러다가 험버트는 그의 영원한 ‘롤리타’- 열두 살 난 완벽한
님펫 ‘돌로레스 헤이즈’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갖기 위해,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돌리, 돌로레스,
로, 롤라, 롤리타! 그녀의 엄마와 결혼을 한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계속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어느 날 사고로 돌로레스의 엄마가 죽자 험버트와 돌로레스 둘만 남게 된다. 험버트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천국이 따로 없다. 그
완벽한 천국에서 험버트는 그의 완벽한 님펫인 롤리타의 육체까지도 소유하게 된다.
역겨운가? 나는 좀 처음에 솔직히
역겨웠다. 소녀들이 뛰어노는 공원 근처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며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험버트의 시선을 따라가자니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할까, 이런 고민까지 들었다. 그의 읊조림은 아동을 대상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변태 중년남의 변명, 자기합리화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픈지. 읽을수록 쓸쓸하고, 애달픈 감정이 드는
것인지. 내가 왜 이 변태(!)에게 동조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가슴 아픈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집착이, 광적인 열정이,
헌신적인 애정이 왜 그렇게도 안타깝던지. 슬프고 씁쓸했다. 돌로레스의 육체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마음은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남자. 어쩌면 돌로레스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 없었던 사랑. 님펫은 영원하지 않다. 성장하고, 결국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잡았다 해도 결국은 영원하지 않은 세계. 그 모든 것이 무척 슬프고 서글펐다.
사회에서 이른바 ‘비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랑, 변태라고 부르는 사랑, 그 사랑의 감정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누가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애끓는 사랑을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영화
롤리타(Lolita)에서 험버트 역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의 한없이 쓸쓸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이 불쌍한 남자에게 더
동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는 세계, 이미 잃어버린 세계, 영원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동경…. 이런 것들이 한편의 시(詩)처럼 펼쳐진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 혐오스러운 사랑, 금기의 사랑이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엄청난 문학적 재능 때문일 것이다. <롤리타>를 읽고
나면 이 세상에 과연 변태의 사랑, 금기의 사랑,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관한 도덕적 잣대에 따른
구분은 사라지고 그저 오로지 ‘사랑’ 그 자체만이 남는 기분이 든다.
자, 이제 문학동네 버전으로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를 만나볼까......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 (<롤리타>, 민음사, 3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