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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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그녀의 연인인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의 답장은 자주 오지 않는다. 남자는 그저 여자의 편지 뒷장에 메모를 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 남자는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힌 상태다. 여자와 남자는 결혼을 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여자는 때문에 그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의 소식이 담긴 편지를 남자에게 보낼 뿐이다.


여자의 이름은 아이다(Aida), 남자의 이름은 사비에르(Xavier)- 이렇게 해서 이 소설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은 이루어진다. 존 버거는 소설의 첫 도입부에서 이들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그러나 발견하게 된 경위는 밝힐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편지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은, 아니 어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다.

사비에르는 왜 감옥에 갇혔을까? 그것도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살았던 나이만큼 그 시신을 감금해 놓는다는 가혹한 형벌, 이중종신형이라는 무거운 선고를 받게 된 것일까? 해답은 금방 알 수 있다. 아이다의 편지 뒷면에 적힌 그의 메모를 통해 그는 반정부 투쟁을 벌여온 테러리스트였으며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사비에르의 메모에 담긴 내용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 세계의 불평등, 신자유주의 세계화,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맞서는 내용이다. 프란츠 파농이나 차베스 등 부당한 현실에 반대해 혁명을 꿈꾸던,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들의 잠언이나 명언들도 상당수 차지한다. 이런 메모로 인해 사비에르가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다국적기업의 폭력적인 지배 등에 맞서 싸웠기 때문을 알 수 있게 된다.

바깥에 있는 아이다 역시 그런 삶과 무관하지는 않다. 약제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투쟁을 하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군인들의 총에 맞아 다리를 다친 소년을 돌봐주는 등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묵묵하게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편지 속에 적힌 ‘카드놀이’라는 암호화 된 이야기로 사비에르와 함께 투쟁을 하던 이들과 그녀는 계속 연결되어 있음도 유추할 수 있다.

아이다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과 곁에 있던 존재가 사라진 상태, 즉 부재의 상태는 다르다면서 그가 없는 현재의 상태를 외롭게, 그러나 꿋꿋하게 버틴다. 면회의 기회라도 얻고자 번번이 결혼 신청을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다. 이들이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이중종신형을 받은 이 남자, 사비에르와 아이다가? 이 두 연인의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편지 속의 이들을 보면 그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폭압적인 세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과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올곧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은 정말로 어디선가 지금 일어나고 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은 남아메리카일 수도 있고, 아프리카일 수도 있고, 아랍 땅일 수도 있다.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얼굴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 살아가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이다가 사비에르를 부르는 호칭은 스페인어, 터키어, 아랍어 등등 다채롭다. 때문에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소위 제3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제3세계에 이런 척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단지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일깨우게 된다.

오늘날 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의 횡포, 세계화가 가져온 불평등의 심화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역시 크게 본다면 그런 범주에 속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그런 책들 중에서 조금 더 돋보이는 이유는 연인들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문학이라는 장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런 장치를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얼굴을 한 수많은 개인이 지금 이 순간도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 세계 곳곳에서 쓰러져 가고 있음, 신음하고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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