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 땅에서 엄연히 인기(?) 작가가 된 줄리언 반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1년 전이다. 그때도 딱히 빠르게 안 편은 아니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유명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 역사>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이라는 작품으로,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된 한 남자가 질투와 망상에 시달리는 내용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또 다른 작품을 빌려 읽게 되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내 말 좀 들어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그대로 반스의 팬이 되고 말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때문에 ‘이 사람의 작품은 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럴 정도로 이 책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그 무렵 나는 책 읽기 슬럼프 시기였는데, 반스 때문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린책들에서 속속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나는 그 책들을 하나씩 사 모으면서 기뻐했다. 이제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반스의 작품들도 거의 절판 또는 품절이니, 세월이 또 그만큼 흐른 셈이다. 요즘은 열린책들 대신 다산책방에서 반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열린책들에서 발간했던 그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내 말 좀 들어봐>나 그 후속작이었던 <사랑, 그리고>도 그중 하나이다. 줄리언 반스는 예술 작품이나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비틀어 쓰는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그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독자를 살짝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봐>나 <사랑, 그리고>는 반스의 작품 가운데 그 ‘비틀어 쓰기’가 좀 덜 한, 그래서 가장 읽기 수월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두 작품은 ‘사랑’이야기이며, 그것도 삼각관계, ‘불륜’ 이야기다. 그런데다가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참 수다스럽게도 풀어놓는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세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털어놓고 있으니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내 말 좀 들어봐>를 읽을 때,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스튜어트’에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할 것이다. ‘올리버’는 ‘스튜어트’와 ‘질리언’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참 사랑에 빠진 이들이 올리버를 좋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왜 질리언이 그 충직한 스튜어트대신 조금은 얍삽해 보이는 올리버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면 질리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더욱이 내가 기억하기로 스튜어트와 올리버의 가장 다른 점은 질리언의 '머리빗'을 대하는 태도였다. 올리버는 질리언이 그림 복원 작업을 하면서 종종 빗어 넘기던 그 이빨 빠진 머리빗을 보면서, 그 빗을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빗이 몹시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문제의 스튜어트는 그 빗대신 다른 빗을 사다 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이게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런 두 가지 면을 보이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그게 이빨 빠진 머리빗일지라도) 사랑스럽고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물건이나 행동 가운데 자신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새로 사주던가 해서라도 바꾸길 바라는 경우 등등.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에게 더 애정이 가겠는가? 아마도 질리언은 자신의 이빨 빠진 빗마저 사랑한 올리버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내 말 좀 들어봐>는 이렇게 ‘사랑’의 여러 모습을 세 화자 모두에게 공감이 가게끔,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해되게끔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를 읽고 나서 줄리언 반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정보를 찾다 보니, 후속편도 있는 게 아닌가! 주인공들의 10년 뒤 이야기라는데, 아 정말 궁금한 거다. 그때 당시, 번역본은 아직 안 나오고 영어판과 불어판만 판매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궁금증을 또 참지 못하고 열린책들 홈페이지를 찾아가서는 내 생애 처음으로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독자가 편집장에게’를 클릭하고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안녕하세요.
    귀사에서 줄리언 반스 작품을 계속 번역해서 출간하고 있기에 문의해봅니다.
    줄리언 반스 <내 말 좀 들어봐>의 후속 작인 <love, etc.>의 출간 계획은 없으신가요?
    꼭 읽어보고 싶어서 문의해봅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놀랍게도, 거의 즉각적으로 답장이 왔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앞으로 두 권이 더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중 <사랑, 그리고>는 올해 안, 가을 무렵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줄리언 반스와 열린책들에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메일을 주고받은 게 2007년 7월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문제의 <사랑, 그리고>는 2009년 1월에 출간된 것으로 기억한다.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서 샀던 나. <사랑, 그리고>는 조용한 밤, 혼자 살며시 펼쳐 읽어야만 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이유는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내게만 자신들의 은밀한 속내를 고해성사 해오기 때문이다.

<내 말 좀 들어봐>에서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자 악다구니를 쓰던 세 사람,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돌아온 것이다. 첫 등장부터 재미있다. “이봐! 오랜만이야. 10년 만이군! 많이 변했다고? 당신도 많이 변했다.”라며 아주 오래 전에 만났던 친구와 해후를 하듯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정말로 이 작품을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사람이라면 감회가 새로웠을 듯하다. 스튜어트의 말처럼 변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많이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랑이나 결혼, 인생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었던 전작처럼 속편인 <사랑, 그리고> 또한 단순한 ‘삼각관계 러브스토리’로 읽어버리기엔 그 깊이가 무척 깊다. 10년이 흘렀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1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책장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책을 읽으면 이들이 늙었구나 하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데 그저 흰머리나 불어난 체중 등 외모의 변화에 대한 묘사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런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표현하고 있는 반스의 글솜씨에 감탄이 나온다. 물론 올리버는 여전히 속사포처럼 얄미울 정도로 현학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스튜어트는 변함없이 어딘가 꽉 막힌 답답한 느낌이고, 질리언은? 전보다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던 여자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올리버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두려워지기도 한다. 올리버는 여전히 낭만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질리언이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 ‘Love, etc’에서 ‘etc’가 아닌 ‘Love’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그런 삶.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온(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스튜어트가 10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루어온 ‘etc’적인 삶(세속적인 성공)에 비해 올리버의 삶은 초라하고 볼품없다. 때문에 질리언의 재기 발랄함은 올리버의 낭만주의자적 삶 속에서 빛바래진다.

이쯤에서 ‘어, 그렇다면 이 이야기 너무 뻔한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연애와 달리 결혼은 현실이어서, 현실적이기 보다는 낭만적인 남편 올리버를 택해 살던 질리언이 결국 돈에 굴복해 불행하게 되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10년 전에 그랬듯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며,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셋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첫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첫사랑의 배신에 상처를 받고 오랜 세월 삶을 그저 버텨온 남자 스튜어트, ‘가능한 한 많이 하는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세상의 우선순위는 오로지 사랑이라는 무일푼의 낭만주의자 올리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유일한 사랑’이라며 자신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을 뿐이라는 질리언. 이렇게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너무나도 다른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러브스토리가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의 고백이?

더 흥미로운 사실은 <사랑, 그리고>가 마지막 장에 이르러도 어쩐지 끝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내 말 좀 들어봐 Talking It Over>를 1991년 발표한 뒤 2000년에 <사랑, 그리고 Love,etc>를 발표한 줄리언 반스. 2010년은 그냥 지나갔지만 혹시 2020년 최후의 속편 발표를 목표로 지금 열심히 쓰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쩐지 반스는 스튜어트와 올리버, 그리고 질리언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아마존: 이제 이들 세 인물에 대해 끝을 냈다고 생각하나요?
반스: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끝냈다고 생각하고 나서 8년 뒤에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었거든요.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 그 인물들은 지금의 인생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 그들에게 적어도 10년은 더 주어야 할 겁니다! (영국 아마존과의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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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출판사는 반스의 책을 절판시켰다... ^^;;

국내에 반스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을 때 열린책들 출판사가 재출간할 거로 믿었어요. 열린책들 문학전집 특별판 만들지 말고, 절판된 반스의 책을 다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잠자냥 2017-12-06 13:33   좋아요 1 | URL
네... 재주는 열린책들이 넘고 돈은 다산책방이 주워담는 형국이랄까요... ㅎㅎ 열린책들이 절판 안 시켰다면 요즘 반스 덕분에 재미 좀 봤을 텐데 말이지요. ㅎㅎ

cyrus 2017-12-06 13:34   좋아요 0 | URL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열린책들 의문의 1패.. ㅎㅎㅎ
 
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몇 해 전 이스탄불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정확히는 터키 곳곳이었다. 한 달에서 며칠 모자라는 시간. 어찌 보면 길지만 막상 그곳에서는 짧게만 느껴지던 그 기간 동안 오로지 터키만을 여행했다. 이스탄불은 여행이 시작된 도시이자 마지막으로 들른 도시였다. 그때 만났던 터키의 모든 도시들이 아름다웠지만, 이스탄불이 던져준 매력은 그 어떤 도시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 여행은 내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고 그 까닭은 거의 이스탄불 때문이다. 내게 터키는 곧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독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한다는 그 흔한, 수없이 들었던 말을 직접 체험하니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다채로운 인종에 자유로운 사람들, 꿈틀거리던 생의 기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도시. 단 며칠 동안 머물렀음에도 홀딱 반해버린 그곳- 이스탄불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읽는 일은 이스탄불을, 터키를 추억하는 일과 같다. 터키를 다녀온 뒤로 파묵의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때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도시 곳곳을 떠올리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은 이스탄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내게 가장 좋은 책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어쩌면 그 자리를 <내 마음의 낯섦>에게 살짝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한 편은 에세이로, 또 다른 한 편은 소설로 이스탄불이라는 놀라운 도시를 그려내고 있으니, 그냥 나란히 둘까?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을 펼쳐서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나는 그해 여름 곳곳을 누비던 이스탄불을 떠올렸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탁심 거리 등등. 터키에 다시 가고 싶었던 소망이 얼마쯤은 이뤄진 것도 같았다. <내 마음의 낯섦>의 주인공은 바로 ‘이스탄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메블루트’라는 가난하고 정직하지만 소심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메블루트 못지않게, 이 작품의 숨은 주인공은 신비롭고 열정적인 도시 ‘이스탄불’임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라크를 홀짝이고 아이란을 마시며, 되네르 케밥과 시쉬 케밥을 먹고…. 이런 기억들이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했던 도시 이스탄불과 함께 되살아난다. 메블루트의 이스탄불은 어쩌면 내가 찾았던 이스탄불과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 메블루트는 1969년 늦여름에 이스탄불로 이주해 2012년, 이스탄불의 도시화가 거의 완성되는 그 기간 동안 그곳에서 살아간다. 내가 이스탄불을 찾았던 해는 2011년이니 메블루트에게는 낯설기 만한 현대화된 이스탄불을 만난 셈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오자아!’를 외치는 메블루트를 스쳐지나갔던 것은 아닐까?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긴 내가 거닐던 곳들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였음이 틀림없을 테니 메블루트, 또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스만 스타일, 유럽 스타일 노래를 부르던 유흥 장소들은 폐쇄되고, 그 자리에 시쉬 케밥과 아다나 케밥을 먹고 라크를 마시는 시끄러운 식당들이 생겨났다. 배를 튕기면서 춤을 추며 즐기는 젊은이들은 보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메블루트는 이스틱랄 대로 근처에는 들르지도 않았다. (36쪽)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버지와 함께 무작정 이스탄불로 온 열두 살 소년 메블루트. 아버지와 아들은 1960년대 후반 이스탄불 골목 곳곳을 누비며 터키전통음료인 요구르트와 보자를 팔지만 가난을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터키를 구제하는 것은 밥장수, 행상, 되네르 케밥 장수들이 아니라 학문이다.”(96쪽) 라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로 가난을 벗어나보고자 하지만 학문에도 그다지 소질은 없다. 아니, 먹고 살기 바쁜 그에게 공부는 어쩌면 처음부터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사촌형의 결혼식장에서 반한 소녀에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3년 동안 줄기차게 연애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납치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결혼은 정말 성공일까? <내 마음의 낯섦>은 메블루트라는 평범한 남자와 그의 대가족, 그리고 그들의 삶을 중심으로 1960년대 끝 무렵부터 2012년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이스탄불의 변화와 발전, 더 나아가 터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내 마음의 낯섦>속 그들의 삶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이스탄불의 도시화와 그 도시화로 말미암은 빈민들 삶의 모습이 이 땅, 즉 서울의 도시화와 그 안에서 살아간 수많은 소시민들의 삶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터키전통음료인 ‘보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골목 곳곳을 누비며 생계를 이어나간 메블루트의 모습에서 어느 추운 겨울밤 골목에서 들리던 ‘찹쌀떡 사려~’를 떠올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도시는 현대화가 되어 고층빌딩이 늘어서고 생활 시설이 편리해지고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수많은 평범한 ‘메블루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아지거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미로와도 같은 이스탄불 골목처럼 헤매게 된다. 그래도 메블루트는 그 하루를 날마다 성실히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기에.


그럼에도 문득 어떤 날은 말 못할 정도로 낯선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십년이 넘도록 이스탄불에서 살아도 어떤 때에는 이 도시가, 자기의 삶이 낯설기만 한 것이다. ‘처음 삼십오 년은 매년 해를 더할수록 도시에 대한 예속감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탄불이 생소해졌다. 막을 수 없는 홍수처럼 도시에 밀려드는 수백만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새로운 집들, 고층 건물들, 쇼핑센터들 때문일까? (623쪽)’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영원한 이방인처럼 ‘마음의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런 이스탄불을 떠나면 그는 또 그 도시를 그리워한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이 ‘쓸데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곧 깨닫는다. 고향에는 더 이상 ‘밥벌이가 없었고’, 그곳에서 그는 ‘그저 손님일 뿐’이었다. 그는 ‘이스탄불로 돌아오고 싶었다. 메블루트의 삶, 분노, 행복, 라이하 그 모든 것들이 이스탄불에 있었’(483쪽)기 때문이다.


어디 메블루트만 그러할까, 세계 곳곳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간다. 나 또한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이곳을 떠난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동네는 조금씩 바뀔지언정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를 떠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서울도 눈부시게 변화했다. 오늘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내가 어릴 적 뛰놀던 동네나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동네들은 문득 지나다 보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보다도 더한 고층건물들이 늘어섰다. 때로는 이 소란스러움과 혼잡함, 번잡함, 화려함이 싫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의 전원생활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있을까? 나의 현재까지의 모든 삶이 서울이라는 도시 곳곳, 골목골목 사이에 스며들어 있다. 메블루트가 살고 사랑한 이스탄불처럼 말이다.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태어나고 숨 쉬고 먹고 사랑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픔과 고통을 겪고 등등 모든 일을 함께한 그 도시와 이뤄지고 있음을 이 작품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사랑’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단순하지만 변함없는 이러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사람은 주인공 메블루트도 아닌, 어느 평범한 이스탄불 여인이다.


“저 천 만 명의 사람들을 이스탄불에 불러들인 것은 생계이고, 이득이고, 고지서이고, 이자라는 것을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이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사람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453쪽)


메블루트는 큰 부를 얻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이렇다 할 어떤 성공을 이루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기나긴 인생을 지켜보노라면 이 소심하고 나약한 남자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일구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는 어떤 숭고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 마음속이 왠지 낯설어. 이 세상에 도무지 나 혼자인 것 같아.” 말하는 메블루트. 삶에서 문득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 고독감, 상실감과 같은 ‘낯섦’ 앞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다시는 그런 생각 들지 않을 거야.”(262쪽). 


비록 그의 사랑은 얼굴도 모른 채 시작되어 어떤 ‘혼동’과 ‘혼란’을 겪고, 그의 인생 또한 때로는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 끝없이 마음속에 ‘낯선 느낌’을 불러오지만, 그는 주어진 인생을, 사랑을 진실하게 살아간다. 그 평범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자 애쓴 그의 삶은 ‘이스탄불’과 언제나 함께였다.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이라는 혼동과 변화의 도시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바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의 낯섦조차도 모두 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


언젠가는 터키에 한 번 더 가볼 생각이다. 이스탄불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꼭 보자 맛을 봐야지. 운이 정말 좋아서 이스탄불 어느 골목에서 메블루트를 닮은 이에게 보자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다면, 그가 외치는 ‘보오자아!’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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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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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 오래된 과거와 눈부시게 변화하는 현재가 공존하는 신비롭고도 열정적인 도시 이스탄불, 그곳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이야기.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마음의 낯섦‘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고 있지 않을까. 보자 장수 메블루트와 함께 이스탄불 곳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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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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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그 사람은 나를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아침마다 보지만 그에게 나는 그 앞을 날마다 지나치는 수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그 점포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던가? 아, 단 한 번, 정말 목이 말랐던 어느 날 생수 한 병을 산 게 고작이었다. 그 사람은 매우 비대한 몸집으로 작은 상자와도 같은 그곳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다. 비대한 몸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 검고 커다란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종일 지하철 가판대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답답하지는 않을까 공기도 나쁠 텐데, 숨 막히지는 않을까. 미래가 있을까.....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대신 처음 보는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부디 그 작은 상자 속에 다시 갇히는 일이 없기를, 어디론가 조금은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갔기를. 그녀뿐만이 아니다. 집 전철역 근처에는 신문 가판대와 비슷한 크기의 공간에서 아침부터 구두를 고치는 구두수선공도 볼 수 있다. 한 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에서 그들은 종일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은, 사람은 어떤 풍경, 어떤 모습일까.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을 읽노라니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담배 가게 소년>에는 그들처럼 그 작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배운 소년이 있다. 그의이름은 프란츠 후헬. 엄마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던 프란츠는 엄마의 부유한 애인의 죽음과 함께 도시로 나아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이 빈의 한 담배 가게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고향을 떠나 대도시 빈에 첫발을 내딛은 프란츠는 악취와 소음 속에 어지럽기만 하다.



“젊은이 어디가 안 좋아요?”
“아니에요.” 프란츠가 얼른 대답했다. “그냥 이 도시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래요. 악취도 조금 나고요. 아마 배수로에서 나는 거겠죠.”
 “악취가 나는 곳은 배수로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세월이에요. 말하자면 부패한 세월이죠. 부패하고 타락하고 황폐해진 세월!” (로베르트 제탈러, <담배 가게 소년>, 20쪽)


어쩔 수 없다. 도시에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살아가야 하므로. 담배 가게 주인 오토 트르스니에크는 프란츠에게 이런저런 일을 가르치면서 한 가지 특별한 임무를 준다. 모든 신문을 샅샅이 볼 것. ‘올바른 신문 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담배 가게 단골들은 가게 주인에게 온갖 적절한 조언과 정보를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신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게 오토의 주장이다.

이렇게 담배 가게에서 프란츠는 신문을 읽고 담배와 신문을 사러 오는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성장한다. 프란츠가 세상을 배우는 수단이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였다면 현실성은 조금 떨어질 것이다. 신문도 신문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빈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담배 가게 손님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10대 소년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랑, 주체할 수 없는 사랑도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평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조금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담배 가게 손님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프로이트의 등장에 프란츠도 놀랐겠지만 나 또한 어라? 하면서 자세를 고쳐잡고 읽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소설이 조금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궁금해진다. 오로지 픽션이라면 좀 싱거울 것 같다(이 책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어쨌든 프란츠는 이 특별한 손님에게 즉각 매료당하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과 달리 세상에 찌들지 않은 프란츠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첫사랑 아네스카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프란츠는 프로이트 박사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로부터도 뾰족한 답은 얻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프로이트의 조언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담배 가게 소년>은 이렇게 프란츠와 프로이트의 색다른 우정, 프란츠와 아네스카의 사랑, 프란츠와 오토가 운영하는 담배 가게라는 작은 세상을 둘러싸고 서서히 광폭해지는 나치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 등 그즈음 격변하는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한 편의 성장소설로도 또 광포한 시대를 살아가고 견뎌내는 온갖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한 세태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란츠가 뭐랄까 좀 평면적인 인물 유형이라 주인공에게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착하고 순수한 소년이랄까. 어떤 순간에는 좀 뒤틀리기도 하고 내적 갈등도 과하게 겪었다면 더 공감이 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네스카에게 그런 면모를 살짝 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곧 가라앉는다. 아직 미성년인, 덜 갖춰진 예민한 성정의 10대 소년이라면 좀 더 난폭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들, 아니 엄마와 주고받는 편지들도 ‘지나치게 착하고 아름답기만’하니까 어쩐지 낯간지러워지기도 한다.

아네스카에 대한 묘사도 물론 프란츠의 눈으로 그렸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해 보인다. 매우 쉽게 사랑을 주고 또 다른 남자에게로 쉽게 날아가는 보헤미안 여자. 어찌 보면 그저 전형적인 ‘나쁜 여자’ 정도로만 그려진 점도 아쉬웠다. 프란츠의 성장을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 느낌이랄까. 프란츠도 아네스카도 조금 더 입체적 인물로 그려졌다면 그들의 삶과 고민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안타깝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이 작품에 그려지듯이 이토록 좋은 사람일까? 이런 의구심도 든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난 왠지 프로이트가 인간으로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러나 구스타프 융 등 그의 제자들과 있었던 이런저런 일화를 보면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척 성마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한낱 시골뜨기 소년 프란츠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따스(?)하게 나온다니 살짝 괴리감이 들었다. 차라리 괴팍한 면이 더 두드러졌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인물의 성격 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마 결말은 좀 예상 밖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담배 가게 유리창 한쪽에 자신이 꿈꾼 내용을 적어 붙였던 프란츠. ‘제라늄이 밤에 밝게 빛난다. 하지만 그건 불이다. 어쨌든 늘 춤을 출 것이다. 빛이 사’ (267쪽) 라는 메모처럼 어두운 현실에서도 희망이 존재함을 이 작품은 조용히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베르트 제탈러의 작품을 읽은 것은 <담배 가게 소년>이 처음이다. 기대만큼 썩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한평생>까지는 읽어볼 계획으로 책을 사두었다. <한평생>은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한평생>이 로베르트 제탈러의 대표작인 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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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장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펑펑 울어댔는지. 그 뒤로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등을 읽으면서 또 가슴 찡했고 로제 마르탱 뒤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중 <회색 노트>같은 것을 보면서도 무척 감동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그렇게 인상 깊은 성장 소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읽을 때도 좋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설명이 필요없을 듯.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성장 소설’인 데다가 슬퍼서 눈물이 펑펑 난다니. 정말 딱이구나 싶었다. 서른 살이 넘어 이 책을 읽고 펑펑 울었다.

주인공 모모(모하메드)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엄마도 아빠도 누구인지 모르는 버려진 소년. 심지어 자기 나이도 그냥 짐작해서 알뿐이다. 자신이 열네 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된다. 그가 자라는 곳은 모모처럼 버려진 창녀의 자식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파리의 빈민가. 거기서 모모는 창녀 출신의 유대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 의해 길러지면서 자기처럼 최하층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자란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 하얀 피부를 가진 진짜 ‘프랑스인을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모모가 사는 지역에는 아랍인, 흑인, 유대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모는 자신도 언젠가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같은 책을 쓰리라고 늘 생각한다.

실제로 모모가 화자인 <자기 앞의 生>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무척 우울할 것 같지만 웃기기도 하고, 엄청 슬프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에 따뜻한 불이 확 켜진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늘 생각한 소년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통해 사랑의 진짜 의미, 삶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전하는 가슴 찡한 메시지다.

폴 오스터 <공중 곡예사>

제목 그대로 이 책은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월트라는 소년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능력을 지닌!’ 이라는 대목에서처럼 만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폴 오스터는 허무맹랑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잘 써내려간다. 물위를 걸어 다닐 수 도 있고 공중에 떠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원더보이 월트- 이 소년이 그렇다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월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가난하고 비참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예후디라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또 그를 사부로 모시면서 갖은 고생과 고된 훈련 끝에 공중부양능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중부양능력을 지닌 원더보이 월트로 서서히 이름을 날리면서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다. 그래서 월트가 행복하게 살았냐고? 월트가 그 특이한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아마 이 소설은 동화 혹은 만화 같은 소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월트의 삶의 여정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주인공이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내가 살아온 인생, 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들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들었다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알 듯 모를 듯한 감동. 그게 바로 <공중 곡예사>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뜻한 방향으로 가도록 한번쯤은 노력해 볼 만 하다고 원더보이 월트는 말한다.

아멜리 노통브 <사랑의 파괴>

주인공은 일곱 살 난 꼬마다. 베이징의 외인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꼬마는 그곳의 각국에서 날아온 아이들과 공동의 적을 만들고 전쟁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고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를 가진 성장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처음엔 정찰병으로 전쟁놀이를 가장 즐기고, 말을 타며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소녀에게 한눈에 반하는 장면을 보고 이 꼬마가 분명 남자 아이려니 했는데, 그 꼬마 또한 여자 아이이다. 즉 이 소설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다. 노통브가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지만 자신이 베이징에서 겪은 일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소설 속 이탈리아 소녀는 노통브에게 ‘몇 가지 사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항의했다는 후문도 적혀있다.

어린 시절에는 보통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주위 친구들을 동경한 경험이 한두번쯤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꼬마 역시 이탈리아 소녀 엘레나의 황홀한 외모, 도도한 태도에 열을 올렸으리라. 이 일곱 살, 여섯 살 소녀들의 사랑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또 그와 반대로 잃을 수 있는지 등등 사랑에 관해 알고 싶고 정의내리고 싶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이 책은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연합군을 만들고 동독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 다시 동독 아이들과 연합하고 또 다른 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 등등이 어른들이 벌이는 진짜 전쟁의 모습 그대로를 축소하여 보여준다. 전쟁과 사랑에 관한 일곱 살 꼬마의 시선이 놀랍도록 통찰력 있고 영악해서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노통브의 소설은 읽고 나면 뭔가 가슴이 쿵하는 강렬함이 있다


위기철 <아홉살 인생>

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좋은 기억으로 남은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막 웃었고,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 여민이의 허풍쟁이 친구인 신기종의 뼈있는 거짓말에 공감하면서 이 소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읽었을 법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여민이는 제제처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아이고, 또 제제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숲을 갖고 있다. 물론 제제의 현실이 더욱 비참하지만.....

이 작품에서 무척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다면 주인공 여민이보다 그의 친구로 나온 허풍쟁이 신기종이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거짓말 같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실 삶의 진실(사람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월급기계라고 부르거나, 이 월급기계가 하는 일은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구분하는 일이라거나, 싸움은 늘 힘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이긴다거나 등등. 이 꼬마 허풍쟁이의 말에는 너무 뼈아픈 삶의 진실이 숨어있어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한편으로는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라는 골방철학자의 말이 왜 그렇게도 가슴에 와 닿던지!

성장 소설들이 큰 감동을 주는 까닭은 어린 아이들의 눈에 비친 고달픈 삶의 현실이, 인생은 정말 살기 만만하지 않구나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 세상은 한 번쯤 뜨겁게 살아볼 만하다는 희망을 던져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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