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SF가 만난다면 어떤 맛일까? 페미니즘, SF, 단편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혁명하는 여자들>을 처음
봤을 때 무척 궁금했다. 더욱이 100자평이나 리뷰 등을 훑어보니, 칭찬 일색. 특히 ‘늑대 여자’가 강렬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과연 어떤 내용일까? ‘늑대 여자’를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읽었다. 아, 그렇구나. 독특하네. 강렬하네. 이런
느낌들. 그런데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주제의식이랄까?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나도 강렬하면, 특히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여자와 남자, 젠더의 대비가 도식적이고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면 문학적 재미는 떨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문학은 좀
더 상징적이고 은유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읽는 맛이 난다.
사실 <혁명하는 여자들>에 실린 작품들은
SF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SF가 아닌, 그냥 지금 이 현실, 지구 곳곳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토록
강렬하다고 상찬 받은 ‘늑대 여자’만 보더라도 주인공인 그녀 ‘스텔라’가 늑대이지만 ‘여자’인 순간도 있다는 독특한 설정만을
제외하고 보면 작품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전형적으로 억압받고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남자에게 길들여져 어느
틈엔가 남자만 바라보는 여자. 순진하면서도 성적 매력이 넘치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주인(남자)에게 순종적인 암컷 늑대(또는 인간
여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다 남자는 이 암컷, 아니 여자가 늙어갈수록 똑똑해질수록, 자기만의 세계를 가꿔나갈수록 여자에게서
멀어져가고, 결국 다른 젊고 아름답고 덜 똑똑한 여자를 찾게 된다. 매우 전형적인 스토리 아닌가? 게다가! 책 제목이
<혁명하는 여자들>인데 ‘늑대 여자’의 그녀, 스텔라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더 참혹하고
비극적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돋보이던 작품은 어슐러 K.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은 남극
탐험을 떠난 여성탐험대의 요약보고서 형식으로 쓰였다. 이 지구에서 최초로 남극을 탐험했던 그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재미난
발상이라니! 그런데 그들은 남극을 찾아갔다는, 그러니까 남자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남극을 정복’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그저
그들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돌아온다. 그리고 그 비밀은 그들이 할머니가 된 지금도 여전히 지켜진다.
‘나는
그때에도 우리가 그곳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자신이 처음이 되고자 갈망하는 어떤 남자가 어느 날 그곳에
갔다가 그걸 발견하고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였는지 깨닫고 상심할 수도 있으니까.’ (어슐러 K. 르 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혁명하는 여자들>, 263쪽)
이 구절을 읽을 때 정말 입가에 미소가 활짝
번졌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통쾌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 여자들이 먼저 남극을 찾았는데, 그들은 정복했다는,
차지했다는, 소유했다는 증거를 굳이 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저 자신들만의 추억으로 간직한 채 돌아오고는 조용히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다음에 그 남자, 아문센 그가 남극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닐까? 그는 정복했노라, 내가 이
땅에 최초로 발을 디뎠노라 선언하는 바람에 역사에 그렇게 남은 게 아닐까? 그런 은밀하고도 재미난 상상을 해보았다.
르
귄의 작품이 독보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있을 법한 상상으로 우아하게 여성성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정복하지
않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 공감과 위로, 조용하지만 힘찬 인내, 희생정신 등을 그려냈다. 물론 이 작품에는 괜찮은 남성도
등장한다. 그런 점도 좋았다. 게다가 여성탐험대가 최초로 남극에 갔다는 사실을 그 남자, 아문센을 위해서 끝까지 비밀로 해두는
위트 넘치는 배려까지 보이다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혁명하는 여자들>을 읽어 갈수록 아쉬운 마음이
커지면서 예전에 읽었던 한 작품이 떠올랐다. 이 작품이야말로, 내겐 ‘늑대 여자’ 보다 강렬했고 <혁명하는 여자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 전복적이었다. 문제의(?) 작품은 도리스 레싱의 단편 ‘지붕 위의 여자’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영국편
<가든파티>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작품의 질을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난 단편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지붕 위의 여자’는 단연 압도적이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뜨거운 한
여름, 지붕을 수리하던 세 남자- 해리, 스탠리, 톰은 대단한 눈요깃거리를 발견한다. 건너편 건물 지붕 위에서 한 여자가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이게 웬 떡? 그들은 흥분한다. 그들이 있는 곳보다 조금 낮은 건너편 건물은
지붕 위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낱낱이 엿볼 수 있다.
여자는 갈색 담요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었다. 상체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발갛게 익은 탄탄한 등, 양옆으로 활짝 버린 두 팔.
“홀딱 벗었네.” 스탠리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마흔다섯 살 정도 된, 가장 연장자인 해리가 말했다. “글쎄 말이야.”
열일곱 살 꼬맹이 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떠서 연방 싱글거렸다.
스탠리가 말했다. “저, 여자 조심해야지 잘못하다간 신고가 들어가지.”
“아무도 안 보는 줄 아나 봐요.” 톰이 더 잘 보이게 고개를 한껏 위로 뽑으며 말했다. (도리스 레싱, ‘지붕 위의 여자’, <창비세계문학단편선-영국편>, 239~240쪽)
여자는
비키니 차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자그마한 빨간 팬티 하나만 아슬하게 걸쳤을 뿐이고, 그들, 세 남자에게 다분히 도발적으로
보였으리라. 남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여자의 반응이다. 여자는 철저히
무/반/응이다.
이 남자들은 애초에 이 아파트 옥상에 작업을 하러 갈 때부터 아래층에 사는 여자들에게 달걀이라도 구해서 점심으로 삶아먹자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이 건너편 지붕 위에서 빨간 팬티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는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어대는데, 여자가
무반응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워서 그 시선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휘파람에 그들이 기대했을 반응-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성적으로 여지를 주는 응답-은 더더욱 없다. 그저 철저히 남자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한다. 그들은 조금
당황하고 크게 분노한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남자들은 계속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고, 그때마다
여자는 아랑곳없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여자의 몸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보기 좋게 그을리고, 태양은 더 뜨겁게 내리쬔다.
남자들의 휘파람과 도발은 갈수록 더 극렬해진다. 그래도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니, 둘째 날인가 스탠리의 휘파람에 여자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하기는 한다.
‘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마치 자다가 깬 듯 깜짝 놀라며 그들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햇살에 누이 부셔 눈을 깜박이고는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묻었다.’ 이런 태도, 즉 남자 셋이 자기를 구경하든 말든 전혀 무관심한 여자의 태도에 다들 화가 난다. 이 분노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점점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자의 당당한 무관심, 무반응에 남자들은 무릎을 꿇고 만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해리는 이렇게 일을 하다가는
정말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판단해서, 무더위가 수그러들 때까지 작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가슴속에는 뭔지 모를, 해결하지 못한 분노가 남아 괜스레 뜨거운 태양과 무더위를 탓하고 저주할 뿐이다. 가장 어린 톰은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스탠리와 해리 몰래 지붕에 여자가 누워 있던 건물로 들어가서 곧장 지붕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여자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여자는 단 한마디로 그를 엿 먹인다. 여자에게 그나마 낭만적인 호감을 지녔던 톰마저 이제 여자를 증오하게 된다. 그들은
결국 어쩔 줄 모르는 분노에 휩싸였던 참에 물기를 머금은 잿빛 하늘이 나타나자 그제야 고소해한다. 여자가 일광욕을 할 수
없으리라는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아, 참으로 찌질하지 않은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는 남자와 남자의
시선에는 응당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시선에 늘, 언제나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남자가 시선을 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부끄러워하거나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수줍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뭔가 성적으로 질펀한 반응을 하거나. 그런데 마음대로 시선을 굴릴 권리가 있으신, 그 '대단하신' 남자들의 시선을
여자는 단칼에 무시한다. 아예 없는 사람,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한다. 계속 귀찮게 굴자 당당하고도 불쾌하게 화를 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찾아온 톰에게 화끈하게 한방 먹이고 만다.
이렇게 도리스 레싱의 '지붕 위의 여자'는 여성의 몸과 남성의 시선을 전면에 놓으면서 젠더와 계급 문제를 짧지만 강렬하게 표현한다. 남자들은 단순히 그 여자가 감히 여자인데도!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어서
'만' 분개한 게 아니었으리라. 그들이 인지하든 그렇지 못하든 거기에는 엄연히 젠더만이 아닌, 계급적 차이도 존재한다. 자신들은 그 불볕 더위 속에
태양을 저주하면서 지붕을 수리하는 한낱 인부인데, 그녀는 한가롭게
그 태양을 누리며
일광욕을 즐기는 계급적 지위를 가진 것이다. 그 계급적 차이를, 시선을 보내는 남자- 그 시선에 노출되는 여자라는 상태, 즉
젠더의 문제로 환원해 보지만, 그리하여 그들의 위치를 전복해보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층 더
분노한 게 아닐까. 형벌 같은 땡볕에도 유유자적한 여자, 남자의 휘파람과 노골적인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여자. 그 무심한
당당함에서 나는 오히려 짜릿한 통쾌함을 느꼈다. 1960년대 런던, 빨간 비키니 차림 지붕 위의 그 여자가 늑대 여자보다도 한결 더 혁명적으로
느껴졌다. 나처럼 혹시 <혁명하는 여자들>에 살짝 실망한 독자가 있다면 도리스 레싱의 '지붕 위의 여자'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