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 함민복 에세이
함민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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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몇 해 전 설 연휴에 처음 읽었다. 그런데 요즘 또 다시 집어들게 된다. 아무래도 이 책은 설 연휴에 읽기 좋은 책이려나? 그 무렵 나는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를 읽으며 눈물을 하도 흘린 터라 가벼운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 좀 달래려 했다. 그런데 어이쿠, 이 책 역시 집어 들고 읽다가 훌쩍 훌쩍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이 한 살 더 먹고 눈물이 많아진 것도 아니고, 이 책이 눈물을 강요하는 책도 아닌데, 울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후드득 눈물은 떨어진다.


함민복의 시는 학교 다닐 때 이른바 ‘바이블’ 같았다. 다른 학교 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함민복의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바보 취급(?), 아니 진정한 문학도가 아닌(?) 취급을 받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선배들이 하도 폼을 잡고 함민복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바람에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하는 심정으로 그의 시집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꽤 쓴다, 소박하다, 진솔하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등등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시라든가, 한국 현대 문학, 순수 문학에서 멀어지면서 함민복의 이름도 간간히 들릴 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함민복의 에세이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에 대한 이런저런 칭찬의 말들을 듣게 되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읽어 봐야지 하는 ‘언젠가는 도서 리스트’에 올려 두었다.

내게는 좀 이상한(?) 독서습관이 있는데 번역된 외국 문학을 한참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들의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아무리 매끄럽다한들 그래도 번역한 느낌이 남아 있는 문장들만 계속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작가가 쓴 문장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마치 밖에서 사먹는 밥만 먹다 보면 집에서 해주는 밥이 무척 고파지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럴 때 한국 현대 문학을 집어 들면 참 좋겠지만, 역시 또 그렇게는 잘 안 된다. 그나마 문장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들의 에세이집을 읽는 정도로 그친다. 마침 그즈음이 그런 때였는지, 함민복의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더는 망설이지 않고 읽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요즘도 그런 시기인지 모르겠다.

책장을 펼치니 한국어와 씨름하고 살아온 시인의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콕콕 가슴에 와 닿는다. 밖에서 매일 음식을 사먹다가 오랜만에 집 밥을 먹을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책에서도 느껴진다. 따뜻하고, 정겹고, 그러면서도 사물이나 일상에 대한 남다른 시선은 여전하다. 강화도에서 개 한 마리를 키우며 조용하게 살고 있는 이 시인이 써내려간 에세이는 한편 한편이 시(詩)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놓치지 않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고, 뒤늦은 후회가 있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세상에 대한 조용하지만 힘 있는 꾸짖음과 분노도 분명 존재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더없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박한 말투로 별 것 아닌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써내려갔는데 어느 순간 읽는 사람의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어진다. 그의 모든 글을 읽다 보면 함민복은 천생 시인이구나, 시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감성을 지녔구나 싶다.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고, 괜스레 글에서 폼을 잡지도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을 풀어 갈 뿐인데 그런 글이 주는 울림은 무척 크다. 가끔 그는 남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착안해 글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그 사람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미안해하는 마음도 역시나 감추지 못한다. 그가 쓴 글과 살고 있는 삶이 일치하는 순간을 이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글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번쯤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글이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꼭 글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따뜻하고 소박한 이야기 속에서 훈훈한 감동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물론 그 감동은 ‘그래도 삶은 역시 아름답다’라는 식의 근거 없는 희망을 주장하는 에세이, 그저 읽기 쉽게 써내려간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통의 에세이들과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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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2-0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민복의 이런 에세이가 있군요. 담아갑니다.

잠자냥 2016-02-05 13:49   좋아요 1 | URL
네, 나온 지는 좀 됐는데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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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버의 편지와 일기가 동시에......... @.@ 울면서 웃는다. 또 사야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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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편지
존 치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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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존 치버의 편지라니.. 반드시 사야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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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 열린책들 세계문학 169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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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루이스의 <배빗 : Babbitt>을 읽다 보면 익숙한 도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이 떠오른다. 1920년대 미국의 중서부, 중년의 부동산 업자 ‘배빗(Babbitt)’이 살고 있는 (가상의 도시) ‘제니스’는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의 ‘위스테리아’와 닮았고 배빗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중산층의 표본이다. 배빗은 중산층으로서의 ‘표준화’된 삶을 가히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소녀와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과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배빗>의 주인공 ‘배빗’은 일반 명사가 되어 영어 사전에 올라 있다고 한다. ‘Babbitt’이란 ‘스스로 중산층인 체하는 저속한 실업가’ 혹은 ‘중산 계급의 교양 없는 속물’이라는 의미이다. 이름만으로 하나의 명사가 되어 사전에 오른 이 남자 ‘배빗’- 배빗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속물적이고 현실적이며, 표준화된 한 남자의 모습에 혐오감과 함께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나 이 혐오감과 짜증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진다. 


‘그는 기계 장치들을 칭송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기계 장치는 그가 신봉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새롭고 복잡한 기계들- 금속 절단기, 2중 분사식 카뷰레티, 기관총, 산소 아세틸렌 용접기-을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아주 실용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을 풍길 수 있는 용어를 배웠고, 그것을 되풀이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기술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사람이라는 기분을 만끽했다. (91쪽)’

 ‘전국 규모의 대형 광고 회사들이 그의 대외적 생활 혹은 그의 개성을 결정했다. 이 표준적인 광고 제품들- 치약, 양말, 타이어, 카메라, 순간 온수기-은 그의 상징이자 그의 탁월함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었다. 처음에 이런 물건들은 그가 느끼는 즐거움과 열정과 지혜를 가리키는 기호였으나, 곧 신분의 대용품이 되었다. (123~124쪽)’


위와 같은 구절을 보면 1920년대 제니스에 사는 중년 남자가 아니라 2016년 이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복잡한 기계들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새롭게 나오는 전자 제품을 계속 업데이트해가며 그런 기계를 소유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스마트해진다고 착각하는 얼리어답터들, 광고에서 제시한 규격화된 삶을 고스란히 살면서 ‘나는 개성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수많은 현대의 속물들…. 어찌나 표준화된 삶을 살고 있는지 죽어서 가는 천국조차 ‘개별 정원이 딸린 고급 호텔’ 같으리라고(260쪽) 생각하는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들. ‘배빗’은 거의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돈과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표준적인 생각, 표준적인 종교, 표준화된 상품, 사회의 주류라고 여겨지는 생각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물론 때로 이런 삶에 ‘돈을 버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키우고, 이어 그 아이가 또다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이 모든 게 도대체 무엇일까?(341쪽)’ 라며 회의를 느끼고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두려워, 그 따돌림과 배척이 무서워 끝내는 포기하고 마는 이 남자. 이 남자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다 있나!’ 하며 욕을 하다가도 결국 그 욕하는 손가락이 나를, 또는 우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배빗>은 바로 그런 속물들의 삶이 지나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씁쓸한 웃음은 그 끝이 아프고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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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지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1
아베 고보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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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은 왜 뒤쫓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릴까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기 의지로 도망친 인간을 당연히 붙잡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 아베 고보, <불타버린 지도>, 173쪽


이따금 사회.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적을 두지 않을 때가 있다. 견디다 못해 튕겨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사회에 그다지 맞지 않은 사람인데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최면을 걸면서 그 속에서 머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회의감도 들고 염증도 커져간다. 그러다 보면 그냥 그 안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사회 속에서 머물러야만 제대로 인간답게 잘,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다. 가끔 그들은 내 걱정을 하는 거라면서 자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쉬고만 있을 거니, 어떻게 벌어서 먹고 살 거니, 나이 들어 돈도 없고 병까지들면 어떡하려고 하니 등등.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는 거라고 하면서 내가 다시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내가 다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또한 행복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는 마땅히 인간이 누려야 할 자리가 있다고. 가정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인간은 머물 자리, 마땅한 자기 자리가 있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머물렀을 때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낙오자. 패배자. 쓰레기. 잉여라고 한다. 지도 안에서 자기 자리를 굳세게 지키라고 한다.

하지만. ‘불타버린 지도’- 이 사회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다시 그 지도 안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보통은 다들 강제로 그 지도 안으로 끌어들여 놓으려고 하겠지?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지도 안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테니까.

그런데 왜, 스스로 지도 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지도 밖으로 탈출한 사람을 강제로라도 찾아서 그 안으로 끌어들여다 놔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지도 밖에서도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왜 구태여 지도 안에서만 머물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모두가 다 그렇게 사니까, 너 혼자 괜히 튀지 말라고? 혹시라도 내가 그 지도 안에 없기 때문에 언젠가 당신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서는 아닌가?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는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회사에서 과장 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다. 그리고 남자의 부인은 6개월 동안 그를 찾다 못해 흥신소에 의뢰를 한다. 흥신소 직원 ‘나’는 이 남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사실 이 탐정(?) ‘나’도 사회에서 일탈한 사람이긴 마찬가지다.

그 또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내와도 이혼하고 구린 일을 한다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흥신소에서 남의 뒷조사나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 ‘남자’를 찾으면서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실종된 남자와 얽힌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 남자는 대체 왜 사라진 것일까?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이 탐정 ‘나’에게서 종종 실종된 남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는 추적을 할수록 이 실종된 남자를 어쩐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모래의 여자>나 <상자인간>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아베 고보는 <불타버린 지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이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지도 안에서 사라져버린 사람. 스스로 지도를 불태우고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과연 이곳이 당신이 원래 있던 자리니까, 돌아오라고! 라면서 강제로 끌어다 놔야할 권리가 다른 인간(들)에게 있을까? 그것이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처럼 실종은 아니지만 나 또한 때때로 사회적 지도 안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도 안으로 이제 다시 들어가라고, 누군가는 걱정해준답시고 내 삶의 방식에 간섭을 한다. 하지만, 그래서 만약 내가, 지도 안에서 미쳐버리면 그때는 어떤 책임을 져 줄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왜 뒤쫓을 권리가 있다고 믿어버릴까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자기 의지로 도망친 인간을 당연히 붙잡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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