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왕자와 거지 ㅣ 펭귄클래식 55
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어릴 때 그토록 좋아했던 작품이라 ‘소유’하고 싶었으나, 왠지 다시 읽으면 감흥이 깨어질까 두려워 말 그대로 ‘소유’만 하고 있던 <왕자와 거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흥이 퇴색하기는커녕 정말로 그 옛날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세계명작전집으로 어린이용 <왕자와 거지>를 만났던 그 순간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 읽는 <왕자와 거지> 역시 놀랍도록 흥미진진했다. 그 옛날과 똑같은 장면에서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조마조마했으며 마지막에 모두가 다 알고 있듯 왕자 에드워드가 제자리로 돌아가 나쁜 놈들을 벌할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까지 똑같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릴 때는 웃지 않았던 장면에서 낄낄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달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는 그 옛날의<왕자와 거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아마 이런 용어도 몰랐겠지) ‘풍자와 해학’이 느껴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줄거리인데도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예전엔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책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옛날의 그 아이를 역시 또 책으로부터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재미있다’는 감각에 온통 사로잡히기는 얼마만인지. 올해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마크 트웨인을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해로 정해볼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어릴 때 나는 그토록 이 책을 좋아했을까? 곰곰 돌아보기도했다. 돌아보니 나는 공상을 꽤 많이 했던 아이다(모든 아이들이 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상 속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 공상 속에서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두들겨 맞고 거리로 구걸을 나선 꼬마 거지 톰에게 유일한 낙은 ‘공상’이었다. 왕자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고, 왕자가 되는 공상을 즐겨했던 아이. 그런 공상을 할 때 가장 행복했던 톰. 두들겨 맞고 구걸을 한 적은 없지만 톰처럼 나 또한 공상 속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톰의 공상이 현실로 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랄까, 이런 것들이 주는 쾌감이 무척 컸던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톰이 왕자가 된 현실에 만족하기 시작하면서 왕자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화가 났다. 이런 점은 지금 읽어도 마찬가지다. 알고보면 정말 불쌍한 건 톰인데, 왜 나는 왕자인 에드워드를 응원했을까?
왕자와 거지라는 신분의 차이, 계급의 차이(모순)에 주목했기 보다는 왕자는 왕자의 자리로, 톰은 톰의 자리로 가는 게 옳다고(비록 톰이 불쌍하더라도),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왕자와 거지>에서 톰이 고생하는 장면은 작품 전반부에만 살짝 나오지, 그 후에는 왕자가 되어 행복한 모습만(물론 마음속으로는 고달프지만) 나온다.
그에 비해 왕자였던 아이, ‘에드워드’는 지나치게 심한 고생을 한다. 이 때문에 고생하는 왕자가 너무 불쌍해서 어서 빨리 다시 왕자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랐던 듯하다. 에드워드가 왕자로 돌아가면 톰을 잘 보살펴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했던 것 같고.
하층민으로 태어난 고생만 왕창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톰이 잠시나마 행복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건 네 자리가 아니야!’라며 격분하고, 왕자였던 아이의 고생에는 너무나도 공감하며 마음 아파했던 나는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줄 알았던 철부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에드워드’를 응원하고 있으니 여전히 나는 그때의 나에서 자라지 않은 채 아이의 마음, 아이의 정신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