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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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고 하기엔 진실성 부족, 연애라고 하기엔 관계성 부족. 못되고 이기적인 도미니카 찌질이 남자들의 발정담. 그 안에 미국 이민온 유색인들의 초라하고 희망없는 삶이 그려진다. 주노 디아스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데, 첫 책으로는 부적절한 것 같다. <드라운>까지는 읽어볼까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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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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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진을 보면 오블로모프가 떠오른다. 침대에서 누워있기를 가장 사랑했던 오블로모프. 물론 루진이 오블로모프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호감을 얻기는 한다. 그러나 그 둘 모두 행동할 줄 모르는 몽상가. 사랑조차 놓치고 마는 무기력한 잉여자들이다. 헌데 왠지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애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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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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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 슬퍼진다. 우울해진다. 인간이란 결국 이런 존재인가?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싶어 쓸쓸해진다. 나쓰메 소세키가 죽기 직전 쓴 최초이자 최후의 자전적 소설인 <한눈팔기 : 道草>을 읽고 있자면 더욱 그런 고독감과 우울함에 휩싸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양자로 보내졌던 나쓰메 소세키는 스무 살이 넘어 다시 본가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친부모에게서도 양부모에게서도 사랑보다는 환멸을 먼저 느꼈다. 그리고 그런 환멸과 생에 대한 쓰라린 시선이 <한눈팔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친부모에게서 환영받지 못했던 어린 겐조(나쓰메 소세키의 분신)는 양부모의 세속적인 모습을 보며 비틀어진 욕망에 끌려 다니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먼저 배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친가에 복적이 되기는 하지만, 어느 날 그에게 양부와 양모가 번갈아 나타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는 듯 다가오지만, 겐조와 그의 부인은 그들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서서히 경제적 궁핍함을 호소하며 '옛정'을 생각하라며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돈의 액수도 점점 불어난다.

겐조는 누군가에게 돈을 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족한가? 그렇지도 않다.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근근이 가정을 이끌 정도의 수입만을 올릴 때가 배경이기 때문에, 주인공 겐조의 궁핍함도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의 누이도, 그의 형도, 그의 부인과 처가도. 단지 그가 많이 배우고 유학을 다녀온 식자층이고 어딘가에 글을 쓰며 강의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입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가족'이라는 굴레로 당연한 듯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렇다고 겐조가 그의 가족을 사랑하는가? 이 작품에서는 도무지 그런 시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형과 누이는 물론 매형에 대한 겐조의 시선은 연민을 떠나 경멸감에 가깝다. 부인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없다. 한 번도 따뜻한 말이나, 따뜻한 시선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불만투성이다. 자기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갓난아이에게도 '저렇게 못생겼을 수가'하면서 한탄을 한다. 어릴 때 잠시 키워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느닷없이 나타나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양부모에 대한 시선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부인 또한 겐조를 답답하고 고집불통인, 무능력한 남자의 전형으로 바라볼 뿐이다. 걸핏하면 서로 생각이 옳다고 말싸움을 벌인다. 그러다 부인은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며 돌아눕기 일쑤다. 도저히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부의 풍경이다. 커다란 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화해불가의 평행선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서로 갉아먹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간다.

그냥 외면해 버리면 될 텐데, 겐조는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따뜻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들에게 끌려 다닌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벗어날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겐조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탐욕스럽게 늙어버린 양부 시마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도 '이 욕심투성이 노인의 인생과 별로 다를 게 없을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도 한다.

'나 자신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하며 부르짖기도 한다. 그는 또 늙어가기는 해도 의외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좌절한다. 양부에게 나름대로 큰돈을 쥐여주고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부인에게 "세상에 매듭지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다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니까 남들도 자신도 알 수 없을 뿐이야."라고 그가 마지막으로 읊는 말은 인생의 모든 것을 압축한 듯하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굴레 같은 가족 관계, 무능력하고 불만족스러운 자기 처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경멸감, 그런 인간들이 아옹다옹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기도 그렇게 닮아가는 것에 대한 모멸감, 미래와 현실에 대한 불안감 등등 <한눈팔기>는 인생의 쓰디쓴 모든 면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삶'이라는 길 위에 뿌려진 한 포기 풀이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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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39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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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책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수많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마지막 장에 이르러 드디어 황금가지의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 탄성과 함께 가슴이 벅차오른다. 인류는 주술->종교->과학으로 발전해왔다. <황금가지>는 그 과정을 온 세계 신화, 전설, 관습에서 찾아내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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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거지 펭귄클래식 55
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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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토록 좋아했던 작품이라 ‘소유’하고 싶었으나, 왠지 다시 읽으면 감흥이 깨어질까 두려워 말 그대로 ‘소유’만 하고 있던 <왕자와 거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흥이 퇴색하기는커녕 정말로 그 옛날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세계명작전집으로 어린이용 <왕자와 거지>를 만났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 읽는 <왕자와 거지> 역시 놀랍도록 흥미진진했다. 그 옛날과 똑같은 장면에서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조마조마했으며 마지막에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왕자 에드워드가 제자리로 돌아가 나쁜 놈들을 벌할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까지 똑같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때는 웃지 않았던 장면에서 낄낄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달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그 옛날의<왕자와 거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아마 이런 용어도 몰랐겠지) ‘풍자와 해학’이 느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줄거리인데도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예전엔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책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옛날의 그 아이를 역시 또 책으로부터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재미있다’는 감각에 온통 사로잡히기는 얼마만인지. 올해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마크 트웨인을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해로 정해볼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어릴 때 나는 그토록 이 책을 좋아했을까? 곰곰 돌아보기도했다. 돌아보니 나는 공상을 꽤 많이 했던 아이다(모든 아이들이 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상 속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 공상 속에서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두들겨 맞고 거리로 구걸을 나선 꼬마 거지 톰에게 유일한 낙은 ‘공상’이었다. 왕자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고, 왕자가 되는 공상을 즐겨했던 아이. 그런 공상을 할 때 가장 행복했던 톰. 두들겨 맞고 구걸을 한 적은 없지만 톰처럼 나 또한 공상 속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톰의 공상이 현실로 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랄까, 이런 것들이 주는 쾌감이 무척 컸던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톰이 왕자가 된 현실에 만족하기 시작하면서 왕자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화가 났다. 이런 점은 지금 읽어도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정말 불쌍한 건 톰인데, 왜 나는 왕자인 에드워드를 응원했을까?

왕자와 거지라는 신분의 차이, 계급의 차이(모순)에 주목했기 보다는 왕자는 왕자의 자리로, 톰은 톰의 자리로 가는 게 옳다고(비록 톰이 불쌍하더라도),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왕자와 거지>에서 톰이 고생하는 장면은 작품 전반부에만 살짝 나오지, 그 후에는 왕자가 되어 행복한 모습만(물론 마음속으로는 고달프지만) 나온다.

그에 비해 왕자였던 아이, ‘에드워드’는 지나치게 심한 고생을 한다. 이 때문에 고생하는 왕자가 너무 불쌍해서 어서 빨리 다시 왕자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랐던 듯하다. 에드워드가 왕자로 돌아가면 톰을 잘 보살펴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던 것 같고.

하층민으로 태어난 고생만 왕창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톰이 잠시나마 행복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건 네 자리가 아니야!’라며 격분하고, 왕자였던 아이의 고생에는 너무나도 공감하며 마음 아파했던 나는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줄 알았던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에드워드’를 응원하고 있으니 여전히 나는 그때의 나에서 자라지 않은 채 아이의 마음, 아이의 정신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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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봤던 동화나 만화 제목은 기억하는데, 정작 결말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결말을 봤는데도요. ㅎㅎㅎ

잠자냥 2016-09-27 15:02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비단 어릴 때 본 책만이 아니라 몇 년 전에 읽은 책도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 게 많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