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1월 25일. 그러니까, 오늘은 버지니아 울프가 태어난 날이다. 이런 날에 그녀의 책 한 권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에게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종종 버지니아 울프를 소재로 만들었거나, 그녀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서 보이는
이미지도 ‘고뇌하는 천재 여성 작가’의 이미지였다. <3기니>는 울프에 대한 이러한 기존의 이미지에 몇 가지를 추가한다.
평화주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사회주의자인 버지니아 울프- 이런 그녀의 모습을 <3기니>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서간체 형식을 띄고 있다. 소설인가 싶으면서도 소설이 아니고 단순히 울프가 자신의 생각을 쭉 주장한 에세이인가 싶으면서도 그렇지
않고, 편지 형식인데 울프가 꼼꼼하게 단 주석이 달려 있는 형식부터가 독특하다.
변호사인 ‘남성’이 ‘나’(‘나’는 꼭 버지니아 울프라고 볼 수만은 없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의
형식을 띄고 있다. 첫 번째 기니, 두 번째 기니, 세 번째 기니로 나뉘어져 각각 독립적인 주제를 갖고 가상의 ‘남성’에게
‘나’는 답장을 보내고 있다. 변호사인 ‘남성’은 전쟁을 막기 위한 활동에 기부금을 내 달라고 ‘나’에게 주문을 했고, ‘나’는
답장을 통해 어떤 이유로 기부를 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조목조목 밝히며 남성 중심 사회에 쓰디쓴 비판을 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각 장과 이 책의 제목을 이루는 ‘기니(guinea)’의 의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1930년대 영국에서 기니(guinea)는 의료비나 비싼 사치품을 살 때, 공수표에 쓰는 액면가로
사용되었다. 기니는 곧 사용자의 계급과 구매품의 고가를 의미한다. 울프가 3기니를 쓰고 있을 때 부자들은 자선 단체에 기니를
기부하거나 그림이나 그 밖의 사치품을 살 때 기니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영국의 약탈, 제국주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영국은 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의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했고,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얻은 수익금을 기념하려고
주조된 상징적인 동전이 바로 ‘기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니’는 영국의 제국주의, 침략주의,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국에서 여성의 상태가 노예와 다를 바 없음을 폭로하는 상징적인 제목이다.
첫 번째 기니에서 울프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밝히며, 전쟁을 만들어 온 역사는 바로 남성임을 조롱한다. 전쟁은
곧 남성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며, 군복과 훈장 등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 등이 모두 남자들의 문화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권에서 여성은 교묘하게 배제되어 있음을 꼬집는다. 때문에 기부금을 내기보다, 국가에 충성하고 전쟁에 동참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기존의 대학과는 다른 여성대학을 만드는 데 1기니를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이 새로운 대학, 가난한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기술, 군림하고 살상하며 땅이나 자본을
획득하는 기술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기술을 가르치려면 월급, 제복,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가난한 대학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값싸게 배우고 실행할 수 있는 기술만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테면 약학, 수학, 음악, 미술,
문학이 좋겠습니다. 새로운 대학은 인간의 상호교류 방법, 즉 다른 사람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는 기술, 대화하는 기술, 이것과
관련되는 의복과 요리에 관한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새롭고 청빈한 대학의 교육 목표는 분리와 전문화가 아니라 결합이어야
합니다.” 라며….
이런 식으로 울프는 두 번째 기니에서 여성의 전문직 진입을 돕는데 1기니를 기부하겠다고 밝히고, 세 번째 장에 와서야 그
‘남성’에게 3기니 가운데 1기니를 보내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역시 ‘정의와 평등과 자유의 위대한 원칙을 몸으로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다는 조건을 달면서. 결국 울프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사라져야
하며, 애국심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국가 종속형 인간, 훈장, 메달, 작위 등을 따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기존의 대학
이런 것들이 사라져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울프가 살던 시대에서 1세기가 지났다. 버지니아 울프는 폭격이 계속되는 런던에서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 울프가 만약 1세기가 지난 지금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세상이 달라졌다며 기꺼워했을까? 울프가 그렇게도
바라던 여성만을 위한 대학도 생겼건만, 그 여성 대학은 여전히 기존의 대학들과 다를 바 없이 '남성들과 똑같은 경쟁 틀'에서
싸워서 이겨 성공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런 현실을 보며 그녀는 여전히 강물에 뛰어들고 싶어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