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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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을 읽다가 잠이 들어 책을 떨어뜨린 적이 몇 번 있다. 감기약을 먹어 정신이 몽롱했던 때였다. 그때마다 애인은 “태고의 시간! 제목부터 잠이 오네. 잠이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잠이 든 건 감기약 때문이라고 했다. 태고가 그 태고가 아니야, 아니, 그 태고는 맞는데, 폴란드의 한 마을 이름이야. 태고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야. 1900년대 초부터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 그 사이에 1~2차 세계대전도 있고, 폴란드 사회주의 과정도 있고. 그제야 애인은 재미있겠네 한다.


실은 나도 그랬다.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올가 토카르추크, 그이가 지난달 노벨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태고의 시간’이라니, 왠지 하품이 밀려온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태곳적 이야기라도 들려주면 금세 잠에 빠져버리듯이. 이 책의 처음 몇 쪽을 읽어도 이런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이어서 태고 마을의 곳곳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문장들은 성경 한 구절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단군신화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이러면 좀 곤란한데? 이런 마음이 들 때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태고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이 저마다 펼쳐진다. 


게노베파의 시간과 크워스카의 시간을 읽을 때부터 나는 이 책에 매혹당했다. 게노베파도, 크워스카도, 미시아도 모두 여성이다. 태고 마을에 사는 남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삶부터 그려나간다. 전쟁터로 남편을 보낸 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인,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라고 말하는 여인. 그런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 미시아, 루타, 그리고 이지도르, 그들이 또 다른 삶을 일구어나가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설킨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 세상에 태어나 목숨을 연명해간다.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그렇다고 처참할 정도로 불행한가?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두 번의 전쟁, 그로 말미암은 크고 작은 사건들에 휩쓸리기도 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아끼는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전쟁터에 나간 게노베파의 남편 미하우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가. 그런데도 삶은 늘 고단하다. 쉽지 않다. 크워스카와 루타 모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이지도르의 삶도 고단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을 것만 같은 부유한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또 어떤가. 그는 서서히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갈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간다.


그들 저마다의 세월을, 시간을 지켜보노라면 문득 내 시간을,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지금 어느 즈음인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고 결국 그 뒤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과정에 있을 뿐이 아닐까. 그런데도 인간은 왜 태어나서 이토록 모질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하염없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토록 많은 이들의 ‘시간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삶이 허무하다는, 덧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으로 이들이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흘렀다. 어느 아침, 숙취에 시달리며 자신이 마흔 한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파베우의 생각을 마주했을 때였다. 열심히 살았고, 사랑했으며, 그토록 원했던 여인 미시아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아이들을 낳고, 좋은 지위까지 누리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도 숙취에 시달리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던 그는 삶이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며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도 없고,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일깨우는 것’도 없다. ‘그저 끊임없는 투쟁과 채울 수 없는 야망,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속에 울고 싶어지고 울음을 터뜨려보려 하지만, 오랫동안 울지 않았기에 우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우는 법을 잊은 그 대신 나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럴 때 인간은 과거와는 다른 미래의 시간을 꿈꾼다. 파베우 또한 마찬가지로 ‘미래 속에 생각을 던져 넣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억지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긍정적인 생각도 곧 사라지고 끔찍한 슬픔만이 되돌아온다. 미래 역시 과거와 별다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들, 교육과정과 승진, 펜션과 집 증축, 모든 계획과 활동 너머에는 궁극적으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그는 그 아침의 숙취 속에 깨닫는다. 이처럼 참혹한 진실이 있을까.


<태고의 시간들>은 이렇듯 그 수많은 시간을 거쳐 무(無)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를 이야기한다.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부단히도 살아가려 애쓰는 나약한 인간의 삶. 결국 그 지난한 과정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을 앞둔 대부분의 인간은 미시아가 그러했듯이 ‘언어 능력, 삶의 환희, 생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을 전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틀림없이 공포’에 떨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써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고 두뇌 활동이 멈추게 되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한 사람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미시아의 ‘특별한 샐러드와 초콜릿 크림을 끼얹은 케이크와 생강 과자 또한 영원히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생각과 말, 그녀가 직접 겪고 몸담았던 모든 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또한 이지도르가 ‘사랑했던 장소들이 점차 흐릿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감정도 사라진다. 조카가 생겼을 때의 벅차오르는 감동, 사랑하는 이가 떠났을 때의 끝없는 절망, 기쁨, 확신, 공포, 자부심, 그 밖의 수많은 다른 느낌들 그 모두가……. 나와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인간은 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할까. 신조차 ‘세상을 창조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을 창조해 봐도 얻어지는 건 전혀 없다.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확장할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헛된 일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조차 이럴진대 나는 이 세상을 왜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게다가 악으로 넘쳐나는 듯한 세상을 개선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세상은 개선할 수도, 개악할 수도 없’고 그저 ‘지금의 상태로 유지될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인간들의 이 미약한 몸짓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345~346쪽)


신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은 때로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시간은 끝나지만 그 시간 너머의 또 다른 시간, 영원으로 향한다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그 영원의 존재는 신마저도 부러워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신이 보고 계신다. 시간은 달아난다. 죽음이 쫓아온다. 영생이 기다린다’. 개개인의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난다. 그리고 그 개인은 소멸해간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하다. 신조차 그 영원은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개인은 또 다른 개인이 되어 영속한다.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가 그의 딸의 손으로 이어지듯이. 나무가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영원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꿈의 중단 상태일 뿐’이리라. 인간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진실. 그렇기에 불안한 인간과 동물의 삶. 그러나 그 시간 너머의 영원을 <태고의 시간들>은 묵직하게 전한다. 태고에서 태어나 다시 태고로 돌아가는 삶. 슬프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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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여왕 아니 에르노, 그녀의 고백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사건> 출간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임신 중절 경험을 글로 쓴 것이다. 대단하다, 용감하다, 놀랍기 짝이 없다. 많은 에르노의 책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매우 짧다. 집중해서 읽는다면 한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 그러나 이 책은 장담하건대 낙태, 여성의 자발적 임신 중단에 관한 그 어떤 책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시작부터 강력하다. 그녀는 병원을 향하고 있다. 병원 가는 길을 묘사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묻는다. ‘병원을 나설 때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병원 대기실에 도착해 접수를 하고 주위를 돌아본다. 병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머리가 벗어진 삼십 대 남자, 젊은 흑인 남자, 주름진 얼굴의 오십 대 남자. 금발 여자, 임신해서 배가 나온 여자와 정장 차림의 남자…. 응? 이상하다. 산부인과에 이렇게 남자가 많아? 의아할 즈음, 그녀가 찾은 병원은 산부인과가 아니라 에이즈 검사를 위해 찾아간 곳임을 알게 된다. 아,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할 즈음 그녀는 에이즈 음성 판정을 받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선다. 그러다 문득, 그때의 그 일을 떠올린다. ‘1963년 지금과 똑같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던 순간’을…….


7월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섹스하는 몸의 움직임과 사정, 여러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장면 때문에 나는 여기 있었다.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 춤처럼 여겨졌다. 보채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남자는 오로지 내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고자 이탈리아에서 온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하는 몸짓과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정자, 이 모든 것을 내가 병원 대기실에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도 섹스와 연결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11쪽)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 춤처럼 여겨졌다는 그녀. 병원 대기실과 섹스를 도무지 연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아니 에르노이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섹스는 곧 병원 대기실과 연관된다. 1963년 10월 내내 그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넘도록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다. 팬티에 비친 피를 볼 수 있기를 내내 바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러 가도 온통 생리 생각뿐이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사르트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닫힌 방>을 보러 간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생리 생각뿐이다. 그날 그녀는 연극을 본 뒤 수첩에 이렇게 쓴다. ‘멋지다. 내 안의 이런 현실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치학과 학생인 P와 여러 차례 섹스했다. 위험한 시기임을 알 때도 자신의 배 속에 ‘그것이 생길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과 쾌락을 누리며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게 잘못일까?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게 그녀의 오산인가? 두 사람이 사랑과 쾌락은 똑같이 즐겁게 누리는데, 왜 그 결과는 아니 에르노, 그녀, 여성 혼자만 이토록 고통 속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극장에서도, 연극을 보면서도 공부를 하다가도 팬티에 피가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심정을 함께 섹스를 하며 즐기던 그 남자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와 진료 약속을 잡는다. 그 와중에도 여느 때처럼 부모님 댁에 가서도 혹시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들킬까봐 두려움 속에 떤다. 마침내 산부인과에 가고, 진료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의사는 임신이 틀림없다면서 명랑하게 웃음 지으며 그녀에게게 말한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오마이갓! 이게 과연 할 소리인가? 그녀는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온다. 그날 수첩에 이렇게 적는다. ‘임신 끔찍하다.’ 출산예정일은 1964년 7월 8일. 그녀는 임신 진단서를 찢어 버린다.

절반의 책임이 있는 P에게도 사실을 알린다.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다고, 임신 중절을 결정했노라고. 이 소식에 그는 크나큰 안도감을 느끼고 무사태평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 뒤로 모든 문제 해결은 그녀만의 몫이다. 1963년, 임신 중절이 불법인 시절이다. 그녀는 이 시절을 떠올리면 그 몇 달은 흐릿한 불빛에 잠겨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시절. 이때를 떠올리면 ‘출항’이나 ‘선악의 저편’ ‘밤 끝으로의 여행’ 같은 문학 작품 제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노라고 말한다. 지금도 여전히 소설에서 중절 일화를 읽으면 마치 말들이 순식간에 폭력적인 감각으로 변화해 버린 듯, 이미지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충격 속으로 빠져든다고. 그 시절 듣곤 했던 노래를 우연이라도 듣게 되면 당혹감에 사로잡힌다고.

임신을 확진 받은 이후의 삶은, 생리를 기다리던 때보다 더 지옥이다. 예전처럼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듣고, 학생 식당에 가고, 학생들만 다니는 바에서 커피를 마시지만 이제 그들과 자신은 다른 처지이다. 그들과 자신은 더는 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함으로써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듯하다.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상황을 가리켜 ‘임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저 수첩에는 ‘이것’, ‘이런 것’이라고 쓸 뿐이다.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없는 그녀. 고민 끝에 장 T.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는 유부남인데다가 ‘피임의 자유, 가족계획과 관련한 비합법적인 협회’의 일원이기에 그녀에게 어쩌면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다. 그는 누구와, 그리고 언제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음에도 그녀에게 섹스를 제안한다. 오마이갓! 그에게 그녀는 임신함으로써 ‘섹스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범주에서 이제 의심할 여지없이 이미 섹스를 경험한 여자의 범주로 이동한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라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위험마저 없기’ 때문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일을 당하고도 그녀는 말한다. ‘불쾌한 일화였지만 내 상황에 비춰 보면 어쨌든 하찮은 일’이었노라고.

시간은 흐르고 배 속의 태아는 자라고 그녀는 속수무책이다. 의사를 찾아가 보지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뒤흔든다. 불법에 누구도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삶은 서서히 부서져간다. 공부를 좋아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던 총명한 대학생은,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조차 없다. 다만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자신의 육신을 질질 끌고 다닐’ 뿐이다.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 무너져 내릴 뿐인 허울 같은 구조물처럼 보일 뿐이고 도저히 논문을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 ‘논문을 쓸 수 없음은, 보이지 않는 내 타락의 명백한 징표’가 된다. 그녀의 수첩에는 이런 단어들이 적혀 나간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정상적인 세계에서 배재되었다는 끔찍한 의미, 수치심과 타인들의 비난어린 시선 속에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법은 도처에 있었다. 감정을 꾹 눌러 적은 내 수첩 속에, 장 T.의 튀어나온 두 눈 속에, 이른바 강요된 결혼들에, 영화 속에, 임신 중절을 한 여자들의 수치심과 타인들의 비난 속에도. 언젠가 여자들이 자유롭게 중절을 결정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생각 속에도 법은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임신 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아니면 금지되었기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31~32쪽)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을 홀로 강구한다. 부모님 댁에서 뜨개질바늘 한 짝을 갖고 기숙사로 돌아와 홀로 낙태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오마이갓! 이런 순간에도 자기 자신에게 가하게 될 고통은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용기를 북돋으며 단단히 마음을 먹기도 한다. 이런 처절한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는 그놈의 P. 그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녀가 홀로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겪는 내내 그 절반의 책임이 있는 그놈은 아무 상관없는 타인처럼 무사태평하게 지낼 뿐이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제는 자기 임신 중절 경험까지 글로 쓰느냐고. 그녀 말대로 ‘모욕과 두려움 그리고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이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대학교 기숙사 화장실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잉태했던 그 경험을. 그녀가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렇게 글로 써서 밝히는 이유는 하나다.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녀마저 이런 일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그녀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토록 처절한 ‘사건’을 고백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38쪽)

이 글을 쓰던 시기에, 코소보 난민들이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항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밀항 전에 잠적해 버린다. 그럼에도 코소보 난민을 비롯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밀항업자들을 쫓는다. 삼십 년 전에 임신 중절 시술가에게 그랬듯이 밀항업자들이 존재를 몹시 못마땅해 한다. 누구도 그 존재를 부추기는 법률이나 국제 사회의 명령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 임신 중절 시술을 해주었던 이들처럼, 이민자들의 밀항을 돕는 이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올바른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59쪽)


아니 에르노는 살아남아 이 글을 썼지만 불법으로 임신 중절 시술을 받거나 온갖 기이한 민간요법으로 낙태를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여성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 또한 의사가 아닌 이에게 기이한 시술을 받는 바람에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이 글조차 세상에 나올 수 없을 뻔했다. 흔히 태아의 생명과 살 권리를 말하며 낙태를 반대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위해 산 사람의 삶과 목숨을 송두리째 걸어야만 하는 이런 일이 계속되어야 할까? 게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온갖 낙인은 누가 찍는 것인가? 임신이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 왜 임신의 책임은  여성에게만 짐 지우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에르노의 이 고통스러운, 그러나 진실 가득한 문장은 여성보다 태아의 권리를 앞세워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덧붙여,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낙태금지법이 발효되던 시절의 미국에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여성과 버려진 아기들을 구제하는 한 의사의 삶을 그린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도 이 책과 함께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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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현모양처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4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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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시 시리즈의 매력은 살인 사건은 있지만 아주 큰 위협이나 끔직함이 없어서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점. 드디어 해미시의 매력이 터진다. 프리실라와의 관계도 살짝 변화가 오는데, 이 커플 아닌 커플 이야기 갈수록 흥미진진. 이 권에서는 좀 기발한 살인방법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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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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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라는 마을에서 탄생하고 소멸해 가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고... 어차피 죽음으로 가는 길, 인간은 왜 태어나 사는 걸까? 묵직한 슬픔이 남는다. 크워스카, 루타, 미시아, 이지도르의 시간이 마음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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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구지 모모라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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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처음에는 고소하고 묵직한 맛이 느껴지다가 곧 산미가 입안에 확 번진다. 고소하면서 신맛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만족할 커피. 아이스커피로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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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달 2020-01-1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구지 모모라 굉장히 맛있게 마신 기억이 있는데, 고소하고 묵직한 맛인가 보네요. 모모라는 아이스가 더 나은 것 같아요.

잠자냥 2020-01-18 09:57   좋아요 0 | URL
네 아이스로 마시면 더 훌륭할 커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